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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왕님 망겜에도 엔딩이 있나요-62화 (62/127)

62화

“무, 뭐라고!”

“시끄러워.”

그의 목소리가 높아지자 감고 있던 붕대를 꽉 조였다. 불쾌함을 토로하던 표정은 금세 울먹이는 표정에 가까워졌다.

‘귀엽네.’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웃음소리에 사내의 얼굴은 원망으로 변했다. 시시각각 변하는 표정은 꽤 흥미로웠다.

“그래서 난 몇 번이고 너희 단원이 위험에 빠지면 구해줄 거야. 기사단이나 칼리고와 너희는 별개니까. 그게 널 구해준 이유야.”

“…….”

“칼리고는… 음, 구해주긴 싫은데 정작 큰일이 닥치면 구해주지 않을까 싶네.”

“그런가….”

“그래. 그러니 너도 객관적으로 생각하는 게 좋지 않을까?”

“왜 내가 객관적이지 못하다는 거지?”

“남의 이야기만 듣고 와서 우리를 적대 세력으로 인지하고 경계했잖아.”

“네가 우리 기사단을 공격했다고 들었어. 단장님을 걷어찼다고….”

“우리가 언제 너희를 공격- 아… 설마 그때 일인가?”

“역시 무슨 일이 있었군….”

“전후 설명도 없이 공격당했다고만 하면 경계할 만도 하네. 그렇지만 그때는 불가피했어.”

“불가피하다니! 사람을 걷어차는 데에 이유가 있단 말이야!”

“하아아- 칼리고가 그저 심기가 불편하다는 이유로 리헤로스의 몸에 상해를 입히려 했거든. 기사단원들은 그저 참아라, 금방 지나갈 거다, 그리 말했고.”

“그, 그런 일이… 있었다고?”

“그래. 누구 하나 칼리고의 재수 없는 태도를 지적했으면 좋았을 텐데 전부 눈 감고 넘어가는 형국이었지.”

“…….”

“현재의 기사단 내부 상하관계는 건강하지 않아. 독이 될 게 뻔해. 그러니 충고하는 거야.”

꼼꼼히 감긴 붕대의 끝을 잘라 매듭지었다. 그리고 반대편 허벅지를 찰싹 때렸다. 근육 진 다리는 단단한 곤약처럼 탄력 있었다.

“이제 가봐. 다음부턴 생명의 은인에게 감사 인사는 해라.”

“…….”

팔자를 그리고 있는 짙은 눈썹은 꽤 심란해 보였다. 앞장서 문을 열어주니 그는 넝마가 된 바지와 절뚝이는 다리를 이끌고 천천히 걸어 나간다. 여관 밖으로 완전히 사라진 걸 보고 나서야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조용히 제자리로 돌아왔다.

‘충고를 듣든 말든 쏟아내니 기분이 낫네.’

솔직한 말로 글라디우스 기사단과 오해를 풀고 싶어도 칼리고는 우리와 대화할 의사가 없었고, 단원들도 그의 말이면 무조건 따랐다. 진지하게 입장을 전할 상대가 있었단 것만으로 대청소를 마친 직후와 버금가게 개운했다.

약을 담은 통을 정리하고 핏자국이 남은 바닥을 닦아내었다. 청소가 끝났다고 생각한 시점에 문이 열렸고, 나의 금발 룸메이트가 모습을 드러냈다.

“어? 늦게 오네.”

“응, 오늘은 다른 날보다 늦게 끝났어.”

“무슨 일을 그리… 아니다 그래…. 밥은?”

그에게 저녁 식사를 차려주기로 했었거늘 짧은 시간 안에 있던 여러 사건으로 인해 차마 준비하지 못했다. 그가 밖에서 먹고 왔길 진정 바랐다. 그런데 식사 여부는 관심 없고 낯선 이의 방문을 눈치채기라도 한 것인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방에… 누가 들어왔었어?”

“나 참 너 없는 동안 이상한 짓이라도 했을까 봐?”

