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햇빛에 잘 말려서 뽀송한 침구에 얼굴을 묻는다. 넓고 쾌적한 수도의 여관에서 상쾌한 아침을 맞이했다. 활짝 열린 창에서 미세먼지 하나 없는 상쾌한 공기는 자연스럽게 잠을 깨워 주었다.
“깼어?”
“으응…. 날씨 좋다.”
“창문 열어놓는 게 더 상쾌하지? …어, 왔다.”
“전령 왔어?”
전령이 왔다는 소식에 벌떡 일어나 그의 옆으로 갔다. 창에 날아든 흰 비둘기 모양의 마법 전령이 리헤로스의 손에 스크롤을 쥐여주고 팔 위에 앉는다. 스크롤을 펼치자 비둘기의 형상은 빛 가루가 되어 사라졌다.
“리헤로스에게. 오랜만에 보는 이름에 반가움을 숨길 수가 없네요. 아크리스와 함께 무사히 수도까지 갔다니 다행입니다. 그간 연락이 없어 혹여 불미스러운 사고에 휘말렸을까 걱정했답니다. 열리지 않는 검이라면 추측하신 대로 마법이 걸려있는 게 분명합니다. 제가 그곳을 떠나온 지 오래되어 기억에 남는 인물들이 아직 수도에 있을지 모르겠군요. 글라디우스 기사단과 접선을 했고 그들과 협력하기로 했다면 기사단 마법 부서로 가보세요. 그곳에서 ‘프리나’를 찾아 물어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그녀는 훌륭한 왕궁 마법사이니 말이죠.”
“프리나.”
“그럼 언젠가 다시 만날 때까지 건강하시길.”
“글에서 녹틸 말투가 들리는 것 같아.”
“추신.”
“추신도 있어?”
“아크리스. 저한테 했던 말 잊지 마세요.”
“아오….”
“녹틸한테 무슨 얘기를 했는데?”
“그런 게 있어.”
“걱정할 만한 일은 아니지? 녹틸이 너한테 한 소리 했었다며”
“응응, 그런 거 아니야. 신경 쓰지 마. 그리고 화해했어.”
“정말? 다행이다.”
리헤로스 잘 지키라고 신신당부하는 게 분명했다. 루카뿐만 아니라 리헤로스까지 품에 싸고도는 거냐고. 이 과보호로 똘똘 뭉친 답 없는 인간을 표현할 콤플렉스 명이 존재하지 않는다.
“크리스?”
“응?”
“프리나를 찾으러 가보자.”
“아, 그래야지…. 그런데 거기 가면 재수 없는 놈이랑 또 마주치는 거 아니야?”
“재수… 칼리고 말하는 거야?”
“그래. 칼리고인지 나부랭인지.”
“설마. 어제 단단히 경고했으니 괜찮을 거야.”
“너답지 않게 화를 많이 내긴 했다만, 또 그러면 이번엔 힘껏 걷어차 줘야겠어.”
“응, 나도 안 막을 게.”
“푸핫! 뭐? 네가 그런 말 하는 거 되게 낯설다.”
“어제 너한테 한 처우는 심했잖아. 내가 더 화나던데.”
“나한테 무례했던 걸 화날 게 아니라 네가 화나야 하는 건 당연한 거고… 됐어. 너까지 감방에 들어갈 순 없으니 나쁜 역할은 내가 할게. 너는 나를 말리는 역할을 해.”
그는 재밌는 말을 들은 것처럼 소리를 내 웃었다. 늘 생각하는 거지만 그의 미소는 햇살이 따로 없었다. 이런 얼굴에 실력도 좋고 인성도 좋으니 너도나도 데려가고 싶어 하고 시기하고 질투하는 거겠지.
‘정말 잘 났어.’
최대한 가벼운 차림새로 검 하나만 들고 어제 방문했던 훈련장으로 향했다. 크게 달라진 것 없는 전경이 우릴 맞이해줬고, 마침 물어보기 편한 사람이 눈에 띄었다.
“아킬라 경. 안녕하세요.”
“아, 용사님. 안녕하세요.”
“실례지만 프리나라는 사람을 알고 계신가요?”
“프리…나요?”
“네.”
“꽤 유명한 사람이라 하던데.”
“글쎄요. 처음 듣는 이름이네요.”
“맞다. 단서가 더 있어. 기사단의 마법 부서랬어.”
마법 부서라는 말에 아킬라는 손가락을 딱 소리 나도록 튕겼다.
“제가 잘 모를 만도 하네요! 마법부는 특수 기사단인지라 훈련소가 일반 기사단과 완전히 분리되어 있거든요. 왕립 도서관 바로 옆에 있으니 그쪽으로 가보세요.”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그런데 마법부는 무슨 일로 찾으시는….”
