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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왕님 망겜에도 엔딩이 있나요-42화 (42/127)

42화

“네 말을 빌려서 정말 이상한 ‘환영 인사’네.”

“문전박대는 아니라 다행 아니겠어. 사용인을 안 쓰는 무인 저택인가 봐.”

“무인이라… 녹틸도 그 큰 저택을 마법으로 움직였었지. 영주가 마법사일 수도 있겠네.”

“일단 앉을까?”

“그래도 그렇지, 우리가 온 걸 알면 나와서 인사 정돈하지 않나.”

“어쩌면 낯을 많이 가리시는지도 몰라.”

낯을 가린다니, 사용인도 안 쓰고 모습도 드러내지 않는 자라면 그럴 만했다. 완벽하게 이해한 것은 아니었지만, 어떻게든 이 기괴한 환영식을 아름답게 포장해 주려는 리헤로스의 마음을 생각해서라도 말을 더 얹지 않기로 했다. 우리는 천천히 찻잔을 들어 갈증을 해소했다.

‘그러고 보니 이상하게 몽롱하네. 역시 어제 한숨도 못 잔 게 문제였나.’

몸이 무거워지는 듯한 감각에 제 목을 주무르고 있는데 옆에서 찻잔이 소란스럽게 내려놓아진다.

─쨍

“깜짝이야. 왜 그래?”

“크리스.”

“응?”

“나를 떠나지 마.”

“뜬금없이 무슨 말이야 그게?”

“떠나지 말아 줘. 부탁이야.”

“내가 떠나다니. 대체 뭔…….”

차를 마시다 말고 난데없이 흐름에 맞지 않는 말을 늘어놓더니 그 맑고 또렷하던 눈동자엔 초점이 없었다. 마치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어떻게 하면 네가 내 곁에 남을 수 있어?”

“…….”

“우린 이제 행복할 일만 남았는데, 어째서….”

“차에… 이상한 걸 탔나?”

그의 찻잔에만 특수한 약물을 사용한 건지 의심이 되어 한 모금 머금어 보았다.

‘아무 이상 없는데.’

리헤로스가 이상해진 이유가 불명확해 자세히 관찰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눈에 띄게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흡사 가위에 눌린 사람이 힘겹게 저항하기 위한 움직임으로 보여 본능적으로 그의 손을 잡아당겼다.

“리헤로스! 정신 차려 봐!”

“앞으론 내가…… 어?”

“리헤로스?”

“내가 뭐 하고 있었지?”

“정신이 들어?”

떨림이 사그라들더니 손목을 돌려선 내 손을 맞잡는다. 또렷이 자의로 움직이고 있는 것으로 보여 안도의 한숨을 길게 뱉었다.

“후우우… 조금 전까지만 해도 눈에 초점도 없고 이상한 소리만 늘어놓더니.”

“어? 내가 그랬다고?”

“무서울 정도로 주절주절 혼자 폭주했다고. 나더러 떠나지 말아 달라고 하면서.”

“그럴… 리가.”

그러고 보니, 본래 출처 불분명한 음식이 있다면 의심할 법도 한데 티 테이블 앞에 앉자마자 홀린 듯 차를 마신 게 이상했다.

“뭔가 있는 게 분명해.”

“그렇다면 설마….”

─띠딩

[던전]

혼탁의 울타리 : 제2군단장 이마고

[시스템]

인원 제한 없음.

‘X발, 던전이었어?’

맞잡고 있던 손을 놓고 곧바로 활을 집어 들었다. 주위를 경계하고 둘러보아도 인적은 코빼기도 느껴지지 않았다. 먼저 공격해오거나 미친 소리를 하며 등장을 하는 게 보통인데 오히려 조용하니 불안했다.

‘이 저택 자체가 군단장인 것은 아니겠지?’

“리헤로스. 정신 들었으면 밖으로 나가자.”

“응, 근데 왜 이렇게… 어지럽지? 너는 괜찮아?”

“괜찮고 말고, 너무나도 아무렇지 않아. 자, 걷기 힘들면 손이라도 잡아.”

“고마워.”