“그게 아니라…….”

이내 리헤로스의 시선은 어딘가에 꽂혀 떨어지지 않았다. 그 방향을 쫓으니 내 허벅다리였다. 흰 바지 위에 짙은 갈색으로 눌어붙은 혈흔이 선명하게 보였다. 다른 것을 치운다고 옷차림은 미처 신경 쓰지 못했다.

“피… 맞아?”

“아… 이거. 맞긴 한데….”

“어디 다쳤어? 무슨 일이 있던 거야. 누가 그랬는데!”

“아니, 아니! 진정해. 내 피 아니야.”

“네 피가 아니면…?”

“그게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오늘의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던 중, 시장에서 들었던 마을 주민의 말이 떠올라 혀끝에 제동이 걸렸다.

‘용사와 공주님이 약혼할 것 같다던데?’

리헤로스가 사사로운 사건의 자초지종을 알게 됐다간 또 성가실 정도로 깊게 파고들게 뻔했다.

‘어차피 약혼 일로도 충분히 정신없을 텐데. 나 같은 거에 시간 뺏기고 싶을까.’

축제가 끝난 지 얼마나 됐다고 눈 뜨기가 무섭게 왕성에 불려간 것을 보니 약혼은 속전속결로 진행될 것 같았다. 그러니 굳이 상세히 얘기할 필욘 없을 것 같아 간략하게 요약했다.

“길바닥에 사람이 쓰러져있길래 숙소로 데려와 치료해 준 것뿐이야.”

“정말?”

“내가 왜 거짓말을 하겠어.”

“그런 거라면 다행이지만…. 좋은 일 했네. 착하다.”

“됐다. 이 얘긴 그만해. 국왕 만나고 왔댔지?”

“아아, 응.”

“무슨 얘기 했어? 뭐 준대? 작위나 영지 같은 거?”

“아… 아니야. 별 얘기 안 했어. 신경 쓰지 마.”

“우리 사이에 숨기는 거 없자며?”

“…….”

눈썹을 치켜드니 머뭇대던 그의 윗입술과 아랫입술이 조금씩 떨어졌다.

“왕족은 멀리 못 나가니 바깥은 어떤지, 그간 어떤 모험을 했는지… 같은 이야기들을 풀어드렸어.”

뭉뚱그려 나온 대답은 전형적인 둘러대기였다.

‘거짓말. 국혼에 관해 이야기 나눴겠지.’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날까. 소문에 의하면 공주와의 혼담이 오고 가는 게 분명할 텐데 어째서 숨기는 걸까. 내가 미덥지 않아서?

습관적으로 여러 가지 추측하던 중 멈췄다. 리헤로스가 내 손을 잡아 왔기 때문이었다.

“있지 크리스. 나흘 뒤에 옆 마을에 같이 갈래?”

“갑자기 왜? 의뢰라도 받았어?”

“그건 아닌데… 그냥 묻지 말고 같이 가주면 안 될까?”

“흐음…….”

뭔진 몰라도 시답잖은 걸 숨기고 있는 거겠거니 싶었다.

‘어쩌면 그때 국혼 사실을 이야기해 주려는 걸까.’

리헤로스의 손안에 갇혀 있는 손가락을 조금씩 꿈지럭댔다.

“그러지 뭐. 집에만 있어서 할 것도 없는데….”

“그래? 잘 됐다.”

“할 일 없다는 게 잘 된 거냐?”

“아니 그런 얘기가 아니라….”

“됐다. 서러워서 일자리를 찾든지 해야지.”

“크리스….”

한껏 예민해진 신경은 불쾌한 감정으로 전이되어 일파만파 커졌다. 손을 세차게 뿌리치고선 방을 박차고 나왔다.

─쾅!

발을 쾅쾅 구르고 찍어대며 걸었다. 왜 이리 짜증이 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가 할 일이 없어 잘 됐다고 해서?

나에게 숨기는 게 있어서?

