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나는 하염없이 걷고 있었다.
그런데 깊은 잠을 자다 깬 것처럼 온몸이 묵직했다.
“콜록콜록!”
도무지 개운해지지 않는 마른 기침을 해댔다. 감기가 온 것처럼 목이 뜨거웠다.
“가슴 답답해 미치겠네…. 뭐가 걸린 것 같아.”
가슴팍을 퍽퍽 두드리다가 문득,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던 주변의 전경이 낯설게 느껴졌다.
온통 흰 공간, 하지만 불순물이 섞인 것처럼 은은한 오로라 같은 것이 울렁거렸다. 바닥은 물 위를 걷는 듯 파장이 일었지만, 손으로 만져보니 그저 단단한 바닥이었다.
“여긴 어디지? 누구 없어요?”
고독한 메아리를 받아줄 사람은 없었다. 그래서 이 공간의 끝은 어디인가 궁금해져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흰 공간은 조금 춥게 느껴졌고, 아주 희미하게 우웅 대는 소리는 우울함을 자극하기도 했다.
‘1억을 받는 대신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 떨어지면 어떤 선택을 할 거냔 이야기도 잊지 않나. 직접 경험해 보니 못 할 짓이네.’
1억 원은 큰돈이 맞긴 하지만, 나의 정신건강이 염려될 정도였다. 이곳을 빠져나가더라도 1억은 고스란히 심리 치료에 쓰일 것 같았으니 말이다.
─찰박
한창 두리번거리던 중, 걸어왔던 뒤편에서 소리가 들렸다.
끊임없는 고독 속 인기척에 반가운 마음에 몸을 돌리니─
“뭐…야?”
나… 아니, ‘마왕 아크리스’가 웅크리고 앉아있었다.
내 뒤에 있었으면 나를 봤을 텐데 말없이 계속 그 상태였다. 가는 미동도 없었다.
“넌… 아크리스의 본체 맞지?”
“…….”
“여긴 어디지?”
“…….”
“이봐, 내 말이 들리긴 한 거야?”
“…….”
“이야기 좀 해달라니….”
성급한 성격을 가진 나는 대답을 기다리지 못하고 녀석에게 손을 뻗었다.
어깨에 손이 닿자마자 어딘가로 빨려 들어가는 것처럼 전경이 빠르게 바뀌었다. 웅크리고 있던 ‘아크리스’는 그 자세 그대로였지만 내 손과는 완전히 멀어지고 있었다.
“윽…!”
정신없이 변하던 배경은 비로소 어느 숲으로 보이는 공간으로 멈추었다. 그래서 다시 ‘아크리스’에게 다가가려고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몸이… 없어졌어.’
분명 아까까지만 해도 실체가 있었는데, 지금은 영혼만 둥둥 떠 있는 것 같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전지적 관찰자 시점에 가까웠다.
‘야! 야!’
소리 지르듯 불러도 어떤 막에 가로막힌 듯 내 주변에서만 왕왕 울려댔다.
‘지켜보라는 말인가. 네가 보여주고 싶은 게 뭔데?’
아크리스는 마침내 몸을 일으켰다. 누군가에게 다가가는 것으로 이야기는 시작되었다.
어떤 긴장감을 가지고 접근했다기보단 호기심에 가까운, 아주 흥미로운 연구 상대를 찾은 것 같은 경쾌한 감정이었다.
‘저자가 용사… 맞지?’
수수한 모험가 옷에 옅은 밀 발에 벽 안을 가진 남자. 얼굴은 블러 처리를 한 듯 뿌옇게 보였다. 가장 처음, 아크리스는 그저 용사를 손안에 가지고 노는 장난감 정도로 생각했다. 동행하며 불쾌한 일에 휘말리게 하는 등 알게 모르게 용사를 괴롭혀댄다.
그런데 그가 어떤 장난질을 쳐도 그저 웃으며 ‘이번엔 덜 다쳤어. 다행이다.’ 하며 웃어넘기기 일쑤였다.
‘리헤로스랑 비슷한 느낌이네. 보다 훨씬 씩씩한 것 같지만.’
반응이 원하는 대로 나오지 않자 지루해진 아크리스는 게헤나로 돌아가려 했다.
‘왜 돌아가지 않았지?’
내 머릿속 물음에 답하듯, 장면은 순식간에 이어졌다.
용사는 아크리스에게 크림 파이며 꽃이며 그가 좋아하는 것들을 찾아주며 함께 기쁨을 나누었다. 아주 작은 친절이었지만, 생전 처음 겪어본 상냥함에 아크리스는 점점 용사에게 호감을 느끼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그리하여 속세에 미련을 갖게 되고, 끝내는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너 근무 태만이야!’
