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리헤로스의 상처는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회복되었고, 이틀 만에 퇴원 절차를 밟고 숙소를 새로 잡게 되었다.
‘황당하다. 최근 출시된 게임 중 용사에 의해 목숨이 부지된 최초의 마왕 아닌가.’
어린이 만화에서는 악당을 고쳐 쓰는 경우가 많았지만, 이건 만화가 아니지 않은가. 그가 살려준 목숨이긴 해도 본능적으로 두려웠다. 공식으로 우호적인 상태로 밖을 나온 첫 발돋움이니 어떤 변수가 있을지 몰랐다.
“크리스!”
그가 애타게 찾는 목소리가 들렸다. 어둠 속에 있던 나는 찔끔 놀라 발끝이 움직였다. 그로 인해 굴뚝 안쪽 벽면의 잿더미가 부스스 떨어졌다.
“…….”
“…….”
“굴뚝 안에 들어가 있는 거야?”
“…….”
“내려와….”
그의 말에 힘없이 주르륵 미끄러져 내려갔다.
─퍼석
“거길 왜 올라갔어. 고양이야?”
“…….”
“여기가 그렇게 싫어?”
“싫다기보단… 어색해.”
“네가 있어도 되나 싶어서?”
“…….”
한숨을 작게 내쉬던 리헤로스는 물수건을 가져와서 내 얼굴을 북북 닦아주었다.
“오늘도… 왜 신분을 숨겼는지는 말 안 해줄 거지?”
“…….”
“언젠간 말해줄 거지?”
“모르겠어.”
이틀간 우리의 대화는 이런 식이었다. 나는 필사적으로 말하지 않고, 리헤로스는 집요하게 물어왔다. 그런데 리헤로스는 어찌나 인내심 강하고 착하던지 칼로 찔러가며 고문해도 시원찮을 텐데 묻고 답해주지 않으면 말았다.
‘내가 나쁜 짓 하지 않을 거란 확신인가? 무모하게.’
당연히 나쁜 짓 할 이유가 완전히 사라졌으니 하진 않겠지만 리헤로스는 내 속을 모를 텐데도 심각하게 남을 믿는 게 아닌가 싶었다. 꾹꾹 잿더미를 다 닦아주고 나서야 천천히 입이 열렸다.
“오늘은… 칼리고 기사단장이 호출해서 기사단에 결과 보고를 하러 가야 해.”
“그런데…?”
“마왕이 죽었다고 말할 거야.”
“…진심이야? 거짓말이 안 들킬 거로 생각해? 나도 너에게 필사적으로 숨겼지만, 결국엔 들통났잖아. 언젠간 알게 될 진실이야.”
“어떻게든 안 들키게 해볼게.”
“그게 말처럼 되면 얼마나 좋겠냐고.”
나 역시 주변을 오랜 시간 속여오긴 했지만, 들킬 것을 늘 상정하고 지냈기 때문에 의연했다. 현실 세계든 가상 세계든 세상에 비밀은 없다고 생각한다. 대책 없는 이 남자의 꽃밭에 강제로 끌어들여진 게 불안해졌다.
‘이러다가 더 참담한 최후가 기다리고 있는 거 아닌지 몰라.’
특히나 칼리고에게 들키면 옳다구나 내 목을 치려고 안간힘을 쓸 게 뻔했다.
“나 기사단에 가기 전에 같이 교회당에 가자.”
“교회당이라니….”
“가서 신탁 받을 수 있으면 좋을 것 같아. 앞으로 우리가 어떻게 이 사건을 어떻게 해결해 나가면 좋을지 같은 거 말이야.”
“흐음, 어쩌면 네가 믿는 신은 옆에 있는 놈을 당장 죽여라! 할 수도 있겠네.”
“그럴 리가….”
어디까지나 리헤로스가 막무가내로 날 살려둔 것이니 이 세계의 뜻은 정반대일 수 있다. 역시 마음의 준비를 하는 편이 좋겠다.
