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연회를 벌이던 요정들은 새벽 동이 트니 한둘씩 모습을 감추었고, 그들이 다녀간 자리는 노란 꽃이 천사의 헤일로 모양처럼 링 형태로 만개해 있었다.
“꿈만 같아….”
“그러고 보니 오늘은 한숨도 못 잤는데 괜찮아?”
“응, 이상하게 몸이 가벼워.”
“그렇다고 해도 무리하지 마. 안 좋다 싶으면 꼭 이야기하고. 여정이 얼마나 남았든 휴식이 우선이니까.”
“그럴게. 크리스도 컨디션 안 좋으면 말해주기야.”
나야 걱정이 무색하게 컨디션은 최상이었다. 연회 이벤트 영향일까 신기하리만치 가뿐했다.
‘그보다 어젯밤 그 말… 나만 신경 쓰이나.’
‘…말했잖아. 너를 지키고 네가 살아갈 이곳을 지킬 거라고.’
리헤로스는 나를 많이 생각하고 아끼고 있다는 것을 지난 몇 달간 꾸준히 보여주었다. 이제는 그의 태도를 의심하지 않고 오롯이 긍정적으로 볼 수 있게 된 듯했다.
'고작 말 몇 마디뿐인데도 말이지.'
말만 번지르르한 걸 죽기보다 싫어하는 줄 알았는데, 번질댈지언정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으면 그만이었던 것 같다. 감정의 샘이라곤 가물어 쩍쩍 갈라진 지 오래라 얇고 가는 물줄기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줄 알았건만, 어느새 그 물줄기가 쌓여 마음이 눅눅하니 젖어 들었다.
“크리스?”
“왜 불러? 심각한 고민 중이란 말이야.”
“저기 봐. 너 닮은 하얀 나비야.”
“어디… 참 내, 하얀색이면 나야? 그러면 저기 옆에 노란 나비는 너고?”
“좋아. 나는 노란 나비 할게.”
“유치하게. 철 좀 드세요. 용사님.”
그다지 웃긴 얘기도 아닌데 숲속을 웃음소리로 채웠다. 멀찍이 떨어져 걷던 우리의 거리가 시간이 지날수록 가까워지는 게 느껴졌다. 마음의 거리뿐만 아니라 물리적인 거리 말이다. 한번 의식하기 시작하니 너무 붙지 않았나 싶었다.
“어…….”
“시답잖은 소리 할 거면 꺼내지 마라. 체력 아껴.”
무언가 말하려 했는데 톡톡 쏘아대는 나로 인해 입막음 당했다. 영원히 닿지 않는 두 개의 그네처럼 아슬아슬하게 스치던 손등이 툭, 툭 닿는 것이 느껴졌다. 그의 말문은 다시 열렸다.
“너 손이….”
“…….”
역시나 너무 붙어 걸었나 민망해졌다. 얼굴에 피가 돌기 시작하니 뺨이 따가운 느낌까지 들었다.
그는 내가 걱정하는 바와 달리 전혀 다른 이야길 꺼냈다.
“손이 얼음장이야. 살짝 닿았는데 한기가 느껴질 정도로.”
“늘 이런 상태여서 잘 모르겠는데.”
“어제 추운 데서 자서 그럴지도 몰라. 손 이리 줘봐.”
“어?!”
그가 불쑥 손을 잡으려 하자 무의식적으로 뒤로 숨겼다. 빈손으로 멋쩍게 웃는 리헤로스를 죄지은 것처럼 흘끔흘끔 보았다.
“막무가내였지?”
“아니. 그게….”
“미안해.”
“아, 진짜! 손 피한 거 가지고 풀 죽어선 불편하게 만들고 있어. 마, 맘대로 해보던가….”
“정말?”
“…무른다?”
“무르지 마. 다른 게 아니라 네가 걱정돼서 그런 거니까.”
“무슨 걱정까지야? 고작 손잡는 걸로… 다친 것도 아닌데.”
“손발이 차가우면 감기에 쉽게 걸리잖아. 그럼 금방 체력이 떨어질 거고, 그럼 걱정할 수밖에 없지.”
“그런가…….”
“나는 체온이 높은 편이니까 녹여줄게.”
“나 참… 그래봤자 얼마나 높다고.”
말은 그렇게 해도 양손을 꼭 잡는 그를 뿌리치지 못한다. 수많은 전투로 거칠어진 손바닥이었기에 부드러운 느낌은 없었지만, 손등 전체를 덮는 큰 손이 꼭 감싸주어 포근했다.
열기를 더하기 위해 정성스레 손등을 문지르는 모습이 퍽 하찮아 보였다. 거구의 남성이 작은 강아지를 보살피듯 쓰다듬는 행위와 흡사했다.
“이제 좀 따뜻해진 것 같아?”
“흥, 글쎄다. 야영지가 춥긴 했나 봐. 네 손도 그다지 따뜻하지 않은데.”
숲의 길목 한복판에 서서 손을 맞잡고 있는 행동을 멈추고 싶었기에 툭 뱉은 말이었지만 나의 오판이었다.
