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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왕님 망겜에도 엔딩이 있나요-81화 (81/127)

81화

“나… 할 말 있어.”

내 존재가 리헤로스에게 피해를 줄 거라고 하니 덜컥 겁이 났다. 그래서 급히 서두를 텄지만, 어떻게 말하면 좋을지 깊게 생각해 보진 않았다. 늘 서글서글 미소가 떠 있는 그의 표정도 조금은 가라앉았다. 제 무릎 위에 올려둔 수건이며 물컵을 테이블 옆에 올려두고 자세를 바르게 고른다.

“응. 뭐든지 말해.”

어떤 말이든 들어줄 준비가 된 그를 보니 더더욱 쉽사리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백 퍼센트… 아니, 이천 퍼센트 확률로 서운해하겠지.’

그저 서운한 걸로만 끝나면 다행이겠지만, 또 자기가 뭘 잘못했냐고 물으면 할 말이 없었다. 내가 마족이라는 이유로 네 명예가 실추될까 걱정된다고 하면 분명 상관없다고 하겠지.

정적이 길어질수록 그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게 보였다. 나는 빳빳한 입술을 윗니로 툭툭 뜯어내다가 어떻게든 겨우겨우 개미만 한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

“아까 못 먹은 밥… 먹고 싶어.”

“그랬구나. 워낙 심각한 얼굴로 말해서 걱정거리라도 있는 줄 알았어.”

“미안, 너 앉아있을 틈도 없이 오라 가라 시키는 것 같아 민망해서….”

“밥도 안 먹고 잤으니까 배고플 만도 하지. 금방 가져올게.”

“그, 그렇게 배고픈 건 아니니까 천천히 가져와도 돼!”

“하하, 알겠어.”

알겠다고 해도 서두를 게 뻔했다. 그는 원래 그런 사람이니까.

리헤로스가 방을 완전히 빠져나가고서야 깊은 한숨을 소리 내어 푹 내쉬었다.

‘결국 테네브 집으로 가겠다고 말 못 했어. 나 때문에 책잡히면 어쩔 거야 유자현! 잘 생각하란 말이야.’

겨우 꺼낸 게 고작 밥 달라는 말이라니 핑계가 1차원적이고 한심했다. 민망한 마음에 소극적인 나의 일부를 한참 나무랐다.

‘솔직히… 리헤로스 핑계 대고 있는 거 아니야?’

그가 서운할까 봐 말하지 못하는 게 맞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었다. 아무리 서운해한들 내 결심이 선다면 그도 막을 수 없는 것 아닌가.

짧게나마 도출한 결론은 ‘내가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됐다’라는 게 결정적임을 깨달았다. 구질 거리다 못해 지질할 정도의 나 자신도 종잡을 수 없었다.

“후우우.”

재차 한숨을 쉬며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 손가락 끝도 움직이지도 못했던 처음에 비해선 많이 나았지만, 회복 속도가 심히 더뎠다.

‘리헤로스의 검에 찔렸을 때도 그랬지. 그 폭탄도 신성력이 깃들어서 있어 그런 걸까?’

알리엔토 사가에 속성별 상성이 존재했다는 것이 불현듯 떠올랐다. 어둠과 빛은 여느 게임에서 그렇듯 상충하는 성향을 가지고 있으니 명확한 상성이었다. 현실에서 플레이할 당시엔 상성이 메인 공략에 크게 영향을 주지 않는 미미한 시스템이어서 기억 속에 묻혀있었다. 실제로 당하면 물리적 대미지는 차치하고, 정신적 대미지가 큰 느낌이었다.

오른손으로 왼팔 위를 가볍게 쓸고 지나가니 닿은 곳마다 찌릿찌릿 고통이 퍼져나갔다.

“아프다… 흉 지겠지?”

목숨을 건지고 난 후라 느긋한 걱정이 튀어나왔다. 안위는 확보되었으니 그보다도 큰 걱정거리가 떠올랐다.

세상엔 비밀이 없다. 언젠가 들통날 정체를 숨기고 있는다고 속아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오히려 숨기고 있었다고 괘씸하다고 배로 분노할 사람들은 수두룩할 것이다. 지켜주겠다고 다짐했던 게 물거품이 될 바엔 테네브 쪽으로 가는 게 그에게 좋은 결말이지 않을지 계속해서 고민에 빠졌다.

‘그런데 리헤로스… 공주님이랑 결혼하는 거 맞긴 하지?’

이상하게도 그건 묻기 어려웠다. 녹틸은 소문을 믿지 말라고 했지만, 사실이면 어쩌지. 리헤로스 입에서 듣는다는 자체로 정신력이 급격하게 낮아질 것 같았다. 행복한 얼굴로 결혼 소식을 알리는 리헤로스? 그 표정은 무엇보다 가슴을 떨리게 할 것 같지만 대상이 내가 아니라는 사실에 그만한 좌절감도 몰려들 것 같다.

회피한다고 될 일은 아니지만 그랬다. 실연의 상처가 아문지 얼마나 됐다고 짝사랑도 실패해야 하는지 그냥 모르는 채 넘어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왜 이렇게 늦지?’

