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충격으로 인해 입이 쩍 벌어져서는 다물어지지 않았다. 이 인간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안 사귀거든?”
“약 이주 전에 봤을 때 비해 두 사람의 공기가 많이 달라진 것 같아서요. 뭔가… 애틋한 느낌이랄까.”
“대체 어디가? 전-혀 달라진 거 없거든?”
“…진짜 모르는 거예요. 모르는 척하는 거예요? 어디 동굴에만 갇혀있다가 나와서 타인과 감정 교류를 안 해봤어요?”
“괜히 이상한 바람 넣지 마. 그런 거 신경 쓸 겨를 없어. 리헤로스도 목표에 가까워지려면 사사로운 감정은 배제해야 해.”
“……갑자기 리헤로스가 안타까워졌어요.”
“…….”
“당신, 리헤로스의 감정을 들여다보기 싫어서 벽을 세우는 거죠?”
어느 정도 맞는 말이긴 했다. 그의 자상함에 상처 입은 마음이 새살 돋는 것 같았다. 하지만 어차피 이 게임의 막장에선 그의 손에 죽을 목숨인데 깊은 사이가 되기 싫다는 것은 여전했다. 원래의 목표를 끊임없이 되새겨야 한다. 이상한 길로 빠져선 안 된다. 녹틸이야 남의 이야기니까 가볍게 이야기할 수 있는 거겠지.
‘그래, 그렇게 생각해야 마음이 편해.’
“무슨 사정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본인에게 좋다면 그렇게 하시던가요. 속으로 구구절절 생각하고 티 내지 않는 스타일 같은데, 그러면 평소에 눈치 없다고 많이 욕먹지 않아요? 저랑 있을 땐 눈치가 휙휙 돌아가면서.”
“…요즘 왜 이렇게 살살 긁는 놈들이 많아졌지?”
“놈들이라니, 저 말고 또 있나요?”
“어, 심지어 너보다 왕재수인 놈이 하나 더 생겼어.”
“당신 성격엔 살인했을 것 같은데 용케 참았네요.”
“네가 이러니까 재수 없단 소릴 듣는 거야.”
녹틸은 빙그레 웃으면서 대화를 자연스럽게 마무리하였고 다시 검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거 고대 마법이긴 한데, 이건 그냥 풀 수 있는 게 아니네요.”
“그럼 뭔데?”
“그건 리헤로스가 오면 이야기해 줄게요. 어차피 당사자한테 설명해야 하는 건데 두 번 하긴 귀찮거든요.”
“마음대로 해. 그럼 재밌는 얘기나 해봐.”
리헤로스와 루카가 돌아오기 전까지 시답잖은 근황을 나눴다. 녹틸이 사는 곳은 전쟁의 영향을 받지 않고 외부와 단절된 곳이라서 크게 변한 것은 없었다. 보통 루카가 얼마나 컸고, 요즘은 어떤 공부에 관심을 보이는지 따위에 관한 이야기였다.
요깃거리를 사러 간 두 사람은 금방 돌아왔고, 첫날 갔었던 빵집을 다녀온 모양이다. 맛있는 빵 내음이 방 전체를 메우니 급격하게 허기가 져서 빵을 입에 한가득 쑤셔 넣고 먹어 치웠다.
“크리스, 체할라. 우유 마셔.”
“원래 이렇게 먹성이 좋았어요? 천천히 드세요. 안 뺏어 먹으니까.”
“형, 내 것도 줄까여?”
“됐어. 꼬맹이나 많이 먹고 쑥쑥 커라. 서둘러 커야 할 텐데? 그렇지?”
장난 섞인 내 말의 뜻을 알아들은 루카는 우유병을 부여잡고 단번에 마셔버린다. 서로 화목하게 정제된 탄수화물을 해치우고 나서 다시 검에 집중할 수 있었다.
“리헤로스, 이건 계약 무기에요.”
“계약 무기요?”
“네, 고대 정령왕의 영혼의 조각 일부가 깃들어있죠. 이를 통해 정령왕과 계약하면 검을 자유자재로 쓸 수 있는 것뿐만 아니라 정령왕을 통해 극대화된 마력을 지닐 수 있게 됩니다.”
“그럼 혹시… 쥬바르메라는 이름도 정령왕과 관련이 있나요?”
“쥬바르메. 빛의 정령왕 이름이에요.”
“역시….”
눈동자가 금빛으로 변하고 흡사 번개 같던 검기의 형상까지 만들어낸 그때를 떠올렸다. 그것이 정령왕 쥬바르메를 통해 뿜어낸 강력한 마법이었던 것인가.
“잠깐잠깐, 네가 검기를 발산했을 때, 계약 무기를 사용한 게 아니라 원래 소유하고 있던 검이었잖아?”
“맞아. 그랬어. 그래서 정령왕이나 계약 무기랑은 전혀 상관없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혹시 계약 무기가 리헤로스를 기준으로 반경 20m 안에 있지 않았나요?”
