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먹고 튀려고 했어? 어이가 없네.”
잊고 있었다. 인간이란 자고로 대가 없이 호의를 베풀지 않는다. 인간 불신의 정점에 있던 내가 방심을 하게 될 줄은, 어쩌면 이것도 대가 없이 다정하기만 했던 리헤로스에 익숙해져서 일 것이다.
“윽… 돈으로 갚으면 되잖아.”
“지금 당장 줄 수 있어? 못 하지?”
“……내일, 내일 줄게.”
“어쩌지? 내일이면 두 배는 내야 해. 그게 한 잔에 금화 두 닢짜리 술이라고.”
“거짓말 마. 그게 어떻게 금화 두 닢짜리야?”
“그래? 내기할까? 자신 있어? 다시 펍으로 돌아가서 확인해 보면 되니까.”
“…….”
사실이든 아니든, 놈은 주인장과 친해 보였기에 어떤 작당 모의를 할지 몰랐다. 당연하게도 내 쪽이 불리했다. 애초에 목적이 뚜렷한 터무니없는 요구에 가까웠다.
“내일 두 배로 갚으면 되잖아!”
“그건 내가 싫은데?”
“뭐?”
“오늘 갚는다고 하면 싸게 쳐줄게.”
놈은 바지 버클을 툭 풀더니 내게 밀착했다. 골반에 닿는 더러운 감각이 몽롱한 정신을 단숨에 깨게 했다.
“저리 안 꺼져?”
“큭큭, 나 혼자 즐겁자는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튕겨?”
“…….”
“잔뜩 예뻐해 줄게.”
“하, 씨…….”
“응?”
“씨X!! 꺼지라고!!”
무릎으로 놈의 가랑이 정중앙을 힘껏 올려 찍었다. 묵직한 물주머니 같은 것이 뭉클 느껴졌고, 가격하기가 무섭게 사내는 기절하듯 뒤로 넘어갔다. 그 어느 가냘픈 소리를 내지도 못하고 입만 뻐끔대고 있었다.
“X만 한 게. 좋은 말로 할 때 꺼질 것이지. 뭘 예뻐해? 안 그래도 기분 X 같은데 더 X 같게 만들고 있어. 줘 터지게 패고 싶은 거 참은 거니까 하늘에 감사하며 살아가라. 알겠냐? 두 번 다시 내 눈앞에 띄면 그 X만 한 거 떼다가 마빡에 붙여버릴 거니까.”
참고 있던 욕이 쏟아져 나왔다. 입안에 고인 침을 바닥에 탁 뱉고선 여관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그런데 그 앞에 우두커니 서 있는 인영을 발견하고는 나도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른 리헤로스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으며 내 쪽으로 다가왔다.
“…….”
“…크리스.”
“왜 나와 있어? 잘 시간 아니야?”
“밖이 소란스럽길래.”
“흥… 용사님, 정의의 사도다 이거냐? 온갖 일에 참견하러 다니게.”
“네 목소리가 들린 것 같아서 그랬어.”
“…….”
그럼 뭐, 다른 사람이었으면 참견 안 했을 거란 말인가. 말을 항상 이런 식으로 애매하게 하는 건지 속이 부글부글했다. 이러니 속절없이 그의 말에 기분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것 아닌가.
“웃기고 있네. 다른 사람이었어도 튀어 나갔을 거면서.”
“술… 얼마나 마신 거야?”
“내가 얼마나 마시든 네가 알 게 뭐야.”
“…들어가자. 밤공기 차갑다.”
“그러지 않아도 들어갈 거야.”
술이 다 깬 줄 알았으나, 머리끝까지 났던 열이 팍 식어버려서인지 한걸음 디딜 때마다 비틀거렸다. 곧장 그가 다가와 부축해 주었다. 나도 모르게 그에게 기대고 싶어지려 해서 밀어냈는데, 그럴수록 더욱 나를 제 쪽으로 당겼다. 옆구리를 지탱해 주는 손으로 인해 몸은 흔들리지 않았지만, 마음만큼은 주체하지 못하고 흔들리고 있었다.
***
울렁거리는 윗배를 부여잡고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 창으로부터 들어오는 그림자의 위치를 보아하니 평소보다 더욱 늦게 일어났다는 사실을 깨달은 참이었다.
습관처럼 옆 침대를 보았는데 오늘도 어김없이 리헤로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역시나 왕궁으로 갔겠지.’
점점 그의 부재가 익숙해지려 한다. 침대 밖으로 느직느직 기어 나오니 거실 테이블 위에 쪽지가 보였다.
“새삼스럽게 웬 쪽지….”
쪽지 위엔 금화 다섯 닢이 올려져 있었다. 설마 어젯밤 술 마신 거 뱉어내라고 시비 걸렸던 걸 모두 들은 걸까.
