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다행히도 멀지 않은 곳에서 우물을 발견해 텅 비었던 리헤로스의 수통을 채웠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다 마시는 건 경우가 없었어.”
“하하하, 화났어?”
“화는 아니고.”
“자, 다 채웠다. 그 사람 덕분에 더 시원한 물을 마시게 됐네.”
“그래, 네 장점이 긍정적이라는 걸 또 상기시켜주는구나.”
미련 곰퉁이 같으니라고. 툴툴거리고 있는데 어디선가 소란스러운 수풀의 바스락대는 소리와 비명이 동시에 들려왔다.
“히, 으아아악!”
“비명?”
“크리스, 저쪽에서 들려.”
남자는 우리를 발견하고선 제 발에 걸려 넘어지다가 일어나길 반복하며 다가왔다.
“흐아아!”
“아니… 대체 무슨 일이죠?”
“살려주세요. 용사님!”
“진정하세요. 왜 이런 곳에 혼자 계신 겁니까?”
“그, 그게 젯, 제가…. 마차를, 여기로… 그니까! 다른 마을에서 왔거든요!”
“잠깐잠깐,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어. 숨 좀 고르고 얘기해.”
다른 게임의 NPC들은 아무리 당황해도 잘만 말하는데 알리엔토 사가는 귀찮을 정도로 쓸데없는 부분에서 사실적이다. 리헤로스는 기껏 채운 수통을 넘겨주었다. 일전의 떠돌이 상인과 달리 목만 가볍게 축이고 넘겨줬다는 점에선 양심적이었다.
“가, 감사합니다….”
“무슨 일이 있으셨던 건가요? 이렇게 겁에 질려 도망치고 계셨던 이유가 뭔가요.”
“그게… 저는 다른 마을에서 라이오펠로 납품하는 식품 도매상인데요. 오는 길에 습격당했습니다.”
“습격이요?”
“마군인가?”
“습격자들의 인상착의가 어떻게 되나요?”
“그… 두 발로 걷는 곰이었던 것 같아요. 근데 대부분 키가 제 가슴께에 올 정도였어요. 썩은 내가 진동했고요.”
“마군이 맞는 것 같아. 얼마 전에 만난 마군도 돼지의 형상을 한 아인종이었던거 기억나?”
“지난 전투에서 살아남은, 잔존한 마군일까? 새로 발견된 마군이 벌써 이곳까지 진군했을 리는 없잖아.”
“아마 네 말대로 패잔병일 확률이 높지.”
“얼마나 떨어진 곳에서 습격당하셨죠?”
“그,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워낙 정신없이 도망쳐 온지라….”
“알겠습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앞으로 그런 불상사는 두 번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감사합니다. 용사님!”
“우선은… 왔던 길로 돌아가는 건 무리일 것 같고, 수도와 가까우니 그쪽으로 가시는 게 좋겠습니다.”
“다리 풀려서 걷지 못할 것 같은데, 이 말 타고 가.”
“정말 친절하시군요! 감사합니다!”
내가 타고 왔던 검은 말의 고삐를 건네었다. 남자는 고삐를 받아 쥐고선 감사하다며 허리를 연신 숙여댔다. 조심스레 말에 올라타고 떠나기 직전까지도 감사하다는 말 입에서 떠나지 않았다.
‘살면서 이렇게 감사 받을 일이 없어서 그런지 기분이 나쁘지 않네.’
“크리스, 저 흑마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어?”
“그건 어떻게 알았어?”
“그냥, 네 표정 보면 대충은 알아.”
“…그런 걸 일일이 보고 있냐?”
“보게 되는 걸 어떡해.”
‘미치겠네.’
“크흠, 하여튼… 마군이 남아있으면 큰일이니까 얼른 가보자고.”
“알겠어. 크리스, 말에 타.”
“내가? 너는?”
“타기 싫어?”
“아니… 싫은 건 아닌데, 너는 어쩌려고.”
사실 뚜벅뚜벅 걷기는 싫었기에 권유를 받자마자 냉큼 올라탔다. 나보단 피로를 쉽게 느끼는 리헤로스가 타는 게 편하지 않을지, 사실 나는 걸어도 되는데 하는 마음이 있긴 했다. 그를 흘끗 쳐다보자 씩 웃는다.
“내가 걱정돼?”
“…누가 걱정된대.”
“그렇게 걱정된다면 나도 탈게.”
“어?”
리헤로스는 안장 꼬리 부분의 손잡이를 잡고 내 뒤에 가볍게 올라탔다. 그의 행동에 내가 내려야 하나 허둥대고 있었는데 그의 양 팔이 내 옆구리에 쑥 들어오더니 고삐를 쥔다. 그의 팔 사이에 갇힌 모양새가 됐다.
“괜찮지?”
“……엄밀히 따지면 내가 얻어 타는 거니까….”
“좋아, 그럼 내가 운전할 게 꽉 잡아.”
