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
그의 짧은 문장에 심장이 미칠 듯이 뛰었다. 푸르고 맑은 눈은 꼭 바다 같아서 순식간에 그 안으로 빨려 들어가 잠수병이 온 것처럼 온몸이 저릿저릿해져 왔다.
‘의미 그대로 받아들여도 되는 거야?’
가슴에서부터 시작된 간질거림이 목까지 타고 올라온다. 기분 좋은 감각이 아닌 불안과 초조의 기포가 톡톡톡 터지며 간질이는 것에 가까웠다. 좀처럼 진정되지 않고 날뛰는 호흡을 달래기 위해 크게 심호흡하다가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무슨 말을 하나 했다.”
“…….”
리헤로스의 말없이 미소 짓고 있는 모습을 다시금 피하고 싶었다. 안 된다 모처럼 자리가 생겼는데 오늘만큼은 피하지 말고 이야기해야 한다.
“나도… 리헤로스가 좋아. 넌…”
뭍에 올라온 물고기처럼 한참 뻐끔대기만 했다. 문장의 끝맺음이 튀어 나가지 못하도록 누군가 잡아당기는 것 같았다. 하지만 꾸역꾸역 토해내듯이 말을 이었다.
“-정말 좋은 친구야.”
“아하하, 진짜? 기쁘다.”
그는 따뜻한 미소를 보였다. 분명 벼르고 벼르던 사과와 마음 표현을 끝냈음에도 후련하지 않았다. 어째서 저 미소만 보면 죄를 짓는 것 같을까. 한편으로는 한 점 아쉬움 없는 대답이 돌아오니 약간은 실망스럽기까지 했다.
‘그럼 리헤로스가 뭐라고 해주길 바란 건데…. 그런 뜻이 아니라고, 고백이라고 말해주길 바라?’
번번이 리헤로스의 말에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가 짜게 식었다가 북 치고 장구 치고 한다. 누가 보면 도끼 병 말기라고 손가락질할 수준이었다.
생각을 곱씹고 있던 중 그가 팔을 벌린다.
“네가 처음으로 날 친구로 인정해 준 날이잖아.”
“어어… 그런데?”
“한 번만 안아보자.”
“다, 다 큰 남자들끼리 소름 돋게.”
“왜, 친구니까 이 정도는 할 수 있는 거 아니야?”
“뭐… 소원이라면 해주겠지만.”
“소원이야.”
“….”
잔을 발코니 난간에 내려놓고 그에게 다가가 그의 몸을 안았다. 그러자 리헤로스도 내 몸을 감싸 안아 그의 몸이 바짝 다가왔다.
“네 생각을 말해줘서 고마워.”
“…낯 뜨거워진다. 그런 말 마.”
“그래도 고마워. 아무리 내가 널 이해한대도 네가 말해주는 게 훨씬 기뻐.”
“……그래. 신경 쓰이게 해서 미안해.”
미안하다는 맺음에 그는 더 꼭 당겨 안는다.
“미안하다고 말하지는 마.”
“으아악… 아, 알았어. 알았어. 이제 놔주라.”
그의 등을 탭아웃 하듯이 두드리고 나서야 천천히 놓아주었다.
“그럼 이제 많이 먹었으니까 산책할래? 저택 내부 구경해도 된다고 했던 것 같은데, 이김에 둘러보면 어떨까 하고.”
“음… 그럴까?”
발을 맞춰 걸으며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리헤로스는 와인 잔을 두고 왔지만 나는 구태여 비싼 술을 잔뜩 즐기겠다며 한 잔 가득 채워와선 홀짝이며 걸었다.
“크리스 너무 많이 마신 거 아니야?”
“전혀. 이 정도 마신 걸로는 많이 마셨다고 하면 안 되지.”
“술 엄청 세구나.”
“멋있으면 형님으로 모시던가.”
“하하하.”
“2층은 불을 안 켜놨네.”
“근데 창이 커서 달빛 덕에 웬만한 건 다 보이는 것 같아.”
2층의 홀같이 탁 트인 곳에서 그랜드 피아노를 발견한다. 보통의 그랜드 피아노는 검은색이지만 이곳은 새하얀 색상이었다. 창 너머의 달빛이 반사되어 더욱 눈부신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피아노다.”
“규모가 큰 저택이라 이렇게 큰 피아노도 들여놓는구나.”
“리헤로스, 피아노 칠 줄 알아?”
