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리헤로스 님 앞으로 온 서신입니다.”
문 앞에 은색 전신 갑옷을 입은 인물이 동그랗게 말린 서신을 들고 서 있었다. 하지만 그 갑옷의 이음새마다 금색 연기 같은 이펙트가 보였고 안에 사람이 들어 있는 게 아니라, 마법으로 이어 붙어놓은 무생물인 것으로 보였다. 리헤로스가 손을 뻗어 왕가 문양이 실링 되어 있는 서신을 받아들었다. 서신이 손으로부터 떠나자 우두커니 서 있던 전령은 연기처럼 사라졌다. 그는 공중으로 흩어지는 연기를 바라보다가 서신을 펼쳐 소리를 내 읽었다.
“국왕의 이름으로 명한다. 용사 리헤로스는… 조속히 수도 라이오펠의 글라디우스… 기사단과의 합류하라.”
“글라디우스 기사단?”
뭐 이렇게 하루가 멀다 하고 새로운 인물들이 나타나는지 외우기도 힘들 지경이었다.
“글라디우스면 왕실 직속 기사단이겠군요.”
뒤에 있던 녹틸이 말했다.
“이래 봬도 제가 왕궁에 있던 몸이거든요.”
“기사단이 왜 저를 부를까요?”
“흐음… 그 긍지 높은 기사단의 호출이라면 위급한 상황이긴 하겠어요. 웬만해서는 남의 손 빌리는 걸 싫어하거든요.”
‘두 개의 군단을 추가로 풀어버린 건 역시 오버였나.’
페로가 한 군단도 통제하기 힘들다고 했는데 예상 밖 수준의 난장판을 치고 있나 보다. 우리가 가기 전에 왕국 군이 절멸하면 큰일이다. 이거야말로 스토리가 산으로 가는 거 아닌가. 두 사람은 기사단이 급하게 병력을 끌어모으는 것이 마군 때문일 거로 생각하지 못하겠지만, 서신에도 적혀있지 않으니 굳이 정보를 흘려서 의심받지 말고 조용히 있어야 한다.
“크리스. 서둘러야겠어.”
“그래도 배울 건 배우고 출발하자. 하루 정도의 유예는 괜찮을 거야. 빨리 가는 것보단 전력에 도움이 되어야지.”
“마법 배우는 거 말이지? 알겠어. 녹틸, 오늘 밤샐 각오 됐어요.”
“후우… 리헤로스. 괜찮겠어요?”
“그럼요.”
“우선 점심은 먹고 하죠.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어요.”
‘뭐? 점심시간이라고?’
문밖의 하늘을 올려다보니 태양이 중천에 떠 있었다.
“와… 점심 될 때까지 아무도 안 깨워준 거야? 대박이네.”
“크리스…. 계속 깨웠는데 안 일어났어.”
“형 진짜 깨웠어요!”
“….”
오늘은 왜 이렇게 깊게 잔 거지. 오늘은 리헤로스 꿈─지나치게 생생했지만─을 꾸고 난 이후에는 초기에 느꼈던 ‘전원이 OFF 되는 느낌’으로 잠들었던 것 같다. 그 탓인지 입맛도 없어 식당 테이블에 올려진 빵의 가운데를 썰어 잼만 대충 발라서 낚시터로 나왔다. 이곳의 풍경 하나만큼은 반찬이 따로 필요 없었다. 한입 크게 베어 물며 시원한 공기를 들이마신다. 에그앤 매그에서 먹었던 갓 구운 빵보다는 맛있지 않았지만 이걸로도 최고의 만찬이었다.
“그걸로 요기가 되겠어?”
익숙한 목소리에 고갤 돌려 올려다보았다. 싱글싱글 웃는 리헤로스가 유화로 칠한 것 같은 새빨갛고 예쁜 사과를 내밀며 옆자리에 앉았다. 받아들자마자 곧바로 매끄러운 표면을 이 끝으로 물었다. 텁텁한 밀가루 맛이 남아있는 입안을 달콤하고 상큼한 과즙으로 개운하게 씻어내렸다. 리헤로스도 다른 손에 들고 있던 사과를 아삭아삭 소리 내며 베어 먹는다.
“그러는 너는? 귀한 몸이신 용사님이야말로 잘 먹어야지.”
“아침에 많이 먹어서 생각이 없어. 마법 공부할 때는 계속 앉아있으니까 배가 안 꺼지더라.”
“흐응- 그럴 만도 하네.”
“크리스. 루카가 너한테는 뭐 안 물어봤어?”
“응?”
둘이 사귀냐고 물어봤던 그건가. 자기 스승을 좋아하니 확인차 물어봤던 거고 별 영양가 없는 이야기이니 대충 안 물어본 셈 치기로 했다.
