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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왕님 망겜에도 엔딩이 있나요-16화 (16/127)

16화

순식간에 벌어진 황당한 일에 목청을 높여 리헤로스를 불렀다.

“리헤로스!”

“무슨 일이야?”

다급한 목소리에 안쪽에서 두 사람이 놀란 눈으로 나왔다. 사다리를 부여잡고 엉거주춤 기울어있는 나를 본 리헤로스는 성큼 다가와 사다리를 잡아들더니 가볍게 내려놓았다.

“큰일 날 뻔했네.”

“이게 문제가 아냐! 우리 책을 훔쳐 갔어!”

“책? 누가?”

“여우 귀를 한 꼬맹이. 지금이라도 뒤쫓으면 따라잡을 수 있을 거야. 빨리!”

구구절절 설명할 시간이 없었다. 황급히 리헤로스의 소매를 잡아끌고 나가려는 순간 어깨를 붙잡혔다. 그가 미련하게 말리나 싶어 신경질적으로 홱 돌아보았는데 손의 주인은 팔먼이었다.

“당장은 쫓지 말고 그냥 두게.”

“네? 놔두라고요?”

어떻게 그냥 놔둬요. 그 책은 메인 임무 보상이란 말이에요. 라는 말이 튀어나오기 직전이었다. 리헤로스의 옷자락을 우왁스럽게 쥐고 있었는데 그의 큰 손이 살포시 겹치고 나서야 이성이 돌아왔다.

“인상착의를 들으니 알겠어. 그 아이가 어디에 사는지, 누구인지 아니까 진정하게나.”

“팔먼, 그 아이가 누굽니까?”

“녹틸의 제자이네.”

‘망할, 이번엔 또 누굴 찾아가야 하는 거야.’

RPG에서는 흔한 전개이긴 하다. 퀘스트 분량을 늘리기 위해 NPC를 찾아가고 부탁을 들어준 뒤 또 찾아가서 부탁을 들어주기. 일명 뺑이 돌리기다.

“녹틸은 어디 사는 누구죠?”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호숫가 저택이 하나 있네. 거기에 왕실 사서를 했던 마법사, 녹틸이 살고 있지.”

“왕실 사서에… 마법사요?”

“선대 왕이 각별하게 여긴 대단한 친구인데, 지금은 그만두고 어린 제자에게 마법도 가르치고 책도 쓰고 하는 것 같더군.”

리헤로스는 그의 말속에 단서를 찾아 되물었다.

“책을 쓴다면 설마….”

“그래. 자네들이 가져온 책의 저자이기도 하지. 직접 오기로 했는데 오늘은 제자를 대신 보낸 모양이네.”

“책 저자의 제자였다니….”

그나마 책이랑 관련된 인물이라서 다행이었다. 마법사가 쓴 책이라면 마법서 아닌가? 어디에 쓰이는지는 모르지만, 마법서라면 생각한 것보다 더 귀중한 아이템임이 분명했다.

“오늘은 무슨 일로 오기로 했던 겁니까?”

“녹틸이 주기적으로 마법 재료를 사 가는 날인데, 스승의 심부름도 까먹고 훔쳐 달아난 걸 보면 사정이 있는 모양이네.”

“그렇군요.”

“….”

“너무 기분 나빠하지 말고 녹틸에게 가보게. 그가 해결해 주겠지.”

너털웃음 짓는 팔먼과 애써 웃으며 내 어깨를 도닥여주는 침착한 리헤로스 사이에서 홀로 붉으락푸르락했다. 그 꼬맹이 녀석 귀엽다고 생각했던 거 취소다.

“가자.”

“녹틸에게?”

“그래야지. 그 책 없으면 안 돼.”

“응, 알겠어. 저희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그래, 서두르지 말고 조심히 가게. 언제든 시간 나면 차 마시러 오고.”

