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
─바스락
얕은 잠에 빠져 있을 땐 작은 소음도 크게 들리기 마련이었다. 아주 희미한 소리였지만 어디서도 들리지 않을 재질의 이질적인 소리여서 눈이 저절로 떠졌다.
‘아직 어둡네… 새벽인가?’
허나, 새벽이라고 하기엔 너무나도 칠흑 같았으며, 이슬에 젖은 상쾌한 풀 내음 대신 눅눅하게 젖은 비린내가 풍겨왔다. 대체 어디에서 나는 냄새인지 점점 고약해지는 것 같았다.
곤히 잠들어 있는 리헤로스가 깨지 않도록 조심스레 일어났다. 방 안을 둘러보아도 그 어디에도 이 냄새를 풍길 것 같은 물체는 없었다.
─끼이익, 끼익
방이 어둡다고 느낀 이유를 깨달았다. 천천히 흔들리는 두꺼운 커튼 아래로 창밖의 빛이 보였다.
‘내가 창문도 안 닫고 커튼을 쳤었나?’
어떤 진상을 알아내기 위한 움직임은 아니었고, 단순히 창문을 닫고 싶었다. 몽롱한 졸음을 참으며 창가로 다가갔다.
커튼을 힘껏 열어젖히자 역한 냄새가 훅 불어닥쳤다.
“우욱…!”
당연히 있어야 할 숲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고, 창문 밖은 어둡고 음침한 게헤나의 풍경과 흡사했다. 잠깐 잠들어 있는 동안 무슨 일이 있던 걸까. 그 어딜 둘러보아도 생명감이라곤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죽어버린 세상. 그 말이 가장 잘 어울렸다.
'그를 깨워서 나가야겠어.'
창문에서 천천히 떨어지며 뒤를 돌았는데, 침대를 중심으로 검고 끈끈한 물체가 바닥에서부터 차오르기 시작했다.
"리헤로스!"
그것은 한 번 생겨내기 시작하니 우후죽순 불어나기 시작했다. 그가 잠들어 있는 침대를 뒤덮고 있었다. 검고 끈적한 액체를 뿌리치고 앞으로 나아가려 해도 점점 팔과 몸에 끈끈하게 붙어 늘어졌다.
“리헤로스!! 눈을 떠!!”
내 고함에도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늪처럼 푹푹 빠져들어 가며 몸을 무겁게 만드는 검은 점액들을 힘겹게 힘겹게 뿌리치며 가까스로 침대의 맡에 도착했다. 점점 아래로 끌고 들어가는 것 같았지만 침대 프레임을 꽉 붙들어 떨어지지 않게 노력했다.
“흐, 으윽…! 일어나…! 리헤로….”
고개를 드니 내가 잡고 있는 것은 침대가 아니었다.
그가 키우고 싶다고 했던 크림색의 장미가 잔뜩 장식되어 있는 관 속에 그가 누워있었다.
“으… 으으… 아… 아…!”
숨통이 턱 막혀왔다.
왜, 어째서? 왜? 나 때문에 죽은 거야?
내가 같이 있어 달라고 해서 이런 일에 휘말린 걸까?
아름다운 크림색의 장미는 점점 검게 타들어 갔다. 관속에 검은 액체는 점점 차올랐고, 리헤로스의 모습을 완전히 뒤덮었다.
허겁지겁 그 속으로 손을 뻗어 리헤로스를 건지려 했지만, 내 손에 잡힌 것은─
새하얀 뼛조각이었다.
…
“으아아아악!!”
나는 몸을 벌떡 일으켰다. 또 지긋지긋한 꿈이었다.
온몸이 식은땀으로 푹 젖어있었다. 아직도 그 뼛조각을 쥐었던 촉감이 손끝에 남아 있었다. 그래서일까 두려움은 쉽게 사라지지 않아, 옆에 응당 있어야 할 리헤로스 쪽을 바라보았다.
없다. 리헤로스가 없다.
온몸에 쭈뼛쭈뼛 소름이 돋았다. 꿈이 정말 현실이 되어버린 걸까? 리헤로스가 없다는 사실을 믿고 싶지 않았다. 곧바로 잠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건넛방으로 달려 나갔다.
“리헤로스!!”
그의 방은 텅 비어있었다. 포기하지 않고 1층으로 내려갔지만, 그 누구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으윽… 리헤로스…!!”
이렇게 애타게 부르면 모든 걸 내려놓고 달려와 줄 것 같은데 너무나도 조용했다.
견딜 수 없는 외로움과 두려움은 나를 길 잃은 아이로 만들었다. 갈 곳을 잃어 하염없이 그의 이름을 부르는 것밖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악몽이 꿈이 아니라, 오히려 그와 행복했던 나날이 꿈이었던 것 같다.
‘역시 내가… 내가 없어져야 했나 봐.’
온 세상이 나의 존재를 부정하는데, 내가 목숨을 부지할 자격이 있나 싶었다.
가슴이 너무나도 아파 사지가 찢기는 고통과 맞먹었다.
─끼익, 철컥
그때, 정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휘청대는 몸을 이끌고 복도 끝으로 나가보았다.
