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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왕님 망겜에도 엔딩이 있나요-44화 (44/127)

44화

정적은 그 어느 때보다 길었다. 그는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해 입술만 뻐끔대고 있었다. 그리고 겨우겨우 비집고 나온 첫마디는 이것이었다.

“크리스…!”

“…소꿉놀이는 즐거웠나?”

“거짓말… 하지 마. 놀리는 거지?

“죽이겠다고 결심한 대상이 바로 옆에 있는데도 한 치 의심 없는 아둔함이란, 눈뜨고 못 봐주겠더라고.”

“네가 보여줬던 행동들이 모두 가짜라고?”

리헤로스의 말에 필름을 모아 보는 것처럼 그간 여정의 기억이 조각조각 떠올랐지만 금세 접어두었다. 괜한 추억과 동정은 이제 사양이다.

“그래. 모두 가짜야. 그 어느 것도 진심인 적 없어.”

“아닐 거야.”

“제아무리 부정해 봤자 달라지는 것은 없다만.”

“너는 나를… 수없이 도와줬잖아. 방금 목걸이도….”

“아하하하! 아아, 그게 너를 위한 거라 생각한 건가?”

“뭐…?”

“이 세계가 정상적으로 돌아가기 위해선 맹목적인 정의의 사도, 간단히 말해 무모한 사람이 필요했지. 그런데 네가 이 대륙에 처음 왔을 때만 해도 혼자서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잖아. 네 멍청한 행동에 보다 못한 내가 아주 잠시간 지원해 준 것일 뿐, 무슨 감정이 있어 그런 거 아니야. 착각하지 마.”

매몰찬 말을 뱉어내니 그의 주먹은 꽉 쥐어 들어갔고 바르르 떨리고 있었다.

‘그래. 그 손으로 검을 쥐어.’

그도 이젠 비열한 나의 실체를 알았으니 검을 빼 들리라 믿었다. 싸우게 되면 적당히 대치하다가 져줄 심산이었다.

‘이제 집으로 돌아가는 거야. 원래 있어야 하는 곳으로.’

“아니야.”

“…….”

“나를 죽일 수 있는 상황이 그렇게 많았는데 그러지 않았어. 왜?”

“허? 그걸 굳이 설명해야 하나? 그냥 널 갖고 논 것뿐이야. 무료한 생의 새로운 유흥이었지.”

“아니, 너는 날 죽일 생각이 없었어. 오히려 내가 다치거나 위험에 빠지면 겁에 질렸으면 모를까. 아까도 마을 주민을 해할까 봐 네 몸으로 대신 막았잖아. 이것도 네 유흥인가?”

“…….”

“아니야?”

그가 상처받지 않고 빠르게 성장하길 바라서 물심양면 도운 게 맞으니 더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시비와 조롱이 터져 나오던 말문은 막혀버렸다.

“…크리스. 네가 이 사실을 숨긴 데엔 이유가 있었을 거야. 그걸 내게 말해줘.”

“여태까지 한 말은 뭐로 들은 거야. 못 들었어? 나를 친구로 여기던 너를 비웃고 기만했다고!”

“친구… 그래 우린 친구잖아.”

“제기랄, 아니야! 네가 죽이고 싶어 마지않던 마왕이 나라고!”

제자리걸음 하는 대화에 분노가 치밀어 올라 그에게 다가가 멱살을 쥐었다.

“너, 내가 우스워? 내 손에 죽어봐야 나불대지 않지?”

“…….”

“마왕을 죽이고 싶다며! 용서할 수가 없다며!”

“네가 보였던 행동들은 기만이라 믿을 수 없어…. 그렇게 모질게 말하지 않아도 돼. 무슨 이유인지 이해할 수 있는 것일 거야.”

“하아아… 말이 안 통하잖아!”

“네가 이 일을 시작하게 된 이유부터 차근차근 이야기해 보면… 무언가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거야. 그러니 돌아가자. 부탁이야.”

멱살을 쥐고 있는 나의 손 위로 그의 따스한 손이 겹쳤다. 그러게 매사 투덜대고 싸가지없는 날 왜 미워하지 않았냐며 주먹을 날리고 싶었다. 나를 의심하고, 탓하고, 경멸했으면 좋았을 것을 그는 그러지 않았다. 지나친 상냥함에 마음이 자꾸만 흔들렸더랬지.

“하… 하하, 돌아갈 곳…?”

손을 사납게 뿌리치고 비틀비틀 뒷걸음질 쳤다.

분명 죽음에 가까운 고통을 조금 전까지 겪었고, 그로 인해 나의 마음은 다 잡혔다고 생각했다. 그런데도 그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자면 결심이 어그러지고 복잡해져 왔다.

