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똑… 똑…
어디서 들려오는 건지 모를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기나긴 정적을 깬다.
“어…?”
“내가 떠나준다면 어떨 것 같냐고. 홀가분할까?”
“왜 그런 얘길 하는 거야?”
“그냥.”
네가 나 없어도 될 것 같아서.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끝내 목에서만 맴돌다 나오진 못했다.
“아니, 가지 마.”
“뭐….”
“내 옆에 있어줘.”
“왜…?”
난 왜 물어보고 있을까. 내가 힘들다면 떠나고 아니면 남는 것인데 왜 이렇게 그에게 응석 부리는 것처럼 되는 걸까. 그의 의중이 중요한가? 내가 그에게서 어떤 존재였음 하길래 묻는 걸까.
“나는… 종종 스스로 불완전한 존재라 느껴져.”
“네가? 어째서…?”
“가끔은 머릿속이 하얘져. 무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때, 혹은 감정에 휩쓸릴 때 네가 흔들리는 키를 잡아주잖아.”
“그건 착각이야. 내가 없어도 넌 똑같이….”
“그렇지 않아.”
리헤로스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나의 흐릿한 어미를 가로챘다.
“크리스. 너 스스로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알아줬음 해. 부탁이야.”
‘자현아.’
‘유자현. 너 자신도 사랑하지 못하는데 누굴 사랑하겠어?’
순간 ‘그 사람’의 환청이 들렸다. 역시 리헤로스는 그 사람을 떠올리게 한다.
내가 가장 사랑했던─그 시절의 그 사람.
“크리스?”
“…….”
“아니다… 네가 이런 이야기를 하게 만든 건 모두 내 잘못이야. 혹시 내가 무슨 잘못을….”
“그럴게.”
“어?”
“네 옆에 있을게.”
어차피 꿈이란 나의 무의식이라 내가 듣고 싶은 것만 들려줄 텐데 달콤한 말을 들으며 자존감을 채우긴 싫었다. 어떤 외부적 요인에도 휘둘리지 말고 그를 돕자. ‘그’를 떠올리게 하는 이 남자와의 관계만은 실패하고 싶지 않은 아집일지도 모른다.
‘두 번이나 실패하긴 싫어.’
바보 같은 고민을 끝마치고 내 손 위를 감싼 그의 손가락을 하나씩 풀어냈다. 두 계단쯤 아래에서 여전히 나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그를 등지고 방으로 돌아와 누웠다. 낡고 차가운 시트를 파고들며 더 깊은 잠에 빠져들기 위해 눈을 감았다.
오늘은 그 어느 때보다 생생한 꿈이었다.
─쿵
“으음….”
보통이면 조잘대는 아침 새소리에 깼을 텐데 대신 웬 큰 울림에 눈을 뜬다.
“뭐 하는 거야….”
부스스 몸을 일으켜 1층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2층에는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아 없는 것 같았고 접견실, 식당을 순서대로 살펴보아도 아무도 없었다.
‘다들 어딜 간 거야?’
살피지 않은 곳은 1층 복도 끝, 화려한 무늬의 문 하나뿐이었다. 이 안에서 마법 공부를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당연하지만 안을 살펴보기 위해 문으로 손을 가져다 대었다.
─파지직
“앗, 따가워.”
망할 마법사. 내가 들어올까 봐 방어 마법을 걸어놨나 보다. 이 정도면 마법으로 부술 수 있을 것 같긴 했다. 대적할 수 없는 마왕의 힘을 보여주고 싶었지만 참기로 했다. 어차피 리헤로스가 공부를 성실히 하고 있으면 다행인 거고 그만큼 강해질 수만 있다면 고마울 따름이다. 접견실로 돌아와 가장 긴 소파의 끝 쪽에 털썩 주저 않았다.
‘이틀 걸린 댔지. 그럼 내일도 이렇게 혼자 있겠네.’
그동안 뭔가 생산성 있는 일을 해볼까 고민을 시작했다. 숲으로 들어가 마법 한 번씩 써보기, 잠깐 게헤나로 들어가 마군 기강 잡기 같은 거 말이다.
─벌컥
“어? 꼬맹이. 공부하러 간거 아니였냐?”
루카는 접견실에 들어서고 나서 별다른 액션을 튀하지 않았다. 그저 멀찍이 서서 뚱한 얼굴로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제 스승한테 이상한 소리 들은 거 아니야?’
뻘쭘한 상황에서 자리를 뜰 수도 없고 묵묵히 루카가 입을 열 때까지 보고 있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부러 발을 쿵쿵 구르며 오더니 1인용 소파 쪽에 털썩 앉는다. 체중이 실린 소파의 쿠션은 푹 주저앉다가 원래 높이의 반 정도로 돌아와 나와 시선이 맞춰진다. 대각선 자리에 앉아서는 뭐 마려운 강아지처럼 우물쭈물 댔다. 얘는 또 무슨 얘길 하려고 시동을 거는 건지 한숨이 푹 나왔다. 어쩌면 악역의 숙명인 지도 모른다. 일명 욕받이.