“그래? 어떻게 해야 따뜻해지려나… 이렇게 해볼까.”
내 양손을 모아 따뜻한 입김을 불더니 본인의 뺨에 찰싹 붙인다. 저 잘난 얼굴을 자는 동안 쿡쿡 찔러본 적은 있어도 넓은 면적을 감싸본 건 처음이다. 내 손에 의해 뺨이 꾹 눌려 조금은 깜찍한 표정이 되어버리니 묘한 정복감까지 들게 했다.
‘아니지, 이게 아니지!’
정복감은 무슨 정복감이야. 역시 리헤로스와 접촉하면 머릿속이 이상해지는 것만 같았다. 이 행위를 멈춰야 한다. 목소리를 높이려고 하니 바람 새는 리코더 소리 같은 삑사리가 나왔다.
“뭇… 무슨 짓, 뭐 하는 거야? 갑자기!”
“이러면 따뜻하지?”
“됐어! 바보야. 그렇게 한다고 안 따뜻해져. 타고난 체질이라 금방 차가워진다고.”
실망한 듯 눈썹을 구부리던 그가 손을 놓을 줄 알았더니, 목으로 옮겨버린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잊을만하면 간지러운 짓을 해서는 애써 정리해둔 마음속을 뒤엎어놓는다.
“여기에 대면 훨씬 따뜻하지?”
“…….”
“안 따뜻해? 그러면….”
“그, 그러네… 따뜻해. 따뜻하네….”
“다행이다. 조금만 이러고 있으면 네 체온도 올라갈 거야.”
안 따뜻하다고 했다간 이다음엔 어디에 넣어버릴지 몰라 황급히 대답했다. 우물쭈물 어쩔 줄 몰라하는 꼴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울까 도망치지도 못하고 얼굴을 둘 곳이 없어 푹 숙이고 있었다.
‘미치겠네….’
그리고 애석하게도 이 평화는 오래가지 않았다.
“으아아악! 살려주세요!”
“꺄아악!”
“사람 살려!”
익숙해지기 싫은 비명이 들려왔다. 이벤트의 여운을 즐길 새도 없이 또 퀘스트인 모양이다. 초반의 허둥대던 모습은 이제 없었고, 침착하게 귀를 기울였다.
“위험에 빠진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닌가 본 데.”
“서둘러 가보자.”
“응, 그래야지.”
맞잡고 있던 손은 자연스럽게 풀어졌다. 내가 가장 먼저 앞으로 튀어 나갔지만, 어느새 그가 앞질러 달리고 있었다. 리헤로스는 길고 무거운 장검 한 자루에 더해 백금색의 계약 무기를 등에 지기까지 한 상태였다. 그런데도 나보다도 잘 뛰는 모습에 감탄이 나왔다.
“흐, 흐아아!”
열심히 뛰고 있음에도 비명의 근원에 가까워질 듯 말 듯 했다. 아마 쫓고 쫓기는 추격을 벌이고 있지 않은가 싶었다.
흙바닥에 우당탕 구르는 소리가 들렸고, 그때 서야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는 것 같았다.
“살려! 살려주세요!”
“크크큭. 살고 싶으면 도망가질 말았어야지.”
“거꾸로 매달아 피를 뽑자. 주인님께 바치자.”
읊는 대사를 보아하니 마군일 게 뻔했다.
‘내가 언제 사람의 피를 제물로 바치라고 했냐고.’
저 멀리 길 중앙에 여럿의 형체가 시야에 들어왔다. 바닥에 주저앉은 마을 사람들은 반항도 못 하고 공포에 질려 떨고만 있었다. 그들을 둘러싼 염소 머리의 아인종과 인간형 마족이 푸른 휘장을 어깨에 걸고 있었다.
“흐아아악!”
그중 하나는 마을 사람 한 명의 발목을 잡아 들었고 무식하게 크고 거친 검을 배 가까이에 가져다 대었다.
“이봐, 군단장께서 모두 포획해놓으라고 했잖아. 죽이면 안 될걸.”
“한 명 정돈 괜찮아. 다시 도망치려고 하니 성가셔서 죽였다고 하면 된다.”
“그럼 마음대로 하던가.”
“잘못했습니다! 잘못했어요!”
─퓩
제아무리 달리고 있다고 해도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자니 사고 지점에 도착하기 전에 일이 날 것 같았다. 급한 대로 화살을 쏘았고 마군의 팔에 명중하니 괴성을 지르며 잡고 있던 주민을 떨어트렸다.
“크에에엑!”
“웬 놈이냐!”
─콰드득, 철퍽!
마군은 일제히 우리 쪽으로 몸을 돌렸는데, 그 사이를 파고든 리헤로스가 검을 들고 있는 마군의 팔을 베어낸다. 잘려 나간 살덩이는 묵직한 소리를 내며 바닥을 굴렀다. 다른 마군도 무기를 빼내어 들어 리헤로스에게 대항하려 했지만, 군단장이 아닌 하급 졸개 마군은 그의 적수가 아니었다. 모두 순식간에 가슴을 꿰뚫리고, 목이 베여 추풍낙엽처럼 속절없이 쓰러졌다.