마음이 심란해도 웃어른에게 인사는 잊지 않았다. 이웃집 할아버지와 같은 팔먼은 문밖까지 나와 배웅해 주었다. 마을로 막 나서기 시작할 때 보인 마부에게 부탁해서 마차의 끄트머리에 얹혀갈 수 있었다. 도저히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눌 기분이 아니어서 지나온 길을 묵묵히 보던 중 리헤로스가 먼저 입을 열었다.

“크리스 너무 걱정하지 마. 찾을 수 있을 거야.”

“그래야지.”

금화를 몇십 개 몇백 개를 준대도 구할 수 없는 아이템이란 말이다. 이 세계에 들어온 지 얼마나 됐다고 매 순간이 충격의 연속이냐고.

“물건은 얼마든 대체할 수 있잖아. 사라진 게 네가 아니라서 다행이야.”

“….”

어젯밤의 일을 가까스로 잊고 있었는데 어쩌다 이런 분위기가 됐는지 환장하겠다.

“일부러 기분 풀어주지 않아도 돼.”

“진심이야. 물건 없어지는 건 괜찮아. 난…”

그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며 말끝을 끌었다.

“나는… 사람을 잃는 게 더 무서워.”

“무서워?”

“…말이 헛나왔어.”

무섭다고 할 정도로 두려워하는 이유는 뭘까. 어쩐지 유독 관계에 집착하는 것 같더라니. 어쩌면 주인공이라면 겪는 아픈 과거가 있겠다. 특히나 인물이 밝으면 밝을수록 과거가 어두웠던 게 정석이니까 그는 어떤 이야기를 가졌는지 궁금했다. 기획자로서 호기심이랄까.

“내가 뭐든지 말해주길 바라면서 너는 숨기기야?”

“…나중에 이야기해 줄게.”

“나중에 언제?”

“음… 네가 나한테 숨기는 게 없어지면?”

“진짜 치사하네.”

“부끄럽지만 정말 길고 지루한 얘기거든.”

“지루한 얘기면 어때. 세상만사가 늘 즐거운 것도 아닌데.”

“그런가?”

오늘 안으로 이야기해 줄 기미가 보이지 않으니 포기하고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그럼 나중에 꼭 얘기해 줘.”

“크리스 너도 얘기하는 조건이지?”

“아 진짜. 알았어. 나도 얘기해 줄게.”

“아하하, 그럼 약속.”

리헤로스의 새끼손가락이 단단히 걸리고 엄지손가락을 맞대고 꾹 찍었다. 이런 시답잖은 이야기를 끝낼 때 즈음 마부가 호수 근처에 내려주었다. 잔잔한 호수 옆에 2층짜리 저택이 보이는데 꼭 정년퇴임 후 살고 싶은 꿈속 건물처럼 생겼다. 문 앞에 설 때까지도 저택에선 그 어떤 소음도 없어 으스스 한 기분이 들기까지 했다. 리헤로스가 앞장서 도어 노커를 이용해 문을 두드렸다.

─똑똑똑

“루카. 손님 맞이하렴.”

문 안쪽에서 들리는 나긋한 목소리의 주인은 ‘루카’라는 인물을 불러댔다. 머지않아 잠잠해지더니 기척이 가까워졌다. 한참을 느적거리다 빼꼼히 나온 ‘루카’는 우리의 책을 훔쳐 간 그 여우 귀 꼬마였다.

“너!”

“힉!”

문을 채 닫지도 않고 안으로 사라져버린 꼬마를 쫓아 들어왔다. 복도에 들어서자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손님을 맞이하기 위한 용도의 접견실이었다. 멀리 가진 못했을 것이고 여기 어딘가에 숨어있겠거니 했다. 예상한 대로 1인용 소파 뒤로 뾰족하고 큰 여우 귀가 튀어나와 있다. 녀석을 잡으려 살금살금 다가가려는 순간.

─철컥

반대편에 달린 문이 열린다. 그와 동시에 꼬마는 열린 문으로 꽁지 빠지게 달아났고 의아한 톤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음? 무슨 일 있었니?”

