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리헤로스의 눈은 정확할 거예요. 그렇게 믿어요.”
“그래. 믿든 말든 날 공격하지만 않으면 감사하겠어.”
“그건 약속할게요. 다시 한번 그를 부탁합니다.”
“알았대도. 리헤로스의 전 애인이야? 꼭 그런 사람한테 당부 듣는 것 같네.”
“네?”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처음에 네가 그와 둘만의 시간을 갖는다던가… 내가 붙어있는 걸 싫어하길래 사심으로 좋아하는 줄 알았어.”
“하… 하하.”
녹틸은 보기 드물게 얼빠진 얼굴로 맥없는 웃음소리를 낸다.
“리헤로스는 물론 수려한 얼굴에 매력적인 사람이긴 합니다만… 그를 본 하루 만에 반해서 계략을 꾸민다고 하면 너무 이상한 사람이지 않을까요?”
“생각해 보니 그것도 그렇네.”
“그 모습을 보고 질투했나요?”
“전혀!”
“저는 오히려 두 사람이 각별한 관계일 거라 생각했거든요.”
“무슨 소리야?”
“리헤로스가 당신 미인계에 넘어갔을까 봐 어떻게 만나게 되었는지 물었거든요. 아크리스의 접근으로 만남이 시작된 걸 알고 경계했습니다. 아시다시피 무슨 목적으로 접근하는지 모를 신원불명의 마족을 싫어하니까요.”
“미, 미인계라니… 무슨 헛소리야! 술 마시면서 했던 대화가 그런 거였어?”
“네.”
“하아… 그랬다니.”
“아직은 두 사람이 연애하지 않는 것 같아서 불의의 사고가 터지기 전에 둘을 떨어트리려고 했죠.”
“아직이라니? 앞으로도 안 할 거야.”
“흐음-”
미심쩍게 흘겨보는 그를 보고 희번득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러던 중 더욱 중요한 사안 한 가지가 떠올랐다.
“혹시 리헤로스한테 내가 마족인 걸 말했어?”
“걱정 마세요. 안 했습니다.”
“고맙긴 한데 왜 말하지 않았어? 사이를 떨어트리고 싶었다면 악의 축이라고 고발하면 됐잖아.”
“오히려 이간질하면 로미오와 줄리엣 효과로 더욱 가까워질 것을 우려했습니다.”
“참 많이도 생각했다.”
“그만큼 그의 존재가 절실하기도 했단 이야기죠.”
“알았어. 그가 네게 그 정도로 중요한 사람이라면 위험에 빠지거든 내 몸을 던져서 구할게.”
“그렇다면 다행이지만요….”
“왜. 또 마음에 걸리는 게 있어?”
그는 희미한 침음을 흘리다가 말을 이었다.
“리헤로스 앞에서는 저에게 존댓말하고 둘이 있을 땐 반말하고, 쭉 이럴 건가요?”
“….”
“농담입니다. 마음대로 놓으세요. 저는 안 놓겠지만요.”
“농담 한번 더럽게 재미없게 하네.”
그의 입꼬리가 희미하게 올라가는 게 느껴졌다. 다행히도 녹틸과의 적대적 관계는 이로써 끝나게 된다. 마음이 홀가분해져서 잠을 청하려 했는데 예상했다시피 잠은 오지 않았다. 낮과는 다른 모습을 가지고 있는 호수를 달빛을 조명 삼아 천천히 거닐며 아침을 맞이했다.
‘좋은 아침이야.’
저택 내부의 커튼이 일제히 걷혔다. 리헤로스와 녹틸은 밥 먹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서재에 쿡 박혀 나오지 않았다. 건물 전체를 울리는 소음이 지속됐고. 나는 접견실에서 루카가 흰 도화지 위에 규칙 없이 휘갈기는 채색을 지켜보고 있었다.
“어제 녹틸이랑 얘기는 잘한 거야?”
“히힛.”
