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툭, 도그르르륵
발끝에 차인 돌멩이가 저 멀리 굴러가다가 힘이 다해 멈춘다. 숲길 한복판에 홀로 놓인 돌멩이가 내 모습과 다름없다고 생각하니 한숨이 자연스레 나왔다.
“후우우우….”
공주와의 약혼이라 하면 정석적인 용사의 엔딩 루트였다. 워낙에 다정한 말과 행동은 자꾸 내 처지를 잊게 만들곤 한다.
‘난 조연이었지.’
내 멋대로 그의 의도를 넘겨짚다가 그것이 사실이 아님을 확인하는 순간 자괴감에 빠져버린다. 고독한 마음은 그 누구도 찾을 수 없는 무인도에 뚝 떨어진 것 같았다.
너저분한 머리를 쓸어 넘기기 위해 팔을 드니 낯익은 회색 털이 품 안에서 떨어졌다.
‘주인님은 혼자가 아니래도요!’
순간 머릿속에 말을 걸어온 듯 생생한 페로의 목소리가 들렸다. 다시금 찾아온 적막이 환청임을 인지하게 했다.
‘그러고 보니 그간 축제 즐긴다고 페로를 완전히 까맣게 잊고 있었잖아.’
페로는 유일한 내 편이라 믿고 있었지만, 외롭고 힘들 때만 보고 싶다고 찾는 꼴도 퍽 이기적이었다. 만일 녀석이 무사히 생존해 있음에도 나를 찾아오지 않는 이유는 내 이기심에 질린 바람에 떠난 것일지도 모른다. 무신경했던 지난날이 후회되어 페로의 털을 꾹 쥐었다.
‘어차피 혼자가 익숙했잖아. 이 정돈 혼자 감내할 수 있어.’
끊기지 않는 어둡고 눅눅한 생각들을 벗 삼아 발이 닿는 대로 걷기만 했더니 어느새 깊은 산중으로 들어와 있었다. 작은 동물들과 풀벌레들의 울음소리가 낯선 이의 방문을 경계하는 것만 같았다.
‘곧 어두워질 텐데, 너무 깊이 들어왔네.’
지금이라도 뒤로 돌아 숲을 빠져나가야겠다는 생각이 미치는 그때, 어디선가 이질적인 속삭임이 들려왔다.
“……티리스.”
‘사람 소리? 만일 여관이면 오늘 밤은 묵고 가는 게 좋겠지?’
어차피 돌아가지 않더라도 리헤로스는 크게 신경 쓰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귀를 기울이며 발걸음을 옮기니 어느 통나무로 된 오두막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쉽지만 여관은 아닌 모양이네.”
여전히 중얼대는 소리는 끊이질 않았다. 본채의 창문 안을 들여다보았는데 불도 켜져 있지 않았고 아무도 없었다. 뒤로 조금 돌아가니 본채보다 작은 크기의 창고 같은 것이 나왔다. 대체 뭘 하고 있기에 쉴 새 없이 읊조리는 건지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살짝 열린 문 사이로 내부를 들여다보았다.
“우세드-스테르 노 레-티리스.”
“우세드-스테르 노 레-티리스.”
“우세드-스테르 노 레-티리스.”
알 수 없는 언어를 중얼대는 세 명의 인물은 검은 로브를 푹 뒤집어쓴 채, 웅웅대는 검푸른 마법진을 중심으로 서 있었다. 흐릿하게 빛을 내던 마법진은 인물들이 주문을 외우면 외울수록 빛을 강하게 발산하기 시작했다.
“오스티아-포레”
“논레스트릭드 인-테 토페쥬.”
“주인이여, 강림하소서!”
“강림하소서!”
“오오… 주인이시여. 우리의 제물을 받아 되살아나소서.”
“되살아나소서!”
“되살아나소서!”
마법진 중앙에 있는 ‘제물’이 인간임은 분명했다. 무릎을 꿇은 채 고갤 떨구고 있는 ‘제물’은 정신을 잃은 건지 미동도 없었다. 기분도 우울한데 이상한 일에 휩쓸리기 싫어 돌아서려다가 멈췄다.
‘이렇게 된 거 착한 일이나 하나 쌓을까.’
생명을 제물 삼아 소환한다면 틀림없이 악의 축일 테니 재지 않고 수상한 의식을 저지하기로 했다. 무기가 될만한 것을 찾기 위해 의식이 벌어지는 오두막의 옆을 살펴보았다. 마구간의 앞, 건초더미에 아무렇게나 꽂혀있는 포크 삽을 뽑아 들었다.
붕붕 휘둘러보니 예전에 썼던 창과 비슷한 길이와 무게감이었다.
‘이 정도면 충분해.’
포크 삽을 뒤로 숨긴 채 다시 의식의 장소로 돌아갔다. 열린 문틈으로 얼굴을 빼꼼히 들이밀며 능청스레 말을 걸었다.
“실례합니다.”
“흠? 뭐냐!”
“여긴 어떻게 왔지?”
“길을 잃어서 그런데요.”
