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테네브의 장검은 기괴하게 뒤엉킨 살덩이들을 베어 냈다. 살덩이들은 생명을 잃고 검게 변하더니 잿더미가 되어 사라졌다. 그리고서야 바닥에 그려져 있는 검푸른 마법진이 제대로 모습을 드러냈다.
“네가 제물로 쓰일 뻔했을 때, 그 마법진과 같아.”
“응. 확실해. 주문의 진인가?”
“그러지 않을까? 그때에도 강림해달라고 외쳤던 걸 보면.”
“…….”
마법진을 둘러싸던 빛은 점점 약해지더니 완전히 사그라들었다.
“그냥 도박장이 아니었네.”
“훨씬 더 수상한 음모가 숨겨져 있는 게 분명해.”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
─달각, 다그락
충격적인 장면을 본 탓일까 작은 소리에도 소스라치게 놀랐다.
소리의 출처는 녹틸에게 받은 나침반이었다. 잊지 말라고 신호를 주는 것만 같았다.
“맞다. 페로! 어디에 있는 거지?”
“네가 찾는다는 박쥐?”
“응, 아주 가까이에 있나 봐.”
“그렇다면… 저쪽일까.”
테네브가 가리킨 방향에는 빛이 들지 않는 어둡고 좁은 통로였다. 그곳을 쭉 따라 걸으니 끝에 일반 문과 달리 철제를 덧대 견고한 모양새의 문이 있었다. 손잡이를 잡아당기다가 밀기도 해봤지만, 꼼짝도 하지 않았다.
“열쇠가 어디 있을 것 같은데….”
“열쇠는 필요 없어.”
그런 말을 남긴 테네브는 나를 뒤로 물러나게 하더니 문을 힘껏 걷어찼다.
─콰앙!
전혀 열리지 않을 것 같던 문은 굉음을 내며 활짝 열어젖혀졌다. 손잡이 쪽이 부서진 게 아니라, 경첩 쪽이 너덜너덜 박살 나서 반대쪽이 열린 상태였다. 나는 넋이 나가서는 턱이 빠질 듯이 입을 벌리고 있었다.
“허… 이게 돼…?”
“왜? 딱 봐도 녹슬고 못도 몇 개 빠져있잖아.”
“보통 열쇠로 열려고 하지, 너처럼 박살 낼 걸 전제로 살펴보진 않거든.”
“그런가. 어쨌든 열었으니 들어가 봐.”
기가 찼지만, 지금은 꼬투리 잡을 시간이 없었다.
방 안으로 들어서니 창고에 보석과 귀중품이 흘러넘치는 상자와 미술품, 그리고 작은 철장이 보였다. 점점 가까워질수록 나침반은 달각대며 세차게 대상을 가리켰다. 철장 안에는 날개로 제 몸을 감싸고 있는 회색의 물체가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페로!”
“후, 흐에? 주인님!”
“뭐 하다가 이런 곳에 갇힌 거야?!”
“흐우….”
걱정스러운 질책이었다. 페로는 시무룩해져서는 다시 자기 몸보다 큰 날개로 얼굴을 가렸다. 기죽은 페로를 보니 왜 그렇게까지 목소리를 높였는지 미안해져서 작아진 목소리로 철장에 달린 자물쇠를 만지작거렸다.
“기다려봐… 열쇠가 어디에 있을….”
“열쇠를 어느 세월에 찾겠어. 나와봐.”
테네브는 검을 들더니 힘껏 내려쳤고, 자물쇠가 쩡 소리를 내며 힘없이 부서졌다.
“히이이이!”
“페로 놀라잖아. 머리 안 쓰고 힘으로 해결하는 스타일이냐?”
“무식하다고 말하고 싶은 건가?”
“내가 언제 그랬어. 괜히 혼자 찔려서.”
철장 문을 열어 겁에 질린 페로를 꺼내주었다. 비록 과격한 테네브에 의해 생각한 것과 달리 감동적인 상봉이 되진 않았지만, 안도했다.
“무사해서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야.”
“흐에엥! 주인님도 무사하셔서 다행이에요!”
“그런데 어쩌다 여기로 온 거야?”
“그건… 이야기하자면 조-금 길어요.”
“대체 내가 잠든 사이에 무슨 일이 있던 건데.”
“주인님이 잠드시고 나서 저도 깊이 잠들었어요. 그리고 눈을 떠보니 주인님은 없고… 마왕성은 폐허가 되어서 아무것도 남지 않았어요….”
내가 잠들고 페로도 같이 잠들었던 거구나. 불러도 답이 없더라니. 내게 질려 떠나버린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니어서 다행이었다.
“주인님을 불렀는데도 주인님이 답을 안 주셔서… 혹시 잘못되셨을까 봐… 히윽… 히끅….”
“그랬구나… 나도 널 불렀는데 닿지 않았던 것 같아.”
