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리헤로스가 옆에 있는 아침. 이상하게 낯설었다. 입으로 잘 들어가지도 않는 아침을 먹고 함께 옆 마을까지 걸어가기로 했다. 성문을 나서도 붙잡지 않는 병사들, 줄지어 수레를 끌고 들어오는 상인들을 보니 완전한 평화가 찾아왔다는 체감이 들었다. 온갖 탈것이 지나가는 걸 물끄러미 보고 있으니 리헤로스가 나를 툭툭 건드렸다.
“마차 안 타도 괜찮겠어?”
“응? 옆 마을까진 별로 안 멀잖아.”
“알겠어. 다리 아프면 얘기해.”
“하면 업어주기라도 하게?”
“당연하지.”
“됐다. 그러다 둘 다 지쳐서 숲 한복판에서 조난될라.”
“어차피 숲에서 자는 건 익숙하니까 괜찮지 않을까? 모닥불 없이 잔 적도 있잖아.”
“바보야. 그때랑 같냐? 세상을 구한 용사님 체면이 있지.”
“너만 비밀로 해주면 되지.”
“진짜 바보 같아.”
픽 터져 나오는 웃음은 의도하지 않아도 늘 그와 있으면 자연스럽게 나왔다. 무슨 이야길 해야 할지 고민하지 않아도 되고, 그저 시시껄렁한 이야기도 받아주는 편안한 사람이었다.
‘이제 그가 왕성으로 들어가면 이런 대화도 더는 없겠지.’
즐겁게 얘기를 나누다가도 머릿속 한편에 명명백백한 사실이 반짝이게 되면 주체할 수없이 착잡해졌다.
내가 입을 다무니 그도 도착할 때까지 잠자코 걷기만 했다.
“후우, 다 왔다. 피곤하지?”
“아니야 별로 안 피곤해.”
“정말? 체력이 많이 붙은 모양이네.”
“그런가…….”
“자, 이쪽이야.”
수도와는 조금 다른 건물 양식이 다른 도시에 왔음을 직관적으로 느끼게 해주었다. 광장을 지나 주택단지로 들어섰고, 가장 끝 쪽에 아직 개발되지 않은 여럿 부지 사이에 우뚝 솟아있는 2층의 저택이 보였다. 리헤로스는 그 앞에 멈춰 섰다.
“여기야.”
딱 봐도 새로 지은 건물이었다. 한두 푼 들여 어쭙잖게 지은 것도 아닌, 공수가 많이 든 것 같은 절제된 느낌의 고급스러운 저택이었다.
‘설마 신혼 별채를 자랑하려고?’
그런 거라면 정말이지 궁금하지 않은 정보였다. 반면 그의 표정은 빙글빙글 미소가 맴돌며 해맑아서 더욱 심란해졌다.
“…….”
“어때?”
“묻기 전에 여기가 뭐 하는 곳인지 내가 알아야지.”
“우리 집이야.”
“어?”
“네가 돌아갈 곳을 만들어주고 싶었어.”
“뭐…? 무슨….”
“이제 게헤나 마왕성이 아닌 여기가 네 집… 그리고 우리 집이야.”
“우리…집이라니.”
내가 들은 걸 온전히 믿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게 무슨 말이지? 이 남자의 온기는 무방비할 때 훅 치고 들어와 막아낼 도리가 없었다.
“빨리 보여주고 싶어서 엄청나게 서둘렀어.”
“설마… 아침 일찍 나갔다 오는 게 이것 때문이었어? 국왕 폐하를 알현하러 갔던 건?”
“응, 폐하는 오전에 잠깐 인사드리고 곧장 공사 현장으로 왔었어. 작업 잘 되고 있는지 보는 겸, 내 힘도 조금 보탰지. 이거 때문에 늦게 들어오기도 했거든.”
“…….”
“마음에… 안 들어?”
“아… 아니… 너무 좋아.”
“다행이다. 네가 싫어할까 봐 걱정했어. 나 혼자 들떠있나 싶기도 했고.”