어느새 드라마 과몰입 시청자처럼 닿지 않을 말을 걸고 있었다.
나는 아크리스의 몸에 들어오고 나서 곧장 마군단을 움직였었는데, 그와 달리 본체는 용사와 데이트를 즐기며 마군단을 방치하기 일쑤였다. 말 그대로 ‘평화’로웠다. 일전에 마왕성 첨탑에서 보았던 일기에서는 그는 학구열이 대단했었는데, 그건 완전히 잊은 눈치였다.
점점 둘의 사이는 가까워졌고 아크리스는 용사의 진심 어린 고백을 받아 두 사람의 사이는 친구라 불리지 못할 정도로 사랑에 빠진다.
‘대책 없이… 왜 저런 짓을 벌인 거야.’
나라고 그를 힐난할 자격은 없긴 했지만, 나와 달리 용사와 입을 맞추고 밤새 사랑을 속삭일 정도로 급진적으로 가까워진 상태였다. 행복에 벅차오른 게 느껴졌다.
그가 알고 있던 행복의 정의를 새로 씌운 것처럼, 새로운 단어를 알게 되어 수십 번이고 입에 걸리는 것처럼 행복을 만끽하기만 했다.
‘이렇게 끝나면 정말 좋겠지만….’
일기에서 이미 결말을 봤듯이, 당연하지만 그 평화는 오래가지 못한다.
용사가 불량배들의 시비에 휘말려 크게 다칠뻔한 적이 있는데, 분개한 아크리스가 능력을 조절하지 못하고 마계의 생물을 꺼내어 대항하던 중, 민간인들이 많이 다쳐버리는 상황이 생겼다.
“제발…. 나를 떠나지 마.”
아크리스는 용사를 몇 번이고 붙잡지만, 그는 매몰차게 떠나버렸다. 그리고 용사는 나타나지 않았다. 이 세계에서 완전히 영멸했다고 말하는 게 맞겠다.
그의 슬프고 고통스러운 심경을 대변하듯, 새하얗던 배경은 검게 물들었다. 아크리스는 어둠 속에서 하염없이 울기만 했다. 투명한 눈물은 점점 붉게 물들어 뺨 중앙에 선명하게 줄이 그어지듯 흘렀다.
“…….”
그리고서 모든 장면이 뚝- 멈췄다. 그와 동시에 내 몸도 자연스레 생겨났다.
피눈물을 흘리던 그것은 천천히, 아주 천천히 몸을 일으키더니 내 쪽으로 다가왔다. 괴로운 듯 울고 있던 녀석은 씨익 미소를 지었지만, 호의적인 느낌은 아니었다.
“내 몸에 변변치 않은 게 들어와 앉았군.”
“뭐라고?”
“단도직입적으로 이야기하지. 경고하겠는데 용사를 사랑하지 마.”
“처음부터 끝까지 설명도 없이 불친절하네.”
“비참해진 내 꼴을 못 봤나? 지금까지 용사를 사랑하면 파멸뿐이야. 비단 너라고 다르진 않을 거다.”
“그래서 너는 못 떠나고 여기에 있는 거야?”
“용사가 죽게 되면 너도 나와 같이 이 공간에 갇혀서 행복으로 포장된 고통을 영겁의 시간 동안 느끼게 돼. 분명 후회하게 될 거야.”
“하하… 이걸 어째. 난 너와는 달라. 그와 이어질 생각이 없거든.”
“뭐?”
“난 리헤로스와 잘 될 생각이 없다고.”
“큿….”
“…….”
“크크큭… 크흐흐흐…. 거짓말.”
─푹
녀석은 내 왼쪽 가슴에 손을 찔러 넣는다. 컥, 하는 소리가 저절로 나왔다. 녀석은 내 몸통 안에서 손을 휘적휘적 저으며 무언갈 찾고 있었다. 고개를 들어 녀석을 노려보니 푸르고 탁한 빛의 구체를 꺼냈다.
“아, 미안. 워낙 작아서 찾기가 힘들었네.”
“윽! 무슨 짓이야…?!”
“이게 네 마음인가? 작은 데다 병들어서 빛깔도 탁하고 볼품없군.”
“이렇게 제멋대로니까 용사가 도망을 가지.”
녹틸보다 재수 없고 칼리고보단 덜 재수 없는 스타일이었다. 그는 구체를 자세히 들여다보더니 픽 웃는다.
“그와 닿고 싶어 몸이 달은 게 보이는데, 내 눈을 속일 건가? 지금 너와 나는 한 몸이야. 내가 그 초라한 마음도 모를 리가 없단 말이지.”
