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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왕님 망겜에도 엔딩이 있나요-80화 (80/127)

80화

“크리스, 아 해봐.”

“으… 아아….”

그로부터 이틀이 지났다.

멍하니 입을 벌리고 있자 입안에 들어온 건 아무런 조미료도 첨가되지 않은 흰 죽이었다. 움직이기 힘든 나를 위해 리헤로스가 한 술 한술 떠먹여준다. 하지만 삼키는 것도 버거웠다. 처음과 달리 목소리를 낼 순 있었지만 성대 결절이 온 것처럼 쩍쩍 갈라진 소리였다.

“목은 크게 안 다쳐서 다행이야.”

“으응.”

“조금만 참아. 그래도 많이 나았어.”

“흐우…….”

“왜 그래?”

“맛있는 거 먹고 싶다….”

“어떤 게 먹고 싶은데?”

“갓 구운 노릇노릇 한 빵.”

그도 그럴 것이 이틀 내리 흰죽만 먹어서 입안이 텁텁했다. 정제된 탄수화물과 김치가 간절했다.

“많이 낫긴 했지만… 다친 부분이 식도에도 영향이 있어서 아직 먹기 힘들 거야.”

“조심해서 먹으면 안 될까? 아주 조금씩 먹으면 괜찮을 것 같은데.”

“…….”

“응? 리헤로스.”

설득하기 위해 절실한 목소리를 냈다고 생각했는데, 목소리가 흔들리니 아양 떠는 느낌이지 않았나 싶어 머쓱했다. 그래서 그에게 향했던 몸을 돌려 정자세로 앉았다. 그 모습이 시무룩해 보였는지 나를 어르고 달랜다.

“그럼 아주 조금만 먹어보자.”

“진짜?”

“목 아프다 싶으면 바로 뱉어야 해.”

“응응! 그럴게!

몇 번이고 고민하는 듯 주저하던 리헤로스는 끝내 1층에서 빵을 가지고 올라왔다. 아마 본인의 식사용으로 사둔 것일 텐데 먹지도 못하고 나를 간호해 주고 있는 거겠지. 고마우면서도 미안하고, 자괴감이 들었다.

이 지경으로 다친 걸 알았을 때 리헤로스는 대체 무슨 일이냐며 녹틸의 일을 도우러 간 게 아니냐며 꼬치꼬치 캐물을 줄 알았다.

‘어쩌다 다쳤는지 테네브한테 들었나? 그래서 안 물어보나?’

분명 탈옥한 걸 눈치챘을 텐데 칼리고는 왜 아무런 대처를 하지 않는지 의문이었다.

‘조용하면 불안하다는 게 뭔지 알겠다.’

모든 상황이 나의 책임을 물지 않으니 더더욱 불안했다. 이게 바로 죄짓고는 못 산다는 것의 표본 아닐까. 심란한 마음은 밀가루로 달래야 한다. 리헤로스로부터 빵을 넘겨받으려 하는데 그는 갑자기 줬다 빼앗듯이 거두었다.

“오늘은 그냥 끓인 죽 먹으면 안 될까?”

“왜에….”

“빵은 내일 먹자.”

“…….”

눈앞에 있는 그림의 떡, 아니 그림의 빵을 보고 있으니 더욱 우울해졌다. 기대감에 찬 손은 침대 위로 툭 떨어졌고 어쩔 줄 몰라 하던 그는 내 오른손에 빵을 올려주었다.

“그럼… 정말 조금만 먹어야 해. 정말로…!”

“약속할게. 그리고 네가 걱정할 만큼 아픈 건 아니야.”

“그건 아니야. 너 지금 많이 아픈 거 맞아.”

“으응….”

엄청나게 단호하게 받아치니 금세 풀이 죽어버렸다. 가끔 그가 용납하지 못하는 절대 영역이 존재하는 것 같다.

─똑똑똑

“들어갑니다.”

“테네브. 아직 이른 시간인데 일찍 왔네.”

“드렉티오 경, 먼 길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1층에서 노크를 해도 아무도 마중을 나오지 않기에 실례를 무릅쓰고 들어왔습니다.”

“아, 식사 중이라 듣지 못했네요. 죄송합니다.”

“…….”

테네브는 미간을 힘껏 구기더니 거의 뜀박질하듯 다가와서는 내 손을 ‘탁’ 쳐냈다. 맞아서 아픈 건 둘째치고 동그랗고 탐스러운 빵이 굴러떨어지는 걸 보고 화나지 않을 수 없었다.

“뭐 하는 거야…! 콜록콜록!”

