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결전의 날이 밝았다.
이른 아침부터 눈을 뜬 리헤로스와 나는 곧장 무투대회가 열리는 경기장으로 향했다. 건물의 생김새는 콜로세움을 모티브로 한 것 같았다.
“설마 저기… 전부 경기장 들어가는 사람들인가?”
“정말?”
굉장히 이른 시간임에도 흡사 피난을 가는 것처럼 셀 수 없이 많은 인파가 광장 한쪽을 꽉 채우고 있었다.
“역시 사람들은 불구경 다음으론 싸움 구경을 좋아한다더니….”
“아하하, 아무래도 왕국의 전력을 증명하는 자리라서가 아닐까?”
그런 건 아니고 도파민에 절어있는 인간들이 대부분일 것 같다만 그냥 그렇다고 치고 넘어갔다. 경기장의 뒤로 돌아 참가자들이 입장하는 문으로 들어서려는데 병사 하나가 내 앞을 막았다.
“여기부터는 용사님 혼자 들어가십니다.”
“아… 그래요?”
“그럼 크리스는….”
“아크리스님은 관중석의 VIP석 쪽으로 모실 예정입니다.”
걱정스레 물었던 그는 경비병의 말에 안도한 듯 미소 지어 보였다.
“다행이다. 그럼… 다녀올게.”
“그래. 부담 없이 잘하고 와.”
예전의 어리숙한 리헤로스가 아니기 때문에 충분히 잘할 거라 믿었다. 오히려 칼리고를 찍어눌러 수많은 사람을 모두 놀라게 하지 않을까 싶었다.
‘칼리고가 분해서 엉엉 우는 걸 보고 싶다.’
까불어서 죄송하다고 무릎 꿇고 싹싹 비는 칼리고를 떠올리며 실실 쪼개고 있었다. 어느새 다른 경비병이 옆에 와있는지도 모른 채.
“아크리스님?”
“아… 네? 네.”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시나요? 제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또 다른 병사를 따라 경기장 내부로 들어섰다. 아직 관중은 단 한 명도 들어오지 않아 발소리가 텅텅 울려댈 정도였다.
“여깁니다.”
“여기가… VIP석인가요?”
“네.”
다른 관중석과 달리 쿠션이 조금 있는 식탁 의자처럼 보였다. 이 나라는 VIP 대우를 이런 식으로 하나 싶었다.
‘장난하냐.’
그렇다고 해도 나를 이곳까지 안내해 준 경비병에게 잘못은 없으니 묵례해서 보냈다. 심히 투덜거리고 싶었지만, 들어줄 사람도 없으니 꾹 다물고 의자에 앉았다.
‘리헤로스 경기만 보고 나가야지.’
다른 사람 싸우는 건 내 알 바 아니니 시작도 전에 리헤로스의 경기가 빨리 오기만을 바랐다.
몇십 분이 흘렀을까 경기장의 관문을 여는 것을 알리는 나팔 소리가 들리자 관중석에 사람들이 쏟아지듯 들어오기 시작한다.
“붐비는 사람들 사이에서 줄 서 있다가 온 게 아닌 것만으로도 감사해야겠는데….”
너도나도 앞자리에 앉겠다고 비집고 들어왔고, 싸우는 사람들도 있었다.
‘무투대회가 따로 있나. 이게 무투대회지.’
야만적인 모습을 보고 있자 하니 얼굴이 절로 구겨졌다. 그러던 중 누군가 내 옆자리를 차지하며 인사를 걸어왔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인사를 마치고 고갤 돌렸는데, 옆눈으로 느껴지는 시선은 신경 쓰이게 했다. 옆자리 녀석은 나를 보며 하염없이 방실방실 웃고 있다.
‘뭐지. 나를 아나?’
축제를 만끽하는 틈을 타 포교를 하거나 구걸하는 거라면 쫓아내려 했다. 한껏 경계하고 있으니, 상대는 나의 표정을 읽고 서운해하는 한숨 소리를 냈다.
“이야… 아무리 잠깐- 지나갔다지만 너무하신데.”
“네?”
“저 기억 안 나세요? 킁킁. 숲에서 칼리고 단장님이 용사님께 훈계하지 말라고 화냈었잖아요.”
“어 그걸 어떻게 알….”
“요정의 샘, 제가 알려드렸잖아요…. 히힛.”
“아!”
칼리고가 리헤로스의 몸에 흠집을 내려고 했을 때, 기사단을 나가겠다고 대뜸 우리를 따라왔던 고양이 기사였다.
“오랜만이네.”