엉거주춤 들린 손의 검지가 눈에 띄었다. 스피나에게 받았던 반지였다. 붉은색의 원석이 나를 향해 시끄럽게 속삭이는 것 같았다.

‘이기적인 기만자. 비겁자.’

나를 집어삼킬 것만 같다. 멍하니 정신이 팔려 반지를 보고 있는 사이 어느새 리헤로스가 이쪽으로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여전히 검은 빼 들지 않은 채.

“뭐 하는 거야? 검 들어.”

“무기는 들지 않을 거야.”

“미친 거 아니야?”

마왕과 대화로 풀려고 하는 용사가 세상에 어디에 있나? 기가 막혔다. 내 쪽에서 먼저 공격해야만 그가 받아칠 것 같아 손을 뻗었다.

‘손이….’

주체 못 하게 떨리는 손은 그를 향해 제대로 겨누질 못한다. 결심을 완벽하게 끝낸 줄 알았는데 몸이 생각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내 어떤 행동에도 멈추지 않아 성큼성큼 다가와 가까워졌다.

“다가오지 마!”

─화르륵

나를 중심으로 푸른 불꽃이 퍼져나가 넓은 원형의 장판이 깔렸다. 이글이글 피워내는 마계의 열기는 그도 함부로 뛰어들지 못하는 듯했다.

‘모든 게 밝혀졌는데도 어째서 태도가 바뀌지 않는 거야. 나는 갖은 죄책감을 안고 살아가기엔 나약해. 뭐든 좋으니 어서 끝이 났으면 좋겠어.’

어차피 알고 있었지 않은가 용사와 마왕은 공존할 수 없다는 사실을.

검지에서 빼낸 반지를 불꽃으로 둘러싸인 원 밖으로 던져버렸고 리헤로스의 발끝으로 굴러가 부딪힌다.

“용사 리헤로스.”

“크리스…….”

“잘 생각해. 너와 나는 공존할 수 없어.”

“아니야. 방법이 있을 거야!”

“낙관적인 생각은 집어치워! 네 한심한 태도 때문에 전의를 상실할 지경이니까.”

“…….”

“싸울 생각 없는 놈과 마주하는 것도 한계다. 잘 생각해 봐라. 어떤 선택이 이 세계를 위한 것인지.”

“나는….”

네가 구해야 하는 건 기만자 ‘크리스’가 아니라 이 세계인데도 세계를 버려서라도 나를 선택할 것처럼 구는 것인지 모르겠다.

“하, 하하하… 그래 그렇게 계속 망설이고 있어. 그렇다면 나는 세계의 종말을 위해 움직일 테니.”

“종말이라니….”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는 말이 있듯. 그에게 마음을 정리할 시간을 주는 게 맞는 것 같다. 당장 그와 결판을 짓는 것은 무리다. 그리하여 나는 나의 자리로 돌아가기로 마음먹었다.

“내가 돌아갈 곳은… 단 한 곳뿐이야.”

리헤로스를 등지고 포탈을 생성했다. 그 안으로 발을 들이려는데, 리헤로스가 뜨거운 불길을 헤치고 내 쪽으로 달려들었다.

“크리스!”

“기다리고 있겠다. 게헤나의 마왕성에서.”

그 말을 끝으로 포탈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디딩

[시스템]

긴급 퀘스트가 강제 종료되었습니다.

[시스템]

사유: 퀘스트 진행 불가

***

다른 느낌의 숨 막히는 정적이었다. 제 앞마당이어야 할 마왕성이 바깥세상보다 낯설었다. 흠뻑 젖어 물 밖으로 막 나온 사람처럼 느릿느릿 몇 걸음 걷다가 그대로 털썩 무릎을 꿇었다.

“하아… 하아아….”

리헤로스에게 찔렸던 상처는 이미 한참 전에 아물어 아프지 않았다. 물리적인 고통이라기보단 마음이 공허해 도저히 두 다리로 서 있을 수 없었다. 온몸을 떨며 바닥에 웅크린 추한 꼴을 그 누구도 보지 않아 다행이었다.

‘결국 난 그 어느 쪽의 신임도 받지 못하게 되어버렸나….’

현실에서나 이곳이나 다를 것 없었다. 어느 쪽에도, 그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한다. 지독한 현실이 가슴에 사무친다. 어쩌면 내 삶은 애초에 이렇게 설계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울화가 치밀었다.

“씨X… 내가…. 내가 뭘 그리 잘못했는데!”

돌바닥을 세차게 내려치며 울부짖었다. 눈물은 여전히 나오지 않았다. 몸 안쪽에 무언가 꽉 막혀있는 기분이었다.

