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널 혼자 두는 게 불안해.”
“왜 그렇게까지… 나를 생각하는 건데?”
“그 이유가 듣고 싶어?”
“…….”
그 이유가 어떻든 간에 듣고 나면 감당하기 힘들 거란 예감이 들었다.
자꾸만 리헤로스를 등지고 돌아설 때, 마지막 표정이 눈앞에서 아른거렸다. 그렇기에 몸 어딘가를 간지럽히는 궁금증을 참고 대화 주제를 돌리기로 했다.
“날 의심했던 사람이랑은 같이 갈 수 없어. 또 무슨 일이 벌어지면 나부터 의심할 게 뻔한데 위험을 감수할 수는 없지.”
리헤로스의 행동이 조금 서운하긴 했어도 그로서는 최선이었을 것이다.
용사니까.
‘시민들이 다치면… 크리스가 더 죄책감을 느낄까 봐 그랬습니다.’
그의 목소리가 잔잔한 물결에 파문이 인 것처럼 머릿속에 왕왕 울려댔다. 본인의 선한 마음과 양심이 아닌 나를 위해 그런 것이라 하지 않았던가. 그래서 리헤로스의 대답을 듣고 난 이후엔 이미 마음은 누그러질 대로 누그러졌다. 단순한 내 감정은 금세 이해해버리고 말았다.
‘리헤로스가 오해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그가 오기 직전에 끌어안고 있던 모습에 크게 의미 부여하지 않았으면 했다.
오랜 생각을 마치고 테네브가 뒤늦게 눈에 들어왔는데 그는 입술을 잘근 씹고는 아무 말도 없었다.
“할 말… 없으면 난 갈게.”
그를 지나쳐 가려고 하는데 따라오더니 앞을 가로막았다.
“뭐야…?”
“저번에 네가 불쾌할 만한 이야기를 다짜고짜 물어서 미안했어.”
“…그게 끝이야?”
마족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박해하려는 건 너무 괘씸했으니까. 내가 착한 일을 하기 위해 얼마나 갖은 노력을 했으며 그를 위기에서 구해줬는데 의심을 할 수 있을까.
“넌 음모와 싸우기 위해 열심히 했다는 걸 알면서도 단정해버렸어. 다른 마족과 다르게 살아오면서 받은 차별이 어땠을지 생각했어야 했는데. 내가 어리석었다.”
“지금이라도 그리 생각해 주니 고맙네.”
“…아직도 화났어?”
“그래. 이 짧은 몇 마디 듣고 금방 화가 풀릴 것 같아?”
갑작스레 팔목을 덥석 잡는 모습에 화들짝 놀랐다. 무슨 짓을 할 생각인지 겁이 났다.
“뭐야?! 이거 놔.”
놓기는커녕 내 손으로 본인의 가슴을 퍽퍽 소리가 나도록 때렸다. 소리는 컸지만, 오히려 내 손이 아팠다. 힘겹게 손을 빼냈다.
“뭐 하는 짓이야?”
“화가 풀릴 때까지 때려도 좋아.”
이게 무슨 해괴한 행동인가. 이유를 듣고 몇 초간 벙쪄있었다. 뒤늦은 실소가 터져 나왔다.
“풀렸어?”
“내가 칼리고야? 아무리 화나도 고작 화풀이하겠다고 사람 때리는 짓은 안 해.”
“그럼 어떻게 해야 네 마음이 풀리는데?”
노력이 가상했다. 노력을 안 하는 사람은 싫어도 뭐라도 하려는 모습은 보기 좋았다.
“아직 그 종교 조사하고 있어?”
“당장은 잠잠해졌어도 혹시 모르니 지켜보고 있긴 하지.”
“그렇다면 그 사건 같이 조사해.”
“뭐?”
“아직 끝나지 않았거든, 아까 내가 상처 입힌… 사람들이 그 종교와 연루된 사람들이었어.”
“뭐라고? 그런데 리헤로스가 구했단 말이야?”
“중요한 건 그게 아니야.”