포동포동한 뺨이 발그레하게 달아올라 복숭아 같아졌다. 어젯밤의 이야기를 듣고 나니 루카를 건강하게 잘 키운 녹틸이 대단했다. 저 탐스러운 볼을 깨물어 보고 싶다는 감상을 하던 중 아이는 입술을 오므리며 종알댔다.
“스승님도 제가 좋은가 봐여.”
“왜?”
“그냥- 고맙다고, 스승님도 제가 좋다구 하던데여.”
“음.”
녹틸이 루카를 그렇게 생각하는 건 같은 마음이라기보단 아들 같은 마음으로 좋아하는 게 아닌가 싶은데, 행복 회로를 지켜주기 위해 굳이 말하지 않기로 했다.
“잘 됐네.”
“이곳은 저와 스승님의 보금자리이니까 잘 지킬 거에여. 그리고….”
“그리고?”
“언젠가 겨, 결혼…할 거예요….”
도화지로 들어갈 것처럼 얼굴을 푹 숙이며 웅얼댔다. 픽 웃음이 절로 나왔고 녀석의 머리를 잔뜩 헝클였다.
“그래. 결혼하면 초대해 줘.”
“히히. 당연하져! 형 덕분에 용기 낼 수 있었으니까여.”
그런 식으로 용기 낼 줄은 몰랐다만 그래도 덕분에 좋은 기회가 만들어졌고 녹틸과 오해를 풀었으니 나야말로 고마웠다. 그렇기에 정말로 결혼하게 된다면 축의를 낼 용의는 있다.
어느덧 해가 저물었지만, 마법 공부 중인 두 사람이 도무지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아 루카의 저녁 식사를 챙겨주기까지 했다. 함께 기다리던 루카는 연신 하품만 하더니 결국 잠을 청하러 방으로 휘적휘적 올라갔다. 나는 심심하던 차에 호시탐탐 노리던 녹틸의 주류 창고를 차근차근 털기 시작했다.
‘마법사는 그저 고상스럽게 차만 홀짝일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맛있는 술이 많네.’
아주 깊은 밤이 되고 나서야 마침내 두 사람이 서재에서 나왔지만, 표정이 그다지 좋지 않았다.
“이상해.”
“무슨 일 있어?”
“어떻게 된 일인지… 리헤로스는 충분한 마나와 그릇을 가지고 있음에도 마법을 정확하게 구사할 수가 없어요.”
‘스킬 버그겠군. 이럴 거면 애초에 배우게 하지 말던가. 짜증 나는 프렉탈 놈들.’
“그만하면 됐어. 당장은 사용하기 어려운가 보네.”
“미안해. 나 때문에 시간을 허비한 것 같아.”
“그렇지 않아요. 제가 더 연구를 해야 했었는데.”
“서로 탓은 그만해. 누가 잘했고 잘못했고의 문제는 아닌 것 같아. 오늘은 이만 자러 가. 내일부터는 오래 걸어야 할 것 같으니까.”
“그렇게 하세요.”
“그럼 가자. 크리스.”
생각해 보니 이 자식, 자러 갈 때마다 애착 인형 찾는 것처럼 같이 가자고 하지 않는가. 여기서는 방도 따로 배정받아 같이 가고 자시고 할 것도 없는데 역시나 ‘에스코트’ 당하는 것 같아서 짜증 났다. 불퉁한 얼굴로 그를 지나쳐 먼저 계단 위를 올랐다. 리헤로스는 곧바로 따라 올라왔는데 계단 난간 사이로 절레절레 고갤 젓는 녹틸이 보였다. 2층으로 올라온 그는 방문 앞에 선 내 팔을 가볍게 붙잡았다.
“크리스, 무슨 일 있어? 왜 이렇게 급히….”
“…그냥.”
“술 냄새. 결국 혼자 마신 거야?”
“남 이사- 너희가 안 나오니까 술 마시는 것밖에 할 일이 더 있어?”
“나 기다렸어?”
“너를 기다렸다고? 내가?”
“아니야?”
“…….”