싫어할 리 만무했다. 내가 돌아갈 곳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사무치는 고독감에 빠져있던 때가 있었다. 그걸 알아챈 걸까. 게헤나는 폐허가 되어버렸으니, 방황하는 걸 신경 쓰고 있었던 걸까. 그 의도가 어떻든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워낙에 표현에 궁색한 삶을 살아왔던지라 어색하게 말을 더듬기나 했다. 그는 내 얼굴을 한참 살피더니 싱긋 미소를 지어 웃는다.
“들어갈까?”
“으…응.”
리헤로스는 내 손을 잡아 이끌었다. 문을 열어 저택의 내부로 들어서자 원목 위에 흰 페인트를 칠한 깔끔한 복도가 펼쳐져 있었다. 아직 집이라고 불리기엔 공간만 덩그러니 존재했지만, 이상하게도 아늑하고 포근하게 느껴졌다.
“1층에 거실이랑 주방, 작은방이 있어.”
“이 규모 저택에 방이 작은 거 하나뿐이야?”
“2층에 방을 많이 만들었어. 네가 원하면 1층 작은방을 써도 되고.”
“당연히 큰 방이 좋아.”
“아하하, 그럼 2층으로 가볼래?”
나는 목 관절이 고장 난 인형처럼 연신 끄덕거리기만 했다. 한 칸 한 칸 오르는 게 답답해 손을 놓고 계단으로 먼저 뛰어 올라갔다.
방문은 네 개였는데, 가장 가까운 방문을 열자 따가운 오후의 볕이 방 전체를 채우고 있었다. 밖에서 보는 크기와 체감이 안 되게 더 큰 느낌이었다.
“우와….”
“어차피 방은 많이 나눌 필요 없을 것 같아서 각각 방을 크게 만들었어.”
“좋다. 여기에 테이블 놓고, 여기에는 옷장, 그리고 이쪽엔 침대 두 개 놓으면 딱 좋겠다.”
“침대 두 개?”
“응. 두 개로 나눠 써야지.”
“아… 나는 옆방 쓰려고 했는데.”
“아…? 아…!”
“혼자 자는 게 무서우면 같이….”
“아니! 나도 혼자가 좋거든?!”
그와 같은 방을 쓰는 게 익숙해진 나머지 바보같이 함께 방을 쓸 거라 생각했다니. 낯짝에 피가 몰려 점점 무거워졌다. 이 방을 쓰게 되면 오늘의 대화가 계속 떠오를 것 같았다. 매일매일 흑역사를 떠올리며 이불을 걷어찰 기력은 없었기에 냉큼 방 밖을 나섰다.
─철컥
바로 맞은편의 방을 열자 창밖에 녹음이 우거져 있어 앞서 보았던 방에 비해 확연히 시원했다. 눈을 감고 심호흡을 하고 있으니 어깨에 손이 얹어진다. 자연스레 고갤 돌리며 눈을 뜨자 바로 코앞에 그가 다가와 있었다.
“괜찮아?”
“어? 뭐가?”
“너… 열나는 것 같아서. 호흡도 불규칙적이고.”
어깨를 잡던 손은 내 뺨 위를 간질이듯 쓰다듬고 지나간다. 가까스로 가라앉은 열을 지피는 것만 같아 뺨을 북북 닦아댔다.
“읏… 쓸데없는 걱정 하지 마.”
“그럼 다행이지만… 그간 바빠서 네게 신경 쓰지 못한 것 같아.”
“굳이 네가 신경 쓰지 않아도 잘 먹고 잘 살고 있거든?”
“내가 그러고 싶어서 그래.”
“무….”
무슨 소리냐며 평소와 같이 꽥 소리 지르고 싶었는데 목에 큰 덩어리라도 걸렸는지 나오지 않았다. 내가 어물어물 대고 있으니 리헤로스는 침음을 흘렸다.
“으음….”
“왜…? 뭐 걸리는 거라도 있어?”