“누구든 말해봐! 내 죄가 뭐냐고!”

남들과 같은 가정, 같은 사랑, 같은 우정을 바라는 게 그리도 욕심이었나. 누구든 하나는 가질 수 있는 걸 나는 그 어느 하나도 가지지 못한 걸까. 내 인생은 저주받은 것이 틀림없었다.

“흐으, 윽… 아아아….”

“주인님…!”

한참을 흐느끼는 소리만 내던 중 복도 끝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왕 성을 모두 떠나 아무도 남지 않은 줄 알았는데.

“누구…야?”

“저예요.”

포로롱 날갯짓하며 다가온 박쥐는 이 세계에서 몇 안 되는 반가운 캐릭터였다. 큰 눈망울이 불안스레 흔들리는 페로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올려다보고 있었다.

“괜찮으신 거예요? 너무 괴로워 보이셔요.”

“…….”

“주인…님?”

“모르…겠어.”

“힘들면… 힘들다고 말씀하셔도 돼요. 그래도 돼요.”

녀석의 말에 억눌려있던 차가운 감정이 끓어올랐다. 페로를 끌어당겨 품에 꽉 안았는데 갑작스럽고 행동에 놀랄 법도 한데 그저 가만히, 숨죽이듯 안겨있었다. 페로의 안정적인 심장 박동 소리를 들으니 복잡한 머릿속이 조금은 진정되었다.

“힘들어….”

“주인님….”

“내가 부족한 탓이야. 이도 저도 하지 못하고 민폐야…. 이래도 되는 걸까.”

“주인님 탓이 아니에요.”

“난 이제 혼자야….”

“그럴 리가 없잖아요! 제가 있는걸요. 저는 끝까지 주인님을 따라갈 거라고 약속도 했잖아요!”

말의 힘이란 무섭기도 하고 무겁다. 분명 일전에 같은 말을 들었을 땐 네 삶을 살라고 면박이나 주었는데, 지금은 이보다 더한 말이 없었다. 적어도 마지막으로 남은 ‘내 편’, 페로만은 지켜야겠다고 생각했다.

“이제 나설 거야…. 그러면 해결될 거야. 그래야 해. 원래의 목표를 상기해야 해.”

“주인님? 괜찮으신 거 맞죠?”

“이제 괜찮아. 좀 쉬어야겠어. 피곤하네….”

“네에, 쉬시는 게 좋겠어요. 제가 방으로 안내해 드릴게요.”

페로를 따라 방으로 향했다. 그저 평소처럼 걷기만 하는 것뿐인데도 발에 무게 추를 단 것처럼 한 걸음 한 걸음이 버거웠다. 그런데도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고 이윽고 침실에 도착했다. 겉옷은 대충 벗어 의자에 걸어 두었다.

“필요한 게 있으면 불러주세요. 푹 주무시고 나면 내일은 한결 마음이 편하실 거예요.”

“응 알겠어….”

“저어… 주인님.”

“응?”

“아, 아니에요…. 꼭 일어나셨으면 좋겠어요.”

페로의 말은 이해하기가 어려웠지만, 나를 걱정해서 하는 말이란 것은 알았다. 그래서 푸스스 미소를 지어보았다.

“걱정 마. 정말 잠깐 눈 붙이는 거야.”

“네에. 알겠습니다. 그럼 쉬세요.”

페로가 문을 조심스레 닫고 나가자 녀석이 있을 땐 미처 몰랐던 방 온도는 매우 차가웠다. 그래도 이불만큼은 나를 빈틈없이 감싸주어 편안했다. 지독한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해 눈을 감았다.

나는 마왕성의 복도를 하염없이 걷기만 한다. 어디로 향하는지 모르지만, 그 목적지까지 가는 데에 한 치의 망설임이 없었다. 발걸음도 매우 가벼웠다.

─타박… 타박…

작고 낡은 문을 열고선 현기증이 나도록 빙글빙글 휘어있는 나선형 계단을 오른다. 그 꼭대기엔 굳게 잠긴 또 다른 문이 보였다.

‘그곳으로 가.’

“그곳으로… 가?”

성대의 울림으로 직접 목소리를 내고 있단 것이 느껴져 자연스럽게 눈이 떠졌다. 잠꼬대였나 싶었지만, 꿈에서 본 이미지는 너무나도 생생했다.

‘누구지?’

꿈을 꾸고 있을 당시엔 목소리가 익숙했는데, 깨고 나니 들어본 적 없는 낯선 이의 목소리였다.

“그 문은… 대체 뭐였지.”

낯선 꿈속의 목소리가 가보라고 했으니 속는 셈 치기로 했다. 낡고 작은 문을 찾아 마왕성 수색에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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