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뭐 하고 있어?! 저놈을 당장 체포해!!”
“설마 나 말하는 거 아니지?”
“저놈이 가는 곳마다 마의 징조가 있어! 이 일의 주동자가 분명해!”
“아크리스?!”
“미친! 이거 놔!”
난 저항할 새도 없이 포박당했고, 테네브는 놀란 얼굴로 나를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
나를 어디로 데려가나 싶더니, 두 번 다신 오고 싶지 않았던 칼리고의 집무실이었다.
분명 무투대회에서 리헤로스에게 패배하고, 연회에서 내게 정강이를 차인 이후로 코빼기도 안 보이던 놈이 기고만장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턱을 들어 올린 상태로 눈으로만 우리를 쫓았다. 앉아서도 내려다본다는 말이 어울리는 행색이었다.
“오랜만이군.”
“칼리고! 이게 무슨 짓이야!”
“여전하군. 왕국의 치안을 담당하는 글라디우스 기사단의 단장으로서 의심스러운 인물을 심문하는 건 당연한 것 아니겠나.”
“재수 없는 놈…!”
벤이라 불리는 기사단원이 칼리고 쪽으로 고개를 숙이며 예를 표했고, 이어서 어이없는 폭로가 터져 나왔다.
“단장님! 저놈이 가는 곳마다 마의 징조가 있습니다. 심지어 근래 본 적 없는 마물이 쏟아져 나옵니다.”
“흐음, 마의 징조와 마물이라. 그런 거라면 그냥 넘어갈 수 없지.”
“내가 가는 곳마다 나오다니? 고작 두 군데밖에 안 가봤는데!”
“마의 징조가 뭔지는 아나?”
“알고 있어.”
“네가 부정한 인물일 가능성이 커지는 소리군.”
“알고 있는 것만으로 속단한다고? 난 불공정한 너에게 심판받고 싶지 않아. 차라리 왕궁으로 보내 국왕 폐하께 심판받겠어.”
앉아있던 칼리고는 짧게 한숨을 내쉬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 앞으로 다가와 무릎 꿇은 내 허벅지 위를 구두 굽으로 꾹 찍어 눌렀다. 얕게 신음하니 내 턱을 잡아 홱 들어 올린다.
“너같이 하찮은 것에 폐하께서 시간을 할애하실 것 같나? 나는 왕의 대행이다. 이 구역에서 내 말은 절대적이라는 말이야.”
“큭…!”
“억울한가? 그렇다면….”
내 얼굴을 이리저리 돌려 보더니, 귓가에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때의 제안은 아직 유효한데, 생각해 봤나? 수락하면 내 너를 무고하다 증언해 주지.”
“더러운 새끼… 꺼져.”
“난 주제도 모르고 건방진 놈이 제일 싫어. 버르장머리를 고쳐줘야겠군.”
칼리고는 어깨에 걸친 제복을 벗어 테이블에 올리더니 방의 모퉁이에 서 있는 기사단원에게 손을 내민다. 기사단원은 기계처럼 움직이며 그의 손에 채찍을 쥐여주었다.
‘미친…! 미친 거 아니야?’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렀다. 감겨있는 채찍을 풀어내고 내 쪽으로 휘두르려 팔을 뒤로 뻗는데.
“흠? 뭐냐?”
테네브가 앞을 가로막더니 이내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칼리고님, 그는 부정한 인물이 아닙니다. 동행했던 제가 보증할 수 있습니다.”
“호오, 테네브. 아직도 안 가고 있었군그래? 조사로 바쁘지 않던가?”
“그가 있는 곳에서 마의 징조가 나타나고, 마물이 나온 것은 그저 우연의 연속일 뿐입니다.”
“그 말 맹세할 수 있나.”
“드렉티오 가문의 이름을 걸고, 주신 크레아티오께 맹세합니다.”
칼리고의 표정은 점점 차갑게 굳었다. 분위기가 좋지 않았다. 어쩌면 테네브도 같이 매질 당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그를 조용히 말리려고 했다.
“테네….”
“후.”
그런데 칼리고의 굳은 얼굴은 급격하게 풀리더니 미소가 떠올랐다. 너무나도 온화해서 인위적이라 느껴질 정도였다.
“후후후… 내가 다른 사람은 몰라도 테네브 자네는 믿으니 이번은 눈 감고 넘어가 주지.”
“감사합니다. 단장님.”
“하지만 우연의 연속도 계속되면 우연이 아니게 된다는 점은 알고 있겠지.”
“정 불안하시다면 제가 이 자를 감시하겠습니다.”
“자신 있나?
“네.”
“좋다. 감시 경과는 항시 내게 보고하도록.”
“알겠습니다.”
채찍은 다시 기사단원의 손으로 돌아갔다. 그 답지 않게 조용히 자리로 돌아가고 있었고, 테네브는 내 뒤로 돌아와 손목 결박을 풀어주려 했다.