“아까 침대 두 개 쓰는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그동안 너랑 쭉 같은 방 쓰다가 떨어지려니까 허전할 것 같아. 안 그래?”
“나, 난 후련하거든?”
“정말로?”
“어!”
“단박에 말하니까 서운한데.”
간혹 능글맞은 대답이 섞여 나올 때가 있는데 바로 이런 순간이었다.
‘서운하긴 개뿔.’
마치 평생 나와 같이 있을 것처럼 말하는 그의 단어 하나하나, 맺음이 가슴속을 부글부글 끓게 했다. 나도 모르게 마음속으로 중얼거리려던 말을 입 밖으로 던져버렸다.
“어차피 네가 왕성으로 가면 난 혼자일 건데….”
“응? 뭐라고?”
“…누구나 언젠가는 혼자가 된다는 말이야.”
“왜 그렇게 생각해?”
“어릴 적 평생 갈 것 같던 우정도 몇 년 지나면 잊히고 금세 그 자리에 다른 사람이 채워지기도 하니까.”
“…크리스는 늘 이별을 생각하는 것 같아.”
“…….”
“지금 우린 같이 있잖아. 이별은 없을 거야.”
“네 낙관적인 생각이 부럽다.”
“낙관적인 게 아니라 정말 없을 거야.”
“없다니….”
“크리스… 너만 그렇게 하고 싶다면.”
심장이 아플 정도 쿵 떨어지는 것만 같았다. 나에게 선택지를 주는 걸까. 내가 정말 너와 쭉 함께하고 싶다면 그래 줄 건가?
‘공주와의 약혼을 포기하라고 하면 포기할 거야?’
최종으로 도달한 생각이란 게 고작 이것이었다. 가슴 언저리에 삼키지 못한 응어리가 남은 것처럼 불편했던 이유를 깨달았다. 리헤로스가 약혼한다는 사실이 그리 서운했던 건가.
이를 통해 비로소 내 마음을 확신하게 되었다.
─나는 리헤로스를 좋아하고 있구나.
생각하는 것보다 더─
회피하고 있던 감정의 자각은 편도행 기차나 다름없었다. 도착한 곳에서 꼼짝없이 헤매는 것밖엔 할 수 있는 게 없다.
그런데 내 도착지 앞엔 내 목적이 있었다. 그렇기에 부디 떠나지 말고 내 곁에 있으라 응석 부리고 싶은 욕구가 무럭무럭 생겨나고 있었다.
‘제발 나를 흔들지 마.’
반면, 이성은 이래서는 안 된다며 삽시간에 자라난 감정의 뿌리를 끊고 뽑아내려 애썼다. 그와 나는 다른 세계의 사람이다. ‘게임의 엔딩’이라는 목적을 달성해야 하고 그를 이용해 나는 원래의 세계로 돌아가야 한다. 즐거운 표정으로 조잘대는 리헤로스를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었다.
“이제 집안을 채울 가구도 보러 가자.”
“나…… 가야 해.”
“어디를?”
“아… 그게…… 녹틸한테 부탁받은 일이 있거든.”
“갑자기 무슨 일?”
“책 쓰는 데 도와달라고 해서. 마침 할 일도 없고… 돈도 준다니까 승낙했어.”
사실은 홧김에 방방곡곡 쑤시고 다니면서 겨우겨우 따낸 일감이었지만 말이다. 괜히 그의 말에 휘둘려 감정적으로 굴기 전에 자리를 뜨고 싶었다.
“돈이 부족했어?”
“네가 준 게 적은 건 아닌데 나도 내 일을 해야지.”
“…….”
“왜… 왜 그런 표정 지어. 하여튼 난 간다. 가구는 일 끝나고 보자. 너 혼자 다녀와도 돼.”
“같이 가.”
“가구 보러?”
“응.”
“알겠어.”
“그럼 기다리고 있을게. 녹틸한테 안부 인사 전해줘.”
곧바로 포탈을 열어 녹틸의 저택 앞으로 도착했다. 겨우 뜨거운 공기 밖으로 탈출한 사람처럼 크게 심호흡했다.
