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너희 영역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야?”
“말 그대로야. 우리 영역이라고.”
“…….”
“왜 갑자기 꿀 먹은 벙어리가 됐어! 죽고 싶지 않으면 대답해!”
‘잠깐, 이 녀석들은 마군이 아니다.’
마군의 상징인 파란 휘장도 없을뿐더러 마군이라면 아무리 나와 직접 대면한 적이 없더라도 같은 동족이고 지배자라는 것을 알아챘다. 그런데 이 ‘대장’이라고 불리는 녀석은 내가 누군지 알아차리지 못한다.
─디딩
[시스템]
[쇼크]상태가 풀리고 연계 상태 이상인 [시야 제한]이 10분간 유지됩니다.
초점이 안 맞는 카메라처럼 시야가 흐릿했다가 돌아왔다가 반복된다.
‘그러고 보니 곰 가죽도 살갗에 붙어있는 게 아니라 조금 떠 있는 것 같아.’
그런 어지러움 속에서도 집중해 본 결과론 그랬다. 변성기가 온 것처럼 목소리가 이상했고, 체구도 마군이라고 하기엔 작았다. 기존에 만났던 마군들은 졸개라고 할지언정 체구가 성인 남성의 평균 신장을 훌쩍 넘을 만큼 큼지막했다. 낙마의 충격으로 흐릿한 시야가 제대로 돌아오지 않으니 우선 회유하려 했다.
“……나와 같이 있던 금발 머리 남자는 어디에 있지?”
“알 거 없어! 대답이나 해. 무장한 상태로 여기에 뭐 하러 왔어!”
“…말할 기분 아니야.”
“허어? 왜!”
마군을 토벌하러 왔을 뿐 그들의 영역에 온 거창한 이유 같은 건 없지만, 우선은 리헤로스가 무사한지 확인이 필요하다. 그렇기에 정보를 주기 전에 내가 원하는 것을 먼저 요구하는 것이 바람직한 인질의 자세 아니겠는가.
“그 사람은 내게 소중한 사람이야. 무사한지 알기 전까진 내 입은 안 열려.”
“에이잇! 귀찮게!”
대장이라 불리는 곰은 바깥으로 얼굴을 내밀고서 누군가에게 데려와! 라고 소리 질렀고 다른 곰들이 판자 따위에 묶은 리헤로스를 낑낑대며 질질 끌고 왔다.
“리헤로스!”
“이거 봐. 무사하지? 그런데…”
녀석은 리헤로스의 가슴팍에 발을 올려 짓밟는 시늉을 했다. 머리에 피가 몰리는 것 같았다.
“바른 대로 말하지 않으면 이놈은 무사하지 못할 거야!”
“발 치워.”
“헹, 싫다면?”
“…그런데 무사한 거 맞아? 미동도 없잖아.”
“흐음, 그런가?”
놈은 리헤로스의 가슴을 발끝으로 툭툭 건드린다. 무례함에 화가 나도 리헤로스를 생각해서 애써 참았다.
“제발 이거 풀고….”
“방치해둔 사이에 죽었나 보지.”
“…뭐?”
“죽었을 거라고.”
답지 않게 오래 참았음에도 자극적으로 되돌아오는 말들이 분노케 했다. 눈가의 실핏줄이 툭, 툭, 터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죽어?”
─투두둑
초보자 무기를 들고 있지 않으니 무기 보정 효과가 없어 힘을 주기만 해도 밧줄은 힘없이 뚝뚝 끊어졌다. 마법이 안 걸린 밧줄 따윈 가는 거미줄 수준에 불과했다. 서서히 일어나 놈들을 노려보았다.
“꺄아악!”
“어…? 그걸 어떻게 풀었….”
리헤로스를 끌고 왔던 놈들은 발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재빠르게 도망쳤는데, ‘대장’이라는 놈은 뒷걸음질 치긴 해도 도망가지는 않았다.
“그가 잘못됐으면 너도 죽는 거야.”
“그런 말로 협…박 해봤자 하나도… 안 무서워!”
애써 허세를 부리곤 있지만 떨리는 목소리만은 솔직했다. 우두커니 서서 놈을 노려보다가 묶여있는 리헤로스 앞으로 가서 무릎을 꿇었다. 그의 턱 아래를 꾹 눌러 짚고 코에는 귀를 가져다 댔다.
