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
이미 오전이 된 지는 오래였지만, 오늘만큼은 첨탑에 가지 않고 침실에서 멍하니 누워만 있었다. 심장이 너무 빨리 뛰어 주체할 수가 없었다.
‘평화로운 세계를 만들겠다는 건… 역시 그거겠지.’
마왕인 나를 제거하는 것.
세계가 평화로워지는 길은 그것뿐인 게 뻔했다.
‘그가 아무리 착하다고 해도… 그렇게 나쁘게 굴었는데 여전히 좋아하는 게 이상하긴 해.’
당연했다. 이별 마지막 순간까지도 그의 행동을, 나를 생각해 주는 마음을 조롱하다가 헤어졌으니. 그 당시에는 아니었을지라도 곱씹다가 생각이 바뀌었는지도 모른다.
“하아아……. 이해는 하지만 착잡한 건 어떻게 할 수 없네.”
우선은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마경을 보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페로와 노는 것뿐이었다. 그런데 페로는 야행성인지 이른 시간엔 일어나지 않은 듯해서 아침만은 홀로 보내는 시간이었다.
‘페로가 말했던… 창고 가볼까?’
적어도 무어라도 해야 상념의 늪에 빠지지 않을 것 같으니 내린 결정이었다.
창고는 다행히도 포탈을 통해갈 수 있었다. 그런데 내가 생각한 창고의 규모란, 커봤자 10평 남짓의 방 정도로 생각했는데 전혀 아니었다.
“박물관 아니야?”
길게 늘어서 있는 책장과 장식장, 무기 거치대 등 주기적으로 청소하진 않는 것 같지만 가지런히 배치되어 있었다.
책이야 내가 읽을 수 없는 이상한 상형 문자들 뿐이었고, 잡동사니라고 해서 나의 흥미를 끌 만한 것은 없었다. 그러던 중 한 장식장 앞에서 멈춰 섰다.
“비약…?”
장에 빼곡히 채워져 있는 시약병들이 눈에 띄었다. 병에 일일이 붙은 이름표들을 하나하나 훑고 지나갔다.
[망각의 비약]
‘이걸 마시면… 모두 잊을 수 있나?’
어떤 이유라고 콕 집어 말하긴 어려웠지만, 시험해 보고 싶었다. 집어 들어 병의 뚜껑을 열어보니 안은 텅 비어있었다. 그 옆의 병을 들어 살펴도 똑같았다.
‘그냥 병만 모아둔 장인가….’
기대감만 증폭시켜두고 알맹이는 아무것도 없다니 실망스럽기 그지없었다. 병을 내려두고서 장식장을 지나치려는데 바닥에 무거운 무언가가 끌린 자국이 있었다.
‘이 장식장을 옮긴 것 같은데.’
바닥에 난 길을 따라 장식장을 쭉 밀어보았다. 그 뒤엔 문 하나가 숨겨져 있었다. 마왕은 숨기고 싶은 게 많았나, 이곳저곳 저만의 비밀 공간을 많이 만들어둔 것 같다. 첨탑에서처럼 선대 마왕에 대한 정보나 단서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싶어 바로 문을 열고 들어갔다.
‘첨탑 같은 잠금장치가 없는걸 보면… 그다지 중요한 건 없으려나? 누구든 문을 찾으면 드나들기 쉽잖아.’
지하 깊숙이 내려가는 계단은 오르는 첨탑과 완전히 상반되는 이미지였다. 무한히 타오르는 횃불이 벽 곳곳이 꽂혀 있어 어두운 지하를 밝혀주었다.
계단 끝을 겨우 내려오고 나서 공간을 둘러보니 주류 저장고로 보였다. 중앙에는 낮은 소파와 테이블이 있어 굳이 지상으로 올라가지 않고도 이곳에서 즐길 수 있는 것 같았다.
“뭐야…. 저장고인데 왜 그렇게 꼭꼭 숨겨놨대.”
어차피 마왕이라 하면 술 마시는 게 특별한 것도, 흠일 것도 아닐 텐데 우스웠다. 이렇게 된 거 낮술이나 즐겨보자는 생각에 이것저것 꺼내어 중앙 테이블에 올려두었다. 그런데 테이블 위에 이미 한 가지의 병이 놓여있었다.
‘선대 마왕이 먹고 안 넣어둔 건가?’