그는 지푸라기를 잡는 절박한 사람처럼 꽉 잡았다. 장비를 챙겨 저택을 빠져나가려 했다. 들어올 땐 그리 길지 않은 복도였던 것 같은데 어쩐지 한참을 뛰어 문에 도달했다.

“크리스.”

“왜, 또?”

“네 손을 잡으면 어지럼증이 가시는 것 같아.”

“뭐?”

“이상한 수작 부리는 거 아니야. 진짜야.”

“…….”

가는 눈으로 흘겨보니 그는 한껏 진실한 눈빛을 보내왔다. 결백하다는 듯 미간을 구기고 입술을 꾹 다문 모습이 의심을 씻어내렸다.

“그렇다면 어쩌겠어. 우선은 이렇게 잡고 있어 보자.”

“응.”

왼손엔 활이, 오른손엔 리헤로스가 있으니 손이 남지 않아 저택의 대문을 발로 박차고 나왔다.

“하아아아…. 저 비싼 문을….”

누군가의 나른한 한숨 소리가 들려온다. 정원 중앙으로 이동하여 멀찍이 떨어지고 나서야 저택을 자세히 살폈다. 그리고 지붕에서 가볍게 뛰어내리는 하얀 물체가 보였다.

그것은 갑옷 대신 흰 제복에 파란 휘장을 길게 끌리듯 나풀나풀 매달고 있었다. 이전에 페르킨과 달리 가느다란 팔다리의 소유자였고, 종과 꼬챙이 같은 긴 막대기를 들고 있었다.

“오오! 이게 누구십니까?”

“놈이 제2군 단장인가?”

“주인이시여! 저를 위해 이곳으로 유인해 주신 거로군요! 감복! 또 감복하였습니다!”

“그런데 주인이라니, 누구를 보고 말하는 거지?”

“…….”

필사적으로 모르는 척하려 했다. 그냥 하늘에 대고 혼잣말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을 테니. 그런데 이마고는 내가 대꾸를 하지 않으니 노골적으로 앞으로 폴짝 다가와서는 무릎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용사의 목숨을 끊지 않고 제게 보내주신 은혜에 보답하겠습니다. 제물의 심장을 꺼내어 주인님께 바칠 테니 지켜봐 주십시오! 이 이마고, 실망하게 하지 않습니다!”

“크리스?”

리헤로스의 손을 놓고는 허벅지에 매어둔 단검을 재빨리 뽑아 들어 놈의 목을 그으려 했다. 내 행동을 알아차린 듯 가볍게 백 점프해서 피한다.

“흐음?!”

“저게 무슨 말이야?”

“마군이 언제 제정신인 적 있었냐? 쓸데없이 궁금해하지 말고 검 들어.”

나직이 말을 돌려도 여전히 그의 표정에선 의문이 가시지 않았다. 누가 봐도 이상한 그림이긴 했다. 자신의 조력자 앞에서 무릎을 꿇는 악의 세력이라니, 의문을 품을 만했다.

“그렇군요! 말로만 하지 말고 행동으로 보이란 이 말씀이십니까! 아아, 그런 깊은 뜻도 모르고 저는 한참 멀었습니다.”

“약이라도 했나, 누가 네 주인이야?”

“놈이 하는 말… 무슨 말인지 알겠어.”

“뭐…?”

리헤로스의 단호한 목소리에 겁에 질렸다. 이곳이 여정의 종지부를 찍는 곳인 걸까. 들통나면 난 어떡해야 하지 단시간에 수십, 수만 가지 경우의 수가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마침내 착잡한 표정의 리헤로스의 입이 열렸다.

“아까 보였던 환각과 마찬가지로… 내 집중력을 흐트러트리기 위해 널 모함하는 게 분명해.”

그가 보내오는 무한한 신뢰에 감동한 것도 잠시, 부정할세라 서둘러 수긍했다.

“긋, 그렇지. 저놈이 하는 말은 다 헛소리니까 신경 쓰지 마.”

“못 뵌 사이 유머 감각이 늘어나셨군요!”

가까스로 자기 세뇌를 끝낸 리헤로스를 혼란스럽게 만들고 앉았다. 나는 더는 대꾸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해 활시위를 당겼고, 내 신호를 알아차린 리헤로스는 양손으로 검을 쥐고 도약할 자세를 마쳤다.