안장이 가운데로 오목한 구조여서 그런지 점점 그의 몸이 앞으로 쏠리는 바람에 몸을 바짝 밀착하게 되었다. 그의 탄탄한 가슴이 등에 닿았고 숨결이 뒷덜미에 닿아 간지러웠다. 후드를 끌어다 머리에 뒤집어썼다.
‘미치겠네!’
성인 남성 둘이 타고 있으니 말이 속도를 내진 못했다. 그래서인지 목적지까지 가는 길이 지나치게 길게 느껴졌다.
“끙….”
“크리스, 어디 불편해?”
“으잇, 귀에 대고 말하지 마!”
“미안.”
“아오! 말하지 말라고!”
후드를 뒤집어쓰니 리헤로스가 귓가에 가까이 다가와 속삭이듯이 말했다. 귓바퀴에서부터 고막 깊숙이까지 간지러워지는 바람에 팔꿈치로 그의 배를 쿡쿡 찔렀다.
“아 진짜…!”
“쉿.”
“……어…… 같아….”
“…아마…… 왕의……….”
어디선가 여러 명이 속삭이는 소리가 동시다발적으로 들려온다. 흡사 영화에서 악마에게 홀렸을 때 들리는 환청 효과음 같은 소리를 내고 있다. 연령대도 불분명한 중성적인 목소리에 무슨 대화인지 알 수도 없고, 어디에서 들려오는지도 알 수 없어 제자리에서 두리번거리기만 했다.
“푸르릉.”
“워워, 진정해.”
“지금 들리는 거, 목소리 맞지?”
“응. 마군인가?”
“…이리 와….”
“……이리로 와….”
“기분 나쁜 소리네. 누구한테 말하는 거야?”
“누구냐! 모습을 드러내라!”
“…….”
리헤로스의 고함에 속삭이던 목소리는 사라지고 숲은 금세 잠잠해졌다.
“사라졌나? 우선 움직이자.”
“응, 그래야겠어.”
고삐를 흔들고 얼마나 달렸을까, 눈앞에서 무언가 빠르게 솟구치는 것이 보였다.
“히히힝!”
“덫이야!”
“앗, 윽!”
그것의 정체는 덫으로 설치된 그물이었고, 다행히 걸리지 않았지만 깜짝 놀란 말이 앞발을 들어 올리며 등 위에 올라타 있던 우릴 모두 떨어트렸다. 리헤로스가 나를 끌어안아 감싸주었기에 머리부터 떨어지는 불상사는 없었다.
─딩
[시스템]
외부의 강한 충격으로 인한 [쇼크] 상태.
행동이 제한됩니다.
“크윽….”
크게 아픈 건 아니지만 낙하의 충격으로 상태 이상이 발동해 옴짝달싹할 수 없게 되었다. 내 머릴 감싸 안고 있던 리헤로스의 팔이 스르륵 풀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가 정신 차린 걸까.
“리헤로스?”
바닥에 납작 엎드린 상태로 고개만 쳐들어 그의 행방을 찾았다.
“큭, 하…! 악…!”
누군가 리헤로스의 목에 밧줄을 감고 질질 끌고 가고 있었다. 키가 작은 곰들이었다.
“안 돼! 리헤로스! 이 새끼들…! 죽여버리겠어!”
─빡!
분명 나는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시야가 바닥으로 툭 떨어진다. 통증은 느껴지지 않았지만, 의식이 점점 멀어진다. 내 주변으로 그림자가 몰려들었다.
“…아니야. 아닌 것 같아.”
“아무것도 안 가지고 있는데.”
“무서워….”
나를 둘러싼 속삭임을 마지막으로 정신을 잃었다.
…
“자현아.”
오랜만에 듣는 내 이름. 게다가 익숙하고 반가운 목소리였다.
“유자현 일어나.”
눈을 서서히 뜨니 나는 자동차의 조수석 시트에서 몸을 기댄 채였다. 목소리의 주인은 미소를 머금은 상태로 전방을 주시하고 있다.
“진서… 형?”
“왜 그렇게 놀라? 곧 도착이니까 일어나.”
“하, 하하… 여기가… 현실이지?”
“무슨 소리야? 꿈꿨어?”
“하… 으응 이상한 꿈을 꿨어. 근데 우리 어디 가? 집 가는 건가?”
“…….”
“형? 박진서?”
대꾸 없는 그를 재촉하듯 불렀다. 그의 표정엔 조금 전까지 존재했던 온기가 없었다. 이 공간 모든 것이 잿빛으로 변해있었다.
“자현아.”
“어?”
“우리 헤어지자.”
“뭐…?”
“나… 결혼하려고. 알잖아, 우리 부모님은 나 이러고 사는지 모르는 거. 얼른 가정 꾸려서 부모님께 손주 안겨드려야지.”
“결혼이라니? 나… 너무 갑작스러워. 왜 그래? 내가 혹시 뭐 잘못….”
“아니야 자현아. 그냥… 이해해 주라.”
“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그럼 나는?”
“…너는 생활력이 강해서 혼자 잘 살아갈 수 있어.”