마족이라서 그런지 교회당이 생리적으로 꺼려졌는데 그가 사정에 사정하는 끝에 못 이겨 끌려 나왔다. 수도의 교회당도 엄청나게 무시무시하게 거대했다. 높게 솟은 첨탑은 마왕성의 첨탑을 연상케 하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마족이 믿는 신은… 카르말록스라고 했던가.’
내 머릿속에 강제로 말을 걸어왔던 게 아마 그 존재인 걸로 생각되었다. 그런데 소통이라 불리는 상호 작용을 시도할 방법은 따로 없어 보였다. 여태껏 만났던 마군단이나 마왕의 일기에서는 카르말록스가 종종 언급되었는데 대체 어디로 사라졌는지, 무얼 하고 있는지 불현듯 궁금해졌다.
‘설마 악신을 처치해야 하나?’
그렇다면 소통할 방법을 찾아서 리헤로스에게 이야기해주어야 한다. 그게 진엔딩인지도 모르지.
“들어가자.”
“아….”
“왜 그래?”
“신관이라던가 신성력이 있는 사람들이 날 알아보진 않겠지?”
“모르지 않을까. 걱정되면 내 뒤에 숨어.”
“내가 숨겨지겠냐?”
“체격이 나보단 작잖아.”
“묘하게 열받네.”
예전에도 나를 감싸주려 이리 행동했었는데 이번엔 그의 등판이 어느 때보다 드넓어 보였다.
“오늘도 오셨군요. 형제님.”
“안녕하십니까? 주교님, 오늘은 기도를 올리러 왔습니다.”
주교와 인사를 마치고 일렬로 늘어서 있는 긴 예배당 의자의 중간으로 함께 나란히 앉았다. 손을 모으고 이마를 기댄다. 어차피 내 기도는 들어주지도 않을 테니 기도하는 리헤로스를 슬며시 훔쳐보았다. 교회당의 스테인드글라스를 투과한 형형색색의 빛이 그를 아롱아롱 비추고 있다.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그의 모습은 한 폭의 그림과도 같았다.
‘잘 생기긴 했어.’
얼굴의 조각조각을 나노 단위로 훑어보고 있었다. 그러던 리헤로스가 눈을 떴고 황급히 안 본 척 눈을 감았다. 그런데 리헤로스 쪽에서 아무 말도 들려오지 않으니 이상해서 한쪽 눈만 슬쩍 떠보았다.
“…….”
“왜 그래?”
“답을 주지 않으시네. 너를 만나러 게헤나에 가기 전엔 들렸는데.”
“그땐 뭐라 그랬는데?”
“일단 너를 만나라고 하셨어. 그 뒤는 내가 바라는 대로 하라고.”
“…….”
“잠깐, 내가 바라는 대로 하라고 했으니….”
“네가 바라는 건… 뭔데?”
“그건….”
“…….”
“교화 아닐까?”
“교, 교화….”
범죄자 취급이 영 껄끄러웠다. 굳이 따지자면 범죄를 사주한 공조자가 맞긴 하지만.
“네가 해온 나쁜 행위만큼 착한 일을 하면… 하늘이 답해주지 않을까.”
“으음….”
육성게임 프X세스 X이커 에서도 비슷한 시스템이 있다.
‘업보 스탯을 낮춘다 이거지.’
불온한 행위를 저지르고 난 후에 오른 업보를 교회에 가서 참회하거나 봉사를 하며 낮추면 엇나가던 아이가 올바르게 자라 높은 등급의 직업을 가질 수 있었다.
“그래, 속는 셈 치고 해보지 뭐.”
“응, 나도 열심히 도울게.”
무작정 밖으로 나왔을 땐 어떻게 움직여야 할지 몰라 불안했는데, 목표가 세워지니 의욕이 생겼다. 착한 일이라면 리헤로스만 따라다니기만 해도 저절로 굴러들어 오지 않던가.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열심히 해보자.’
교회당 밖으로 나오니 늘 한결같이 화창한 날씨가 유난히 상쾌하게 느껴졌다.
“그럼… 먼저 돌아가 있어.”
“너는 어쩌고?”