“물도 제대로 넘기지 못하면서 뭘 먹으려는 거야? 리헤로스! 당신이 간호하고 있는 이유를 제대로 상기하시죠.”

“……죄송합니다.”

“리, 리헤로스에게 그러지 마. 안된다고 했는데 내가 달라고 졸랐어. 너무 먹고 싶어서….”

“감싸지 마. 네가 아무 먹고 싶다고 해도 안되는 건 안 된다고 해야지. 간병인의 자세가 안 되어있습니다.”

고작 빵 한 조각 때문에 분위기가 이 지경이 될 줄은 몰랐다.

“아크리스. 이럴 거면 우리 집으로 가지.”

“어…?”

“네 회복이 더딘 이유를 대충 알겠으니 말이야.”

테네브는 리헤로스를 경멸하듯 노려보았다. 내가 칼리고를 보는 눈빛과 맞먹을 정도로 살벌했다. 다른 것보다 내가 이 분위기를 더는 버티지 못할 것 같아서 오른손을 뻗어 테네브의 옷자락을 쥐었다.

“아니야. 나 거의 다 나았어. 봐, 손가락도 이제 움직여.”

굳어버린 분위기를 풀기 위해 애써 떨리는 손가락을 움직였다. 첫날에 비해선 가동 범위가 많이 회복되었다. 테네브는 길게 한숨을 뱉더니 가방에서 약통을 꺼내어 침대 옆 테이블에 올려두었다.

“드렉티오 경, 약 감사합니다. 크리스, 밥은 조금 있다가 먹자. 약 발라줄게.”

리헤로스는 테네브에게 한 소리 듣고도 속없이 감사 인사까지 보내며 미소 짓는다. 그 모습이 너무나도 짠해 보고 있기 힘들었다.

“함부로 건들지 마시죠. 제가 합니다.”

약통을 위해 일어선 리헤로스가 무안할 정도로 테네브는 차갑게 말했다. 이런 사소한 것까지도 제지할 줄 몰랐고 가까스로 풀었다고 생각한 분위기는 급냉동 되었다. 나까지 테네브의 심기를 어지럽히지 않기 위해 얌전히 따랐다.

“아크리스. 팔 들어봐.”

“어어….”

고분고분 팔을 들어 올렸고 붕대를 천천히 풀어냈다. 살갗은 징그러울 정도로 잘게 잘게 갈라져 있고 그 사이로 붉게 새살이 올라오고 있었다. 테네브는 능숙하게 연고를 펴 바르기 시작했는데, 속살뿐만 아니라 뼛속까지 파고든 열감이 떠올라 고통으로 다가왔다.

“아…! 악…!!”

“많이 아플 거야. …조금만 참아.”

“으웃…! 윽……큭…!”

까딱하면 정신을 잃을 것 같았다. 눈앞에 다시금 섬광탄이 터진 것처럼 빠르게 점멸해댔다. 팔로 끝나는 게 아니라 다리며 옆구리며 발라 줘야 하여 이 고통을 몇 번이나 다시 느꼈어야 했다. 치료가 전부 끝나고 나서는 온몸에 들어갔던 힘이 한 번에 탁 풀리며 기진맥진해진다. 리헤로스는 물수건으로 내 이마를 꾹꾹 눌러주었다.

“고생 많았어.”

“잘 참았다. 이제 며칠만 더 하면 완전히 살이 올라올 거야.”

“누울래….”

“부축해 줄게.”

“부축해 줄게.”

“둘 다 내버려 둬…!”

두 사람은 동시에 손을 뻗었지만 두 사람의 손을 마다하고 혼자 꾸물대며 누웠다. 서로 먼저 해주겠다며 흡사 경쟁하는 것 같은 모습이 가시방석… 아니 가시 침대와 다를 게 없이 불편했다.

“나는 조금 더 잘게. 할 일들 해….”

“잘 자 크리스.”

“…….”

고통스러워 식욕이 사라졌고 그 고통을 잊기 위해 잠시 눈을 감았다.

***

눈을 감기가 무섭게 잠들어버렸고, 이번엔 그 어떤 악몽도 없이 개운하게 저절로 눈이 떠졌다. 소리 없이 조심스레 눈만 뜨니 양옆에 리헤로스와 테네브가 보였다. 두 사람은 의자에 앉아 서로를 묵묵히 주시하고만 있었다.

‘설마 나 깰 때까지 두 사람… 이러고 있었나?’

숨 막혀 미칠 것 같았다. 가만히 지켜보고 있다가 못 참고 내가 정적을 깼다.

