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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왕님 망겜에도 엔딩이 있나요-57화 (57/127)

57화

“아악! 그렇게 휘두르면 어떡하냐!” “용사야 너만 믿는다!!”

“지면 안 돼!”

“칼리고 님! 꼭 이기세요!”

어느 한쪽이 밀리기 시작하면 환호와 야유가 뒤섞여 터져 나온다. 그 비율이 워낙 비등비등하여 누구의 편이고 누구의 적인지 모를 정도였다.

‘오히려 귀에 안 들어오니까 리헤로스도 신경 쓰이지 않을 거야.’

완력이 강해졌다 한들 그의 멘탈은 아직 너무나도 여렸다. 얼마 전, 주정을 부리던 사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던 것처럼 증오에 찬 욕을 들으면 안 그런 척해도 분명 흔들릴 테니 말이다.

─카앙!

칼리고의 검술은 말로만 들었지 얼마나 대단한지 눈으로 직접 확인할 길은 없었다. 오늘에서야 보게 되었고 첫 감상은 이랬다.

‘엄청 부드럽네.’

의외였다. 칼리고의 성격상 거칠고 난폭한 검술을 구사할 줄 알았다. 그런데 검술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지만, 칼리고의 동작은 하나하나가 섬세한 움직임이라는 것이 느껴졌다. 자신만의 스트라이크 존을 만들어 그 안에서만 검이 흐르는 궤도를 계산한 후 움직이는 것 같다고 할까. 불필요한 동작은 절대 하지 않았다.

‘한마디로 급소만 정확하게 노리고 있다는 거지.’

─카각, 드드드득. 쨍!

칼리고의 무감정한 얼굴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파악조차 어려웠다. 리헤로스는 용케 잘 막아내고 칼리고에게 위협이 될만한 공격도 서슴지 않고 했다.

리헤로스의 내려 베는 동작을 피한 칼리고는 크게 올려 베는 자세를 취했다.

“위험해!”

나도 모르게 심취해서 목소리를 높였다. 다른 소란에 묻히긴 해서 닿진 않았을 것이다. 과몰입한 관객 중 하나에 불과하였다.

─쐐액

리헤로스는 상체를 뒤로 꺾어 올려 베는 궤도를 피했다. 코끝이 거의 닿을락 말락 한 정도로 아슬아슬했다.

‘이런 말 하긴 싫지만, 괜히 기사단장이 아니긴 하군.’

맞붙은 검을 밀어낼 때 몸의 무게를 한껏 싣는 리헤로스의 특징을 파악한 모양이다. 그래서 잠시 피했을 때의 흐트러진 자세를 노리고 물러섰다가 일격을 날린 것 같았다.

“옳지, 잘한다!”

“묵사발을 내버려!”

공격을 가까스로 피했지만, 칼리고의 검은 멈추지 않았다. 가로로 연속 베기를 하며 리헤로스의 자세가 완전히 무너지는 것을 유도하는 듯했다.

계속해서 뒷걸음질 치다 보니 고르지 못한 바닥에 걸려 뒤로 넘어질 듯 휘청였다. 빈틈을 잡아낸 칼리고의 검이 그의 가슴을 향해 쇄도했다.

“안돼…! 리헤로스!”

무투 대회이긴 해도, 그의 검은 리헤로스에 대한 살기가 느껴졌다. 진검인데 가슴을 찌르려는 행위를 스포츠맨십으로 여길 수가 없었다. 초조한 마음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버린다.

─훽

날렵한 백 텀블링으로 가볍게 피해냈다. 리헤로스의 특장점인 재빠른 몸놀림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

“잘한다. 리헤로스!”

두 번, 세 번 백 텀블링하여 칼리고와 멀찍이 떨어졌다. 하지만 그것은 방어 태세를 위한 동작이 아니었다. 리헤로스는 곧바로 칼리고에게 달려들었다.

─쨍!

다시 검이 서로 맞붙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몇 번이고 검을 부딪쳤다. 점차 고조되는 싸움은 환호와 야유를 하던 사람들도 숨을 죽이게 했다.

