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왕님 망겜에도 엔딩이 있나요-30화 (30/127)

30화

“리헤로스.”

“응?”

“차와 디저트가 나오면 너는 먹지 마. 내가 기미를 해볼 테니까.”

“그 안에 이상한 것을 탔을까 봐?”

“혹시 모르지. 귀족들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너를 자신의 가문에 묶어놓고 싶어 하는 것 같단 말이지.”

“알았어, 조심할게.”

들리지 않을게 가까이 다가가 귓속말을 했는데 문 쪽에 서 있던 사용인이 그 모습을 만류하듯 헛기침해댄다. 환복을 마친 스피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직전에 입은 드레스보단 수수한 느낌이지만 여전히 화려한 차림새였다.

“백작님, 오늘 아침 새로 구매한 찻잎입니다.”

“마침 손님도 오셨고 잘 됐네요.”

찻잔을 들어 코끝으로 향을 느끼더니 소리 없이 시음한다. 지정석이니 무언갈 타거나 조작하려면 충분히 손을 쓸 수 있을 것이다. 그녀가 차를 넘기고 나서 뒤늦게 따라 찻잔을 들어 마셨다. 무슨 차인진 모르겠지만 쌉쌀하면서 끝 맛엔 과일 향이 입에 남는 신비로운 맛이었다.

“리헤로스도 들어요.”

“천천히 마시겠습니다.”

“혹시 이상한 거라도 탔을까 의심하는 거 아니죠? 말씀드렸죠. 이드랑제의 이름을 걸고 권유한 티타임이에요.”

“….”

“정 의심되면 잔을 바꾸죠. 험난한 모험을 해오신 분들이니 의심이 많아질 수밖에 없겠죠.”

“아닙니다. 잘 마시겠습니다.”

말 잘 듣는 리헤로스는 권유에 못 이기고 차를 입에 머금었다. 다행히도 그가 쓰러지거나 이상 반응을 보이진 않았다.

“어때요. 괜찮죠?”

“네, 아주 맛있는 차네요. 잠깐이지만 백작님을 의심한 것은 맞습니다. 죄송합니다.”

“어머, 솔직도 하셔라.”

‘바보, 그거까진 굳이 얘기 안 해도 될 텐데…!’

그는 너무나도 솔직하고 거짓말을 못 하는 것이 장점이지만 이럴 땐 단점으로 작용하는 것 같다. 누가 의심했다고 사실대로 말하나, 보통 입맛이 없어서 안 먹었다고 하면 될 것을.

“생각해 봤는데. 당신을 포섭하려는 방식이 옳지 않았고 그 과정을 겪은 리헤로스는 불쾌하고 의심을 할 수밖에 없겠죠. 저의 태도의 문제가 커요. 미안해요.”

화낼 거라 생각했는데 귀족이 작위도 없는 평민에게 사과라니.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저택에 오기 전의 대화에서도 느껴졌다만 상당히 격 없는 사람인데 이 정도일 줄 몰랐다.

“아닙니다. 백작님께서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오해가 풀렸습니다.”

“아하하.”

─띠롱

[시스템]

대상 ‘리헤로스’에 대한 NPC ‘스피나’의 우호도가 변경되었습니다.

(54 -> 61)

그때, 처음으로 소셜 스탯과 관련된 시스템 알림이 노출되었다. 이 게임의 핵심 시스템이라 할 수도 있는 건데 다른 NPC들의 소셜 스탯은 여태껏 크게 변동되지 않았나 보다.

‘첫인상이랑 이야기를 나누면서 바뀌는 호감도가 크게 다르지 않아서였을까.’

그런데 스피나는 리헤로스가 사과받아주자 급격하게 스탯이 상승했다. 아마 이런 솔직한 스타일의 소통이 잘 맞는 NPC였나 보다.

“귀족이어도 자만하지 않고 살기로 다짐했는데 생각보다 어려운 것 같아요.”

“백작님은 그것을 제게 사과하는 것으로 보여주셨으니 이해합니다.”

“…저는 리헤로스가 정말 좋아요.”

왜인지 모르겠지만 스피나의 말에 일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러니 당신과 좋은 관계로 남고 싶어서 이렇게 사과하는 거예요.”

“백작님의 뜻이 그러시다면, 저희도 같은 마음입니다.”

“정말요? 기뻐라.”

놀랐던 게 무색할 정도로 훈훈한 마무리였다. 이드랑제는 군수산업을 주도하는 가문인 것 같았고, 이 세계에서 그에게 도움이 될만한 사람이라면 모두 아군으로 만드는 것이 적절했다.

‘만약 칼리고가 용사였다면 이런 관계들은 상상도 못 했겠지. 나도 그런 인성의 용사라면 돕지 않았을 거고.’

생글생글 미소를 짓던 그녀는 찻잔을 내려놓더니 조금은 비장한 얼굴을 하며 우리를 곧게 응시했다.

“리헤로스, 아크리스. 제가 서포트 할게요.”

“네?”

“두 사람의 여정에서 필요한 게 있으면 전적으로 지원해 드릴게요. 저는 사업가이고 당신들에게 투자하는 거죠.”