기다린 건 맞지만 리헤로스를 기다렸다기보단 리헤로스가 배우는 마법의 결과물이 궁금했을 뿐인 걸 인정하기 싫어서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그는 손가락 등 쪽으로 내 뺨을 겨우 닿을 정도로 살살 쓰다듬어주었다. 마치 병아리를 조심스레 쓰다듬는 거인의 손길처럼. 무의식적으로 리헤로스를 올려다보려 했는데 바닥으로 떨궜다. 뿌리치기 힘든 묘한 기분이었다.
“얼마나 마신 거야?”
“많이 먹든 말든….”
“다음엔 같이 마시자.”
“…마음대로 해.”
옹알이에 가까운 대답만 남기고 방으로 후다닥 들어왔다. 술같이 마시는 게 대수인가 이렇게 사춘기 소년처럼 우물쭈물할 필요는 없는데 오히려 더 수상한 반응을 보인 것 같았다.
‘이게 다 녹틸 때문이야. 괜히 이상한 소릴 들어서.’
낡고 퀴퀴한 이불 속으로 들어가 발로 이불을 퍽퍽 차 댔다. 공기 중에 먼지가 뽀얗게 나풀거렸다. 술을 그렇게 많이 마셨는데도 여전히 잠은 오지 않았다. 현실과 달리 술을 미친 듯이 퍼부어도 고주망태가 될 정도로 취하지 않는다는 점이 어색했다.
‘자고 싶다….’
어김없이 뜬 눈으로 아침을 맞이했다. 이곳에 온 이래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네 명이 오붓하게 식사하게 됐다. 그런데 마법 수업의 성과가 그다지 좋지 않았기 때문일까 식사 분위기가 마냥 밝고 가볍지만은 않았다. 발랄한 루카마저 이 공기의 무게를 읽었는지 숟가락으로 깨작대기만 했다.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를 식사를 마치고 수도 라이오펠로 갈 채비를 마쳤다.
“녹틸, 이틀 동안 감사했습니다.”
“조심히 가세요. 혹시라도 무슨 일 생기면 연락해 주세요.”
“꼬맹이 잘 있어라. 스승님 말 잘 듣고.”
“물론이져!”
“그럼 연이 닿으면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정중히 인사를 남기고 가지런히 정돈된 길을 따라 걸었다. 녹틸의 저택은 시작의 지역인 ‘프린치피움’의 끄트머리에 있었기에 그곳을 벗어난 첫 여정이었다. 설레는 마음도 있었지만 다소 걱정스러웠다. 수도까지 가려면 족히 며칠을 꼬박 걸어야 하는데 리헤로스 체력으로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다.
“리헤로스. 다음 마을에서 탈것을 빌려보자.”
“많이 힘들어?”
“나 말고 너 때문에 그런 거거든?”
“나는 아직 멀쩡해.”
“그렇다면 다행이긴 한데….”
“그래도 오늘 안으론 다음 마을에는 도착할 것 같지?”
“응. 그런데 작은 마을이라고 돈 주고 빌릴 말도 없는 거 아니겠지?”
“그럼 다음 마을에서 빌리지 뭐.”
“긍정적이다.”
“그게 내 장점 아니겠어.”
그 말을 끝으로 우리 둘은 에너지를 아끼기 위해 입을 다물었다. 자연에 들리는 소리를 벗 삼아 걸었지만 쉬지 않았기에 몸이 녹초가 되기 일보 직전이었다. 주위가 점차 어두워질수록 멀리서부터 존재감을 드러내는 마을의 불빛이 눈에 띄었다. 불빛으로만 가늠했을 땐 금방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해가 완전히 지고 나서야 가까스로 도착할 수 있었다. 이번 마을에서 무조건 쉬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마을의 분위기가 이상했다.
“마을 입구에 아무도 없네?”
“그러게, 뭔가 이상해. 민가 있는 쪽으로 가볼까?”
─쾅!
“꺄악!!”