“맞아요. 전투 공간과 가까운 예배 단상 쪽에 있었어요.”
“마력에 이끌려 일시적으로 공명할 수 있었던 것 같네요. 분명 리헤로스의 정신과 마법이 기폭제였을 거예요.”
일반 마법치고는 압도될 정도로 강한 힘이 피부에 와닿았는데 이변은 없었다.
“리헤로스가 정령왕 쥬바르메와 계약을 하게 된다면 지금보다 더 훨씬 강한 마검사가 될 수 있어요.”
“마검사요?”
“마검사는 마법을 이용해 검을 강화하는 검사예요. 리헤로스의 마나 흐름을 읽었을 때, 찬란한 빛의 줄기가 느껴졌었는데 리헤로스는 역시 빛과 공명하는 모양이군요. 후후, 역시 제가 사람을 제대로 본 것 같아요.”
“그럼 이제 이걸 어떻게 써먹을 수 있을지 생각해 보자고. 녹틸, 어서 열어줘 봐.”
“아쉽게도 제가 억지로 봉인을 해제할 수 있는 게 아니라 리헤로스가 정령왕과 생각을 나누고 공명을 하는 것이 중요해요.”
우리는 모두 사방에서 검을 내려다보며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머리를 맞대고 있는다고 똑 부러진 해결책이 나오는 것이 아니니 아이디어를 하나씩 던지기 시작했다.
“검을 쥐고 힘을 줘 보세요.”
“흐읍…!”
그의 이마에 핏대가 설 정도로 힘을 주었지만 아무런 반응이 나타나지 않았다.
“검을 휘두르면서 정령왕을 불러봐.”
“쥬바르메!”
목소리에 기합이 잔뜩 들어간 채, 정령왕의 이름을 불렀지만 부름에 답해주지 않았다.
“맞다. 그때 페르킨이 심한 말을 했잖아, 그래서 공명했던 거 아니야? 우리가 욕해줄 게 되는지 확인해 보자. 바보야! 멍청아!”
“저는 리헤로스에게 욕하지 않을래요.”
“…너 진짜 짜증 난다.”
“이런 방법으로는 안 될 것 같네요.”
“그런가요….”
“가지고는 있지만, 무용지물이네, 고물 아니야? 안에 녹슬어서 못 연다던가.”
“정령왕이 들으십니다. 말씀 삼가세요.”
어떻게 공명을 하면 좋을지 아이디어 회의를 하는 것이었지만, 초반의 진지한 기색은 온데간데없고 점점 농담 따먹기에 가까워졌다. 웃고 떠들고 있는데 거실 쪽 문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똑똑똑
“응? 누가 왔나 본데.”
“여관 주인 아닐까? 점심 식사 시간이라 물어보러 왔을지도 몰라.”
“헤헤 제가 나설 때가 됐군여. 모두 바쁘시니까 제가 나가볼게여!”
도도도도도─
어른들의 대화에 끼어들 수 없어 심심했던 걸까 루카는 말릴 틈도 없이 재빨리 튀어 나갔다. 저택에서도 루카가 손님을 맞이하는 경우가 많았으니 몸이 먼저 반응했는지도 모른다. 별생각 없이 사사로운 잡담이 이어졌다.
그러면서 문득 꽤 시간이 흐른 것 같았는데 루카는 방에 들어오지 않았다. 루카의 부재가 신경 쓰였다.
“루카? 이야기 전했으면 문 닫고 방으로 돌아오렴.”
“꼬맹이. 왜 이리 오래 걸려?”
“루카?”
애타게 기다리던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제야 녹틸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고 그를 따라 우리도 거실로 나왔다.
─끽, 끼익
녹슨 경첩 소리만이 루카의 대답을 대신하고 있었다. 문을 닫지도 않고 나갈 만큼 긴박한 상황이 아이에게 있을 리가 없다. 모두가 차마 입에 담기 어려운 생각 중인지 구태여 말은 하지 않았지만, 유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어른이 셋이나 있으니 이런 일이 있을 줄은 몰랐는데.’
“루, 루카….”
새파랗게 질린 녹틸은 비틀거렸고 내가 가까스로 부축했다. 여러 가지 사건·사고를 딛고 일어나 금이야 옥이야 보살피고 있는 루카가 갑작스레 사라져 버리니 찰나지만 아찔하게도 무서운 상상들이 벼락처럼 내리꽂힌 모양이다.
“흩어져서 찾아보자.”
“응, 알겠어. 녹틸! 괜찮아? 걸을 수 있어?”
“네, 네에… 괜찮아요…. 빨리, 빨리 찾아야… 루카…!!”
녹틸은 꿈속에서 달리는 것처럼 허우적대며 당황해 있었다. 나와 리헤로스가 최대한 많은 곳을 둘러보는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리키 루미를 찾아낸 전적도 있었으니 아주 약간은 침착할 수 있었다. 여관 밖은 대도시답게 유동 인구가 많았다. 그래도 루카의 큰 귀는 어딜 가나 눈에 띄니 금방 찾을 수 있을 거란 믿음이 있었다.