문에서 빠져나온 사람은 동그란 안경을 쓴 남색 머리의 남성으로 긴 머리를 하나로 가지런히 땋아 어깨에 걸쳐두었다. 흰 천에 금색 실로 자수 놓은 긴 옷을 주렁주렁 걸치고 있어 그 행색은 누가 봐도 마법사였다. 우리를 바라보며 싱긋 미소를 짓는 남성을 향해 리헤로스가 나서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리헤로스라고 합니다. 마법사 녹틸… 이신가요?”

“예, 제가 녹틸입니다. 무슨 일로 오셨죠?”

에둘러 말할 가능성이 큰 리헤로스를 가로막고 발언권을 얻었다.

“제자분이 저희 물건을 훔쳤거든요.”

“저런… 우선 앉으세요. 루카, 이리 오렴. ”

녹틸은 높지 않은 목소리로 조곤조곤 부른다. 그의 말에 꼬마가 모습을 드러냈고 훔친 책을 옆구리에 낀 채 털레털레 걸어왔다. 손을 내밀고 있는 녹틸에게 얌전히 건넸고 도난품을 살피던 남자는 제법 놀란 기색이었다.

“아, 이건….”

“도둑은 내가 아니라 저 사람들이야! 스승님의 책을 가지구 있었다구여!”

내가 기가 막힌다는 듯 헛웃음 치자 루카는 꼬리털을 부스스 세우며 노려봤다. 이에 질세라 똑같이 노려봤다. 불꽃 튀는 기싸움 사이에서 리헤로스가 침착하게 말을 꺼냈다.

“녹틸이 집필한 책이라 들었습니다. 불순한 경로로 얻은 것은 아니고 마물 처치 후에 전리품으로 획득하게 되었습니다.”

“오래된 책이라 가물가물하지만 제가 쓴 책이 맞네요. 여기 제 사인이 작게 들어가 있거든요.”

재밌는 거라도 발견한 것처럼 천진하게 웃으며 표지 구석에 박힌 작은 금색 로고를 보여준다. 꼬마는 외지인 말은 믿을 수 없다는 둥 스승님의 사인과 체취가 있어 가져온 거라는 둥 씩씩댔지만 녹틸은 우리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제자의 잘못이 맞네요. 괜한 일로 발걸음 하게 만들어 죄송합니다.”

“스승님…!”

“루카, 두 분께 사과드리렴.”

울음을 필사적으로 참으려는 것처럼 입술을 꾹 물었다. 제 스승을 위해 한 일이니만큼 몰라주는 것이 어지간히도 야속하겠지.

“…죄송합니다.”

끝내 머리를 숙였지만, 꽤 분한 모양인지 야무지게 쥔 두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사과를 마친 루카의 머리를 녹틸이 쓰다듬어주었다.

“잘했어요. 잘못을 인정할 줄 아는 루카는 멋있어요.”

“히….”

위엄 넘치는 마법사의 모습을 상상했건만 유치원이 따로 없다. 왕실 사서라는 경력도 가진 전도유망한 마법사가 왜 이런 외진 곳에서 어린아이나 보살피고 있는지 모르겠다. 루카를 한참 달래주고 나서야 우리에게 관심이 돌아왔다.

“이 책은 가져가셔도 됩니다. 제가 예전에 펴낸 책인데 이곳저곳 떠돈 모양이에요.”

“사실… 이 책을 열 수가 없어서 부탁드리려 했습니다.”

“그랬나요? 왜 안 열릴까.”

표지 위에 손을 얹고 살피더니 짐짓 심각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표지에 그려진 문양이 금색으로 빛났다가 사그라지자 책이 자연스럽게 펼쳐졌다.

“작은 방어 마법을 걸어두었는데 그게 발동한 모양이에요.”

“그랬군요. 마법까지 걸 정도면 꽤 중요한 물건으로 보이는데 이 책의 사용처가 어떻게 되나요?”

“이건 마법을 배울 수 있는 책이에요. ”

그냥 다음 목적지에 대한 단서쯤이라고 생각했건만 마법 스킬북이라니 횡재했다. 리헤로스 능력치를 어떻게 더 뻥튀기시켜줄까 고민했던 것이 어느 정도 해소되었다.