“아무것도 안 물어봤는데.”
“아… 그래?”
붉디붉은 사과의 표면이 반사되어서인지 그의 뺨이 조금 상기된 듯 보였다 아직 잇자국이 나지 않은 사과의 표면을 문질러대며 한참 말을 고르는 것 같았다.
“루카가 워낙 장난기가 많잖아.”
“꼬맹이가 그런 편이지.”
“그래서 말인데 오해하지 말고 들어.”
“뭔데?”
“너랑 내가… 그런… 사이로 보이는 걸까.”
“…….”
그런 사이가 뭔데? 하고 해맑게 묻기도 싫었다. 그게 무슨 질문인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큰 반응 없이 심드렁하니 입을 다물고 있자 그는 소개팅에 처음 나온 사람이 대화 주제를 찾는 것처럼 머뭇댔다.
“사귀는… 것처럼.”
“……….”
신이시여. 그냥 안 물어보고 말 줄 알았건만 끝내 입 밖에 내어진다. 굳이 이런 얘길 꺼내는 이유가 있을 텐데, 혹시 녹틸을 정말 좋아하니까 이런 오해가 불편한가? 살짝 떠봐야겠다.
“불편했으면 미안. 그냥 그렇게 생각한 루카가 귀여워서.”
“전혀 안 불편해.”
“어? 정말?”
“그 오해받았을 때 네 기분은 어땠는데?”
“내 기분?”
“응, 루카한테 한 소리 하고 싶을 만큼 화났어? 아니면 기분 나빴어, 민망했어?”
“아….”
리헤로스는 시선을 손에 쥐고 있는 사과에서부터 바닥으로 떨군다. 뭔가 있나 본데, 호기심 어린 눈으로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어느 쪽이든 흥미진진하다. 민망하다며 더 곤란해하는 얼굴 보고 싶다고 하면 변태 같으려나… 뭐 어때 그냥 즐기기로 했다.
“솔직하게 말하면… 좋았는데.”
“…………왜?”
예상치도 못한 대답에 사과를 코에 박은 채 마저 먹지도 못하고 멈춰있었다.
“그야 크리스는 착하고, 예-”
“푸학!”
마지막 단어는 듣지 못했지만 유추할 수 있었기에 더욱 듣기를 거부했다. 두 가지 모두 살면서 들어볼 일이 없는 단어였기에 차마 끝까지 듣지 못하고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를 놀리는 게 아무리 재밌다지만 이건 도저히 듣고 있을 수가 없어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민망해서 그런 그거 아니다. 정말이다. 이런 예상을 벗어나는 답을 늘어놓는 그에게 지는 기분이 들어서도 아니다.
“크리스?”
“아~ 갑자기 술 마시고 싶네. 럼에 레몬 잔뜩 넣어서.”
“술? 같이 마실래?”
“곧 공부하러 갈 놈이 무슨 술이야. 녹틸이 너 방해하지 말라고 으름장을 놓아서 안 돼.”
“녹틸이 그랬어?”
“그래. 너 없을 때 얼마나 구박을 하는지. 서러워 죽겠다.”
“하하, 그런 일 있었으면 얘기하지. 내가 잘 말해볼게.”
“어어? 장난인 줄 아나 본데, 아서라. 네가 그 얘기 하면 그 인간은 날 더 싫어할걸. 세 치 혀로 널 현혹한다고.”
“그가 널 싫어해? 그럴 리가.”
‘그래 녹틸은 너한테 잘해주니까 넌 못 믿겠지.’
그 무뢰배를 감싸주는 그를 보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 망망대해처럼 펼쳐진 망상 속에서 유유자적 헤엄치던 몸 위로 크고 거친 파도가 휩쓸고 간 느낌이었다. 리헤로스의 다정함은 나에게만 향하지 않을 것이다. 루카가 다른 사람과 엮였어도 이랬겠지. 모든 사람에게 다정한 사람은 꼭 그러니까.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고, 멀찍이 있지만, 녹틸이 대문 밖으로 조금 빠져나와선 목소리를 높여 부른다.
“리헤로스. 이만 들어와요.”
“아아, 네!”
“힘내라.”
“응, 좀 이따 보자 크리스.”
리헤로스의 두꺼운 등을 전우애 가득히 넣어 팡팡 두드려주었다. 그는 시원하게 입꼬리를 올려 웃고는 대문 안으로 들어간 녹틸의 뒤를 따랐다. 나는 다시 제자리에 앉아 잔잔한 호수를 노을이 질 때까지 멍하니 구경하다가 저녁 즈음엔 식당 찬장에 있는 비싸 보이는 술을 꺼내 잔뜩 마셨다. 알딸딸 한 기분이 드니 머지않아 잠들 수 있을 것만 같아서 방으로 올라가 얌전히 누웠다.