사실 중요하긴 했지만, 이미 도망쳐 버린 놈들을 어찌할 도리는 없었다. 빨리 잊는 게 상책이었다.
“아직 성체를 소환하지 못했다고 했어…. 아마 다시 시작될 거야. 너 혼자 조사하긴 벅찰 거고… 나와 리헤로스도 둘이서 대처하기엔 어려울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어.”
“으음….”
현재의 내 상태가 정상이 아니었기에 더욱이 그랬다. 리헤로스에게 도움이 되는 인물이 절실했다. 테네브 정도면 전력에 꽤 도움이 되는 NPC이다. 그러니 꿍한 마음은 서둘러 풀고 협력을 요청하는 게 옳았다.
“알겠어. 그렇게 하지.”
“좋아. 그런데 정말로 나 믿는 거 맞지? 나 ‘감시’하려고 수락한 건 아니지?”
“그런 거 아니야. 네가 원하면 매일매일 사죄할게.”
“나 뒤끝 심하니까 조심해.”
“……빵 좋아하지?”
내 말에 어쩔 줄 몰라 하던 그는 한 손에 들고 있던 상자를 앞으로 내밀었다. 그 안에는 예쁜 모양의 머핀들이 여섯 구가 앙증맞게 줄지어 서 있었다.
“이게 뭐야?”
“이제… 일반식도 먹을 수 있을 것 같아서 사서 네게 가져다 주려 했어. 그런데 여기에서 만났네.”
“그래? 왜 이렇게까지….”
“지난번에 빵… 나 때문에 못 먹었잖아. 그것도 진심으로 사과하고 싶었어.”
“그랬구나… 세상에. 자주 가는 빵 가게에선 못 봤던 건데 귀엽다.”
“우리 집 근처에 있는 작은 가게에서 사 왔어. 입소문 난 곳이라 맛있을 거야.”
“진짜?”
상자에서 크림이 듬뿍 올라간 머핀을 집어 조심스레 한 입 베어 물었다. 입에 들어가기가 무섭게 향기로운 얼그레이 향이 폭죽 터지듯 퍼져나갔다.
“얼그레이 머핀이구나… 맛있다…. 크림이 느끼하지 않고 부드러워. 시트는 푹신푹신해서 크림이랑 함께 먹으면 입에서 같이 녹아내려. 말도 안 나오게 맛있어.”
“그래? 무슨 말인진 모르겠지만 다행이다.”
“다른 맛은 뭐야?”
“글쎄, 그냥 종류별로 사 왔어.”
안에는 곰돌이 모양의 머핀도 있었다. 들어서 테네브 얼굴 옆에 갖다 댔다.
“이건 너 닮았다.”
“내가 이걸 닮았다고?”
“응. 곰돌이.”
아주 지극히 1차원적인 이유였다. 그는 갈색 머리카락에 곰처럼 우직한 면이 있었으니까. 그렇게 곰처럼 생긴 남자가 아기자기한 머핀을 골라 사 왔을 생각을 하니 어쩐지 웃음이 배시시 나왔다. 곰돌이 머핀을 그의 입에 꾹 누르자 그는 놀란 눈을 했다.
“너도 먹어. 나 혼자 먹기 민망하니까.”
“우음.”
그도 입술을 우물거리며 맛보기 시작했다. 나처럼 미식을 즐기는 스타일은 아닌 것 같아 별 표정 변화는 없긴 했다. 단 음식이 들어와서일까? 마음이 더욱 누그러졌다. 머핀 하나를 해치우고 나서 손가락에 묻은 크림을 쪽 빨아먹었다. 그 모습을 테네브가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테네브라면 기사도 정신이니 뭐니 하면서 식사 예절 아니라고 잔소리할 것 같아.’
어느 정도 반응이 예상되는 녀석이었다.
“…칠칠하지 못하게 묻히고 먹네.”
“뭐 어때? 높은 분 앞에서 먹는 것도 아니고. 원래 머핀은 깨끗하게 먹기가 더 힘들잖아. 위로 쌓아 올린 빵이라서.”