“이 검이 마법으로 잠겨있는 것 같아서요. 마법사에게 자문을 얻어보려 합니다.”
“아하… 그렇군요.”
“그럼, 수고하세요.”
아킬라의 시선이 리헤로스의 검에서 꽤 오랫동안 떨어지지 않았다. 우리는 나란히 발을 돌려 훈련장을 빠져나가고 있었는데 어쩐지 뒤통수가 따갑다 싶어 어깨너머의 뒤쪽을 슬쩍 훔쳐보았다. 아킬라는 우리 쪽을 보며 어느 말단 기사에게 귓속말하고 있다.
‘뭐지?’
그 모습이 한동안 눈에 밟혀 찜찜했지만, 뒤가 켕길 만한 짓을 한 건 아니기 때문에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이드랑제 가문의 제안을 거절한 녀석이 저 녀석이야?”
“콧대가 높구만. 쳇.”
거리를 거닐면 몇몇 기사와 모험가들이 리헤로스 들으란 듯이 씹어대는 이 상황들이 훨씬 신경 쓰이고 곤혹스러웠기 때문이다.
“…하루아침 사이에 인기남 되셨네.”
“찾아왔던 사람이 대단한 사람이라고 하던데… 거절하면 이렇게 될 거라고 대충 예상했어.”
“그냥 모르는 척해. 저 사람들은 공공의 적을 만들어 열등감을 해소하고 싶은 거니까.”
“난 괜찮아. 금방 익숙해지겠지.”
욕먹는 게 익숙해진다는 것은 마왕인 내 역할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왕이야 악행을 저지르고 욕을 먹는 거라 나름 합당한 처사라 생각하지만, 용사는 세계를 위해 싸우면서 사람들의 넋두리도 들어줘야 하고, 겸손해야 하며 착해야 하지 않은가. 그 많은 희생을 요구하면서 본인에게 돌아오는 것 하나 없는 극한 직업은 더 없을 것이다.
“익숙해지지 마.”
“응?”
“……내가 대신 화내줄 테니까.”
“크리스…….”
“크흠, 도서관 보인다. 옆에 훈련장이 있다고 했지?”
답지 않게 위로한 말이 민망해져 도서관 옆, 마법부 훈련장으로 뛰어 들어왔다. 그런데 바로 직전에 봤던 기사단의 훈련장과 달리 마법부는 매우 조용했고 인적이라곤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사람이 한 명도 없네?”
“그러게, 입구를 지키는 경비병도 없어.”
“문은 열려있으려나? 건물 안으로 들어가 보자.”
내부도 다를 게 없었다. 더 이상 운영을 하지 않는 건물처럼 창은 커튼을 쳐두고, 벽 붙이 랜턴도 몇 군데 켜져 있지 않아 매우 어두웠다. 멀리서부터 불빛이 흔들거리는 것이 보였고, 이내 붉은 휘장의 경비병이 모습을 드러냈다.
“무슨 일이십니까?”
“안녕하세요. 저… 마법부서 기사단원들은 없나요?”
“네, 지금은 추도 기간이라 훈련을 진행하지 않습니다.”
“추도 기간이요?”
“전쟁에서 순국한 기사를 위한 추도 기간입니다. 그중 촉망받던 마법사도 있기에 기사단으로서는 안타깝기 그지없는 일이죠.”
설마 내가 생각하는 그 사람이 아니겠지, 미룰 수 없는 확언을 듣고 싶어 경비병에게 물었다.
“설마… 순국한 기사 중 프리나가 있나요?”
“맞습니다. 홀로 살아남을 수 있었는데 후배 기사들을 위해 희생을 했던지라 더욱 안타까운 일이었습니다.”
“…….”
“…알겠습니다.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렇게까지 모든 상황이 도와주지 않을 수가 있나. 우리는 감전이라도 된 것처럼 얼떨떨한 상태로 건물 밖으로 빠져나왔다.
‘이제 어쩌지?’
정말 한 달을 기다려 고위 마법사에게 자문을 얻는 수밖에 없나? 그럼 한 달의 유예 중 아무것도 못 하고 손을 놓고 있는 수밖에 없는 건가. 그럴 바에 리헤로스가 이드랑제 밑에서 일하는 게 더 빠를 것이다. 그럼 거만한 칼리고를 물 먹이는 것은?
‘잘 세워놨던 계획이 주르륵 미끄러지니… 멘탈 붕괴가 따로 없네.’
그때, 리헤로스의 큰 손이 내 어깨를 흔들었다.