그 순간─

─대앵

“으윽…!”

“갑자기 멈춰서 뭐해?”

어디에 찔린 것처럼 신음을 내는 리헤로스의 목소리에 깜짝 놀라 그에게 다가갔다.

“왜 그래?”

“내 검이…….”

“검이 어때서?”

“부러졌어.”

리헤로스가 쥔 이드랑제의 검은 부러진 곳 없이 완전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오히려 날카롭게 이를 세우고 있어 그 어떤 흠집도 용납하지 않는 새 무기에 가까웠다.

“무슨 소리야? 멀쩡한데!”

“또… 망가트려 버렸어.”

“리헤로스! 정신 차려!”

마군단장 이마고는 우리 쪽의 동향을 살피더니 즐겁게 웃어댄다.

“힛, 하핫! 이 마을 전역에 포진한 꽃, 마리골드의 향기는 서서히 환각에 빠트립니다.”

마을에 피어있던 금색의 꽃말인가? 너무나도 흔한 모양새였기에 어떠한 기능이 있을 거라곤 한 치 의심도 하지 않았다.

이마고는 종을 천천히 쓰다듬다가 가볍게 흔들었다.

─댕

“그리고 이 종소리는 환각으로 완벽하게 빠지게 만들지요. 일종의 최면입니다.”

“뭐라고?”

“용사에게 종소리는 최근 가장 충격적이었을 사건, 그때의 소리로 들릴 겁니다.”

리헤로스에게 있어 충격적인 사건이란, 검이 부러졌을 때였나. 그때엔 침착해 보였기에 트라우마로 남았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이번엔 검기를 쓰지 못할지도 몰라… 그럼 난….”

“젠장! 심지어 평소답지 않게 횡설수설하잖아. 검이 부러져도 이 정돈 아니었단 말이야.”

“주인님, 제가 사용하는 환각은 그저 그런 조무래기 착란이 아닙니다. 주술의 대상자는 심신미약에 가까워지죠. 그러니 횡설수설할 수밖에요.”

“어떻게 해야 해….”

당장 눈앞의 목표도 잊고 혼란스러워하는 리헤로스를 진정시키는 게 우선이었다. 이마고는 가느다란 목을 모로 기울였다. 모든 뼈대가 너무 마르다 못해 앙상해서 머리의 무게를 못 견디고 똑 부러질 것만 같았다.

“이 정도 주술도 못 깨는 용사는 주인님의 상대도 못 되니 제 선에서 처리하는 게 나을 텐데요.”

“입 닥쳐!”

“흐음… 알았다. 비겁하게 이기지 말라 이거군요? 하지만 타고나기를 약한 몸인지라 살아남기 위해 익힌 장기가 환각술인걸요. 저의 유일한 특색을 버리시라는 말 아닙니까. 비겁하다 나무라셔도 어쩔 수 없습니다.”

“그러고 보니 너는 군단장인데 네 휘하의 군단은 어쩌고 혼자 있는 거지?”

“군단이 있긴 합니다만… 곁에 있으면 제가 부리는 환각에 취해서 도통 힘을 쓰질 못해서요…. 마을 밖으로 도망치는 인간을 잡아넣는 일만 수행 중입니다. 마을의 인간은 마리골드를 키우고 제물을 의심 없이 끌고 들어오는 중요한 역할을 해주죠.”

“그래서 마을 외부에서 도망치는 주민들을 잡고 있었나.”

“2군단은 다른 난봉꾼들과 달리 구역 생활을 하는 게 특징이라서요.”

마군에게 변을 당할 뻔한 NPC들은 주술이 덜 풀렸던 게 분명했다. 어떤 계기인지는 모르겠으나, 걸려있던 환각술이 다시금 발동해서 우리를 마을로 끌고 왔을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도 2군단은 신사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지요. 무식한 페르킨 같이 야만적이지 않아요.”

이마고가 뭐라고 나불거리든 내버려 두고 리헤로스를 살피고 있었다. 검은 여전히 쥔 채 미세하게 떨고 있었다. 우선은 트라우마의 매개체인 검을 떼어 놓는 게 좋아 보였다.