위스키를 담는 크리스탈 병처럼 생겼다. 별다른 라벨이 없어 마개를 열어 향을 맡아보니 시큼한 과일 향이 났다.
“정신없이 마시고 정리도 못 할 정도로 즐긴 거 아니야? 그럼 그냥 지나칠 수 없지.”
잔에 쪼르륵 따라서 입에 머금고 맛을 느낀 뒤 삼켰다. 양주라 하면 삼켰을 때 목을 찌르르하게 태우듯 타고 내려가는 것이 특징인데 이는 술이라고 할 것도 없이 아무런 맛도 감각도 없었다.
‘향만 과일이잖아. 탄산수처럼.’
과실주를 담그다가 실패했던 건가 싶어 픽 코웃음을 치고 다닌 와인의 코르크를 따려 했다.
─쨍그랑!
들고 있던 와인병을 놓치고 만다.
손이 미끄러워서가 아니었다. 손가락 마디마디에 힘이 들어가지 않고 덜덜덜 떨렸다.
“몸이… 이상한….”
불현듯 마왕의 일기가 떠올랐다. 선대 마왕은 독약을 먹기 전에 술을 마셨다고 했다.
‘아뿔싸… 내가 마신 게 독약이었나?’
한시가 급했다. 떨리는 손을 가까스로 들어 입안 깊숙이 목구멍을 찔렀다. 울컥 토기가 밀려 나와 게워내긴 했지만, 액체이기 때문에 체내에 얼마나 흡수됐는지 모른다.
“우욱… 허억… 헉….”
‘젠장…. 내가 여기서 허무하게 죽으면 엔딩은 어떻게 되는 거야….’
몇 번을 더 게워내기 위해 목을 찔러댔지만, 먹은 게 없어 위액을 뱉어냈고 그것을 넘어서서는 헛구역질만 해댔다.
“으…… 크윽….”
갖은 노력에도 몸의 떨림은 좀처럼 멈추지 않았다.
‘안 되겠다…. 우선은 몸을 휴식시키는 게 좋겠어.’
포탈을 열어 침실로 이동했다. 이불을 덮는 과정은 생각할 것도 없이 침대로 몸을 던졌고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
입안이 온통 쓴맛만 났다. 마른 입술은 서로 붙지 않았다. 대학교 신입생 새터에 가서 죽도록 마셨을 때도 이보다 힘들진 않았다. 왜 이렇게까지 몸이 비정상적인 반응을 보이는지 흐릿한 기억 너머를 차근차근 되짚어보았다.
‘맞다. 독약인지 뭔지 먹고 기절했었구나.’
다행인 건 죽지 않고 눈을 떴다는 사실이다. 그것만으로 감사했다. 첫 걸음마를 떼는, 소근육의 사용법을 배우는 아이처럼 엉거주춤 삐걱삐걱 대며 몸을 일으켰다. 세상의 짐은 내가 다 지고 있는 듯한, 중력이란 중력은 나에게 모두 몰린 것 같았다. 사지가 무거워 고개를 돌리는 것도 힘겨웠다.
전신이 뻐근하긴 해도 쓰러질 당시에 죽을 것처럼 몸이 뻣뻣한 느낌은 아니었다.
‘우선은 조금 걸어볼까.’
그래야 근육이 풀리고 원래 상태로 돌아올 테니 말이다. 침대 밖으로 나오려는데 발밑에는 가시덩굴이 마구잡이로 자라있었다. 아주 오랜 시간 방치된 폐허나 다름없었다.
“내가… 얼마나 잠들었던 거지?”
갑자기 불안해져 첨탑으로 향했다. 혹시라도 내가 죽은 것으로 판정되어서 리헤로스의 신상에 이상이 생겼다던가, 괴상한 변수가 생기면 큰일이었다.
마경을 붙잡고 흔들어댔다.
“리헤로스! 리헤로스를 보여줘!”
무지갯빛이 일렁이는데 평소보다 전환되는 속도가 눈에 띄게 느린 것 같아 불안했다. 설마 리헤로스를 못 찾는 건가. 역시 무슨 일이 생겼나. 나의 안일함 때문에 이 세계의 결말이 미궁으로 빠져버렸나 싶었다.
자신을 스스로 채찍질하는 것도 잠시, 금발이 모습을 드러냈다.