‘다행히도 맥박도 안정적이고 호흡도 규칙적이야. 그냥 기절한 모양이….’
“에잇!”
─빠각!
몸을 천천히 세우고 있었는데 머리 위로 땔감으로 쓸법한 굵직한 나무 몽둥이가 날아들었다. 재빨리 팔을 들어서 막으니 팔 대신 몽둥이가 두 동강이 나버렸다.
“이게 무슨 짓이야?”
“어… 어, 이게 부서지….”
“이건 나를 향한 명백한 적의 표시고, 살의 맞지?”
“그, 그렇다면 어쩔 건데!”
“그럼 내가 널 어떻게 하든 정당방위겠군.”
분노로 인해 누군가 정수리를 잡아당기는 것처럼 이마가 뻣뻣해졌다. 살기를 느꼈는지 녀석은 반동강 난 몽둥이를 툭 떨어트리더니 온몸이 경련하듯 떨렸다.
─쐐액!
마법을 썼다간 리헤로스까지 다칠 것 같아 최대한 손톱을 세워 놈이 있는 방향으로 휘둘렀다. 손가락 사이로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위협적으로 들릴 정도였다.
“흐, 흐아아악!”
놈은 체구가 작은 만큼 요리조리 잘 피해 다녔다. 나의 시야가 아직 돌아오지 않았기에 명중률이 낮은 탓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손톱을 무자비하게 휘두르는 것을 용케 피해 다니던 놈은 조금 전까지 내가 묶여있던 기둥 뒤로 숨는 것 같았다.
─콱, 드드득!
손가락이 나무 기둥의 절반까지 배어들어 가 깊이 패였고 손톱을 빼는 동작에 놈의 털 가죽을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으아악! 괴, 괴물이야!”
겁에 질려 나자빠진 곰은 엉금엉금 걸음마 떼는 갓난쟁이처럼 기어가더니 마구간 밖으로 나가려는 듯 보였다. 나는 녀석의 위를 덮쳐눌렀고, 뒤집어쓰고 있는 곰 가죽을 찢어발기듯이 잡아당겼다.
[시스템]
상태 이상 [시야 제한]이 해제되었습니다.
“애잖아.”
“흐으윽… 사, 살려.”
녀석은 겁을 먹은 나머지 바지에 실례를 저지른 듯했다. 기절하기 직전에 목도한 것이 리헤로스가 목을 졸리는 모습이었고, 불쾌한 꿈과 리헤로스가 죽었을 거라 도발하는 놈의 행동의 컬래버레이션으로 당연하게 예민해졌었다.
‘실체를 알게 되니 김이 팍 새네.’
덮쳐누르고 있던 몸을 일으켜 ‘대장’ 앞에 섰다.
“침대 없어?”
“흐… 치, 침대…?”
“쟤, 눕히려고.”
***
거구의 남성 신장에 맞는 침대는 웬만하면 없다지만 지금 눕혀진 침대는 청소년기 아이들에게 맞춰진 길이였기에 리헤로스의 발이 삐져나올 정도였다. 마치 일곱 난쟁이 집에 들어와 잠든 백설 공주의 모습 같았다. 그가 회복될 때까지 재우기 위해 문을 닫고 밖으로 나왔다. 허름한 통나무집의 중앙엔 작은 테이블이 있었고 ‘대장’이라고 불렸던 아이가 앉아있다.
“얘기 좀 하지?”
“……쿨쩍.”
“너희 뭐야? 목숨이 장난이야? 아직 나이도 어린 것 같은데 이렇게 위험한 짓을 해? ”
연이은 질문에도 코 먹는 소리만 들려왔다. 슬슬 짜증이 났다.
“이제 골목대장 놀이는 끝이야. 네 보호자는 어딨어. 단단히 혼 내달라고 이야기해야지.”
“…….”
“어른들 어딨냐니까?”
“없어.”
“없다고? 거짓말 마.”
“…여긴 전쟁으로 부모님을 잃거나 생계가 어려워져 보육원으로 보내졌던 아이들이 모인 마을이야.”
“…….”
일전에는 막연하게 스쳐 지나갔었지만 실재했다. 나와 마군으로 인해 파괴된 가정이.
“그러니 맘대로 해…! 이제 도망치지 않을 테니까 죽이든지 고문을 하든지! 우리도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었다고.”