그리 말하며 구체를 내 쪽으로 툭 던졌다. 어쩌면 칼리고랑 엇비슷하게 재수 없는지도 모른다.
“흘려듣지 말고 잘 들어. 원래 세계로 돌아갈 생각이나 해.”
“너… 설마 네가 날 여기로 끌고 온 거야?!”
“그건 아니지만, 네가 이쪽 세계의 사람이 아니란 건 정확히 알고 있지.”
“…….”
“여긴 네 세계가 아니야. 허황한 꿈은 꾸지 마.”
“…그 정돈 알고 있어.”
원래부터 알고 있는 사실이기도 했고, 그의 마음을 탐내지 말자 결심을 했었다. 그런데 타인의 입에서 나온 말로 들으니 왜 이리 불쾌할까. 실제로 봤던 내 마음의 색깔보다도 더 어둡고 눅눅해지는 기분이었다.
“…아직 끝나지 않았어.”
“뭐?”
“이 세계의 이야기.”
“…아직 안 끝났다면, 역시 내가 죽어야…?”
아크리스는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어딘가 초탈한 것 같은, 포기에 가까운 표정이었다.
“용사가 죽어버리면 이 세계는 끝은 영원히 존재하지 않아. 너를 희생해 용사를 결말로 이끌어.”
그는 내 어깨 위에 손을 올렸다. 온기가 느껴지는 손길이었다.
“그게 모두를 위한 행복한 결말이야.”
점점 어깨가 간지러웠다. 손길은 따뜻한 게 아니라 뜨거운 것이었다. 그의 손이 닿는 곳은 푸른빛의 불꽃이 작열했다. 고통에 혼란스러워하고 있는 나를 퍽 밀쳐버린다. 어떤 방어 자세도 취하지 못하고 뒤로 그대로 넘어져 버렸다.
─슈우우우우
분명 엉덩방아를 찧을 것 같았는데, 무한한 공간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으, 으아아아악!”
점점 작아지는 아크리스에게 손을 뻗었지만, 그는 잡아주지 않았고 결연한 말만을 남겼다.
“용사를 사랑하지 마.”
…
그 말을 끝으로 눈을 떴다.
코앞에 큰 눈을 가진 박쥐가 걱정스레 내려다보고 있었다.
“흑, 히욱! 아크리스님!!”
“크리스!! 정신이 들어?”
“아크리스?”
‘어라… 왜 이렇게 둘러싸여 있지.’
뻐근한 턱을 움직여 입을 벌렸지만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페로가 참다못한 눈물을 펑펑 쏟아낸다.
“흐아아앙! 아크리스님! 어떻게 된 거예요! 말을 전혀 못 하시잖아요!”
잠들어 있던 동안 대체 무슨 일이 있던 건지 어리둥절했다. 과거의 기억을 되새길 필요가 있었다.
테네브와 마법진 조사, 지하 감옥, 칼리고 그리고… 폭발.
‘맞다. 기사단이 터트린 폭발에 휘말렸었구나.’
균열이 생겼던 왼쪽 팔이 생각났다. 힘겹게 왼팔을 들어 올리자 몸이 미라처럼 붕대로 칭칭 감겨있었다.
‘설마… 나 불구 된 거야?!’
불안함에 눈을 굴리니 왼쪽엔 리헤로스, 오른쪽엔 테네브가 있었다. 어서 내 상태에 대해 말해달라는 듯 호소하는 눈빛으로 리헤로스를 바라보았다.
“크리스, 드렉티오 경이 널 업고 집까지 데려다주셨어. 그리고… 의원님이 네 회복력이 좋아서 금세 좋아질 거라 하셨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
있는 힘껏 버둥거렸는데 가냘픈 몸부림이었다. 가위에 눌린 듯한 답답함이었다.
‘나 몸에 감각이 없는 것 같은데.’
계속해서 몸을 까딱까딱 움직여보려 했다. 그러니 리헤로스가 내 몸을 잡아주었다.
“어디 불편해? 일으켜줄까?”
“내버려 두시죠.”
리헤로스의 권유에 고개를 끄덕였는데, 곧바로 테네브의 한마디로 저지되었다.
“움직이지 말고 누워있어야 합니다. 잘게 금 간 상처들은 벌어지기 쉽습니다.”
“아… 그렇군요.”
“아크리스. 너는…….”
그는 목 끝까지 말이 차오른 것 같았지만 이내 말 대신 한숨을 뱉어냈다.
“하아, 아니다. 다 낫고 나서 이야기하자.”
테네브가 말하는 ‘이야기’의 저의를 파악하니 두렵지 않을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