그 어떤 때보다 비교할 수없이 반가운 얼굴이 보였다.
“아… 아아….”
“어, 크리스. 일어났네?”
나는 그를 보자마자 무릎이 풀리는 것도 개의치 않고 달렸다. 그는 넘치도록 안고 있던 물건들을 내려놓더니 내 쪽을 바라보았다.
“크리스 어제….”
리헤로스의 몸이 뒤로 기울어질 정도로 몸을 던졌다. 와락 끌어안자 그는 내 몸을 지탱해 주듯이 허리를 안아 들었다. 몸이 완전히 들린 것은 아니지만 발끝으로 까치발을 선 모양새가 되었다.
“크리스?”
“진짜야… 진짜 리헤로스야….”
꿈에서는 놓쳐버렸지만, 현실에서는 놓치지 않겠다는 그런 마음이었다.
시큰해진 코끝을 그의 어깨에 문질렀다. 그는 내 등을 느릿느릿 두드려 주었고 덕분에 불안한 박동은 점차 안정되었다.
“또 악몽 꾼 거야?”
“으응…….”
“같이 있어 줄 걸 그랬네. 밤이랑 달리 곤히 자길래 괜찮은 줄 알았어.”
“밧, 바보야! 딱히 네가 없다고 해서 악몽을 꾼 건 아니야.”
“그래그래.”
“애 취급하고 있어…….”
리헤로스의 목을 끌어안고 있던 팔을 풀었지만, 그는 놓아주지 않았다. 빠져나가려고 하니 더 제 쪽으로 끌어당긴다.
“아, 아침 먹어야지 놔줘….”
“생각해 보니… 나도 오늘 무서운 꿈 꾼 것 같은데 조금만 이러고 있으면 안 돼?”
“거짓말. 안 돼.”
“나는 안아줬잖아.”
“안 된다고.”
“응?”
“…….”
“으응?”
“하아아…….”
그리하여 몇 분을 더 끌어안고 있었다. 저가 원하는 만큼 안았다고 생각했는지 스르륵 놓아주었다.
“대체… 어디 갔다 온 거야?”
“새벽 시장 다녀왔어.”
“시장은 왜? 먹을 건 아직 남아 있잖아.”
“어제 네가 말했던 침엽수. 그거 사러 다녀왔어.”
“급하게 안 사 와도 된다고 말했던 것 같은데.”
“너와 제일 잘 어울리는 침엽수가 계속 생각나서 몸이 간질거렸거든, 그래서 눈 뜨자마자 다녀왔지.”
“바보….”
“미안해.”
“멍청이….”
“그렇게 미워?”
“몰라.”
─달그락
“무, 무슨 소리지?!”
“부엌 쪽에서 났어. 내가 다녀와 볼게.”
“너 혼자서? 안 돼!”
“왜?”
“가, 같이 가…….”
홀로 떨어트려 놓는 건 불안해서 안 될 것 같다. 그의 팔을 꼭 잡고 천천히, 아주 천천히 부엌으로 들어섰다.
까맣고 작은 털 짐승이 과일 바구니 안에 들어가 있었다.
“페로?! 깜짝 놀랐잖아!”
“해, 해흐하허.”
“뭐라는 거야!”
페로는 입안에 남아 있는 과일을 와작와작 씹어 삼켰다.
“배고픈데 두 분은 바쁘신 것 같아서… 혼자 찾아 먹고 있었어요.”
“…….”
“아하하… 배고팠구나. 아침 같이 먹자.”
저 어린 박쥐가 우리의 눈치를 살살 보며 조심스레 부엌으로 갔다고 생각하니 낯 뜨거웠다. 나는 고갤 차마 들기가 힘들었는데 옆눈으로 리헤로스를 흘겨보니 그는 배시시 웃고만 있다.
‘능글맞은 녀석.’
“밥 먹고 나서 같이 나무 심을까?”
“그러자.”
* * *
면장갑을 낀 리헤로스는 묘목을 감싼 끈을 둘둘 풀며 내 쪽으로 보여주었다.
“어때? 귀엽지.”
“응, 이건… 이름이 뭔데?”
“블루 아이스. 알아?”
“아니, 처음 들어봐.”
“다른 침엽수와 달리 눈이 내린 것 같이 생긴 나무야.”
“그러고 보니 하얀 느낌이 있네.”
“이걸 보면 네가 자연스럽게 떠오를 것 같아서 무조건 이걸로 해야지 싶었어.”
“그래봤자 나문데 뭐, 바보….”
흙장난을 치던 페로가 한참 기어 다니더니 구석에서 조용히 무언가에 열중하고 있었다. 반려동물이 조용히 무언갈하고 있으면 불안감이 엄습하지 않던가. 녀석에게 천천히 다가가 무얼 하고 있는지 들여다보았다.
“페로, 뭐해? 심심해?”
“우뭄?”
페로는 볼이 불룩한 상태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녀석이 입에 한가득 사과를 물고 있는 모습은 익숙했지만, 지금 입 밖으로 빠져나온 그 물체의 생김새는 매우 낯설었다.