“나는 기사단에 가서 보고를 해야 해. 같이 가면… 네가 불편해할 사람이 있을 테니까.”
“…….”
“역시 불편하지?”
“저번에 너한테 상처 입히려고 했던 일이 생각나서. 나도 같이 가야 할 것 같은데.”
“아아, 그건… 잘 해결됐어. 괜찮아.”
“그래? 그러면 굳이 내가 가서 초 칠 필욘 없지. 다녀와.”
“네가 초 친 적은 한 번도 없어.”
“기사단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할 텐데.”
나름대로 자학 개그를 친 건데 리헤로스는 영 심란해 보였다. 농담이라고 말을 덧붙이려는데 얼굴이 가까이 다가온다.
─쪽
그가 내 이마에 짧게 입 맞춘다. 화들짝 놀라 제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뭣, 뭐 하는 거야?!”
“교회에서 행운을 기원할 땐 이렇게 인사한대.”
“마족한테 무슨 교회의 행운이야! 제발 부탁인데 예고 좀 해줄래?”
“그럼 하기 전에… 네게 행운을 기원해도 되겠니? 이러면 될까?”
“여태껏 들은 말투 중 제일 짜증 나니까 그냥 하지 마.”
“아하하, 기분 전환하는 겸사겸사 가는 길에 네가 좋아하는 빵 사 먹어.”
“별로 안 좋아해.”
“또 거짓말한다. 얼굴에 다 쓰여 있는데.”
“…….”
리헤로스는 내가 행여 놓칠까 꾹꾹 금화 다섯 닢을 손바닥에 붙일 듯이 꾹꾹 눌러 쥐여주었다. 서둘러 떠나는 뒷모습을 지켜보다가 손에 쥔 금화를 펼쳐보았다.
“말한테 당근 주는 것도 아니고… 흡사 가축과 주인 같네.”
그깟 빵이 뭐라고 늘 먹으라고 챙겨주는 건가.
‘그래도 이왕 받은 거 시원하게 다 써주마.’
자연스럽게 발길이 이끄는 대로 빵집으로 향했다. 이곳은 올 때마다 늘 손님이 북적였고, 제빵사들은 번갈아 가 나오며 식힌 빵을 진열하기 바빴다. 그 누구의 관심과 방해 없이 조용히 원하는 것을 취할 수 있는 곳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더 이 장소가 편한지도 모르지.’
“어? 어어? 용사님 일행분 맞으시죠?”
‘제기랄.’
편하다고 생각하자마자 나를 알아보는 사람이 등장한. 이 정도면 내 생각을 읽히고 있는 게 아닐까 싶었다. 고개를 돌리자 소박한 차림새의 여성이 눈에 띄었다.
“저 기억하시나요? 이드랑제 백작저에서 일하는 웰라예요.”
“웰라? 목걸이 찾는 걸 의뢰했던 분 맞죠?”
“네! 이게 얼마 만이에요. 무사히 모험을 마치고 오신 것 같아 다행이에요. 벌써 이곳저곳 소문이 파다하던데, 리헤로스 님이 마왕을 쓰러트렸다는 게 사실인가요?”
“아하하… 네에… 뭐 그렇죠.”
내 입으로 내가 죽었다고 말하는 게 영 껄끄러웠다. 얼굴의 왼쪽 오른쪽 근육이 각기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는 것 같았다. 어색한 표정을 눈치챈 웰라는 내 눈치를 살피다가 말을 돌린다.
“저 혼자 말이 많네요. 민망하게.”
“아, 아니에요. 괜찮아요.”
“정말요? 다행이다. 제가 살짝 들은 건데 아크리스 님에게만 살짝 이야기해 드릴게요! 왕성에서 기념 연회를 열지 않을까 싶어요. 수도, 아니 왕국 전체의 축제라서 엄청 재밌을 거예요!”
“마왕 토벌 무사 귀환 축하 기념이군요.”
“네에, 저희 할머니가 어릴 적에 한 번… 그 후로 오랜만이니까 적어도 몇십 년은 됐네요! 리헤로스 님은 정말 대단하세요~”
“그렇죠. 엄청 대단하죠.”