그는 잔소리 대신 내 뺨을 꾹 눌러 닦아주었다. 그리곤 크림을 닦은 손가락을 제 입으로 가져가더니 쪽 빨아들인다.
“더, 더럽게 그걸 왜 먹어?!”
“하나도 안 더러워.”
“더러워.”
“……아크리스.”
“왜?”
“이런 말… 해도 되는지 모르겠는데.”
“사과하려는 거면 그 정도만 해. 이제 정말 괜찮으니까. 뒤끝 있다는 건 거짓말이야.”
“그러면 사과 아닌데 해도 되나? …몇 번이고 하고 싶던 이야기거든.”
테네브는 고개를 가볍게 떨구었다. 손에 쥐고 있는 곰돌이 머핀을 만지작대는 모습이 꽤 초조해 보였다.
“뭐길래?”
“…미의 여신 코르티아도 네 앞에선 고개를 숙일 것 같다는 이야기.”
“…….”
“꼭 해주고 싶었어. 기분이 풀리라고 하는 말 아니야. 진심이야.”
“아… 미쳐버리겠네.”
“왜 미쳐?”
“먹기나 해.”
곰돌이 머핀을 빼앗아 그의 입에 쑤셔 넣었다. 진지한 얼굴로 우물대는 꼴이 우스꽝스러웠다. 먹다 말고 대뜸 저런 얘기를 하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대체 이놈의 얼굴 얘기는 언제쯤 안 들을 수 있는 건데.’
마왕이라는 직함을 달고 있는 캐릭터가 이 정도로 매력 있게 만들어질 이유가 있나 싶었다. 차라리 평범한 외모, 아니 아예 확 낮아도 좋았을 것이다. 이제 그냥 외모 얘기가 나오면 반응을 하지 말자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궁금한 게 있는데.”
“얼굴 얘기면 하지 마.”
테네브는 유난히 오늘따라 수다스러웠다. 화해 기념 토크쇼라도 하자는 건가.
“얼굴 얘기는 끝났어.”
“그럼 뭔데?”
“네 애칭이 크리스인가?”
“뭐… 공식 애칭이냐 묻는 거야?”
“그래.”
“아니. 리헤로스가 막 부르는 거야. 정해둔 건 따로 없어. 누구는 날 아리스라고 부르기도 해.”
“그렇군…. 그럼 나도 애칭 지어 불러도 될까.”
“애칭으로 부르고 싶은 이유가 뭔데? 아크리스가 어렵지 않고 좋잖아.”
“나도 널 친근하게 부르고 싶어서 그래. 그렇게 하면 마음의 거리가 조금 좁혀지지 않을까…하고.”
“마음대로 해라. 내가 싫다고 하면 안 부를 것도 아니고.”
“싫으면 안 부를 거야.”
“뭘 또 그렇게까지… 불러도 돼. 딱히 신경 안 써.”
다른 사람들은 부르게 마음대로 두었는데, 테네브만 싫다고 막는 것은 이상하지 않은가.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테네브의 얼굴엔 미소가 떠올랐다.
‘애칭이 뭐라고… 그렇게 좋은가.’
그는 내 쪽으로 몸을 틀었다. 나는 그저 남은 머핀을 씹는 데에 정신이 팔렸다.
“아키.”
“흐응, 그걸로 부를 거야?”
“응, 아키.”
“엄청 어색하다.”
“아키.”
“…왜에.”
“내가 지은 애칭에 대답해 주니까… 기분 좋아.”
“좋으면 됐지. 그런데 내가 못 알아들을 수도 있겠는데.”
“자주 불러서 익숙해지도록 할게. 아키.”
“그러던지…….”
마초답고 무뚝뚝한 그는 세심한 성격과는 거리가 멀었기에 호칭은 금방 아크리스로 회귀하리라 생각했다. 지금이야 할 말이 없으니까 아무 말이나 막 던지는 게 아닌가.
“…너랑 떨어져 있는 며칠 동안 바람이 하나 생겼어.”
“뭔데?”
“다른 사람들이 나를 미워해도 너는 날 미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바람.”