길고 긴 자문자답의 시간이 끝나도록 리헤로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저 답지 않게 굼뜬 속도였다. 혹시 무언가 잘되지 않은 걸까 걱정스러운 마음에 잘 움직여지지도 않는 반신을 이끌고 침대에서 나왔다. 힘겹게 벽과 계단 난간을 짚으며 1층까지 내려왔다.

“후우… 헉….”

근육을 움직일 때마다 흡사 갈라진 살갗이 벌어지는 고통이 밀려왔다. 환부의 고통과 별개로 심히 몸이 무겁고 힘들었다. 설마 내가 모르는 사이에 상태 이상이 걸려있는 건가 싶어 잠시 계단에 걸터앉아 상태 창을 열어 보았다.

[캐릭터 정보]

공개 이름: 아크리스

히든 이름: 없음

직업: ???

성별: 남

나이: ???

거주지: 세르뷔에

[전투 스탯]

공격력: 6137

방어력: 5233

회피: 6

…더보기

[소셜 스탯]

우호도: 애정(91)

“이… 미친…!”

캐릭터 정보와 스탯이 바뀐 게 눈에 띄었다.

거주지는 리헤로스와 함께 사는 ‘세르뷔에’로 바뀌었고, 우호도는 급격하게 상승하여 ‘애정’이 되었다는 것. 이런 건 대충 예상했으니 놀랍지도 않았다.

다른 것보다도 내 이목을 끄는 건 전투 스탯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약 3천에서 2천가량 떨어진 상태였다.

“또 스탯이 떨어졌어…. 전엔 다쳐도 이런 일 없었잖아.”

이러다간 맨손으로 패고 다녔던 일반 NPC들보다 못하게 될 것 같다. 다칠 때마다 내려가는 건가? 시스템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지만 이를 통해 깨달은 건 있었다. 내가 해야 할 일은 단 한 가지.

몸을 사리는 것이다.

꼭 이 세계의 흐름에 개입할수록 이치 어겼다는 것처럼 벌을 받는 것 같달까. 갈수록 개입이 힘들어지고 있다.

‘주인께서 이 세계의 이치를 부수고 있다는 사실도, 신은 알고 계십니다.’

문득 아주 오래전, 비스크라가 죽어가며 했던 말이 떠올랐다. 내가 이 꼴이 된 게 어쩌면 악신 카르말록스의 영향력일 수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추측이 맞았다면 마왕이라는 자리에서 벗어났음에도 이토록 괴롭히는 이유를 이해할 수가 없다. 신의 존재란 원래 인간의 관점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존재라지만, 아크리스의 본체도 내가 죽길 바라고 있지 않았던가.

이 세계의 모든 것이 내가 불행하고 망가지길 바라는 것만 같았다.

‘아니야…. 리헤로스가 말한 대로 우리는 다른 결말을 찾을 수 있을 거야.’

그렇게 믿어야만 한다. 이제 와서 그의 손에 죽고 싶진 않으니까. 초반에 비해 마음가짐이 많이 바뀌었다. 불안한 상상들은 더욱이 리헤로스를 보고 싶게 만들었다. 누군가 재촉한 것도 아닌데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움직였다.

“리헤로스?”

이러면 안 되는데 부엌은 너무나도 고요했다. 식은 죽을 테이블에 올려놓은 채, 아궁이에 불을 때지도 않았다. 머릿속에선 소란스러운 경고음이 울렸다.

“리헤로스!”

대체 어디로 사라진 걸까. 다시금 떠올리고 싶지 않은 악몽이 머릿속을 생생하게 채웠다.

아름다운 꽃을 둘러싼 관에 누워있던 그 꿈. 눈을 감고 있는 그의 얼굴은 너무나도 아름답지만, 생기를 앗아간 듯한 핏기 한 점 없는 얼굴은 두렵기 그지없었다.

눈앞이 빙글빙글 돌았고 잠잠하나 싶던 부실한 균형감각이 몸을 휘청이게 했다.

─쿠당탕

테이블 위에 똑바로 서 있던 식기를 쓸어 넘어트려 버렸다. 당장은 울렁이는 시야를 바로잡기 위해 머리를 지탱해 줄 흔들림 없는 곳이 필요했다. 테이블에 매달려 있던 다는 중력에 못 이겨 스르륵 흘러내리고 있었다. 이대로 충격 없이 조용히 바닥에 누울 수 있다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크리스!”

도통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축 늘어져 있었는데, 누군가 흘러내리는 나를 단단히 안아 들었다. 그 ‘누군가’는 당연하게도 리헤로스였지만 혼란스러워 누구지? 하는 망상이나

“리헤로스…?”

“괜찮아? 몸도 성치 않으면서 1층까지 내려온 거야.”

“네가 너무 안 와서… 어디 갔었어?”

“불을 지필 장작이 떨어져서 밖에서 장작 패고 있었어. 그런데 큰 소리가 들려서 급히 들어왔더니….”

“그렇구나… 바보같이 또…….”

“괜찮은 거야?”

“…없어진 줄 알았어.”