멀지 않은 곳에서 날카로운 비명이 들렸다. 누가 먼저 할 것 없이 바로 그 비명의 주인을 찾아 나섰고 도착한 곳엔 돼지머리를 가진 이족보행 괴수가 서슬 퍼런 도끼를 머리 위로 힘껏 들어 올리고 있었다.
‘파란 휘장…!’
녹틸이 말했던 파란 휘장, 마군이 분명했다. 놈의 시선 아래에는 중년의 여성과 그 품 안에서 떨고 있는 어린아이가 있었다.
“안 돼! 살려주세요!”
“하앗!”
리헤로스는 곧바로 검을 뽑아 달려들었다.
손목을 돌려 원을 그리며 도끼가 내리꽂는 경로를 막아 튕겨냈다.
─키잉!
마군 병사는 거센 반동에 뒤로 기우뚱 기울었다. 리헤로스의 날렵한 칼날은 눈 깜짝할 새 놈의 목을 관통했다. 파고들었던 두툼한 목덜미에서 검이 빠져나오자 검붉은 액체가 쏟아져 내렸다. 다른 마군이 더 남았는지 주변을 살폈는데 놈이 유일했던 모양이다.
“다른 마군은 없어. 저놈만 마을 안으로 딸려 들어온 것 같아.”
“괜찮으십니까? 아이는 다치지 않았나요?”
“요, 용사님! 맞으시죠? 저희 좀 도와주세요!”
여성은 막무가내로 리헤로스를 끌고 어딘가로 향했다. 그곳에서 보상으로 탈것을 빌릴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뒤따라갔다.
탈것을 빌리긴커녕 안아달라고 보채는 아이들과 몸을 가누기 힘들어하는 어른들이 아무렇게나 앉아 자신들의 상태를 살피기에 바빴다. 우는소리와 찢어지는 비명이 섞여 신경을 날카롭게 만들었다. 보고 싶지 않았던 참담한 지옥의 실체를 들여다보는 느낌이었다.
“어떻게 이럴 수가….”
“…끔찍하네.”
루카는 운 좋게 녹틸의 눈에 들어 안정적인 가정에서 자라고 있지만, 실상은 이렇게 오갈 곳 없이 상황이 좋아지기만을 하늘에 바라는 사람들이 대다수일 것이다. 지친 얼굴의 사람들은 한둘씩 이방인을 올려다보기 시작했고 자연스럽게 리헤로스가 용사임을 인지했다.
“용사님이다!”
“용사님이 오셨다!”
그들은 나를 밀치고 리헤로스를 빙 둘러싸 저마다 하고 싶은 말을 우르르 쏟아냈다.
“전쟁은 언제 끝나는 겁니까?”
“마군의 수세가 줄어들지 않았나요? 왕국 군은 어디로 간 거죠.”
“용사님 도와주세요…!”
“부디 저희를 위해 기도해 주세요. 우릴 가여히 여기세요. 아아, 크레아누스시여… ”
“배고파요. 먹을 것 좀 주세요.”
수십 개의 손이 리헤로스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아무런 방어도 하지 못하고 속수무책으로 듣고만 있었기에 내가 인파를 파고들어 그의 손을 잡아끌었다. 가까스로 발을 떼기 시작한 리헤로스는 사람들을 지나쳐 오면서 연신 죄송하다는 말을 남기는 수밖에 없었다. 빛이 닿지 않는 낡은 집의 뒤편으로 몸을 숨겼다.
“리헤로스. 네가 여기서 듣고 있어 봐야 할 수 있는 건 없어. 우선 라이오펠로 가야….”
“….”
“괜찮아? 어디 다친 건 아니지?”
“크리스, 결심했어.
“무슨 결심?”
“반드시… 내 손으로─”
결의에 찬 그의 눈빛은 등골이 서늘해질 정도로 날카로웠다.
“마왕을 처단하겠어.”
─띠링
[시스템]
용사 리헤로스의 목표(이)가 설정되었습니다.
마침내 엔딩으로 향하는 플래그가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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