“녹틸에게 다시 연락해 보자.”
***
우리는 마차에서 내리는 사람들을 반갑게 맞이했다.
“먼 길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어요. 녹틸.”
“별말씀을요.”
“흐아아아암… 졸려워어….”
“꼬맹이도 왔네?”
“제가 어떻게 스승님만 보낼 수 있겠어여.”
루카는 이제 막 일어난 모양인지 얼굴이 팅팅 부어있었다. 그간 깊은 잠에 빠져있었기에 당장 며칠 전에 본 것 같았지만, 퍽 반가웠다.
“그럼 여관 안으로 들어가요.”
“그럴까요.”
“……음?”
함께 여관으로 향하려는데 음험한 기운이 느껴졌다. 누군가 쳐다보는 것 같은 기분. 길거리를 오고 가는 사람들 사이에서 이 불쾌한 시선의 출처를 찾기 위해 둘러보았다.
‘기분 탓인가…?’
둘러보기로는 수상한 인물은 없어 보였다. 요즘 워낙 예민해져 있어 그런 거겠거니 했다. 그래도 끝까지 경계를 늦추지 않고 실내로 들어섰다. 두 사람과 함께 방에 도달하고 나서야 안심할 수 있었다.
“흐아아아아암….”
“마차에서 잠깐 눈을 붙였었는데 잠자리가 불편했나 봐요.”
“루카, 침대에 누워도 괜찮아.”
“감사합니다아. 사양하진 않을게여.”
“고마워요. 리헤로스. 그런데 어떤 무기이길래 고대 마법이 걸려있는 거예요?”
“이 검입니다. 군단장을 쓰러트렸던 마을 예배당에서 습득했어요.”
테이블 위에 백금색의 검을 올려두었다. 녹틸은 겉옷을 벗어 내려두곤 검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예배당이라… 성물일 가능성도 있겠군요.”
“성물….”
“왜 그러시죠. 리헤로스?”
“그렇게 귀한 물건이면… 역시 가져오면 안 됐을까요.”
“그건 아닐 거예요. 성물을 챙기지 못할 정도면 교회 사람들, 그러니까 원주인이 무사하진 못했을 겁니다. 보통 교회의 성물을 목숨보다 소중히 하니 말이죠.”
“그렇군요….”
“걱정 말아요. 온 세계가 당신을 지켜보고 도와주려 할 테니까요.”
너는 플레이어블 캐릭터니까 보상은 아무 생각 말고 가져가도 된다는 말을 꽤 고급스럽게 한다.
“녹틸은 고대 마법에 대해 알고 계세요?”
“그럼요. 저 꽤 높은 곳까지 있었던 사람입니다. 장로의 자리까지 초대도 받았지요”
“현재 기사단 마법부에서 고대 마법을 아는 건 고위 마법사뿐이라던데 그 사람들 할아버지 아니야? 너 나이가 몇 살이야 대체?”
“저 생각보다 많이 먹었어요.”
“그렇다면 크리스도 웃어른 공경해야 하는 거 아니야?”
“괜찮아요. 리헤로스. 그래봤자 저는 인간인데 그는 다른 종족이니까요. 저보다 훨씬 나이가 많을 겁니다.”
“진짜야?”
“뭐… 그럴지도. 나도 내가 몇 살인지 몰라.”
“보통 500살이 넘으면 나이를 안 세게 된다는 말이 있지요.”
“크리스가 저와 또래라고 했는데, 또래가 아닐 가능성이 크겠네요?”
“그렇죠.”
“왜 자꾸 나이 얘기야? 마법이나 어떻게 해봐.”
“괜찮아 크리스. 난…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고 생각해.”
“아오. 진짜.”
“본론으로 돌아와서, 검을 어떻게 해봐야겠죠. 언제까지 검을 둔기로 사용할 순 없을 테니까요.”
“잘 부탁드려요.”
“스승니임 저 배고파여….”
침대에 누워있던 루카가 쪼르르 와서는 녹틸의 허리에 매달렸다.
“그러고 보니 아침밥도 안 먹고 이 시간까지 달려왔구나. 리헤로스, 괜찮으면 루카와 같이 요깃거리 좀 사 와줄래요?”
“그럼요. 가자 루카.”
“아크리스는 남아서 저를 보조해 주세요.”
또 무슨 잔소리를 하려고 나만 남겨두는지 모르겠다만, 나의 심경을 이해할 리 없는 리헤로스와 루카는 신나게 밖으로 나섰다.
─달칵
“보조는 핑계인 거 알아. 이번엔 뭔데?”
“……아크리스.”
“왜?”
“두 사람 사귀지 않는 거 맞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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