설마 공주와 약혼한다고 해서?

‘그런다고 한들 왜 기분이 나쁘지?’

그가 공주와 결혼한 이후, 엔딩 플래그가 세워져 집에 돌아갈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고마울 일이다. 오히려 불명확한 미래에 확실한 이정표가 세워졌으니 할 일도 명확해졌다.

‘약혼 전까지 쥐 죽은 듯 조용히 살자.’

괜한 분란 일으키지 말고 조용히 엔딩만을 기다리면 된다. 그것이 엑스트라가 가진 숙명 아니겠는가. 용사의 손에 몸이 갈기갈기 찢기지 않은 것만으로 감사해야 할 처지에 그에게 신경질을 부려대다니, 오늘 구해준 기사단원보다도 배은망덕하기 그지없었다.

‘그래 유자현, 성질 죽여. 특별한 사이도 아니고 왜 서운해하는 건데.’

생각을 멈추기 위해 다른 생각을 하고, 또 다른 생각으로 뻗어버리니 미칠 지경이었다. 양손으로 뺨을 짝짝 두드리고 머릿속에 무한대로 재생되는 영상을 정지시킬 확실한 방법을 세웠다.

“술 마시러 가자.”

술이야말로 쉴 틈 없는 뇌를 마비시키는 데에 탁월하다. 곧바로 인근의 펍으로 발길을 돌렸다.

이미 날이 어둑해진 탓에 길거리는 주홍빛 램프 불이 하나둘씩 켜지기 시작했다. 어둠을 헤치고 들어선 펍은 수염 난 아저씨들로 북적였다. 그들끼리 떠들기 바빠 장내는 매우 시끄러웠다. 취하면 이 소음도 멀게만 느껴질 것이다. 곧장 바 앞으로 다가가 바텐더에게 바로 주문했다.

“맥주 큰 잔으로 하나요.”

“선불이요. 은화 여섯 닢.”

호기롭게 주머니에서 화폐를 꺼냈는데, 여섯 개의 동그란 금속이 나왔지만 필요한 은색의 화폐는 세 개뿐이었고, 모두 구릿빛이었다.

“…….”

“물이나 드릴까?”

“아뇨. 술 주세요. ……제일 싼 거로.”

“으휴. 세 닢이요.”

은화 세 닢을 바 위에 올리니 바텐더는 노골적으로 크게 한숨을 쉬며 몸을 돌렸다. 뒤편에 가장 크고 들여온 지 얼마 안 된 것 같은 오크통 레버를 당겨 잔을 채웠다.

‘딱 봐도 대용량 싸구려 가성비 술 아니야?’

내용물이 출렁여 흐를 정도로 잔을 강하게 탁 내려놓더니 다른 손님 쪽으로 가버린다. 흰 거품이 퐁퐁 터지는 표면을 주시하다가 한 모금 들이켰다.

‘맛없어….’

예상대로였다. 대한민국엔 가성비 술도 퀄리티가 올라갔는데 여긴 자본에 충실한 맛을 낸다.

그렇다고 해도 거지인 내가 마실 수 있는 술이라곤 이것뿐이고, 아까워서 남길 수도 없는 마당에 볼칵볼칵 들이키기만 했다.

‘암만 술이 아쉬워도 그렇지! 자존심 상하네.’

싸구려 술을 들이켤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된 이유를 생각해 보니 그 끝엔 리헤로스가 있었다. 울컥하는 마음에 식도에 때려 붓듯이 삼키고 있으니 누군가 내 옆에 스르륵 다가와 앉는다.

“안녕.”

남자는 금발에 녹안을 가진 남성이었다. 외모는 평범하다는 말이 가장 잘 어울린다.

“누구…?”

“아까부터 지켜봤는데 많이 마시더라. 괜찮아?”

“많이 마시든 말든… 댁이랑 무슨 상관이야?”

“나랑 한 잔 더 할래?”

“…한 잔 더 하고 싶어도 돈 없어.”