“잠깐.”
칼리고의 말은 장내의 모든 이의 행동을 멈추게 했다. 우리 쪽으로 몸을 돌리더니 입꼬리를 쭉 올리며 기분 나쁘게 웃었다.
“테네브. 너를 못 믿는 건 아니지만, 저놈이 무슨 술수를 써서 빠져나가지 않을까 우려되는군.”
“네? 그게 무슨 말씀이…….”
“내일 해가 떨어질 때까지 지하 감옥에 아크리스와 테네브를 가두어라.”
“넵, 단장님!”
“뭐?!”
“단장님…! 어째서 저를!”
“네가 감시하겠다고 하지 않았나? 밀착 감시하라는 나의 깊은 뜻을 이해하지 못하는군. 내일까지 아무런 징조도 보이지 않는다면 구금 해제시켜도 좋다.”
“…….”
“알아들었나?”
“…알겠습니다. 단장님.”
칼리고는 더 말하지 않고 손짓으로 우리를 내보냈다. 테네브는 묶이지 않았지만, 죄지은 사람과 동일하게 다른 단원들에게 둘러싸여 이동했다. 그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 심란해 보였다.
‘나 때문에 테네브까지 미운털 박힌 게 아닐까 모르겠네….’
글라디우스 기사단은 테네브의 삶 중 하나일 텐데 내가 망쳐버린 게 아닐까 걱정스러웠다.
테네브가 있다고 해서 좀 더 나은 감옥에 갇히는 건 아니었다. 반지하 깊이의 감옥은 위쪽에 작은 숨구멍같이 난 창을 제외하곤 사방이 꽉 막혀있었다.
“미안해서 어쩌지. 같이 구금될 줄이야.”
“괜찮아. 내일 해질 때까지만 참으면 되니까.”
“그건 그렇다 쳐도, 너 찍힌 것 같은데?”
“찍혔다는 말은 무슨 의미지?”
“밉보이게 생겼다고.”
“…그것도 괜찮아.”
“내가 진짜 마의 징조와 연관이 있으면 어쩌려고 날 보증 선 거야?”
“그래?”
“그렇다는 게 아니고… 그랬으면.”
“아니면 된 거야.”
“상상력이 부족하네.”
“일어나지도 않은 일에 머리를 쓰는 건 낭비야. 현재에 충실하면 됐지.”
그때, 높은 곳에 얄팍하게 뚫려있는 쇠창살 창문 사이로 페로가 날아와 앉았다.
“아크리스님! 어떻게 된 거예요?! 하도 안 돌아오시길래 이 인근의 들새들에게 물어보니 잡혀가셨다고 들었어요!”
“들새들이랑 친해졌니? 뭐… 하여튼 그렇게 됐다….”
“좁고 답답하시죠? 저도 함께 있을게요!”
“아니야. 집으로 돌아가서 리헤로스에게 전해줘. 칼리고 때문에 오늘 못 들어갈 것 같다고.”
“히유우… 알겠어요.”
꼼짝없이 그 큰 저택에 둘만 남게 생겼다. 아직 리헤로스의 맹수 같은 첫인상에서 벗어나지 못한 가엾은 페로는 낯을 가리고 있었다. 고작 하루지만 나 없이 둘이 이야기도 나누면서 점점 가까워졌으면 했다.
‘둘 다 내가 아끼는 녀석들이니까. 잘 지낼 수 있을 거야.’
그렇게 믿었다. 그리고 지금은 내가 테네브에게 마음을 표현할 차례였다.
“칼리고 앞에서 감싸준 거… 고맙다.”
“기사의 도리를 지켰을 뿐이야.”
“근데 그렇게 아무나 보증 서면 안 돼.”
“네가 아무나 인가? 친구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렇게 따지면 너와 쭉 동행했던 나도 유력 용의자 아니겠어.”
어쩐지 낯간지러웠다. 본인도 꽤 충격이었을 텐데도 내 쪽이 훨씬 위로를 많이 받는 것 같다. 그래서 민망한 분위기를 조금이나마 벗어나기 위해 평소처럼 장난스레 툴툴댔다.
“흐으응, 감시하는 것도 친구가 하는 일이던가?”
“그건 네가 이해를 해야지 어쩔 수 없어. 기사단은 우리의 해명을 들으려고 안 하니까.”
“네 입에서 ‘우리’와 ‘기사단’이 떨어져 나올 줄 몰랐네.”
“아….”
멋쩍어하는 테네브는 목덜미를 문질러댔다. 그 모습에 나는 소리 내 웃었다.
“이제야 진실의 눈을 가지게 되었구나.”
“나뿐만이 아니라 누구나 다 그랬을 거야.”
“같이 있었으면서 모르는 척할래? 거기 있던 기사단원들 행동 못 봤어?”
“…….”
“나를 패라고 채찍도 넘겨줬는데도 감쌀 생각이야? 실망인데, 친구 안 해. 절교할래.”