울먹이는 녀석에게 테이블 위의 냅킨을 건네주었고 냅킨에 얼굴을 꾹꾹 찍어 내자 금세 축축해졌다.
“그래도… 그래도 믿을 수가 없어서,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주인님을 찾았어요! 그래서…!”
“응. 그래서?”
“주인님이 카드 게임을 잘 하시던 게 생각나서, 카드 게임 할 수 있는 곳을 여러 군데 찾다가 여기까지 온 거예요.”
“…….”
“…….”
“카드 게임을 하는 곳을 찾다가 흘러들어왔다고?!”
“히이… 네에….”
“미치겠다…….”
이곳까지 흘러들어온 이유가 그런 거라니, 얼토당토않아 벙쪘다. 이렇게 세상 물정을 모를 줄이야. 가르칠 게 산더미였다.
“그나저나… 저 남자는….”
페로는 어깨너머의 테네브를 보고는 경계하듯 내게 바짝 붙어 몸을 숨겼다.
“누, 누군가요?”
“아? 쟤?”
“호, 호… 혹시 새로운 용사…?”
“아니, 왕실 기사단 소속의….”
“테네브다.”
“힉!”
테네브는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페로 쪽으로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겁에 질린 페로는 더 들어갈 곳도 없는 내 품으로 얼굴을 묻고 파파팟 파고들려 했다.
“페로가 원래 겁이 많아.”
“…….”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던 그는 방 밖을 나서더니 손에 무언갈 들고 다시 돌아왔다. 혹시 거부했다고 자존심이 상하진 않았겠지. 페로에게 쓴소리라도 한다면 방어해 줄 생각이었다.
─쩍
“꼬마야. 사과 좋아하니?”
“에?”
“자, 먹어봐.”
페로는 얼굴을 쏙 내밀더니 작은 발을 쭉 뻗어서 사과를 받아들었다.
“너도 줄까?”
“난 됐어.”
─사각사각
녀석은 내 몸에 기댄 채 사과를 야금야금 갉아먹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나도, 테네브도 흐뭇하게 미소를 띠었다.
“맛있어?”
“움! 움!”
“너 사과 좋아했어?”
“녜!”
“다행이네.”
“고마워. 페로는 나 이외의 사람이랑은 마주해본 적이 없거든.”
“근데 왜 널 주인님이라고 불러? 애완동물인가?”
“애완동물이라뇨 실례에요! 저는 아크리스님의 전령이라고요!”
“그렇구나. 미안해.”
버럭 짜증을 부릴 정도로 페로는 경계심이 해제되었다. 나도 모르게 파핫, 웃음을 터트리니 테네브가 눈을 흘겼다.
“그러고 보니 넌 무슨 목적 때문에 여길 토벌하는데?”
“그건….”
“심심해서 혼자 왔을 리는 없고.”
테네브는 옆방 쪽으로 저벅저벅 걸어가더니 문을 벌컥 열어젖힌다. 그 안에는 온갖 금은보화가 아무렇게나 쌓여있어 번쩍였다.
‘보상인가 봐! 그러고 보니 리헤로스가 없어도 보상 획득이 가능한가?’
신나서 그 안으로 쫓아 들어가려는데 테네브의 검이 내 앞을 가로막았다.
“이건 모두 도난 장물이니 왕국에서 회수해간다.”
“칫…. 치사하게.”
“어리광 부리지 마.”
“내가 언제?!”
용사가 아닌 NPC의 독단 행동에도 적들이 사망하고, 상황이 정리되는 걸 보면 공식 던전은 아닌 것 같더라니 역시나 보상을 얻지 못한다.
테네브는 안으로 들어가 장물을 한참 동안 뒤적이더니 손바닥 안에 들어올 만한 크기의 펜던트를 쥐고 돌아 나왔다.
“야야. 도난품이라며? 너는 가져가도 되는 거야?”
“…이건 내가 잃어버린 거야.”
“어쩌다가 잃어버렸는데?”
“…….”
“설마 이거 찾으러 여기까지 온 거야?”
“…….”
입을 꾹 다문 테네브를 쫓아 조용히 첫 방 쪽으로 걸어 나왔다. 나뒹굴고 있던 시체들은 어느새 증발해 없어졌다. 페로는 아무 테이블 위로 쏠랑 날아가더니 몸을 흔들며 푸다닥 털어낸다. 잿빛 털이 공기 중으로 숭숭 흩날렸다.
테네브가 말없이 나갈 줄 알았더니 벽에 기대어 앉는다. 그의 서사가 궁금해진 나도 슬그머니 그의 옆에 앉았고 나를 지켜보고 있던 그는 손을 펼쳐 로켓 펜던트를 보여주었다.
“엄청 낡았네. 그 안에 애인 사진이라도 있어? 그런 거라면 굳이 여기까지 와서 목숨 걸고 찾을 필욘 없는 거 아니야?”