“리헤로스, 여기에서 무너지면 안 돼!”

“크리스….”

“주인님, 제가 끝을 내겠습니다. 그대로 붙잡고 계시지요.

더는 시간을 끌 수 없었다. 정말 손을 잡으면 리헤로스의 상태가 좋아지는 것일지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검을 빼앗았고 그의 손을 꼭 감쌌다.

─디이잉

종을 울리자 이마고의 모습이 사라졌다. 여전히 손은 붙든 채, 리헤로스를 뒤로 숨겼다.

“어디로 간 거지?!”

“여깁니다.”

어느새 머리 위에 부양하고 있는 이마고는 날카로운 타종용 스틱을 리헤로스 쪽으로 겨냥하고 있었다.

“어느새…!”

“왜 모르시죠? 저는 음파를 타고 이동할 수 있습니다.”

“뭐?”

“완력이 강하지 않더라도 기술 하나만으로 용사에게 대적할 수 있는 능력이 멋지지 않습니까? 이제 주인님을 감동하게 할 마지막 연주를 보여드리겠습니다.”

“그딴 건 필요 없어.”

“네에?”

“데스데모나!”

─콰과가가가각!

─퍼퍼퍽!

검푸른 원뿔이 땅에서부터 솟아났고 그 모든 것들이 이마고의 몸통을 꿰뚫었다.

“큭, 하악…! 켁!”

적중하면 치명상에 이를만큼 강한 단일기 스킬이다. 하지만 피를 쏟아내던 이마고는 땅바닥에 구르다가 금세 몸을 일으켰다.

“왜 이리 저를 혹독하게 가르치십니까 주인님?!”

이미 알고 있다. 게임 속에 처음 빙의했을 당시, 직접 마물을 처치하니 다시 리스폰 되고 스토리에 영향을 주지 못 했던 것.

‘역시 내 손으론 마군을 죽일 수 없다.’

절대 들키고 싶지 않은 사람 앞에서 스킬은 절대 쓰지 않으려 했건만, 그를 보호하기 위해선 어쩔 수 없었다. 어느새 정신이 든 리헤로스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크리스… 그런 마법은 언제 배운 거야?”

“내 얘길 느긋하게 들을 시간 있어? 놈을 해치워야지!”

“히이이! 해치운다고요?”

─디이이잉

이마고는 뒤로 돌아 종을 두드렸다. 음파를 타고 도망가려는 것 같았다. 종소리가 멀어짐과 동시에 이마고의 모습이 사라졌다.

“놓칠 수 없다!”

리헤로스는 짧지만 나와 손을 잡고 있었기에 멘탈이 회복된 것 같았다. 놈이 사라진 것을 보고 내 손을 놓더니 곧바로 뒤를 쫓았다.

‘손을 잡고 나면 잠시간은 괜찮은 것 같아. 무슨 일이 생기면 다시 손을 잡으면 될 거야.’

전의에 불타는 그의 속도는 어찌나 빠른지 따라잡는 것도 일이었다. 마침내 그의 뒷모습을 발견했고, 어느 한곳을 주시하고 있었다.

‘빠른데? 이마고를 벌써 찾은 걸까.’

검은 금빛의 오러가 둘러싸이고 있었다. 그 검 끝이 향하는 곳은─

‘마을 주민이잖아!’

홀린 듯 멍하니 서 있는 마을 주민이었다.

“쥬바르메 공형. 아키에스!”

검기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뾰족하게 솟은 형태로 목표를 향했다.

나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하나뿐이었다.

─카각, 긱기기긱!

주민을 찌르기 전에 단검을 뽑아 들어 가까스로 막아냈다. 환각에 취한 그는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정신… 차려…!”

힘에 밀려 리헤로스의 검날은 점점 검신 끝으로 미끄러져 갔다.

─쨍!

“아!”

─툭, 투두둑

“윽… 크우읏…!”

리헤로스의 검이 왼쪽 어깨를 꿰뚫었다. 눈앞이 번개 치는 것처럼 번쩍대며 요란스러웠고 찔린 곳은 인두로 지지는 것처럼 고통스러웠다.

이것이 악역의 진정한 죽음임이 느껴질 지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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