와인을 목구멍 안에 쏟아 넣고 피아노 위에 빈 잔을 올려두었다. 자연스럽게 피아노 의자에 앉아 리헤로스를 올려다보았다.
─딩, 딩, 딩
피아노만 보면 본능적으로 학창 시절에 배운 젓가락 행진곡을 치는 K-시민이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리헤로스는 내 왼쪽에 앉아 건반에 손을 올렸다.
─♬
내 연주에 맞춰 왼손으로 반주를 넣기 시작했다.
“오오, 잘 치는데?”
“이 정도는 가볍게 치지.”
함께 젓가락 행진곡을 모두 완주하고 나서 완벽한 합이 만들어 낸 쾌감에 하이파이브를 청했다.
“한 두 번 쳐본 솜씨가 아닌데?”
“나만 그런가. 뭐, 네가 더 잘하는데.”
“난 이것밖에 못 쳐. 내 유일무이한 필살기란 말이야. 넌 당연하게 다른 것도 칠 줄 알겠지? 느낌이 딱 오는데.”
“아, 아니야, 나도 많이 못 쳐.”
“많이… 라는 건 그래도 더 칠 수 있는 게 있다는 거네. 기만하기 있냐!”
“아하하, 칠 수 있는 게 있긴 한데….”
“쳐 봐 쳐 봐, 궁금해.”
보채는 나를 보며 리헤로스는 머뭇대는 듯하더니 다시 건반에 손을 올렸다. 예술에 문외한이라 무슨 곡인지 알 수 없었지만, 느리고 잔잔한 음색이 붕 떠 있던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어주었다. 굳은살이 박이고 상처가 많은 거친 손은 흠집 하나 없는 하얀 건반과 다소 상반되는 느낌이었는데, 그렇다고 한들 손가락은 길고 곧아서 피아노 연주에 적합한 생김새였다.
“오… 잘 친다.”
“사실 몇 번 틀렸어. 부끄럽네.”
“틀렸다고? 거짓말. 그런 거 안 느껴질 정도로 잘 연주했는데.”
“말만이라도 고마워.”
“이런 말 하는 거 진짜 싫은데… 너는 못 하는 게 뭐야?”
“못하는 거야 찾으면 많을걸. 네가 좋게 봐주니까 그렇지.”
“흐응, 찾으면- 이라고?”
“….”
“네 흠은 찾지 않으면 안 보일 정도다?”
“너무해. 오늘따라 심하게 놀리지 않아?”
“푸훕.”
우리는 서로 얼굴을 마주 보며 낙엽만 굴러도 웃음이 터지는 아이처럼 웃었다. 왠지 리헤로스라면 훌륭한 연주를 선보이며 뭇사람을 설레게 만드는 유죄 남일 것 같은데, 그렇다고 해도 그가 카사노바 짓을 하고 다닐 것 같진 않아 순수한 궁금증이 들었다.
“누구한테 피아노 연주해 준 적 있어?”
“음… 들려주는 건 네가 처음이고, 혼자 연습만 했어.”
“이렇게 잘 치는데 왜 내가 처음이야. 피아니스트 되려고 맹연습한 거? 아니면 완벽주의자?”
“그냥, 누굴 들려주기 위한 연주라기보단 피아노를 치면 아무 생각 없어져서 좋더라.”
“스트레스 해소용?”
“그런 편이지. 겸사겸사 듣기 좋은 멜로디이면 기분이 더 차분해지니까 시작하게 됐어.”
“독특하네. 검쓰는 사람들은 스트레스받으면 목검으로 나무나 두들길 것 같은데.”
“그것도 그렇지만, 건반 두드리는 것도 못지않게 속 시원해.”
“뭔지 알 것 같다.”
알 것 같다곤 했지만 사실 게임으로 스트레스 푸는 나로선 이해는 못 했다. 그는 흡연은 당연히 하지 않고 음주도 웬만해선 안 하는 바른 청년이어서일까. 건전한 스트레스 해소법에 역시 이 남자는 남다르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 곡… 치는 법 가르쳐줄까? 어려운 거 아니니까 너도 한 번 쳐보면 어떨까 해서.”
“어려운 게 아니라니 엄청 어려워 보이거든?”
“이 곡은 나도 피아노 시작한 지 얼마 안 됐을 때 했는걸.”
“내가 칠 수 있으려나 모르겠다…. 잊지 마, 내 최대 경력이 젓가락 행진곡이야.”