검고 번들거리는 물체는 가느다란 다리가 파르르 떨리더니 까딱까딱 움직여댄다.
그때야 비로소 저것의 정체가 무엇인지 깨달았다.
“아악! 버, 버, 버버벌레!”
“크리스! 무슨 일이야?”
“페로가 벌레! 벌레 먹고 있다고!!”
“박쥐는 원래 잡식성이라 먹지 않아?”
“징그러워!”
내 호들갑에 놀란 페로는 입이 벌어졌고 물고 있던 것을 툭 떨어트렸다. 손가락 두 개 크기의 검고 번들거리는 벌레는 몸을 뒤집더니 뽈뽈뽈 사라져 버린다.
“저… 징그러워요?”
“아, 아니 그게 아니라…….”
“크리스가 나쁜 뜻으로 그런 건 아닐 거야.”
“히이잉….”
벌레가 사라지고 나서 진정했지만, 페로에게 상처를 입혔다는 점에선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큰 눈이 점점 촉촉해진다.
“그렇지? 크리스.”
“물론이지! 까, 깜짝 놀라서 그랬던 거야.”
“아크리스님이 싫다면 안 먹을게요. 맛있지만…….”
사과가 아닌 선호하는 음식이 다 있는 줄은 몰랐다. 심지어 그게 벌레라는 것도.
‘미치겠네. 기껏해야 과일만 먹을 줄 알았지.’
녀석에게 손을 뻗어 눈가를 북북 문질러 주었다. 말랑말랑한 볼살이 꾹꾹 밀려 올라가니 한쪽 눈만 찡끗 감기는데 그 모습이 안쓰러우면서도 귀여워서 어른들이 아이들을 왜 놀리면서 귀엽다고 하는지 여실히 체감되는 것이다.
"페로, 미안해. 내가 배려를 못 했어. 식성은 존중해 줘야 하는 게 맞는데… 정말 놀라서 그랬던 거야."
"그럼 먹어도 되나요?"
"그건…….”
도저히 흔쾌히 답하기는 어려웠다. 페로 입에서 발버둥 치던 벌레의 다리를 필연적으로 목도해야 한다는 사실이 등줄기의 식은땀을 만들어냈다. 그런데 리헤로스가 제 일처럼 간절한 호소를 담아 바라보니 안된다고 할 수 없었다.
“얘기하고 먹어… 마음의 준비하게."
"좋아요!"
“잘 됐다. 그렇지?”
리헤로스의 말에 페로는 발랄하게 네! 하고 대답했지만, 이내 쑥스러워했다.
“둘이 벌써 친해진 줄 알았네.”
“그러면 좋겠다. 페로, 어때? 우리 친해졌나?”
“그건… 저도… 잘… 우음….”
페로는 횡설수설하더니 부끄러운지 날개를 펼쳐 지붕 위로 날아올랐다.
“용사님, 좀 더 노력해야겠는데.”
“언젠가는 마음을 열어줄 거야. 너무 서두르지 않아야지.”
“내가 한 가지 팁 줄까 했는데 서두르지 않는다니 말아야겠다.”
“그게 뭔데?”
“별로 안 간절해 보이는데… 원해?”
“아주 많이 원해.”
“아하하, 지금 네 표정 봐. 엄청 절박해 보여서 웃겨.”
“진심이야. 친해지고 싶어.”
“페로는 사과를 좋아해.”
“그렇구나. 기억해둘게. 근데 크리스, 페로가 벌레 먹는 건 몰랐는데, 사과 좋아하는 건 알았어?”
“어, 왜냐면 저번에 테….”
아차, 리헤로스에게 테네브 이야기를 무심코 할 뻔했다. 그에게는 여러모로 굳이 드러내 봐야 좋지 않았다.
“테?”
“테…이블에 올려져 있는 사과를 맛있게 먹더라고. 물어보니까 좋아한대.”
“그렇구나? 그럼 사과나무도 심을까.”
“사과를 사 오는 게 아니라 나무를 심는다니 발상 독특하네.”
“사는 건 잠깐이지만 나무를 심으면 과실도 얻고 그늘도 얻을 수 있잖아.”
“일리가 있네.”
“셋이 함께 사는 집이니까 각자 좋아하는 걸로 정원을 꾸미는 게 좋겠다. 그렇지?”
셋이 함께 사는 집이라. 꽤 이상적인 말임에도 실현됐다는 게 여전히 믿기지 않았다. 이 모든 것이 실제가 된 데에는 리헤로스의 상냥함 덕분에 가능한 것이라 너무나도 고마웠다.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리헤로스 손에 죽는 상상만 했는데, 이제는 함께 어떤 미래를 그려 나갈지 따위의 희망을 품게 만드네.’
비록 부질없는 상상이었지만, 그와 조금이라도 같이 있을 수만 있다면 그걸로 만족하기로 했다.
‘네가 나에게 말해주었듯이, 나도 네가 살아갈 세상을 지켜줄게.’
이곳에 남는 사람은 내가 아닌 리헤로스일 테니까. 그가 행복하게 살 수 있게 해주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