“후우 리헤로스, 잘했어.”
전투를 마치자 마을 주민들이 벌떡 일어나더니 우리를 둘러쌌다.
“요, 용사님? 맞으시죠?”
“맞아요. 얘가 용사예요.”
“으, 으하…! 정말 감사합니다!”
“별말씀을요. 그럼 조심히 가시….”
“드릴 건 없지만, 우리 동네에 가서 차라도 한잔하고 가세요!”
“네?”
“와하하! 이렇게나 운이 좋다니!”
여태껏 만난 NPC들에 비해 반응이 지극히 인위적이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마군단으로 인해 공포에 질려있던 사람들이 맞나 싶을 정도로 돌변했다.
“괜찮으신 거 맞죠?”
“예에? 그럼요!”
“전혀 괜찮아 보이지 않은데.”
“으하하하! 정말 재밌으신 분이네!”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지. 어서 가시죠!”
우릴 질질 끌고 가다시피 이끄는 셋은 그저 목적지로 향하는 것에만 몰두해 있었다.
‘설마 이들이 마군… 일리는 없겠지.’
감정 과잉 상태로 보일 정도로 즐거워 보이긴 했으나, 당연히 퀘스트 보상이겠거니 싶었다. 세상에 모든 사람이 나와 같을 수는 없고 많은 행동 양식이 있지 않은가. 생각은 이리 해도 손목이 빠질 것같이 아파지자 입으로는 불만이 터져 나왔다.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려 해도 도무지 이 반응이 이해 안 되는데.”
“아하하… 그래도 좋은 뜻으로 초대해 주시는 거니까…. 그보다 이 마을, 꽃 재배로 유명한가 봐. 향기롭지 않아?”
“향기? 그러고 보니… 꽃이 정말 많네.”
나의 신경을 돌리는 리헤로스 덕에 시야를 넓혀 주위를 둘러보게 되었다.
어느새 마을 안에 들어와 있었고 금빛 무리 같은 꽃밭이 넓은 지역에 걸쳐 펼쳐져 있었다. 그 외에는 특별한 것 없는 시골 마을이었다. 수도에 있을 법한 눈에 띄는 으리으리한 저택 하나만이 우뚝 서 있는 게 특이한 정도였다.
“저기는 무슨 저택이지?”
“저희 영주님의 별채입니다. 관심이 있으신가요?”
“그럼 당장 만나 뵙는 것도 좋겠네!”
“그러네! 영주님도 좋아하실 거야!”
“아뇨. 아니….”
무어라 제지할 새도 없이 성큼성큼 걸어 영주의 저택의 입구까지 도달해버렸다.
“잠시만요…! 미리 약속 잡지 않고 갑작스레 방문하는 건 무례한 행동 같아요. 저희는 괜찮으니 돌아가겠습니다.”
“으하하! 그럴 리가요. 영주님은 늘 환영하십니다.”
“그럼요. 외지인이 마을에 방문하면 영주님을 꼭 뵙는답니다.”
“원래 그런가요? 영주라는 위치가?”
“그게 뭐 그리 중요한가요!”
당연히 중요한 질문인데도 어영부영 마무리한다. 치과 가기 싫은 어린아이처럼 버텨도 꾸역꾸역 끌고 가는 그들의 집념은 대단했다. 한 사람이 앞장서 뛰어가더니 문을 스스럼없이 열어 당겼다.
“영주님! 귀한 손님이십니다!”
“마을에서 즐거운 시간 되세요!”
“이만 가자고! 으하하핫!”
짐짝 싣듯이 저택 안으로 밀어 넣더니 얼빠진 우리를 뒤로하고 저택 밖으로 뛰어가고 있었다. 겁에 질린 모습이라기보다는 어딘가 해맑고 나사 빠진 사람들처럼 보였다.
“대체 뭐야….”
“이곳의 환영 인사는 참… 독특하네.”
“환영 인사겠냐. 딱 봐도 이상하잖아.”
“으음… 아무도 안 계세요?”
“영주의 저택에 사용인도 없어? 희한하네.”
실내의 공기를 채우는 것은 또각대는 괘종시계의 초침 소리뿐이었다. 고요한 로비에서 불청객처럼 멀뚱히 서 있기도 뭐해 그냥 보상을 포기할까 싶었다.
“리헤로스, 그냥 돌아….”
─달그락
“방금 그릇 움직이는 소리였지?”
“응, 분명히 들었어.”
“사람이 있으면 대답을 해주던가… 어휴 됐다. 들어가 보자.”
퀘스트 보상만 받으면 이곳과 작별일 테니 투덜대고 싶어도 참았다. 복도를 쭉 걸어가던 중, 유일하게 문이 열린 곳을 찾아 들어가니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뭐야… 대체?”
기대와 달리 영주라는 작자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고,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찻잔 두 잔만이 우리를 반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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