그러던 중─

─카가가각!

리헤로스는 칼리고의 검 손잡이 가까이의 검날을 파고들었다. 칼리고의 공격만 방어하던 리헤로스는 이제 없었다. 몰아치는 검은 칼리고도 당황스러운 듯했다.

‘리헤로스가 겨누는 곳이 일정하지 않은데, 검술이 아마추어라던가 허접해서일 리는 없다.’

그러고 보니 어떤 위치에 따라서는 칼리고가 막기 벅차하는 것처럼 보였다.

검이 맞는 지점에 따라 쥐는 자세나 들어가는 힘이 다르다 보니 여러 곳을 두드려가며 칼리고에게 혼란을 주려는 모양이었다.

─카캉, 캉!

리헤로스는 무언가 확신한 듯한 몸놀림으로 검을 연속으로 두드리듯 내려쳤다. 칼리고는 애써 허리를 비틀어 검에 쏠리는 힘을 완충하려 했으나 무리인 듯했다.

─뎅그렁

칼리고의 검이 손에서 떨어졌다.

결과를 기다리는 관중은 물을 끼얹은 것처럼 조용했다. 마침내 심판의 깃발이 리헤로스 쪽으로 올라가자 일제히 환호를 질렀다.

“와아아아아아!”

나 역시도 나이에 맞지 않게 제자리에서 방방 뛰어댔다.

“리헤로스! 잘했어!”

“용사니임, 최고예요!”

감격스러운 마음을 주체 못 해 옆에 있던 트레이와 얼싸안았다. 월드컵 직관 왔다가 결승 진출 골을 넣은 것 같은 분위기에 가까웠다. 모두가 친구고 동료였다. 어깨동무하며 승리를 축하했다.

“용사님이 절 살리셨네요!”

“이길 줄 알았어!”

칼리고와 리헤로스는 처음 시작했던 자리로 돌아가 허리를 숙여 서로에 대한 예를 지켰다. 리헤로스가 길을 못 찾아 헤매느라 아무것도 못 한때가 있었는데, 어엿한 검사로 거듭난 게 뿌듯했다.

“무투대회 시상은 용사 리헤로스가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칼리고는 아무렇지 않은 척 담담하게 장내를 빠져나갔지만 어쩐지 그 뒷모습이 초라했다. 이어서 왕의 하사검과 화환, 우승자 세로바가 나왔다. 리헤로스는 화환을 세로바에게 씌워줬고, 하사검을 건네었다. 그런데 시상자에게 인사는 기본인데 그저 망부석처럼 받고 서 있기만 했다.

“저놈, 끝까지 저러네.”

“어휴 알량한 자존심 세우는 거 아니겠어요. 킁킁. 신경 쓰지 마세요. 어차피 승자는….”

“리헤로스니까.”

그깟 예의 하나 안 차렸다고 화나진 않았다. 가장 중요한 것, 어차피 우승은 리헤로스였으니까. 당분간 기사단 훈련장 근처는 가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갔다간 무슨 꼴을 당할지 모르니 말이다.

“그럼 저는 배당-금 받으러 갈게요오. 떼부자 되겠어요.”

“그래. 잘 가.”

“아리스 님도 조심히 가세요오.”

트레이는 바로 경기장을 나갔고 다른 관중도 천천히 퇴장하기 시작했다.

‘리헤로스 보러 가야겠네.’

관중석 구석에 관계자만 출입하는 문을 열고 내려갔다. 어차피 이미 식도 끝났으니 제재하는 사람도 없었다.

선수 대기실로 보이는 곳을 일일이 열어가며 리헤로스를 찾았고, 의외로 넓고 쾌적한 곳에 그의 대기실이 있었다.

“리헤로스!”

“크리스!”

왠지 모르게 그의 얼굴을 보니 벅차올라 달려가 와락 끌어안았다. 그도 내 허리를 끌어당겨 꼬옥 안아주었는데, 그의 몸이 밀착하니 제정신이 돌아왔다.