저택 앞 호수를 몇 바퀴나 빙글빙글 돌며 쉴 새 없이 요동치던 심장 박동을 가까스로 가라앉혔다. 녹틸은 눈치가 빨라 표정이나 행동을 빠르게 읽어내기에 최대한 티 내고 싶지 않았다.
‘그 자식은 어떻게든 비꼴 생각밖에 안 할 테니까.’
얄미운 녹틸의 얼굴을 떠올리니 금세 피가 식었다. 어차피 누군지 알 테니 노크하지 않고 곧바로 문을 당겨 안으로 들어섰다. 서재에서 느릿느릿 걸어 나오는 녹틸과 마주쳤다.
“어라, 하루 일찍 왔네요?”
“응, 오늘부터 시작해도 돼?”
“갑작스럽네요. 그 정도로 급전이 필요해요?”
“그건 아닌데… 하여튼!”
“그러세요. 아크리스처럼 일에 대한 의욕이 높은 사람은 처음 봐요.”
“몰라… 나도 차라리 일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줄 몰랐어.”
“자, 이리 와서 앉아요.”
서재 쪽의 문을 더욱 활짝 열어 단기계약 노동자를 반겼다. 아주 예전에 들어왔을 때와 달리 수북하고 어지러이 쌓여있는 종이 더미로 인해 훨씬 어지럽고 지저분했다.
“이게 뭐야? 정리 안 해?”
“제 나름대로 정리한 건데요. 여기, 인덱스도 붙여놨고요.”
“하아아… 갑자기 막막해지네.”
의자에 털썩 주저앉아 한 장씩 들어 검수하기 시작했다. 보통 오탈자나 설명이 필요할 것 같은 부분에 각주를 달도록 체크하는 등의 작업이었다. 수능을 앞둔 독서실처럼 조용한 서재는 녹틸의 질문으로 정적이 깨어졌다.
옆에서 집필하던 녹틸이 말을 걸었다. 반복되는 업무 속에 지루함이 날아갔다.
“참, 아크리스. 리헤로스에게 물어봤나요?”
“스으읍… 뭐를?”
“방 내어달라고 했잖아요. 저는 리헤로스한테 물어보라 했고요.”
“아… 그건…….”
리헤로스가 만들어준 보금자리. 돌아갈 곳. 그때 온도가 생생하게 느껴지는 것 같았다. 그의 손이 닿았던 뺨이 다시금 간지러워졌다.
“이제…… 필요 없어.”
“왜요? 오갈 데 없어진 거 아니었어요?”
“단어 선택 한 번 아름답네. 갈 곳은… 생겼어.”
“생겼다면 집이라도 구한 거예요?”
“내가 구한 건 아니고, 리헤로스가… 집을 짓고 있었더라고.”
“흐음.”
“방금 되게 짜증 나는 표정이었는데.”
“잘 됐네요. 밥숟가락 하나 느는 게 얼마나 힘든데요. 이렇게 된 거 리헤로스 옆에서 확실히 보필하세요.”
“내가 보좌관이냐? 그리고 이제 특별히 보살필 일 없잖아. 마왕도… 죽었고….”
“그렇긴 한데, 세상이 워낙에 흉흉하잖아요. 마왕이 아니고서도 그에게 위협이 될만한 것은 충분히 존재하고요.”
“그건 그렇지.”
그 말에 칼리고가 가장 먼저 떠올랐다.
‘요즘은 잠잠한 것 같은데, 설마 무슨 일이야 있겠어.’
칼리고뿐만 아니라 리헤로스에게 위협이 되었던 역대 군단장들을 떠올리다가 불현듯 잊고 있던 한 가지의 중요한 것을 수면 위로 건져냈다.
“아 참, 한 가지 더 부탁할 게 있는데.”
“또요? 이렇게 염치가 없을 수가.”
“…….”
“농담이었는데 꽤 진지한 얘기인가 보네요? 말씀하세요.”
“혹시… 게헤나의 생물을 찾을 방법… 없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