“반말이라니, 킁킁… 이거 친밀도가 높다는 얘기죠?”
“똑같이 칼리고 불편해하니까 동질감 들고 반가워서 그렇지. 불편하면 높이고.”
“아니에요. 저는 좋아요오-”
말에 뼈가 있는 건지 아무 생각 없는 건지 모르겠다.
“기사단 그만뒀으면서 여기서 뭐해?”
“킁킁… 기사단을 그만뒀다고 해도 검술에 관심이 없어진 건 아니거든요. 사설 용병단에 들어갔는데 우리 용병단 애들이 출전하거든요.”
“아아, 일반 경기 보러 온 거구나?”
“용사님은 다른 거 보러 오셨어요?”
“난 용사 아니야. 아크리스라고 불러. 그야 특별 경기 보러 왔지.”
“네에 아리스님, 저는 트레이라고 부르세요. 특별 경기도 인기 좋더라고요.”
“아리스…?”
“애칭이에요.”
“…….”
난데없이 등장한 애칭에 붙임성이 좋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내 쪽부터가 대뜸 말을 놓았으니 그녀의 호칭에 굳이 토 달지 않았다.
“아리스님은 베팅하셨어요? 킁킁.”
“아니. 어차피 리헤로스가 이길 거라 별로 재미없을 것 같아.”
“에에, 진짜요? 그럼 더욱 거셔야죠.”
녀석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내 귓가로 다가와 소곤댔다.
“저도 용사님한테 베팅했거든요-”
“아하, 얼마나?”
“제 전 재산이요.”
“뭐?”
당연히 리헤로스가 이기겠지만 이런 무모한 베팅을 하는 사람이 어딨나.
‘리헤로스… 진짜 힘내야겠다.’
트레이는 그저 싱글벙글 신나있었다. 내 돈도 아닌데 심란해지는 것이다. 괜히 리헤로스가 졌다고 나한테 해코지하진 않겠지. 물론 리헤로스가 이기겠지만.
“시작하네용. 어라….”
“왜 그래?”
“원래 특별 경기를 친선경기라고 해서… 제일 처음 시간대에 넣거든요. 다른 검사들의 사기를 촉진시키기 위해서요.”
“오… 그런데?”
“이번엔 첫 경기가 아니네요. 킁… 그러고 보니 역대 무투대회 중 가장 많은 관중이 온 것 같기도 하고요.”
“아?”
리헤로스와 칼리고의 결투가 그냥 화젯거리인 사건이 아니라 수도, 아니 왕국 전체를 뒤흔들만한 결투였다.
일반 경기가 시작되니 콩나물시루처럼 끼어 앉아있는 관중들은 심심한 입을 달래거나 저들끼리 대화하는 데에 바빴다. 그들을 열심히 응원해 주는 것은 콜로세움에 오른 당사자와 연고가 있는 사람들뿐이었다.
‘전부 그 경기를 주목하고 있구나.’
리헤로스가 이 사실을 몰라서 다행이었다. 부담감으로 더욱 일을 그르칠 수도 있지 않은가. 오히려 이 상황을 알게 된 내가 더욱 긴장감에 휩싸였다.
점점 상위 대진으로 진행될수록 관중의 눈이 더욱 또렷또렷 해진다. 옆에 앉아있던 트레이도 같은 용병단 동료를 응원하는 것보다 뒤쪽의 대진 상대에게 응원을 보내고 있었다.
‘이렇게 노골적일 수가 있나….’
경기를 빠르게 끝내는 실력자면 더 좋아하는 것 같았다. 우리가 기다리는 건 이런 허접한 경기가 아니라는 듯이, 어서 해치우고 특별 경기를 보자고 보채는 느낌이었다.
결승 대진이 시작되니 사람들은 의욕적으로 응원하고 있었다. 대부분 아무나 이기라고 고함을 지르는 것에 가까웠지만 말이다.
“올해의 무투대회 승리는 세로바 입니다.”
“와아아아아아!!”
“이제 시상하겠네?”
“근데 이상한데요. 화관도, 무투대회 부상인 왕의 하사검도 안 보이네요.”
그러고 보니 말로만 승리를 축하하고 시상대를 올리거나 다른 준비는 하지 않고 있었다.
“아아, 알려드립니다. 본래 본 대회의 시상은 용사가 왕의 대행으로서 진행하려 했으나, 우승자의 이의 제기로 잠시 보류하기로 했습니다.”
“왜지? 무슨 일 있나?”