‘납치한 게 아닌 것 같으니 멀리 가진 못했을 거야.’
발 빠르게 아주 좁은 틈 사이까지 구석구석 살피던 중, 어느 인적 드문 골목 안쪽에서 삐져나온 듯한, 눈에 익은 잔뜩 부풀어져 있는 꼬리가 보였다. 골목 안으로 쏙 들어가 버린다.
“루카?!”
골목 안으로 바로 들어가지 않고 얼굴만 내밀어 안쪽의 상황을 살폈다. 사냥감을 포착한 듯 엉덩이를 좌우로 씰룩씰룩하니 꼬리가 살랑살랑 거린다.
‘……대체 뭘 하는 거야?’
루카의 시선 끝을 쫓으니 알록달록한 털 공이 방울 소리를 내며 골목 깊은 곳까지 데구르르 굴러가고 있었다.
‘공이 실에 매달려있는 것 같아. 모퉁이를 돌면 조종하는 놈이 보이겠군.’
범인의 눈에 들지 않을 정도로 거리를 벌리며 따라갔다. 예상대로 모퉁이를 돌자 검은 케이프에 후드를 뒤집어쓴 신원 미상의 인물이 드러났다.
“야 이 새끼야! 멈춰!”
바닥에 구르고 있는 마대를 밟아 부러트렸고, 뾰족해진 자루를 수상한 인물에게 향해 힘껏 던졌다.
─콱!
“히, 히익!”
얼굴 가까이 스치고 지나간 살벌하게 뾰족한 자루에 범인은 깜짝 놀라 몸이 굳은 것 같았다. 나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달려들어 놈의 가슴팍을 발로 차 넘어뜨렸다. 벽에 부딪히고 튕겨 자빠진 범인의 멱살을 잡아 흔들어댔다. 색색의 털 공이 데구루루 굴러 골목 안쪽으로 사라지자 루카는 정신을 차린 것 같았다.
“흐엑?! 아크리스 형아?”
“애를 유괴해? 짐승만도 못한 새끼!”
“사, 살려주십쇼! 유괴하려는 게 아니라 아이를 멀리 유인하면 보수를 준다고 해서…!”
“그게 유괴잖아 이 새끼야! 왜 유인했지?”
“그… 그게. 저도 잘 몰라요! 의뢰인이 부탁한 물건을 훔쳐야 한대서요!”
“의뢰인은 누구고 무슨 물건인데?”
“저는 전달받았을 뿐이에요! 자세한 내용을 알고 있는 동업자가 지금쯤이면 접선 장소로 오고 있을 겁니다! 그놈을 잡으세요!”
“쯧, 의리는 쥐뿔도 없군.”
‘자연스럽게 접근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
쥐고 있던 멱살을 놓고선 남자를 발로 툭툭 쳤다.
“옷 벗어.”
“네?”
***
검은 후드를 깊이 눌러쓴 또 다른 인물이 골목에 허겁지겁 들어선다.
“헥헥, 나왔어!”
“…….”
“왜 아는 척도 안 해? 예상대로 아이가 사라지니 모두 방에서 나오더라. 그 사이에 검을 챙겼어. 이제 의뢰인한테 가자.”
“의뢰인이 누구지?”
“그새 까먹었어? 멍청아! 그 왜 있잖아 기사 나으리… 근데 목소리가 왜 그래? 감기라도 걸렸냐?
“…….”
“…너 누구야?”
자신의 동업자가 아니란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공범은 골목을 빠져나가려 했다. 내가 쫓지 않아도 금발의 남성, 리헤로스가 그 앞을 막아선다. 우물쭈물하던 수상한 인물은 훔친 검을 뽑아 위협하려는 듯 보였다. 낑낑대며 검을 뽑으려 하지만 당연하게도 뽑히지 않았고, 그러는 사이 놈의 뒷덜미를 잡아들어서 바닥에 메다꽂았다.
“커헉…!”
“검을 훔치라고 지시한 의뢰인. 누구야.”
“그, 그건 죽어도 말 못….”
“어리석은 자여, 진정 죽고 싶은 게 아니면 바른대로 말하세요.”
리헤로스 뒤에서 나타난 녹틸의 손에 흰색의 스파크가 튀었다. 나에게 보였던 것보다 훨씬 더 격렬하며 살벌한 느낌으로 꿈틀댄다.
“마, 말할게요! 말할게요!”
“잘 생각했어. 이런 짓을 의뢰한 기사 누구지?”
“흐으윽… 나불댄 거 알면 이제 의뢰 안 들어올 텐데 뭐 먹고 산담….”
“그럼 똑바로 살았어야지. 불쌍한 척하지 마. 빨리 말해.”
“의뢰한 기사는….”
우리 셋은 모두 험상궂은 얼굴로 에워싸며 노려보았다.
“어서!”
“아, 아킬라 경이에요….”
“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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