‘그걸 다 들었단 말이야? 쪽팔리게.’
그럼에도 금화의 존재는 반가웠다. 자립할 수 있을 때까진 약간의 생활자금이 필요했으니까. 금화를 주머니에 욱여넣고 뒤늦게 쪽지를 펼쳐보았다.
[다녀올게. 네가 좋아하는 빵 사 먹어. 술 마시지 말고.]
민망했던 기분도 잠시, 행동 양식을 꿰뚫어 보는 문장에 소소한 짜증이 올라왔다. 쪽지는 내려두고 곧바로 옷을 챙겨 입었다. 크게 호흡을 들이마시고 허공에 다짐에 가까운 소리를 질러댔다.
“일하자 일! 사람은 생산적인 일을 해야 정신이 건강해진다!”
지금은 사람보다는 인외에 가깝지만, 몸이 나태하면 정신이 해이해지는 건 종 구분 없이 절대불변 법칙 아니겠는가. 몸을 바쁘게 움직이면 우울감을 느낄 새도 없는 데다 리헤로스와 부딪힐 일도 적어지겠지.
‘빙의되기 전에도 구직활동을 했었는데, 여기에서까지 하게 될 줄이야. 구직용 어플도 없고, 발품 팔아 일자리를 구하는 수밖에 없겠지.’
지체할 것 없이 곧장 수도의 큰 시장의 한쪽, 게시판이 여러 개 줄 세워 서 있는 곳으로 향했다. 우글우글한 사람들 틈으로 비집고 들어가 벽보를 훑어보며 할 수 있을 만한 일을 뜯어내었다. 한 장 한 장이 모여 한 다발이 되었고 귀중품이라도 되는 것처럼 품에 소중히 안아 들었다.
‘이 많은 곳 중 하나 정돈 나를 써주겠지.’
설렌 마음으로 내디딘 첫 가게는 평범한 채소 가게였고, 수레에서 물건을 나르는 수준의 단순노동 업무였다. 가게 안으로 조심스레 들어서자 주인이 인사를 건넨다.
“어서 오세요. 오늘 채소 싱싱하니 한번 둘러보고 가세요.”
“안녕하세요. 혹시 아직 사람 구하시나요? 벽보 보고 찾아왔는데….”
“아아, 미안해서 어쩌죠? 이미 구했어요. 지난 벽보인데 아직 붙어 있었나 보네요.”
“그렇군요. 수고하세요.”
가게 주인과 나는 어색하게 마주 웃었고, 그 기류를 버티기가 힘들어 황급히 가게 밖으로 튀어나왔다.
‘그래. 처음부터 잘 되면 이상하지.’
아직 손에 남은 전단이 한참 많이 남았기에 미련 없이 발을 뗐다. 다음은 작은 식당의 주방 업무였다. 기본적으로 칼질은 할 줄 아니, 레시피만 배우면 쉽게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실례합니다.”
“몇 분이세요?”
“그게, 이 벽보 보고 찾아왔는데요.”
식당으로 들어서자마자 전단을 들이밀었고, 그것을 본 주방장에게 질문이 돌아왔다.
“주방 경력은 얼마나 되세요?”
“경력은 없어요.”
“저희는 경력자만 뽑아요.”
“네? 그래요? 전단엔….”
“아래에 작은 글씨 보시면 쓰여 있어요.”
“…….”
개미 눈곱만 한 작은 글씨로 ‘5년 이상의 경력자 한정’이라고 적혀있었다. 조건을 다른 것보다 크게 써놓아야 하는 것 아닌가. 거절당한다는 건 생각보다 뼈아팠지만, 일일이 에너지를 낭비할 수 없었다. 남은 벽보는 충분했기에 자신 있었다.
‘기죽지 마! 분명히 이 중 하나는 나를 써줄 거야!’
하지만, 기합을 넣은 것도 잠시. 그 이후로 방문한 여러 가게에서 돌아온 대답은 다음과 같았다.
“저희는 여자만….”
“아이고 이런, 우리는 인간만 뽑는데.”
“저희는 서비스 직종이라 잘 웃으셔야 하는데….”
“문 당기시오라고 쓰여있잖아요. 밀고 들어오시면 어떡해요.”
이런저런 이유로 거절당하기 일쑤였다.
‘젠장….’
그 많던 전단은 어느새 손바닥 위의 눈처럼 순식간에 사라져버렸고, 단 한 장만이 남아 있었다. 이것마저 실패한다면 현실에서도 게임에서도 구직 실패한 백수로 낙인찍혀 자괴감에 빠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작은 바에서 서빙… 성별 무관, 연령 제한 없고, 신입도 가능하다고 써 있어. 좋아 가보자.”