‘미쳤나 봐. 왜 이랬지?’

그의 가슴팍을 꾹 밀어내 떨어졌다. 헛기침하면서 차분히 경기에 대해 말을 꺼냈다.

“대단하던데? 칼리고랑 처음 맞붙은 거면서.”

“그래 보였으면 다행이다. 사실… 당시엔 엄청 막막했거든.”

“사람들 환호 소리 들었잖아. 나만 그렇게 생각한 거 아니야.”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네 목소리가 생생히 들렸거든. 그래서 더 집중됐던 것 같아.”

“바보야. 들릴 리가 있냐? 사람이 그렇게 많았는데.”

“나한테 잘한다고 하지 않았어?”

“아닌데.”

습관적으로 0.1초 만에 부정은 했지만, 정말 그랬는지 기억을 되새김질해 봤다. 잘 모르겠다.

“네가 듣고 싶은 것만 들어놓고 듣기 뭘 들어?”

“말했잖아. 칭찬 고플 나이라고.”

“아하? 그래그래. 이리 와 칭찬해 줄게.”

그의 목에 팔을 올리고선 헤드록을 걸었다. 다른 손으로 머리를 잔뜩 헝클여 주었다.

“잘- 했다. 아주 잘했어!”

“아, 아아?!”

원하는 만큼 잔뜩 괴롭히고 나서 놓아주었다. 잘생긴 얼굴 위에 까치집 안착하여 있었다.

“푸하핫! 잘 어울린다.”

“그래? 앞으로 이렇게 하고 다닐까.”

“으응, 그래라. 너무 매력적이라 사람들이 줄줄 따라다니겠는데.”

“세상에. 리헤로스! 머리가 그게 뭐예요!”

문 쪽에서 끔찍한 걸 본 사람인 양 비명에 가까운 높은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리는 동시에 몸을 돌리니 분홍색 머리의 여성이 이쪽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백작님.”

“오랜만에 뵙네요. 백작님.”

리헤로스와 나는 스피나의 손등에 입을 맞추며 예를 갖추었다.

“멋진 경기 잘 봤어요. VIP석에서 보니까 그대의 표정까지도 생생하게 보이더라고요.”

“저도 VIP석이었는데, 백작님도 계셨었나요?”

“어라, 이상하다. VIP만찬 회장에 아크리스는 없던데요.”

“…….”

역시 그 자리는 VIP석이 아니었나 보다. 생각해 보면 세상에서 가장 초라한 VIP석이었다. 당연한 걸 아무렇지 않게 수용하고 있었다.

‘기사단 놈들 짓이겠군. 유치하네! X발…!’

이런 거로 치졸하게 구는 게 꼴같잖았다. 내가 더 말을 하지 않으니 리헤로스가 다시 대화를 이어갔다.

“즐거운 관람 되셨다니 다행입니다.”

“마지막에 칼리고 경의 검을 날려버리는 장면에서는 체면이고 뭐고 통쾌해서 소리 질렀다니까요. 후후. 아! 이야기가 더 길어지면 시간이 부족하니 서둘러 갈까요?”

“어딜 가나요?”

“후후, 역시 잊고 계셨군요? 그동안 왜 연락이 없나 했더니….”

“연락이라면….”

“저와 약속했잖아요. 옷 맞춰 입기로! 시종들이 이른 아침부터 여관에 찾아가도 없고! 밤에도 없었다면서요! 이러시면 저 정말 서운해요.”

맞다. 이번에야말로 이드랑제 가문이 용사 리헤로스를 후원했다고, 제대로 사람들 앞에 소개하겠다며 예복을 맞추기로 했었다. 우리는 무투대회 준비로 여관에 붙어있기는커녕 계속해서 대련하러 나왔고, 늦은 시간이 되어서야 잠을 청했으니 말이다.

“그랬었죠. 정말 죄송합니다. 하지만 저희는 괜찮….”

“어허, 잔뜩 기다리게 만들어놓고 그게 할 소리예요! 그 이야기는 이미 끝났잖아요? 어서 마차에 타세요. 두 번 얘기하지 않겠어요.”