“꺼져라.”
“참 내… 기껏 준비한 대사도 있는데 받아주면 덧나나.”
“꺼지라고 했다!”
셋은 내 말을 들을 성의조차 보이지 않고 일제히 날카로운 단검을 뽑아 들었다. 나도 환대에 걸맞은 대응하기 위해 문을 발로 차 열어젖혔고, 숨기고 있던 포크 삽을 돌려 앞으로 겨누었다.
─키잉
날렵하게 파고들어 온 수상한 인물들의 검은 포크 삽으로 막았다.
날 사이에 끼인 검을 비틀어 돌리자 가볍게 두 개의 단검은 나가떨어졌다.
막대기 부분으로 두 녀석의 관자놀이를 강타하니 맥없이 쓰러진다.
“죽어!”
남은 한 명은 옆구리 쪽으로 달려 들어왔다.
검을 떨어트리게끔 막대 부분으로 팔을 내려쳤지만, 절대 놓치지 않는 집요함을 가진 놈이었다.
“질기네.”
“너도 제물이 되어라!”
검을 쥔 손은 핏줄이 불룩불룩 튀어나올 정도로 힘을 주고 있었다.
막무가내로 휘둘러대는 통에 검날이 얼굴 쪽으로 스쳐 지나갔고, 가까스로 피해 머리카락의 끝만 조금 잘려 나갔다.
‘더 가까워지면 불리하겠는데.’
앞서 몸 싸움했던 두 사람과 미묘하게 다른 힘 차이로 인해 막대로 두들겨 패는 정도론 대응이 어려웠다.
─팍
뒤로 돌아 바닥에 포크 삽을 꽂고 그것을 지지대로 삼아 몸을 회전했다.
─빠악!
회전하는 힘으로 놈의 턱을 차버리니 나동그라져 일어나지 못한다.
워낙 질긴 놈이었기에 혹시라도 벌떡 일어나 칼을 겨눌 수도 있었다.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경계를 했으나, 수 초가 지나도 움직임이 전혀 없어 뒤늦게 숨을 몰아쉬었다.
“후… 싱겁다 싱거워.”
구겨진 옷매무시를 가다듬고 의식 현장을 둘러보았다. 주술의 중단으로 인해 빛을 뿜어내던 마법진은 점점 힘없이 사그라지고 있었다. 무릎 꿇고 있는 ‘제물’ 쪽으로 다가가 상태를 살폈다. 바닥에 굴러다니는 검을 집어 들어 포승줄을 끊어냈다. 남자는 탈진한 모양인지 몸이 축 늘어져 있었다.
“저기, 괜찮아?”
그의 어깨를 잡고 흔들자 구겨져 있던 옷자락이 스르륵 흘러내렸다. 멀리 있는 곳에서 스치듯 보았을 땐 몰랐지만, 착장이 눈에 익었다.
“글라디우스 기사단이잖아?”
“…….”
정신을 잃은 줄로만 알았던 갈색 머리칼의 남자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울고 있다던가 안도하는 등, 인질의 기본적인 표정과 태도를 떠올렸는데 예상과 달리 경계심 높은 얼굴로 노려보고 있었다.
짙은 눈썹 때문인지 선이 굵고 매서운 느낌을 주었지만, 차분한 녹색의 눈동자 때문일까? 어딘가 모르게 풋내가 났다. 지저분한 검댕들이 묻어있더라도 날렵한 이목구비가 묻히지 않는 미남형의 얼굴이었다.
“뭐야. 정신이 들어?”
“너는….”
“고맙다는 말은 됐어.”
“용사의 동행…자 맞지?”
“첫마디가 감사합니다 가 아닐 줄은 꿈에도 몰랐네.”
“왜… 왜 나를 구해준 거지?”
“그럼 죽게 놔둘 걸 그랬나?”
앞으로 상체가 쏠려 기우뚱 넘어질 뻔한 것을 잡아주니 휙 뿌리친다.
“당신은…… 우리 기사단을 싫어하잖아.”
“여기서 기사단 얘기가 왜 나와? 아 씨… 그냥 갈 걸 그랬네!”
“거봐. 맞잖아….”
“하아, 굳이 따지자면 너희 기사단이 싫다기보단 너희 윗대가리가 싫은 거지.”
“단장님에 대해 함부로 말하지 마.”
“참나… 이해가 안 되네. 네 처지가 어떤지 알고 있어?”
“그러면 여기에서 죽게 내버려 둬.”
“쓸데없는 자존심 부리지 마. 네가 예뻐서 구해주는 거 아니니까.”
“…….”
“…그런데 생각해 보니 짜증 나네. 네가 봐도 칼리고는 제정신이 아니지 않아? 몇몇은 이미 알고 있는 것 같더만.”
“함부로 말하지 말라…! 크윽!”
“왜 그래?”
누가 보면 내가 때린 줄 알겠다. 자세히 보니 왼쪽 허벅지가 핏물로 번져있었다. 과다출혈까진 아니지만, 꽤 길게 베여있어 환부에서부터 피가 졸졸 흐르고 있었다.