“그 말이 아니잖아! 너한테 난… 그 정도밖에 안 됐어? 그냥 갈아치우는 부품이야?”
“유자현!”
“….”
“하아… 넌 그게 문제야. 나한테 지나치게 의존한다고.”
“뭐?”
“내가 네 인생을 책임져 줄 거로 생각했어? 네 인생은 네스스로 책임을 져야지. 하긴,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는데, 누굴 사랑할 수나 있어? 넌 자존감이 너무 낮아. 피곤하다고.”
“…너 박진서 맞아?”
“X발… 짜증 나게 질척거려.”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가 가죽 소재의 핸들이 부드득 소리를 낸다. 밀폐된 공간, 그가 쥐고 있는 핸들, 모든 것들이 그의 주도권 아래에 있었다.
“너는 가족이 없으니까 내 말을 이해 못 할 거야. 나는 보통의 삶으로 돌아가려는 것뿐이야.”
“가족까지… 건드리기 있어?”
“아니… 하, 말이 그렇다는 거지.”
“…꼭 이렇게까지 나한테 상처 줘야 해?”
“안 그러면 구질 대면서 매달릴 거잖아. 징징대는 거 짜증 나니까 이렇게라도 해야지. 그냥 내가 나쁜 놈 할게. 그니까 헤어지자고!”
내가 그에게 스트레스 주는 존재였을까? 나는 정말 그를 사랑했는데, 그는 나를 참아주고 있었나? 내가 알던 그 사람이 맞나? 눈물을 주체할 수 없어 고개를 푹 떨궜다. 이 모습마저 보여주는 것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아서인데 그는 나를 보고 있지 않지만 금세 알아챈다.
“하아… 울지 말고. 내가 진짜 나쁜 사람 된 것 같잖아. 이별이 대수야? 사람들은 다 이별해. 다 이러고 산다고.”
“…….”
“후우- 됐다. 하여튼 복수한답시고 말 옮기지 말고… 아니, 그냥 안전하게 네가 퇴사해. 아직 어리고 신입이니까 받아줄 곳도 많을 거 아니야. 나는 곧 과장 달잖아. 나갈 수가 없어.”
“…….”
“…부탁할게. 알았지?”
“…….”
“X발, 좋은 말로 하는데 왜 대답을 안 해. 이 업계에서 계속 일하고 싶으면 처신 잘하라고. 나 연줄 많은 거 알지?”
“하아아… 흑….”
“너 하나 매장하는 건 일도 아니야. 집 도착하면 곧바로 짐 싸서 나가줘. 신혼집으로 써야 해서 말이야.”
“윽… 흐으윽….”
‘나쁜 새끼.’
욕은 목 언저리에서 막혀 뱉지 못했다. 아직도 그에게 미련이 있는 걸까, 아니면 나에게 처한 상황이 불리해서일까. 그가 기회를 줄 때 좋게 헤어지는 게 나을까. 이런 생각은 어떻게든 그에게 화풀이라도, 복수라도 하고 싶었다.
그래서 입술을 벌려 하고 싶은 말을 토해내듯 질렀다.
…
“이 개X끼야!!”
욕지거리를 뱉음과 동시에 몸이 앞으로 튀어 나갔다. 눈을 뜨니 차 안이 아니었다. 거친 짚이 드문드문 깔린 마구간 같은 곳. 다소 어둡지만 먼지가 뿌옇게 떠 있는 것이 보였다.
“헉… 허억…… 꿈이었어?”
깊은 물속에 빠져있다가 빠져나온 사람처럼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깨고 나면 이미 한차례 겪었던 과거임을 아는데 꿈에선 늘 생생한 현실같이 느껴진다.
‘차라리 욕하지 못할 거면 실컷 때리기라도 했음 좋았을걸.’
이미 지나간 일을 후회하기보다 현재의 내 상태를 살피는 것이 우선이었다. 손이 마구간의 기둥 뒤로 묶여있었고 다리는 묶여있지 않았다. 얼굴엔 진흙이 묻은 것처럼 빳빳한 느낌이 들었다.
“뭐야 대체….”
─끼이익
“어, 일어났다. 대장! 일어났어!”
아직 눈앞이 흐릿해 제대로 보이진 않았지만, 흐릿한 인영이 마구간 안쪽을 들여다보다가 누군갈 부른다. 정신을 잃은 사이에 습격했던 놈들이 옮긴 모양이다.
“리헤… 리헤로스는….”
정신을 잃기 직전에 그가 밧줄에 목을 감겼던 상황이 떠올랐다. 그를 어서 찾지 않으면 큰일 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묶인 끈을 풀려 했는데 문이 다시 열렸다.
“성가시네! 먹을 것 하나 없이 물뿐이라니.”
곰의 형태를 한 작은 체구의 형체. 눈이 있을 곳은 안쪽에서 움푹 들어가서 까맣게 파인 것 같았는데 그 속에 눈동자가 희번덕희번덕하니 보였다.
“너는 뭐 하러 우리 영역에서 얼쩡거리고 있었던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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