“리헤로스 님과 아크리스 님은 밖에 준비된 마차에 타시면 됩니다.”

“아저씨 고마워요. 그럼 도착지에서 봐요.”

하긴 백작의 처지에서 약속을 기다리게 하는 평민을 용서할 수 없을 텐데도 이 정도 반응이면 굉장히 유했다. 우리는 말대꾸 없이 경기장 밖에 준비되어 있는 마차에 몸을 실었다.

‘데자뷰 같은데.’

백작가 연회 때보다는 비교적 시간이 여유로웠다. 모험을 급히 떠날 필요도 없고, 다음 일정이라곤 연회뿐이었으니 말이다. 그리하여 일전에 갔던 가게가 아닌 더 크고 화려한 곳에 도착했다.

“서로 어울리는 걸로 잘 골라줘요. 알겠죠? 두 사람의 안목 믿고 있을게요.”

미적 감각은 장담할 수는 없지만 무난한 걸로 고르면 되지 않을까 싶었다.

“어차피 주인공은 너라서 오래 걸릴 것 같으니까… 나부터 빨리 고르는 게 낫겠는데.”

“주인공 같은 게 어디 있어.”

“여기 있다. 어쩔래.”

마네킹에 입혀져 있는 디자인이나 옷걸이에 걸려있는 것을 휙휙 넘겨보았다.

‘대충 까만 걸로….’

까만 턱시도를 짚으며 재단사에게 말했다.

“이게 좋을 것 같아요.”

“너무 무난하지 않아요? 연회에 입으실 옷이라 들었는데.”

“무난한 게 좋죠.”

“흐음, 한 번 입어보세요. 입고 나면 생각이 달라질걸요.”

그래봐야 색상이나 옷 디자인이 오묘하게 다른 것들 아닌가. 원래 세계에서도 옷에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살았기에 더욱 흥미가 없었다.

시착용 턱시도를 받아들고 탈의실에서 한 겹 한 겹 겹쳐 입었다.

‘엄청 귀찮네….’

대충 걸치는 것을 끝내고 나왔다. 거울에 비춰본 내 모습은 그저 평범하기 그지없었다. 내가 딱 원하는 스타일이었다.

“좋은데요.”

“아니야….”

“네?”

“…아니야. 아니야. 예쁜 얼굴이 팍 죽잖아! 시커메 갖고 안 그래도 하얀 얼굴이 시체처럼 창백해 보이잖니!! 얘들아! 그거 가져와라!”

“네! 선생님!”

분명 아까까지만 해도 차분하던 재단사는 급발진하더니 직원들을 시켜 무언갈 가져오게 시켰다. 묵직한 상자는 표면에 벨벳 원단이 감겨있어 고급스러웠다. 뚜껑을 살짝 열어 내용물을 확인하더니 구경할 새도 없이 재빨리 닫는다.

“후우… 이것만은 꺼내지 않기로 스승님과 약속했는데….”

“대체 뭘 꺼내시는….”

“쉿!”

“…….”

“얘들아. 탈의실에 같이 들어가서 입혀드려라.”

“넵! 선생님!”

직원 둘은 나를 붙들고 탈의실로 함께 들어가더니 이것저것 꽂고 입히고 펼쳐주었다. 손이 어찌나 빠른지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끝났습니다. 선생님!”

“응, 나와봐.”

재단사가 손가락을 탁 튕기자 커튼이 걷혔다. 핏은 아까보다 잘 맞는 옷을 입은 것처럼 딱 맞긴 했다.

“너무 하얗지 않아요?”

“이거야! 이거라고! 마침내 주인을 찾았네. 용사님, 이리 와 봐요. 본인의 파트너가 어떤지 감상 좀 얘기해 봐요.”

이런저런 옷을 구경하던 리헤로스는 재단사의 말에 내 앞으로 다가왔다. 그의 눈은 놀란 것처럼 휘둥그레져서는 느릿느릿 입을 열었다.

“정말…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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