“열리지 않았으니 아직 학습하지 못하신 모양이군요.”

“맞습니다.”

“여기까지 온 김에 제가 속성으로 알려드려도 될 것 같아요. 어떠세요?”

“그렇게 해주신다면 감사하죠.”

녹틸의 말을 끝맺자마자 리헤로스는 나를 바라봤다.

“크리스, 네가 배우는 게 좋을 것 같아.”

“응? 어째서?”

“호신용으로 배워두면 좋지 않을까?”

“내가 약골이다. 이거지?”

“그게 아니라-.”

화나기보다는 여전히 자신을 약한 동물 보듯 하는 그의 생각이 노골적이라 웃겼다. 사람을 잃는 게 무섭다고 했으니 이러는 이유도 대충 이해가 됐다. 어떻게 그를 설득할지 고민하던 찰나 녹틸이 말을 가로챈다.

“리헤로스. 당신이 배우는 것이 좋겠어요.”

“예?”

“그렇게 하세요.”

장난스레 아옹다옹하던 분위기는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나야 쓸데없는 실랑이를 벌이지 않아서 좋았지만, 실없이 미소 짓고 조곤조곤하던 사람이 딱 잘라 그에게만 권하는 상황이 묘하게 찝찝했다.

“저, 녹틸….”

“그렇게 해, 리헤로스. 저, 녹틸? 배우는 데에 얼마나 걸리죠?”

“흐음.”

녹틸은 흥미 있는 생명체를 관찰하듯이 리헤로스의 몸을 천천히 훑더니 팔뚝을 덥석 잡는다. 잡는 것에 그치지 않고 느릿하게 쓰다듬는 손길에 흠칫했다.

“아하하, 오해하지 마세요. 마나의 흐름을 느끼는 거니까요.”

“아… 네.”

“리헤로스는 이틀이면 충분하겠어요.”

“이틀로 될까요? 저는 마법이라곤 써본 적이 없는데….”

“그럼요. 그대의 잠재력은 무한해요.”

팔을 놓으면서 둘의 손가락 끝이 툭 느리게 닿았다. 평소라면 신경도 안 쓸 부분을 집요하게 신경 쓰고 있는 나 자신이 지질해 보였다. 책을 도둑맞았을 때부터 예민해져 있어서 그런 거겠지.

“내일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해 보죠. 마법은 처음이랬죠? 배우기 전에 기본 준비를 하도록 해요.”

“네, 그럴게요. 뭐부터 시작하면 될까요?”

“그건 루카가 도와줄 거예요. 그렇지 루카?”

“맡겨만 주세여!”

나를 제외한 모든 인원이 접견실 밖으로 우르르 빠져나갔다. 투명 인간 취급당하는 기분이라 어이없었지만 내가 따라간다고 뭘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리헤로스가 집중해야 능률이 올라갈 테니 빠져주는 게 맞는 것 같다.

접견실에 나와 같이 덩그러니 남아있는 책이 눈에 띄었다. 그의 능력치가 지금보다 훨씬 좋아질 것을 생각하면 좋은데 녹틸이 보였던 미묘한 행동들이 마음 한쪽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기분 탓이겠지?’

─끼익, 달칵

“깜짝…아. 녹틸? 무슨 일이시죠?”

녹틸의 의뭉스러운 행동을 곱씹던 찰나여서 화들짝 놀랐다.

“크리스라고 했던가요?”

“아크리스입니다.”

“그래요. 아크리스.”

내 쪽에선 딱히 할 말이 없어 물끄러미 보고 있었지만, 그는 내 눈을 보며 말을 고르는 듯했다. 은은한 미소를 띤 낯이어도 저 웃음이 정말 기분이 좋아 나온 미소가 아니란 것을 직감했다. 정적이 길어지니 긴장감이 흘렀다.

“…아크리스.”

“네?”

“묻겠습니다. 당신 같은 존재가 왜 용사 옆에 있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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