“백작님도 리헤로스 님이 팔 부상만 안고 돌아오신 걸 알고 대단하다고 칭찬하셨어요. 그분을 영입하지 못한 거에 안타까움을 표하기도 하셨고요. 아아! 제가 말했다는 건 비밀이에요.”
“물론이죠. 제가 말을 전할 사람이 누가 있겠어요.”
“휴우, 저는 혼자 알고 있는 말을 어디에다 전하지 않으면 심장이 쿵쾅거려서 터져버릴 것 같거든요. 말하고 싶어서 혼났어요!”
웰라는 나쁜 의도가 아니겠지만, 백작저에서도 사용인들과 그다지 사이가 안 좋았던 걸 보면 여기저기 말을 옮기고 다니는 걸 고깝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만도 했다.
“그럼 조만간 백작저에서 뵙길 바라요. 그땐 저도 예쁘게 단장하고 있을 거예요!”
“오? 누구한테 잘 보이려고요.”
“아이! 그건 비밀이죠!”
‘리헤로스겠군. 하여튼 인기도 많아.’
웰라는 손 인사를 남기고 떠났다. 생각해 보니 빵 가게 한복판에서 수다스럽게 떠들고 있어 민망했다. 서둘러 먹고 싶은 빵을 골라 담아 계산하고 나왔다. 종이봉투에 차곡차곡 쌓여있는 빵을 하나씩 꺼내 베어 물며 여관으로 향하고 있었다.
“길을 비키시오!”
기마병들은 긴 작대기로 도로의 깃발을 치며 지나가자 왕실의 문양이 사라지고 리헤로스의 얼굴이 떠오른다. 광장의 중앙에 간이 단상을 세우더니 그 위에 선 두꺼운 갑옷을 입은 글라디우스 기사단 병사가 서신을 펼쳐 읽는다.
“마왕이 죽었다! 마군과의 전쟁이 끝났음을 선포하라는 왕명이오!”
“정말인가?”
“소문이 사실이군!”
“이제야 숨통이 트이네. 다행이야.”
“통행금지령을 해제하고 다음 달부터 한 달간, 종전 기념 축제를 열 예정이오! 모두 즐겁게 축제 준비를 하고 즐기기를 바란다고 말씀하셨소!”
“부지런히 준비해야겠구먼, 한 달 동안 장사하려면 바쁘겠어.”
“이야- 이런 날이 오긴 오네. 허허허.”
이드랑제 백작은 고위 계급의 귀족이니 며칠 동안 수집한 소문과 정보를 바탕으로 확정 지어 알고 있던 것 같다. 그걸 웰라가 주워듣고 나한테 줄줄 얘기했던 거겠지.
여관으로 돌아가는 길에 눈에 익은 공터가 보였다. 수도에 있을 때, 페로와 밀담을 주고받던 곳이다.
‘잊고 있었어. 페로는 어디 간 거지?’
머릿속으로 페로를 쉴 새 없이 불렀지만, 잠잠했다. 수도로 돌아오고 나서 정신이 없어 미처 챙기지 못했다. 한가롭게 빵이나 우걱우걱 씹어대던 스스로가 한심했다.
‘페로도 날 떠나버린 건가….’
봉투에 담긴 빵을 절반이나 해치웠지만 어쩐지 입맛이 없어져 남은 건 온전히 여관까지 들고 올 수 있었다. 뒤늦게 돌아온 리헤로스는 빵 봉투에 넉넉히 남은 빵들을 보고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크리스, 어디 아파?”
“아니….”
“근데 왜 빵을 남겼어?”
리헤로스는 이제 내 사정을 아니까 말해주면 함께 찾을 수 있지 않을까? 그래. 그라면 분명 도와줄 것이다.
“리헤로스, 나….”
─똑똑똑
입을 떼기가 무섭게 누군가 방문을 두드렸다.
“용사님, 계십니까?”
“무슨 일이시죠?”
“…저희와 함께 가주셔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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