“하, 하아아…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는 몰라도 모든 만물에 감사했다. 그렇게 한참을 거울에 매달려 중얼대다가 내가 왜 창고로 가서 독약을 마시게 됐는지 곱씹어 보았다.
‘맞다…. 리헤로스는 날 죽이러 오고 있구나.’
이거 나름대로 심란해졌다.
평화로운 세계를 만들겠다는 다짐하던 그때, 마지막으로 보았을 땐 왼팔에 다치었던 그는 지금은 말끔히 나은 듯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그의 상태를 살피는 것이 끝나고 나서야 뒤에 보이는 전경이 매우 익숙한 것을 눈치챘다.
‘잠깐, 게헤나의 해변 아니야?’
어느새 게헤나까지 온 건가. 나는 대체 얼마나 오랜 시간 잠들어있던 건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나에게도 대비할 시간을 줘야 할 것 아닌가.
첨탑에 작게 난 창문으로 몸을 쑥 내밀어 밖을 살폈다. 성은 해변과는 그리 멀지 않아 금방 이곳으로 들이닥칠 것이다.
‘우선 페로부터 피신 시켜야 할 것 같은데. 페로, 듣고 있어?’
언제나 부르기만 하면 0.1초 만에 대답하던 녀석이 답이 없었다. 본관으로 내려가 샅샅이 뒤졌지만 페로는 끝내 모습을 보이지도, 답도 없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길이 없으니 답답하기만 했다.
─콰앙!
“가까이에서 들려. 벌써 온 건가?”
손끝의 떨림이 좀처럼 멎지 않았다. 정말 오고야 말았다. 나의 최후가. 죽음을 앞두고 있다는 것은 이리도 두려운 것이었다. 사형수의 심정이나 다름없었다. 이야기의 끝을 위해선 극복해야 한다. 숨어있어 봐야 목숨이 고작 몇 분 유지되는 것일 뿐이니 그가 찾기 쉽도록 왕좌로 향했다.
‘이곳에 처음 시작할 때도 왕좌였는데, 최후도 왕좌라니 태어난 곳으로 돌아간다는 느낌이네.’
시답잖은 감상까지 나오는 걸 보니 현실을 수긍한 건지 아니면 외려 무서워서 현실 감각이 사라진 것인지 모르겠다. 어느 쪽이든 침착해졌다면 다행이라고 위안으로 삼았다.
─끼이이익, 쿠웅
긴 왕좌의 방 끝에 있는 파랗고 큰 문이 열린다. 양옆으로 나 있는 여러 개의 발코니로부터 희미한 새벽의 달빛이 길을 만들고 있었다. 리헤로스는 그 길을 따라 걸어온다. 어디에서나 찬란한 태양처럼 독보적으로 빛나는 금발은 누군지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도망치지 않고 왔구나.”
“어떻게 네가….”
“오랜만에 재회하고 듣는 첫 대사 치곤 심플한데.”
“아니라고 말해.”
“뭘 말이지?”
“이게 진짜일 리가 없잖아.”
뭘까. 그가 날 죽이기 위해 달려온 줄 알았건만, 애매모호한 역치의 분노만이 느껴졌다. 아직 잔정이 남아있는 거라면 그의 불씨를 더욱 당기는 수밖에 없었다.
“여기까지 와 놓고도 부정하다니… 제정신인가? 동행자 ’크리스’는 마군을 이끄는 우두머리이자 마왕. 마군에 의해 고통받는 참상을 보며 네가 그토록 죽이고 싶어 하던 마왕. 이게 현실이라고.”
“너는 그 누구보다 정의로운 사람이었어. 내가 지켜봐 온 바로는 그랬어.”
“어리석긴, 그건 너를 속이기 위한 연극일 뿐. 난 모든 재앙의 씨앗이고 이미 뿌리를 내려 재앙은 꽃피우고 있어. 넌 그 뿌리를 뽑아내야 하는 것이 소명 아닌가. 부디 망설이지 않길 바란다. 그럼 네가 죽는 선택지밖에 없으니 말이야.”
왕좌에서 천천히 일어나 그와 마주 섰다.
─띵
[던전]
악의 권좌 : 마왕 아크리스
[시스템]
인원 제한: 1명
“그 정도 각오도 없이 온 건 아니겠지?”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