“아크리스!”
작은 입을 우물대다 결심한 듯 씩씩한 목소리로 부른다.
“왜.”
“용사님이랑은 무슨 사이예여?”
“…무슨 사이냐니? 무슨 뜬금없는 소리야?”
“용사님한테 물어보니까… 제대로 말 안 해주길래여.”
“뭐어…… 그냥 동료?”
“거짓말.”
그 말에 한 쪽 눈썹과 입꼬리가 본능적으로 샐쭉 움직였다. 거짓말이라니 그럴 거면 왜 물어보냐고.
“사귀는 거 맞져?”
“허, 아니?”
대체 이게 무슨 소리야. 내가 녀석을 타박하기도 전에 말도 안 되는 추측이 튀어나오니 어이없어 즉답했다. 내 대답에 루카는 눈동자를 이리저리 말없이 고갤 푹 숙인다. 이게 당최 무슨 반응인지 모르겠다.
“그럼… 있잖아요.”
“있는데.”
“스승님이랑… 용사님이 서로 좋아하는 건 아니겠져.”
입안에 물이라도 머금고 있었다면 그대로 뿜었을 것이다. 설마… 이 꼬맹이가 리헤로스에게 마음이 있는 건가? 그래서 로맨틱한 관계인지 묻는 거고? 아이들은 잘생긴 사람에게 호감을 쉽게 느낀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그와 만난 지 고작 하루 밖에 안 됐는데도 이러는 건가, 정말 아이다운 고민이었다. 이 말을 듣기 전까지는 흥미도가 0에 수렴했는데 점점 흥미가 생기기 시작했다.
“왜? 둘이 좋아하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어?”
“그, 그건….”
역시 이 어린이의 눈에도 둘의 사이가 심상치 않아 보이나 보다. 어릴 땐 뭣 모르고 잘생기고 멋있는 어른을 동경하기도 하는데 그게 사랑이라고 착각하곤 하지. 아이고 어리다 어려. 그래, 용사님이 좋디?
“스승님은 내 거란 말이에여!”
“…….”
루카의 통통한 뺨이 잘 익은 토마토가 되어선 버럭 화낸다. 리헤로스가 아니라 녹틸을 좋아한다고? 당연히 리헤로스와 녹틸 둘 중 애인 후보로 둔다면 저런 의뭉스러운 사람일 리가 없었기에 상상도 못했다. 놈이 좋다고 이 세계의 절세 미남을 질투한다니 도무지 납득이 되지 않았다. 내가 모르는 무슨 매력이 있나 보다 싶다가도 대체 왜? 하는 물음이 떠나질 않았다. 급격하게 궁금증이 식어버려 말을 돌리기로 했다.
“인마, 네 스승이 왜 네 거냐? 사람이 물건이야?”
“그, 그게 아니라….”
“네가 스승님을 좋아한다고 해서 녹틸이 리헤로스를… 좋아하면 안 되는 법도 없지.”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데여!”
“일단, 너는 너무 어려. 좀 더 크고 고백을 하던지 해.”
“고, 곳, 곡, 고백이여?”
“좋아하면 고백을 해야지. 근데 지금 고백하면 네 스승은 경찰…이 아니라 경비대에 잡혀갈 거야.”
“헤엑!”
머리가 컸을 때 즈음엔 본인 마음이 진짜였는지 아닌지 알게 되겠지. 지금은 너무나도 작은 세상에 갇혀있어 아직은 모르겠지만, 더 많은 사람을 만나고 경험해 보면 분명 바뀔 것이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꼬맹이가 벌써 사랑을 운운하기엔 너무 이르다.
“몇 밤 더 자면 된다구여….”
“몇 밤? 몇 천 밤은 더 자야지.”
“아니야! 우리 종족은 인간보다 시간이 빨리 간다구여!”
“얼마나 빨리 가는데?”
“인간의 나이로 따지면… 지금 15살이라 그랬어여! 몇 달 뒤면 16살이 될 거구요!”
15살 말투가 왜 이래. 최대 10살쯤 되는 줄 알았다.
“몇 달 만에 쑥쑥 커서 내년쯤이면 스승님이랑 결혼할 수 있어여….”
“…네 스승이 그렇게 좋냐?”
식어버린 궁금증이 되살아났기 보단 그 사람이 왜 좋을까, 같은 물음에 가까웠다. 알리엔토 사가는 플레이어가 공략할 수 있는 NPC는 이성혼, 동성혼 모두 가능했는데 NPC들끼리도 크게 편견이 없나 보다. 그보다 어린아이들이 생각하기로 사랑하면 결혼으로 귀결되는 게 재미있는 포인트이다. 좋아하면 다 결혼하는 줄 알지. 그건 오산이다.
“그러니까.”
“응?”
“형이…. 용사님이랑 같이 모험을 계속해 주면 안 될까여?”
내가 용사와 떨어지길 바라는 NPC와 같이 떠나길 바라는 NPC의 충돌이라니 정말 각양각색이다. 아크리스라는 이름 대신 친근하게 ‘형’이라는 호칭을 써가며 살살 설득하는 모습을 보니 간절하긴 한가보다.