“그래서 죽상이었구나. 내가 사줄게.”

“진짜?”

“응.”

사내의 평범한 외모가 급격하게 잘생겨 보이기 시작했다. 웬 떡이지. 밝아진 내 표정을 본 그는 손짓으로 바텐더를 부른다.

“여기, 맡겨놨던 거 줘.”

이 펍의 단골인 모양이다. 나와 대화할 땐 똥 씹은 표정이던 바텐더는 씩 웃으며 잔 두 개와 글이 잔뜩 적혀있는 바틀 두 병을 들고 와 우리 앞에 따라주었다. 아래에는 금빛처럼 보이는 연갈색의 양주와 위에는 파란색의 양주가 섞이지 않고 층을 이루었다.

“술 잘 마셔? 이거 엄청 독하거든.”

“어쩐지 색깔부터 예사롭지 않네. 이 술 이름은 뭔데?”

“마왕의 영혼이래.”

“왜… 그런 이름이 붙게 된 건데?”

“글쎄, 왜일까?”

“왜인지 궁금한가? 마군의 상징색인 푸른색은 알지? 소문에 의하면 마왕의 눈동자가 금색이라 하더라고. 그래서 마왕을 연상케 한다는 의미에서 이 술은 ‘마왕의 영혼’이라 불리지. 워낙에 도수가 높아서 마시면 게헤나로 열리는 문이 보이는 것 같다는 이유에서도 있다네.”

바텐더는 불쑥 우리 얘기에 끼어들더니 말을 마치자마자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긴다.

얼빠진 상태로 잔을 들여다보고 있자 옆자리의 남자는 내게 손을 뻗더니 옆머리를 넘겨주었다.

“그러고 보니, 너도 예쁜 금안을 가지고 있네.”

“뭐어… 그런가.”

“푸핫, 반응이 왜 그래?”

그는 어차피 공식적으로 마왕은 죽은 것으로 되어있으니 모를 테지만 식겁했다. 급히 잔을 들어 그의 잔에 쨍 부딪히며 아닌 척 둘러댔다.

“마왕이랑 비슷한 취급 받는 것 같아서.”

“비슷하면 뭐 어때, 나는 나쁜 사람이 좋더라. 관능적이잖아.”

“난 착한 사람이 좋아.”

“하하! 나는 어때. 착하지? 너한테 비싼 술을 맛보게 해줬잖아.”

“그러네.”

영혼 없는 대답을 보내고서 한 모금 들이켰다. 식도의 모양이 느껴질 정도로 찌릿한 감각이 타고 내려간다. 케케묵어 식도에 들러붙은 체증도 함께 내려가는 것만 같았다.

사내는 옆에서 쉴 새 없이 조잘댔지만, 기계적인 대답 외엔 별달리 할 이야기가 없었기에 마시는 데에만 집중했다.

어느새 잔은 바닥을 드러냈고, 그와 동시에 눈앞이 휘청휘청 흔들렸다.

‘도수가 세긴 하네. 겨우 한 잔 마셨을 뿐인데 어지러워.’

“난 이만 가볼게. 술은 고마웠어.”

“벌써 가려고? 데려다줄게.”

“됐어.”

마다해도 이름 모를 사내는 나를 부축해 주었다. 펍을 나와선 내 손짓에 순순히 길을 따라 걸었다. 묵고 있는 여관 앞에 도착하자 그가 따라 들어올 것처럼 문 쪽으로 직진한다.

“이제 됐으니까 가. 고마웠어.”

“나도 같이 올라갈래.”

“미쳤냐? 본 지 얼마나 됐다고?”

“깊이 친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웃기지 마.”

나를 부축하고 있던 그는 우악스레 벽으로 밀어붙인다. 등이 강하게 부딪혀 순간 숨이 턱 막히는 것만 같아 얕게 신음했다. 사내의 표정은 금세 험상궂게 돌변했다.

“너나 웃기지 마. 술값은 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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