“아… 목말라.”

“크리스, 깼어? 여기 물. 마시고 싶어 할 것 같아서 수시로 물을 갈아왔어.”

“우와… 진짜? 고마워.”

“아크리스. 진통은 어때? 약 더 발라줄까?”

“아, 아니야. 그건 괜찮아.”

그는 혀를 쯧 찬다. 테네브에겐 따로 물어볼 게 있었다.

“리헤로스, 나… 시원한 물 좀 더 가져다줄 수 있어? 얼음 잔뜩 떠있는 걸로.”

“으응 그럴게.”

“정말 고마워. 부탁할게.”

리헤로스가 복도로 나가 1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밟는 소리가 들릴 때 즈음에야 조심스레 속삭였다.

“그러고 보니 테네브.”

“음, 내 도움이 필요한가 보군.”

“그건 아니긴 한데 이틀이나 지났는데 칼리고는 뭐라고 안 그래?”

“단장님 말인가… 음.”

그는 눈을 가볍게 감으며 아주 잠깐 생각을 한다.

“이상하게 단장님은 아무 말도 없으시더군. 다른 단원들에게 물으니 ‘징조’는 안 나왔으니 풀어준 것 같다고만 했어.”

“하아아… 마물이 그렇게 많이 튀어나왔는데 아무렇지도 않단 말이야…? 의심할 만도 한데.”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래도 혹시 모르지. 단장님이 정말 나와 너를 믿어줘서 풀어줬는지도.”

애석하게도 칼리고를 믿기에 저런 말을 할 수 있는 것 같지만, 나의 의문은 전혀 해소되지 않았다.

“정말로 의심하지 않는다면 다행이지만… 왠지 께름칙한데.”

“아크리스.”

“으응?”

“우리 집으로 가자.”

“…….”

“리헤로스는 널 보호해 주지 못해.”

“설마… 빵 때문이야? 고작 그거 하나 때문에?”

“그것 때문이 아니야.”

“그러면?”

“그는 너무 유약해. 사사로운 감정에 흔들릴 사람이야. 너에게 좋은 영향을 주지 못할 것 같아.”

“…모르겠어.”

“잘 생각해 봐.”

“…….”

왜 나와 리헤로스를 떼어 놓으려고 하는 건지 도통 이해가 안 됐다. 테네브가 내 정체를 알지 못하니 하는 가벼운 이야기라 생각해서, 피하고 싶었던 주제를 먼저 꺼내었다.

“내가 기사단이 만든 마도구, 풀뢰고르에 당했다는 게… 무슨 의민지 몰라?”

“…알아.”

“그럼 내가 마족이라는 건 알고 있다는 거네.”

“그래.”

“글라디우스 기사단이 마족을 보호하고 있다? 이게 가당키나 해?”

“나는 괜찮아. 왕래하는 사람이 없어서.”

“그 문제가 아니…!”

“용사라면 파급력이 더 클 거야.”

“…….”

“용사가 마족을 보호한다? 이걸 왕국에서 용납이 가능할 거라고 생각해? 아니, 오히려 용사의 업적을 의심하게 될걸. 마족과 담합해서 왕국을 속였다고.”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너를 희생해 용사를 결말로 이끌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본체 ‘아크리스’의 말이었다. 그 무엇보다 내가 리헤로스에게 있어 방해 요소가 된다는 건 끔찍했다. 심지어 리헤로스가 잘하고 있어도 반감을 품고 있는 인물이 많은 현 상황에서 적수를 더 늘린다는 건 다정한 그의 마음에 큰 상처가 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생각…해 볼게….”

“…그래. 다음에 왔을 땐 네 결심이 섰길 바란다.”

“…….”

테네브는 눈썹을 구부리며 빈 약통을 가방에 넣고는 방을 나섰다. 가는 길에 리헤로스와 마주쳤는지 아주 짧고 간결한 인사말이 오가는 것이 들렸고, 오래 지나지 않아 리헤로스가 방에 들어왔다. 내가 비교적 움직이기 편한 오른쪽에 앉아 자리 잡는다. 그의 사소한 행동들은 상대를 배려하는 게 느껴져 마음을 뭉클하게 만든다.

“여기 물. 오늘은 드렉티오 경이 일찍 가셨네.”

“으응… 뭐, 할 일 있다나 봐.”

“그렇구나… 많이 힘들지? 어서 나았으면 좋겠다.”

그가 따뜻한 미소를 잃지 않았으면 좋겠다. 매몰찬 세상을 미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러기 위해선 내가 결단을 내려야 했다.

“나… 할 말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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