─쿵
아침에 들었던 그 소음. 두 사람이 서재에 들어가고부터 지속해서 들리기 시작했으니 마법 공부하면서 나는 소리임이 틀림없었다. 그런데 보통 용사라 하면 검을 쓰는 것이 정석인데 마법을 배우게 해서 무엇을 하려는 건지 보상 체계나 성장 구조가 궁금했다.
‘잠도 안 오고 목마르다. 술을 그렇게 마셨는데도 잘 수 없다니. 이거 수면 버그 맞지?’
아주 제멋대로인 게임 세계다. 술 마시고 잘 수 없다면 이렇게 된 거 녹틸의 주류 창고를 거덜 내겠다는 심산으로 1층으로 살금살금 내려왔다. 식당으로 들어가려던 찰나, 서재의 문이 조금 열려있는 것을 발견했고 그 문틈에서 나온 불빛은 어두운 복도의 한 줄기 빛이 되어주고 있었다. 뭐 한다고 문을 활짝 열어놓고 있지. 내가 자는 줄 알고 방심했나? 일전엔 방어 마법으로 들어가 보지 못했으니 궁금했다. 안에 어떻게 생겼으며 어떤 환경에서 그가 공부하고 있는지.
─끼익
조심스레 문을 밀자 일전과 다르게 저항 없이 제쳐진다. 이 건물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규모였다. 어쩐지 내가 묵은 게스트룸은 코딱지만 하더니 서재를 크게 만드느라 손님이고 나발이고 안중에 없나 보다. 빼곡히 들어찬 책들을 둘러보고 있던 도중 중간에 긴 테이블 위에 엎드린 사람이 눈에 띄었다.
“리헤로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나, 정신을 잃었나 싶어 황급히 그의 목에 손가락을 대보았다. 다행히 맥박은 안정적으로 뛰고 있었다.
“잠든 거였냐….”
새근새근 숨소리를 내며 그의 등이 작게 오르내렸다. 그 모양새가 퍽 안쓰러워 보였다. 구석에 있는 소파 위에 널브러진 담요를 주워와 그의 널따란 등위에 덮어주었다. 앞으로는 이런 일이 있으면 그냥 자라고 권해야겠다. 피로도에 취약한 걸 알면서도 그냥 내버려 둔 내 잘못이다. 얘는 나 없으면 무리하다가 몬스터에 의해 죽는 게 아니라 과로사해서 죽을 것이다. 그를 상태를 가장 잘 알고 보살필 수 있는 건 역시 나 하나뿐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러는 와중 불현듯 정오에 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솔직하게 말하면… 좋았는데.’
‘그딴 오해가 좋았다니… 바보 아냐?’
그 누가 나 같은 성격의 캐릭터를 좋아할 것인가 당연히 없을 거라 호언장담했다. 그런데 유일하게 나의 장점을 찾으려 노력하는 사람이자 호의를 표하는 인물이니 그 친절이 모두에게 향하는 걸 알면서도 자꾸 이상한 기대를 하게 된다. 설레발이며 김칫국은 독이라고 수억 번은 외쳐야 한다.
가장 최근에 했던 연애가 매우 실패 적이었고, 어찌 보면 그 일로 인해 내가 퇴사하지 않았다면 게임으로 들어와 수모를 겪을 일도 없었다. 더는 연애는 하지 않겠다고 개인적으로 다짐했건만, 심지어 게임 캐릭터이지 않나? 게임 캐릭터에게 설렌다느니 연애를 한다느니 이런 건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아차….’
무의식적으로 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민망함에 황급히 손을 거두고 나가려는 순간 문 앞에 녹틸이 앞을 가로막고 서있었다.
“뭐 하는 짓이죠?”
“왜? 잘하고 있나 보러 온 것뿐인데.”
“하아….”
한숨을 쉬는 그는 웃음기 한 점 없는 얼굴로 나만이 겨우 들릴 정도의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역시 당신은 못 믿겠어요.”
“내가 뭘 했다고?”
“제가 오지 않았으면 무슨 짓을 했겠죠.”
“오해를 풀 생각이 없네. 왜 그렇게 마족을 싫어하는지 물어도 돼?”
“당신에게 시시콜콜 이야기해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만.”
“대화를 하자고 해도 막무가내네.”
못 말리는 어린이 취급하듯이 한숨을 푹 쉬고 부러 과하게 반응했다. 그러자 그의 얼굴은 하루 남짓한 순간 중 가장 험악한 표정으로 변했다. 의외로 도발이 잘 먹히는 타입이다.
“리헤로스의 여정에서 없던 사람인 것처럼 사라지세요.”
녹틸의 손 위에 하얀 빛의 스파크가 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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