“말씀은 정말 감사합니다만, 저희에게 투자해도 되돌려드릴 수 있는 게 없습니다.”

“왜 없어요? 훗날 많은 사람의 우상이 되었을 때, 이드랑제의 원조를 받아 훌륭한 사람이 되었다고 이야기만 해주어도 우리 가문의 위상이 높아질 텐데요.”

“과분할 정도로 감사한데요.”

“그러니! 제가 여러분을 돕는 만큼 힘내서 명성을 떨쳐주길 바라요. 필요한 게 있으면 말씀해 주시고요.”

“…그렇다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믿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대체 우호도가 얼마나 높기에 이 정도로 적극적으로 지지해 주는 거지?’

설마, 시스템적으로 결혼이 가능할 수준의 우호도가 올랐을까. 원래 같으면 뒷전일 NPC 정보를 오랜만에 살펴보았다.

[NPC 정보]

이름: 스피나 델 이드랑제

성별: 여성

나이: 24세

작위: 백작

…더보기

[소셜 스탯]

우호도: 친밀함(61)

‘61 정도가 친밀함을 느낄 수준이구나.’

사실상 ‘결혼할 수 있는 시스템’이란 건 개발사인 프렉탈 측에서 홍보했던 영상에서나 봤지, 정확히 어떤 방식인지는 전혀 몰랐다. 생각보다 세부 수치를 가지고 있어 흥미로웠다. 여태껏 지나쳐왔던 NPC도 확인해 볼 걸 싶었다.

“사실… 아까 두 사람 얼굴이 죽상이라 말을 안 걸 수 없었거든요. 무슨 일 있었나요?”

“아… 그래서였군요.”

“여러분에게 투자하는 사람으로서 알아야겠어요. 현재 거처가 불편한가요? 아니면 금전적으로 힘든가요?”

“그게….”

“리헤로스, 그냥 말씀드려. 없는 말을 지어내는 것도 아니고 괜찮을 것 같은데.”

“그래도 될까?”

“후후, 어서요.”

리헤로스는 아주 정중하고 예의 있는 단어를 사용하여 칼리고의 만행을 모두 객관적인 기준으로 설명하였다. 나였으면 체면이고 뭐고 욕부터 박고 시작했을 것이다.

“칼리고 경이 그랬단 말이에요?”

“본의 아니게 흉보는 것처럼 말씀을 드렸네요.”

“아니에요. 그이기 때문에 특별한 사건이 아니기도 하네요. 이 나라에서 경에게 한 번이라도 말을 걸어본 후에 그를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걸요.”

“그 정도… 인가요?”

“그렇죠. 그를 흠모하는 영애들도 화려한 껍데기만 좋아하는 거지 누가 그 알맹이를 좋아하겠어요? 미치지 않고서야.”

“풉…! 콜록… 콜록….”

“크리스 괜찮아?”

귀족의 품위는 갖다 버리고 화끈한 어휘를 구사하는 사람이었다,

“후후후, 칼리고 경의 자만과 오만은 언젠가 자신을 스스로 갉아먹을 거예요.”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맞아, 그럴 것 같아요.”

“그런 의미에서 칼리고가 리헤로스를 시기하는 거겠지요.”

“저를요?”

“검술 실력이야 갈고닦으면 언제든 그를 따라잡을 수 있겠지만, 리헤로스의 인품은 따라 하려야 따라 할 수 없죠.”

맞는 말이다.

“그리고 그 인품은 많은 사람이 리헤로스를 따르게 될 아주 중요한 열쇠라고 생각해요. 이 세상 모든 것이 리헤로스를 도우려 하겠죠.”

지당하신 말씀이다. 마왕인 나도 그를 돕고 있으니 말이다.

“녹틸이라는 저명한 마법사께서도 백작님과 비슷한 얘길 하셨는데, 신기하네요.”

“그랬어요? 그러니 그 마음을 잃지 말아요. 돈이면 다 되는 줄 아는 건방진 귀족 아가씨처럼 보였을 저의 무례에도 점잖게 대해주는 용사라니… 정말 탐나는 사람이에요.”

“별말씀을요. 그 정도는 아닙니다.”

그녀의 말대로 리헤로스는 어디에 내놓아도 자랑할 만한 사람이었다. 얼굴이나 능력, 성품까지 완벽함. 그 자체이니 말이다.

칼리고의 험담만 몇 시간을 걸쳐서 했는지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사용인들이 방안 곳곳 샹들리에와 램프에 불을 붙이고 있으니 뒤늦게 해가 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벌써 시간이! 두 분, 괜찮으시면 우리 저택에서 편히 쉬다 가세요.”

“그래도 될까요?”

“그럼요. 비즈니스 파트너이자 친구가 된 기념이라고 해둘게요.”

이런 초호화 저택에서 머물 기회는 흔치 않으니 그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나의 신호를 알아챈 리헤로스는 끄덕였다.

“그럼 실례를 무릅쓰고 신세 지겠습니다.”

“시릴, 손님을 안내해 드려.”