“쭉 같이 다니긴 할 거야.”
지난밤 꿈에 본 리헤로스의 표정이 떠오르자 자연스레 헛기침이 나왔다. 루카의 동그란 눈이 점점 커지더니 큰 여우 귀가 날갯짓하듯이 파다닥 움직였다.
“정말요?”
“내가 문제가 아니야. 녹틸이 우릴 따라온다고 하면?”
“네?!”
금세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들은 양 휘둥그레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그도 리헤로스를 돕고 싶다고 갈 수도 있잖아. 녹틸이라면 그러고도 남지. 지금 하는 거 봐.”
“이 집을 버리구여?”
“그럴지도 모르지.”
“스승님과 저의 보금자리…는… 저는 어떻게 되는 거예여!”
“그래서 말인데, 나보다는 네 역할이 중요하지 않을까?”
“내 역할이요?”
“응. 혹여 그런 일이 생기면 떠나지 말라고 붙잡아봐.”
‘꿈속의 리헤로스처럼.’
나 역시 녹틸이 이 평화로운 관계에 침입하는 것은 사양이다. 그를 엔딩까지 무사히 끌고 가겠다는 다짐을 잠깐이었지만 흔들리게 만들다니 녹틸은 나에게 위협적인 인물이다. 아이에게 이런 것까지 시키는 게 다소 치졸하지만 루카가 잘 설득했으면 했다. 성공만 한다면 나와 루카 모두 윈윈이니까.
“……죠.”
“…겠네요.”
벙쪄있는 루카와 밀담이 끝나자 멀리서 두 사람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곧이어 접견실의 문이 열어 젖혀졌고 특유의 넓은 보폭으로 리헤로스가 다가왔다. 평소보다 가벼운 차림으로 앞섶이 풀어헤쳐져 있었다. 저런 차림새로 공부라니 내가 너무 꼰대인 건가 싶은 생각을 하던 중 그가 옆자리에 털썩 앉았다.
“크리스 뭐 하고 있었어? 후, 마법 꽤 어렵네.”
“왔냐. 배운 건 좀 있어?”
“응. 볼래?”
예의상 물은 말임에도 들뜬 얼굴로 손바닥을 펼쳐 보였다.
─파직
금빛 스파크가 손 위에서 짧게 번적이더니 사라졌다. 찰나에 가까웠다.
“…이게 뭐야? 끝이야?”
“하하, 아무래도 좀 그렇지?”
“아니에요 리헤로스. 내일이면 눈에 띄는 성과를 낼 수 있을 거예요.”
녹틸은 멋쩍게 웃는 리헤로스의 어깨에 손을 올린다. 그 행동을 눈에 담자마자 순간적으로 루카를 볼 수밖에 없었다. 어른의 시선에서는 그다지 대단한 접촉은 아니었지만, 어린 마음에 불안한 모양인지 턱 근육에 힘이 잔뜩 들어가 호두 모양을 만들어냈고, 어찌할 바 모르는 손은 계속 꼼지락대며 불안한 심정을 대변했다. 정작 그 심경을 눈치채야 할 당사자는 안중에도 없고 나만 보고 있다는 사실이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그치만 크리스 말도 맞는걸요. 배웠다고 하기엔 부족하죠.”
“리헤로스가 그렇게 말한다면, 내일은 제가 더 힘내서 도울게요.”
“아, 녹틸은 충분히 잘 도와주고 계세요.”
“정말 리헤로스를 위한다면 누구 탓이네 아니네 훈훈한 분위기 연출하고 있을 게 아니라 무엇이 부족한 지 정확히 보고 가르치셔야 할 텐데요.”
“…예?”
둘의 훈훈한 분위기를 박살 내는 나의 발언이었다. 하지만 맞는 말이지 않은가, 이렇게 적당히 아이 다루듯이 둥기둥기하면 어느 세월에 배우겠다는 건지 모르겠다. 이틀 안으로 안 되니 더 머무르자고 하면 큰일이다. 여기서 이러는 동안 왕국 군은 전투에 돌입하고 있단 말이다. 마군의 수세가 줄어들기 시작하면 나는 리헤로스를 두고 게헤나로 돌아가는 수밖에 없다.
“크리스….”
“우리 용사님 잘 부탁드린다고요. 선생님.”
“…그러죠.”
녹틸은 루카 앞이어서인지 적대적인 분위기를 만들지 않으려 노력하는 것 같았지만 내 눈에는 살기가 넘실댔다. ‘어쩌라고’ 하는 표정으로 리헤로스의 어깨에 팔을 걸쳐 녹틸이 얹은 손이 자연스럽게 떨어지게 했다. 이 행동은 아무리 봐도 히로인을 견제하는 악인 같은 모양새였지만 그래도 속은 시원했다. 이걸로 2전 1승 1패다.
─똑똑똑
낯선 박자의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시스템]
리헤로스에게 전령이 도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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