나의 어린 시절을 보는 것 같았다. 나를 보호하기 위해 강한 척해야 하고 아파도 내색하지 않고 그러면서 모든 사람에게 가시를 세우고 다녔다.
“생계를 위해 어쩔 수 없었다… 난 핑계라고 생각하거든?”
“뭐, 뭣?! 네가 뭘 알아!”
“부모는 너만 없어? 나도 부모 없어.”
“…….”
“그런데 적어도 남을 해치면서 생계를 운운하진 않았어. 다른 사람 밑에서 일하면서 정당하게 벌어 먹고살았지.”
소위 말해 여긴 비행 청소년들이 모인 곳이다. 물론 나의 행위가 나비효과를 일으켜 수많은 사람을 고통으로 빠트린 건 맞지만, 그렇다고 해서 남을 해치려 하는 짓을 용납할 순 없었다. 같은 처지에 놓여있더라도 올바르게 살아가는 사람을 바보로 만드는 짓 아닌가.
“배가 고프면 먹을 채소를 직접 키우고 고기가 필요하면 사냥을 해.”
“키울 줄 몰라. 동물을 죽이는 건 불쌍하잖아.”
“사람들을 쥐어 패서 약탈하는 발상이 훨씬 무서운데?”
“흥….”
“…언제까지 약탈하며 살 수 있을 거로 생각해? 보아하니 정해진 구역에서만 덫을 깔아서 취하는 것 같던데, 너희가 다니는 길목에 사람들이 더 이상 다니지 않으면 머지않아 쫄쫄 굶게 될걸.”
“…어른이 되면 지금보다 강해지니까 수도로 가서 하면 돼.”
“허어, 수도에는 아주 무시무시한 기사단이 있다는 걸 모르는구나.”
“무시무시한 기사단…?”
“그래. 마군단장을 일주일 만에 토벌한 무시무시한 놈들이지. 그놈들 손에 잡히면 나처럼 너희를 갱생 시키기 위해 너그럽고 상냥하게 말로 풀려고 하지 않을걸? 바로 감방에 처넣지.”
“…….”
“감방 가면 의식주 해결되니 좋을 것 같지? 전혀! 수도는 더욱이 피도 눈물도 없어. 감방은 기사단 식사에서 남은 음식물 찌꺼기를 박박 긁어다가 섞어 준다고 하더라고.”
“으… 으웩….”
“어때. 무섭지.”
사실 왕실 감옥은 어떤 구조인지 모르나 엇나간 청소년에게 구구절절한 교훈이나 설명보다는 충격 요법이 나을 거로 생각해서 지어낸 말이다. 칼리고 성격에 할법한 짓을 상상해 보니 꽤 그럴싸했다.
‘그놈이면 그러고도 남는다.’
“그렇게 말해도 할 줄 몰라. 채소가 기를 때까지 굶어? 사냥에 성공할 때까지 굶어?”
“흠.”
“그러니까 어쩔 수 없었다고… 먹여 살려야 하는 입이 몇 갠데….”
“알려주면 해볼 의지는 있고?”
“뭘 알려줄 건데?”
“당장이라도 채집해서 먹을 수 있는 풀이나 열매. 사냥감 손질하는 법 따위 말이야.”
“…….”
“대답.”
“…아, 알려주면 하지…….”
“그래. 이제야 말이 통하네.”
꽤 자존심 상하는지 목소리가 점점 기어들어 갔지만 답을 받아낸 것만으로도 뿌듯했다. 나도 폭력 없이 대화로 풀어갈 수 있구나.
“그럼… 뭐부터 할지 이 마을 좀 둘러볼까.”
“저기….”
“뭐야?”
“다른 애들한테… 비밀로 해줘.”
“바지에 실례한 거?”
“……땀이야.”
“그래. 땀이다.”
저 나이대에 바지에 실례했다고 하면 무리의 대장으로서의 위엄도 떨어질뿐더러 평생 놀림감 예약이다. 어느 집단이든 리더가 있어야 질서가 지켜지니 이 마을의 평화를 위해선 그 정도 비밀은 지켜줄 수 있다.
─쿵!
“무슨 소리야?”
“방 안에서 나는 소리 같은데.”
우당탕 마룻바닥을 구르며 소리가 점점 다가왔다. 문이 벌컥 열린다.
“크리스!”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