수많은 인파가 술렁대자 사회자의 목소리가 거의 묻혔지만, 그의 입 모양이 움직이는 걸 본 사람들은 알아서 잠자코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에- 그러니까. 용사가 왕의 대행인 것을 인정할 수 없다는 이유인데요. 특별 경기의 우승자가 시상하는 것으로 합의를 보았습니다.”
“뭐야? 이래도 돼?”
“세상에. 간도 크네.”
“이야, 우승자가 시상한다고?”
말도 안 됐다. 애초에 이 경기나 축제는 리헤로스의 승전보에 의해 시작된 것이 아닌가. 그럼 명예 시상자인 리헤로스가 당연히 해야 하고 우승자에게도 영예로운 처사인 것이 아닌가.
“아하하, 재밌게 됐네요. 킁킁.”
“어이없어… 왜 이렇게 된 거야?”
“아리스님 너무 화내지 마세요. 우승자인 세로바라는 놈. 글라디우스 기사단 소속이거든요.”
“…그런 거였군.”
감히 기사단장님을 두고 용사가 명예직을 하는 것이 아니꼬웠던 거다. 이 모든 시스템이 왕명으로 시작된 것일 텐데도 토를 다는 저 깡이 대단했다.
“저렇게까지 했는데 용사님이 이기시면, 글라디우스 놈들 배 아프겠네요.”
“맞아. 배 아플걸.”
리헤로스가 이긴다는 확신을 하곤 있다만, 만약에… 아주 만약에 리헤로스가 지면 그거대로 심각했다. 리헤로스를 우습게 볼 것 같으니 말이다.
우승자 세로바는 고개를 쳐들더니 관중석을 한번 쓱 훑는다. 그러다가 내 쪽으로 멈추더니 지그시 주시하는 듯했다.
‘어쩌라고.’
피식 웃는 세로바는 잔뜩 의기양양해서는 콜로세움을 빠져나간다. 경기장의 바닥을 정비하고 사회자가 다시 나오자 사람들은 흥분감을 숨기지 못했다.
“자,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특별 경기! 글라디우스 기사단장 칼리고와 용사 리헤로스! 용사 리헤로스와 글라디우스 기사단장 칼리고의 경기를! 지금! 시작합니다!!”
“와아아아아아아!!”
아무리 결승전 경기의 열기가 뜨거웠다지만 지금보다 더하진 않았다. 휘파람 소리가 끊이질 않았고 관중은 각기 자신이 응원하는 사람의 이름을 연호했다.
“리헤로스! 리헤로스!”
“칼리고! 칼리고!”
콜로세움 양극단에 있는 묵직한 철제문이 열렸고 그 안에서 리헤로스와 칼리고가 나온다. 수많은 인파가 내지르는 함성은 귀가 멀어버릴 정도였다.
“이겨라!! 너한테 오백만 골드 걸었으니까!!”
“지면 죽는다!!”
대놓고 협박까지 하는 도박 중독자도 있었다. 인류애를 잃을 지경이었다.
칼리고는 빨간색의 제복을, 리헤로스는 파란색의 제복을 입고 있었다. 글라디우스 기사단의 단복이 아닌, 새로 제작한 것으로 보였다.
“흐응, 친선경기인데 아주 철저하네요.”
“뭐가?”
“같은 조건에서 동등하게 대결하도록 방어구도 무기도 맞춘 거잖아요. 일반 경기는 모두 자신의 방어구와 무기를 가져왔는데 말이죠…. 킁킁.”
“그래, 그러네….”
기사단 측에서 준비한 물건이니 걱정이 안 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이 많은 사람의 눈을 속일 수는 없을 거다. 만일 조금이라도 이상 반응을 보이면 경기를 중단시킬 생각이었다.
두 사람은 일정 거리를 남기고 마주했다. 결연한 눈빛의 리헤로스, 감정이 없는 싸늘한 시선의 칼리고 사이엔 말로 형용 못 할 살기가 넘실댔다.
심판이 둘 사이에 깃발을 내렸다. 각자 검집에서 검을 뽑아 들어 준비 자세를 취한다.
“…….”
방금까지 함성으로 터져버릴 것 같던 장내는 그 누구도 숨소리조차 내지 않고 긴장감에 휩싸였다.
심판이 깃발을 들어 올리자 경기의 시작을 알리는 중저음의 나팔 소리가 울려 퍼진다. 동시에 칼리고가 리헤로스 쪽으로 파고들었다. 침묵하던 관중은 다시 저마다 소리치고 있었다.
─카랑!
검날이 맞붙자 작은 스파크가 튀어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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