“널 두고 아무 데도 안 가.”

“…….”

나약한 마음의 틈은 계속해서 벌어진다. 어째서 넌 나의 망상에 힘을 실어주는 것인지 모르겠다.

‘이러다간 네게 더 많은 것을 요구하게 될지도 모르는데.’

나를 의자에 앉혀주고 나서 조각난 장작을 아궁이에 던져 넣어 불을 지폈다. 나는 얌전히 앉아 그 모습을 지켜보기만 했다. 밥을 끓일 줄 알았는데 철제 주전자에 물을 올린다. 찬장에서 찻잔을 꺼내더니 그 안에 무언가 넣고 끓인 물을 채웠다.

“이거 마셔.”

“이게… 뭔데?”

“국화꽃을 띄운 차야.”

그렇게나 화훼에 관심이 많더니 식용 꽃까지 꿰뚫고 있는 걸까. 신기하기만 했다. 찻잔 안에 마른 국화 꽃잎이 둥둥 떠다니는 걸 내려다보기만 했다.

“쓸 것 같으면 꿀 좀 타 줄까?”

“아니, 괜찮아. 향이 좋다….”

“네가 원하면 언제든지 해줄게. 어려운 것도 아니니까.”

조심스레 찻잔을 들어 차를 몇 모금 마시니 어지러운 것도 가시는 것 같았고, 무엇보다 몸이 따뜻해져서 야생마처럼 날뛰는 마음이 진정되었다. 평소의 페이스로 돌아오니 그의 얼굴이 시야에 들었다.

‘엄청 귀찮을 텐데도… 고맙네.’

걱정스러운 표정에서 다정한 심성이 드러났다. 이러니까 속수무책으로 그에게 감기고 있는 게 아니겠는가.

“어려운 것도… 얼마든지 해줄 수 있어.”

“무, 무슨 소리야…. 어려운 건 해주지 마.”

나의 대답에 소리 없이 웃는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점차 웃음기가 사라지고 있었다. 혹시 내 정신이 혼미한 찰나에 기분 거스를 만큼 나쁜 이야기를 했나? 불과 몇 분, 아니 몇 초 전의 기억을 되짚고 있었는데 리헤로스가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그런데 너는… 내가 아니어도 되겠지.”

“어…?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깜짝 놀랐다. 내가 평소 그에게 심하게 투덜대고 혼자 할 수 있다며 호의를 거절한 적이 많긴 했는데, 리헤로스가 아닌 다른 사람이어도 괜찮다고 표현한 적은 맹세하건대 없었다. 그의 입술은 몇 차례 달싹대며 참고 있었다. 퍽 이야기하기 곤란해 보였다.

‘유자현, 빨리 생각해 내. 내가 뭐라고 했는지.’

그에게서 내가 저지른 무례가 나오기 전에 먼저 사과하고 싶었다. 둔해진 머리는 도통 돌아갈 생각을 안 했다. 찻잔 속 부유하는 국화꽃에 맺힌 기포가 퐁 터지는 동시에 리헤로스의 입이 열렸다.

“너와 드렉티오 경… 나만큼이나 친해 보이니까.”

“아……?”

“크리스는 나 아니어도 경에게 부탁하면 되니까….”

“아아……?”

나는 멍청한 소리를 낼 수밖에 없었다. 내게 있어 리헤로스는 누구도 대체할 수 없는 유일무이한 존재였으니까. 그게 제아무리 친한 테네브라도 그랬다.

“신경 쓰이게 해서 미안해. 아픈 사람한테 뜬금없이 굴었네. 갑자기 생각나서… 아니야. 회복에 집중하자.”

“아무… 사이도 아니야.”

“응?”

“테네브랑 그렇게 친한 거… 아니라…고.”

내가 왜 변명하고 있을까. 하지만 오해할 여지없이, 덧붙이는 말없이 명확한 의사 전달을 하고 싶었다.

“아… 그랬구나.”

“…그니까… 어… 오해하지 마. 친해도 너만큼 친할 수 있겠어. 지낸 시간이 얼만데.”

“으응.”

안 친하다고 못 박아버리니 테네브에게 미안했지만, 리헤로스에 비해 친하지 않은 건 사실이다. 우리 둘은 어색하게 말을 반복하거나 늘리기만 했다. 그러다가 무언가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 너는 나보다 친한 사람 있어?”

“어?”

“친한 사람 있냐고!”

그 ‘친한 사람’이란 공주님의 존재를 묻는 것이기도 했다. 결혼하느냐고 직설적으로 물어볼 수 없었던 것을 간접적으로 돌려 말했다.

“나는….”

대답을 기다리기까지의 1초가 1시간처럼 느껴졌다.

“크리스 너 하나뿐이야.”

“…….”

꼭 고백처럼 들렸다. 몇 번이고 보았던 그의 애달픈 표정은 그렇게 생각하게끔 했다.

그럼 그의 사적인 영역에 조금만 더 발을 뻗어봐도 되지 않을까. 무식한 용기가 샘솟았다.

“리헤로스. 난….”

“응.”

“네가… 공주님과 결혼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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