“백작님, 죄송합니다만 현재 게스트룸은 한 군데밖에 사용이 불가합니다.”

“뭐? 나 없는 동안 무슨 일 있었어?”

“작은 주인님의 물건을 잠시 치워두신다고 그렇게 됐습니다.”

“방이 몇 갠데 그걸 다 못써?”

“아무래도 갑옷을 모으시는 게 취미다 보니까 부피가 큽니다.”

“하아… 어쩌죠? 두 분, 방 한 개로 괜찮겠어요?”

냉큼 수락해놓고 방 부족하다고 그냥 갈게요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어색하게 웃었다.

“하하… 괜찮습니다.”

“정말 미안해요. 기껏 초대해놓고 대접이 말이 아니네요.”

“너무 마음 쓰지 마세요. 하룻밤의 식객일 뿐인걸요.”

“후후, 식객이라뇨. 저의 소중한 비즈니스 파트너죠.”

우리는 우선 휴식 취하길 원했기에 곧장 방으로 안내받았다. 하녀장 시릴은 높낮이가 없는 건조한 목소리로 안내해 주었다. 사회생활하는 직장인 그 자체였다.

“편히 쉬시고 필요하신 게 있으면 말씀해 주세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 와….”

인사의 끝맺음도 잊을 정도로 감탄이 나오는 방이었다.

“녹틸 저택은 쨉도 안되네. 백작저가 좋긴 좋다.”

“다 들리겠어.”

“뭐 어때. 칭찬인데.”

그냥 킹사이즈도 아닌 킹 오버사이즈의 침대에 누워보는 게 소원이었는데 그것이 눈앞에 있다. 곧장 침대의 측면에서 몸을 던져 누웠다. 이불은 몸에 감기는 감촉이 부드러웠고 가벼운 솜으로 가득 차 있어 몸이 푹 파묻힐 정도였다.

“여관 침대도 충분히 좋다고 생각했는데, 이건…… 진짜 좋다.”

“그 정도야?”

“너도 누워보면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 걸? 빨리 와서 누워봐. 빨리.”

리헤로스는 조심스레 내 옆에 눕는다. 매트리스의 흔들림은 거의 없고 이불솜이 푸수숙 하고 바람 빠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의 반응이 궁금해 지켜보고 있었고 부풀어 올랐던 이불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무방비한 상태에서 내 쪽을 보고 있는 리헤로스가 드러나자 화들짝 놀랐다.

“와앗….”

“아….”

“….”

“…지, 진짜네. 피로가 풀리는 느낌이야.”

“그, 그렇지? 아… 피곤하다. 일찍 누워야지, 얼른 옷 갈아입어….”

‘미친… 방금 대사 이상하게 들릴 것 같은데.’

단순히 빨리 눕고 싶으니 너도 어서 쉬라는 말을 전달했을 뿐인데 묘했다.

“아, 아… 응, 지금 옷은 매우 지저분하니까….”

“그래… 그럼… 나 먼저 씻고 나올….”

‘개 미친… 이건 더 이상하잖아.’

우리는 말없이 침대 위에 앉아만 있었다. 처음 모텔에 온 커플인 마냥. 생각해 보니 무슨 현실에 있을 법한 로판 컨셉의 테마 모텔에 온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어… 먼저 씻을래?”

“……어….”

그냥 길게 말하지 않기로 했다. 무슨 말을 해도 분위기만 어색하게 만들 뿐이었다.

손님용 파자마를 들고 게스트룸에 달린 욕실 안으로 들어섰다. 욕실도 저택의 분위기에 걸맞게 휘황찬란했다. 그보다도 열받게 목욕용 소금이 엄청 달콤한 향기를 풍긴다는 것이다.

‘젠장… 첫날밤 목욕재계하는 것 같잖아…!’

그렇다고 땀내 섞인 퀴퀴한 물 비린내를 풍기며 잠자리에 들 순 없으니 땀에 젖은 몸을 성심성의껏 씻어냈다. 젖은 머리를 툭툭 털어내고 나오니 리헤로스가 어물대며 시선을 회피한다.

‘제발 그렇게 어색해하지 말아 주라. 나도 안 그래도 노력 중이다.’

“…그럼…….”

“응…….”

대충 욕실이 비었으니 네가 씻을 차례라는 말이었고 리헤로스는 알았다고 대답한 것이다. 나는 그를 보내놓고 침대에 먼저 누웠다. 구름 위에 누웠다는 표현이 걸맞은 안락함이었다.

‘이대로 잘 수만 있으면 천국이 따로 없겠다.’

그것도 리헤로스가 나오기 전에 자고 싶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내가 잠드는 것보다 리헤로스가 욕실에서 나오는 것이 빨랐고, 물기에 젖은 그와 같은 침대에 나란히 눕는 상황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잠깐.”

“어, 어…?”

“침대 중앙. 절대 넘어오지 마.”

“…….”

“…….”

“응…… 알겠어.”

내가 이 침대를 포기하기에도 아깝고, 그렇다고 리헤로스를 쫓아내면 쓰레기가 따로 없으니 중간 합의 지점을 찾은 것이다.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30)============================================================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