“칼에 찔렸나 보네. 가자.”
“날 어디로 데려가려는 거야….”
“그냥 묻지 말고 가.”
“나를… 발가벗겨 묶어놓고서 인두로 지지겠지, 기사단의 기밀을 캐내어서 단장님을 협박할 셈인가…. 후우… 그 정도로 나는 입을 열지 않는다…. 헛수고야!”
“…….”
나보다 더한 넘겨짚기 충이었다.
‘생긴 거와 달리 개그 캐 인가.’
한숨을 아주 길게 내쉬고선 녀석의 팔을 내 어깨에 걸고 부축했다.
“뭐, 뭐 하는 거야!”
“너 고문하러 간다.”
“이럴 줄 알았어!”
“그럼 절뚝거리는 다리로 도망쳐 보던가. 도망가면 금세 따라잡아서 두 배로 아프게 고문해버릴 거야.”
“으윽…!”
“농담이니까 의심 말고 따라와. 그런 불쾌한 취미는 네 단장이나 가지고 있겠지.”
“…….”
혓바닥을 슬쩍 내밀어 약 올렸다. 그는 분하지만, 슬슬 본인의 처지를 이해하는 듯했다. 점점 반항의 의지는 사라지고 고분고분 따랐다. 이미 날이 많이 저문 데에다 상처가 그리 깊진 않은 듯해서 병원으로 가는 대신 집으로 데려와 응급처치하기로 했다.
묵고 있는 여관, 방의 문턱까지 무사히 도착하여 문을 열었다. 리헤로스는 아직 도착하지 않은 모양인지 내부는 차가운 공기만이 감돌았다.
“발 걸리지 않게 조심하고.”
“…….”
“악 무거워! 갑자기 버티고 난리야?”
“…내 발로 호랑이 굴에 들어가진 않을 거야.”
“도와줘도 난리야? 진짜 고문해버린다!?”
녀석의 허리를 꼬집으니 버티던 무게가 덜어졌다. 절뚝절뚝 방 안으로 들어서는 그에게 의자를 내어 주었다.
“여기 앉아 있어.”
“용사는… 없나?”
“걔는 아주 바쁘거든. 왜? 유명인 볼 생각에 들떠있기라도 했어?”
“아니야!”
“근데 용사를 찾고 난리야.”
“…….”
상처 소독을 해야 하건만 여기까지 오는 것도 제법 험난했기에 바지를 순순히 벗을 것 같지 않았다. 바지를 가위로 쭉 찢으니 사내는 엉덩이를 들썩거렸다.
“엄살은.”
“아파서 그런 거 아니야…!”
“그러시겠죠.”
일전에 사두었던 상비약을 가지고 와 허벅다리 위에 소독약을 콸콸 부은 후, 붕대를 감기 시작했다.
“큿….”
“내일 날이 밝으면 병원으로 가. 몇 바늘은 꿰매야 할 것 같거든.”
“…….”
“알았어?”
“다시 한번 묻지.”
“응?”
“대체 왜… 나를 구해준 거야?”
“왜라고 하면….”
마왕일 때 진 업보만큼 착한 일을 하기 위해서인데 그에게 구구절절 설명할 이유는 없었기에 말을 돌렸다.
“너는 나랑 왜 척지는데?”
“내가 먼저 물었….”
“내 대답엔 네 대답이 중요해서 그렇지.”
“그건….”
“글라디우스 기사단과 단장님을 모욕해서?”
“……그래.”
“너랑 나는 초면 아니야? 기사단과 단장님을 모욕했다는 근거는 있어?”
“…….”
“분명히 단원들 사이에서 떠도는 소문을 주워들었겠지.”
정곡을 찔린 듯 입을 꾹 다물었다. 기사단 내부에서 우리를 어찌 생각하는지는 짐작했다. 그런데 적이라 칭할만한 세력은 사라진 지 오래임에도 불구하고 생판 본 적도 없는 녀석까지 경계할 만큼 공공의 적이 된 건 전혀 반갑지 않았다.
‘내부에서 분열되면 앞으로 공주의 부군…으로서 국정을 다스려야 할 리헤로스에게도 좋지 않으니까.’
묘하게 윗배가 쓰려왔다. 그래서 더욱이 객관적으로 말할 수 있었다.
“충고하겠는데 기사단과 너를 동일시하지 마.”
“글라디우스 기사단에 입단한 이후로 기사단과 나는 하나다. 절대 분리될 수 없는 게 당연한 거 아닌가.”
“너는 ‘기사 단원’인 걸로 만족하는 거야? 그럼 기사단이 없어지면 너는 뭐가 되는데?”
“난…….”
“기사단원이라는 틀 안에 갇혀 있지 말라고.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너희 기사단이 우리에게 무례했다는 사실을 객관적으로 보라는 말이지.”
“…….”
나는 단호히 말을 이었다.
“난 칼리고가 저렇게 된 데에는 그의 행패를 방관한 기사단원들의 탓도 있다고 생각하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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