공고를 몇백 번은 더 꼼꼼히 살피고 나서야 의기소침함이 남아있는 발걸음에 약간의 자신감이 붙었다.
지도상으로는 시장과 가까이 붙어 있는 줄 알았는데, 골목길을 굽이굽이 깊숙이 들어가고 나서야 작은 간판이 눈에 띄었다. 나무에 음각으로 문양을 판 형태인데 워낙 작고 알아보기 힘들어서 하마터면 지나칠 뻔했다.
‘이런 곳에서 장사해도 사람이 있어?’
X스타그램 카페 같은 걸까. 일전에 X스타그램에서 유명한 카페를 찾는데 입구 찾기가 어려워서 한 시간 넘게 빙빙 돌았던 것을 생각났다. 그런 역할의 가게가 게임이라고 없으리란 법은 없다.
가게 주인에게 어떤 좋은 인상을 심어줘야 할까 고민을 거듭한 뒤, 입가에 뻣뻣한 미소를 머금은 상태로 문 손잡이를 당겨 열었다.
─끼이익
안은 18평 남짓한 작은 술집으로 보였다. 잔잔한 음악이 깔려있었는데, 찾아오기 어렵다는 내 생각과 달리 꽤 많은 사람이 자리 잡고 있었다. 바의 끝으로 다가가 가장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사람에게 말을 걸었다.
“안녕하세요.”
“한 분이세요?”
“그게… 이 벽보 보고 왔는데, 아직 직원 뽑으세요?”
공손히 양손으로 전단을 내밀어 보였다. 매사 툴툴거리고 짜증이 가득한 나도 업주 앞에서는 한없이 순한 양이 된다. 구직자의 비애라 할 수 있다.
“그럼요. 딱 필요한 때에 와주셨네요.”
“다행이네요. 면접은 어떻게 보시나요?”
“면접은 따로 없고요. 바로 들어가서 유니폼 입고 나오시면 돼요.”
“그…런가요?”
“네네.”
요즘 같은 시대에 인간이 과도한 호의를 베풀면 그에 상응하는 대가가 따른단 것이 머릿속을 치고 지나갔다. 게다가 얼마 전에 호되게 당했기에 주인의 조건 없는 친절이 굉장히 신경 쓰였다.
“그럼 저는 서빙을 하면 될까요?”
“네네, 그리고 손님들 옆에 앉아 간단하게 말동무해 주면 돼요.”
“…….”
그 말에 대화를 나누고 있는 손님 옆, 나란히 앉은 직원 쪽으로 시선이 흘렀다. 그것이 주인이 원하는 대로 ‘간단한 말동무’이면 정말 좋으련만, 당연하게도 그러지 않았다. 수상할 정도로 조건을 안 본다 싶었다.
“…죄송합니다. 마음이 바뀌어서요.”
“아쉽네요. 손님들이 좋아하실 텐데, 생각 있으면 와요.”
이곳은 시급을 몇 배로 불러준다고 해도 오지 않을 것이라 단 한 톨의 미련도 없이 가볍게 문을 나섰다.
벽보를 바닥에 버렸고, 내 손에 남은 것은 0개.
우려했던 대로 아무런 수확이 없었다. 전부 거절당한 충격은 뒤늦게 밀려왔다.
“하, 하…하하하… 어디 나가서 곡예라도 해야 하나.”
정신줄을 잡기가 어려워 미쳐버린 생각은 사람들의 이목을 끌만한 스킬을 써서 돈을 버는 방법뿐이었다.
그러나, 스킬 창을 열고 나서 경악을 금치 못했다.
[캐릭터 스킬]
오르쿠스 | ✖ LOCK
케르베로스 | ✖ LOCK
데스데모나 | ✖ LOCK
…더보기
스킬 대부분이 잠겨 있었다.
“개 미친…! 그럼 남아있는 게 없어?”
수도로 돌아오고 난 후, 쓸 일이 없어 전혀 신경 쓰지 않은 부분이었다. 스킬창의 스크롤바를 쭉 내리자 가장 아래에 있는 스킬만이 잠금 표시가 없었다.
[캐릭터 스킬]
…
데스페란도 | ✖ LOCK
페르체로 | 단일 | 쿨타임 450초
데보티오 | 단일 | 쿨타임 360초
공간이동 | 일반 | 쿨타임 240초
그마저도 쿨타임이 매우 길어졌다.
‘젠장, 젠장! 대체 왜 이러는 거야?’
이유는 알 수 없었고 그 누구에게도 물어볼 수 없었다. 해결되지 않을 고민을 붙잡고 있을 수만 없다. 일자리를 알아보고 나서 천천히 해결책을 찾아봐야 할 것 같다.
“하아… 젠장…… 이 방법까지 쓰긴 싫었는데….”
더 이상 쓸 일이 없을 것만 같던 포탈을 열고 프린치피움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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