“하하하, 당연하지. 나도 했으니까 너도 금방 칠 수 있을 거야. 크리스는 똑똑하니까.”
“똑똑하다니 고맙다만 그거랑 상관이 있는 거야?”
“그럼.”
그는 내리고 있던 나의 손목을 잡아 건반에 올려주었다. 그리고 두 옥타브 아래의 같은 위치에 제 손을 올리고 천천히 하나씩 건반을 치기 시작했다. 더듬더듬 그의 손가락을 눈으로 좇기에도 바쁜 초보였지만, 그는 내가 틀리더라도 성급하지 않았으며 차분히 낮은 톤으로 조곤조곤 설명해 주었다. 시간이 흐르는 게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몰입하였다.
“리헤로스는 선생님 해도 잘 어울릴 거야.”
“그래? 은퇴하면 선생님이나 할까.”
그의 말에 불현듯 나의 위치를 상기하게 되었다.
‘그가 은퇴하는 미래의 모습은 보지 못하겠구나.’
지금의 상황이 너무 즐거워 미처 잊고 있었다. 내가 그에게 투덜댔던 것도, 그에게 마음을 내주지 않으려고 했던 것도 그와 나는 다른 세계의 존재이며 하나가 파멸해야 하는 것임을 완전히 망각하고 있었다.
‘어쩌다 이렇게 됐지. 이러면 안 되는데.’
“여기선 이렇게… 크리스?”
“어, 어?”
“왜 그래? 갑자기 심각한 표정을 짓고.”
“……아무것도 아니야. 어떻게 쳐야 한다고?”
“응, 이 부분은 이렇게 엄지손가락을 안쪽으로….”
내가 정신이 팔려 손가락이 느려지자 손등 위로 그의 손이 올라왔다.
“많이 어려워? 이렇게, 라. 라. 미. 레….”
“…….”
거칠고 상처가 많지만 길게 곧은 그의 손가락은 어떤 인생을 살아왔는지 한눈에 증명해 주는 ‘삶’ 그 자체였다. 그러면서 그의 단단한 손끝이 내 손톱 위를 천천히 눌러올 때마다 본분을 새기게 만드는 것만 같았다.
‘그는 용사야. 나는 마왕이고. 이 손은 나를 해할 손이야.’
가슴 한쪽이 찌릿해 왔고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던 멜로디는 나의 장송곡처럼 구슬프게 들렸다.
느리고 천천히 완곡을 치고 나서야 그의 손이 내 손등 위에서 떨어졌다.
“별로 어렵지 않지?”
“…응, 네가 가르쳐주니까. 어떤 느낌인지 알겠어.”
내 말이 맞았지, 하며 씩 웃는 리헤로스. 어떤 예고나 물음 없이 그의 어깨에 머릴 기댔다. 이제 별다른 의미 부여 없이 ‘친구’이니까 이런 행동도 서슴없어졌다는 점 하나는 편했다.
“피곤해?”
“…….”
“그럼 마차로 돌아갈까.”
“리헤로스.”
“응?”
“우리… 친구 맞지?”
“…응.”
“……그래.”
첫 시작은 내 마음 편해지자고 한 사과였지만, 결과적으론 더 불편해졌다. 이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의 착한 마음에 흙을 뿌리는 것이 내심 신경이 쓰였던 모양이다.
‘이젠 나도 모르겠다.’
관계의 진전이 스토리의 진전보다 빠르게 진행되어버렸기에 훗날의 아픔은 미래의 나에게 맡기기로 했다. 처음만 해도 그를 이용해 스토리를 진행하게 하는 것이 중요했건만 이제는 그를 실제 사람처럼 대하고 있다. 아니, 오히려 실제 사람보다 더 마음을 주고 있다.
“여기 계셨군요. 리헤로스, 아크리스.”
“보좌관님.”
“백작님이 이만 저택으로 돌아가자고 하십니다.”
“아아, 네. 금방 갈게요.”
“가야겠네….”
“응, 돌아가자 아크리스.”
‘돌아가자니… 나한테 정말 돌아갈 곳이 있나?’
리헤로스가 사용하는 단어들을 보면 내 처지를 망각할 만도 하다. 자꾸만 내가 어딘가에 속한 사람이라 여기게 되어버리니 말이다. 비참한 기분을 느낄 새도 없이 우리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 마차에 올라탔다. 모임에 올 때까지만 해도 들떠있어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눴지만 돌아가는 길은 싸운 것도 아님에도 무겁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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