내 말에 기다렸다는 듯이 펜던트 뚜껑을 연다. 그 안엔 당연히 있을 것 같은 사진 대신 엄지손가락만 한 페리도트가 박혀있었다. 문외한이 보더라도 고도의 기술로 커팅 된 최상급의 페리도트였다.
“아니네. 잃어버렸으면 큰일 날 뻔했네.”
“단지 값비싼 보석이라서가 아니야.”
“그럼? 무슨 사연이 있어?”
“어머니가 남기고 가신 유일한 유품이야.”
“……함부로 말해서 미안.”
“…….”
“그리 귀한 걸 어쩌다 잃어버렸는지 물은 것도 실례였네. 잃어버린 이유 따윈 중요하지 않으니까.”
“단장님이 압수해갔었어.”
“뭐?!”
기사 단원 괴롭히는 취미라도 있는 건가? 자기 부하라면 누구보다 보호해 줘야 하는 것 아닌가.
‘칼리고 이 미친놈이….’
악행에는 빠지지 않는 칼리고. 어쩌면 그가 이 게임의 진 빌런일지도 모른다.
“왜 압수했대?”
“대련 중에 방해되는 물건은 두고 오라 하셨는데, 내가 깜빡 잊고 목에 걸고 간 적이 있었어. 그때였지.”
“이유도 어이없네. 네가 미성년자도 아니고, 기사단이 학… 아카데미도 아니고.”
“…너무 나쁘게 이야기는 하지 마. 내가 잘못한 거니까.”
“네가 잘못한 건 아니지! 목걸이 하나가 대련에 얼마나 방해가 된다고 그래?”
“단장님에 의해 움직이는 기사단이니까. 단장님의 말씀은 절대적… 일 수밖에 없어.”
테네브의 말은 그랬지만, 표정은 매우 씁쓸해 보였다. 그를 구해주던 날, 단장과 기사단을 모욕했다고 분개했던 때와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었다.
‘내가 한 말을 생각해 본 걸까?’
그런 거였음 좋겠다.
“압수됐는데 기사단 건물에 있지 않고, 왜 여기까지 오게 된 거래?”
“압수품을 다른 기사 단원들이 몰래 빼돌렸고, 여기저기 떠돌다가 도박장까지 흘러 들어간 걸 알게 됐어.”
“그래서 혼자 왔구나.”
“내 힘으로 되찾았으니 이제 신경 쓰지 않아. 잘 보관하면 돼.”
“그때도 혼자 찾다가 납치됐던 거야?”
“뭐… 그렇지.”
기사단 안에서 겉도는 스타일일까, 따돌림의 대상이 될 것처럼 성격이 호락호락하거나 어리숙해 보이지 않은데도 칼리고의 눈에 찍히면 그 아래로 그런 취급을 받는 모양이었다.
집단이라 하면 작은 사회인데, 그 속에서 미운 오리 새끼가 되는 것은 제법 고독한 일이다. 나는 마왕이던 시절뿐만 아니라 지금도 어느 곳에 소속된 것인지 모호한 상태라, 아니라고 해도 외롭고 쓸쓸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다.
“너도… 외롭겠다.”
“뭐…?”
“아… 아니야. 혼잣말이야.”
“너도… 라고 하는 걸 보면, 너도 외로워? 용사가 있는데?”
“…….”
“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어쩌면 우리는 조금 닮았을지도 모르겠네.”
“왜?”
“처음엔 아니었는데 네 말을 듣고, 내가 이곳의 일원이 맞는 걸까 점점 고민하는 횟수가 늘어나고 있었거든.”
“고민하고 있었구나.”
“그래. ”
“나도…… 나도 그런 것 같아. 리헤로스가 사는 삶과 내가 사는 삶의 영역이 전혀 다르거든. 그래서 나 혼자 이 세계에서 동떨어져 있는 것 같단 생각이 들어서….”
“하… 하하, 씁쓸하지만 왠지 모르게 반가운데.”
“하하하….”
우리는 어색한 웃음소리를 내다가 그쳤다. 그런데도 민망하진 않았다. 지친 삶을 누군가에게 토로한다는 건 쉬워 보여도 어려운 일이다. 공감의 측면에서도 그렇고, 어쩌면 나의 치부를 드러내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에게 털어놓았을 땐, 오히려 이런 기분을 느끼는 게 나 혼자만의 고민이 아니구나 싶어서 소소한 동지애 따위를 느꼈다. 어떨 땐 어떤 말보다도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이 가장 큰 위로가 되기도 한다.
차분히 마음의 정리를 하고 있으니 테네브가 정적을 깼다.
“난 이 마법진과 얽힌 집단을 조사할 계획이야.”
“정말?”
“시작은 목걸이 때문이었지만, 눈으로 직접 본 이상 그냥 묻고 넘어갈 수 없겠어.”
“혼자서? 너무 위험하지 않을까.”
“괜찮아. 혼자서도 익숙해져야지.”
그 말로 인해 나는 더욱 그를 가만히 내버려 둘 수 없었다.
“그 조사, 나도 같이 도울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