“내, 내가 잘 이야기해 볼게. 지금까지 널 오해해서 적이라 생각하니 그런 거일 거야.”
“퍽이나 잘 이야기하겠다. 칼리고를 설득해야지 아래 단원들은 세뇌돼서 절대 불가능할걸.”
칼리고 이야기가 나오니 불현듯 그에게서 느껴지던 미시감이 떠올랐다. 어차피 시간도 많은데 이야기 나눠볼까 해서 화두를 던졌다.
“그러고 보니 나 궁금한 거 있어.”
“뭔데. 말해봐.”
“너랑 칼리고, 무슨 사이야?”
“무슨 사이냐니.”
“네 검술… 칼리고와 많이 닮았어.”
“아아… 으음….”
그답지 않게 우물쭈물하였다. 팔꿈치로 그를 툭툭 찔러대며 빨리 이야기하지 않느냐고 재촉해댔다.
“눈썰미가 꽤 좋은데.”
“말 돌리지 말고.”
“하아, 그게 왜 궁금한 건지… 모르겠지만. 나와 단장님은 검사 카푸멘님의 제자야. 어릴 때부터 그분께 검술을 배웠으니 같을 수밖에.”
“아하… 어쩐지. 같은 스승 아래에서 배웠구나.”
“그렇지.”
“실력은 얼핏 보기에 비등한 것 같던데 너는 왜 단장이 되지 않았어? 기사단장은 인품 안 본대? 널 내버려 두고 저런 놈이 된 건지 도통 모르겠네. 자리를 이용해 권력을 휘둘러대기나 하고 말이야.”
“칼리고에 비해 야망이 없었으니까.”
“왜?”
“내가 기사가 된 이유는 그저 왕궁의 평화를 가까이에서 지키고 싶었던 것뿐이니까. 단장이 되면 함부로 돌아다니기 쉽지도 않고, 위엄을 지켜야 하는 위치잖아. 그런 건 답답해서 못 버티거든.”
“의외다. 너 그런 거 엄청 잘할 것 같은데. 고지식한 데다가 융통성 없잖아.”
“이번엔 내가 절교하고 싶어지는데.”
“농담 농담.”
“후우… 그런 자리는 하고 싶은 사람이 해야지. 하고 싶지도 않은데 칼리고와 경쟁하고 싶진 않았어.”
“잠깐… 설마 칼리고랑 동갑이야?”
“아니, 칼리고 쪽이 연상이긴 하지.”
“그렇구나. 그 자식 몇 살이야? 진심 궁금했어.”
“스물여덟.”
“리헤로스랑 동갑이네. 칼리고가 하는 짓은 고작 해봐야 일곱 살 먹은 애 같지만.”
“이상하군 용사가 그 나이였다니, 훨씬 어려 보였는데.”
“나도 놀랐다니까. 너는 몇 살이야?”
“스물다섯.”
입이 떡 벌어졌다. 또래처럼 보이긴 했지만, 훨씬 연하일 줄은 몰랐다.
“…넌 훨씬 나이 많을 줄 알았어.”
“그렇게 삭아 보여?”
“아니… 말투가 좀 그래.”
“말투가? 내 나이대로 보이려면 말투를 어떻게 해야 하지?”
“말끝을 편하게 해봐.”
“으음… 이렇게 하는 건가아.”
“푸학!”
“왜, 왜 웃어.”
“아니… 말끝만 늘린다고 그리 보일 리가 없잖아. 오히려 말을 갓 배운 갓난아기 같아.”
“놀리려고 일부러 그랬군?”
“놀리긴, 말투가 너무 점잖긴 해. 귀족이라 그런가?”
“평생을 이렇게 살아왔으니 그냥 이렇게 살 거다.”
“그러세요.”
이후에는 시시콜콜 감방의 인테리어라던가, 기사단의 입단 조건 같은 사사로운 잡담 정도만 나누었다. 그러다가 깜빡 졸았는데, 어느새 테네브의 어깨에 기대어 자고 있었다.
‘으음… 얼마나 지났지?’
─………!
감옥의 복도까지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밖은 소란스러웠다. 그리고 그 시끄러운 소리의 정체가 점점 감옥의 복도로 들어오는 것 같았다. 우당탕 소리를 내며 계단에서 구른 그것은 우리를 고발한 ‘벤’이었다
“아아악! 저리 가!”
놈은 기사의 체면이고 나발이고 무언가를 피해 엉금엉금 기어들어 왔다. 감옥 입구의 중문을 가까스로 걸어 잠그고 나서 더 큰 소음이 이어졌다.
─쾅! 콰쾅!
“크에에!! 크에에엑!!”
“키기기긱 키에엑!!”
“흐! 흐이이익!”
쥐머리를 한 마물들은 하나둘씩 감옥의 중문 창살에 부딪히며 문처럼 쌓여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