“내 빈자리가 그렇게 컸어? 혼자 그런 생각까지 하고.”
“뭐어…. 후회를 많이 했지. 충동적으로 한 말도 그렇고.”
“바보.”
“너는 내 첫 번째 친구니까… 더 그런 것 같아.”
그저 규칙, 기사의 도리밖에 모르는 녀석일 줄 알았는데 관계에 신경을 많이 쓰는 타입이었나 보다. 그런데 첫 번째라는 말이 굉장히 신경 쓰였다.
“나한테 너는 첫 번째 친구가 아닌데 괜찮아?”
“…….”
“안 괜찮다면 첫 번째라는 것에 의미 부여는 안 하는 게 좋아.”
“괜찮아. 대신…… 욕심은 낼지도 몰라.”
“어떤?”
“…어떤 의미로든 첫 번째가 되고 싶다는 욕심.”
이상하게 들리면 내가 과대 해석하는 거겠지. 무어라 대답하면 좋을지 단어를 고르는 게 어려웠다.
“아… 하하! 꼭 첫 번째일 필요가 있나? 다 같은 친구인데.”
“그래도 우선순위에 따라 느낌이 다르지 않나? 너는… 인기가 많아서 그런 걸까.”
“내가? 나 인기 없어. 오히려 성격 안 좋다고 싫어하는 사람이 더 많지.”
“네 성격 좋은데.”
“이건 또 처음 듣는 말이네. 너한테 기분 상할만한 말 쏟아부었던 거 기억나지?”
“그땐 네가 화날 만한 대화였으니까 이해해.”
“우왓… 그러냐?”
“응.”
“뭐어… 그렇게 생각해 주면 고맙긴 한데, 하여튼 인기는 없고 우선순위도 없어. 다 같아.”
“난 평등이란 건 없다고 생각해서 그래.”
‘계급사회에 찌들었구나.’
이래서 계급 제도가 좋지 않다. 자연스럽게 순서나 급을 매기게 되니까.
“너무 징징대는 것 같아?”
“아니 뭐… 나쁘진 않긴 해.”
절교당할까 봐 안절부절못해선 첫 번째가 되고 싶다는 건장한 체격의 남성. 누가 마다하겠나. 리헤로스와 마찬가지로 유니콘이었다. 현실에서 볼 수 없는 희귀한 남자.
오늘 있던 모든 일은 순전히 모든 것이 나로 인해 발생했고, 나의 실수로 모든 일이 어그러질 뻔했다. 자칫 잘못하면 심연에 빠질 수도 있었는데, 오늘만큼은 테네브로 인해 잊을 수 있었던 것 같다.
‘이러나저러나… 친구는 많으면 좋긴 해.’
늘 한 사람과 좋은 일만 있을 수는 없으니까.
조금 착잡한 심경에 하늘을 올려다보니 어느새 해가 저물고 있었다.
‘리헤로스는 이미 돌아갔겠지?’
제아무리 리헤로스라 해도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을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렇다면 곧바로 세르뷔에로 돌아가는 게 맞았다.
“아… 시간 늦었다. 잘 먹었어. 그럼 가볼게.”
“바래다줄게.”
“됐어. 세르뷔에는 아까 네가 말한 대로 그다지 멀지 않잖아.”
“…듀스리아였으면 바래다줄 수 있었던 걸까.”
“푸하하! 됐다 됐어. 어디든 혼자 갈 수 있어. 그럼 진짜 갈게.”
“아키, 잠깐만.”
그는 내 쪽으로 다가오더니 내 뺨을 다시 문질렀다.
“아직… 크림 묻어있어서.”
“아, 그랬어?”
테네브의 행동이 묘하게 로맨틱하게 느껴진다면 내 착각일까.
‘설마 아니겠지.’
간혹 친구를 지나치게 과보호하는 애들도 있지 않은가. 보통 동생 취급하는 그런 부류가 있기도 하니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조사는… 내일부터 시작할 거야.”
“그래? 알겠어. 리헤로스랑 준비해둘게.”
“……응.”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주고 뒤돌아 걸었다.
한참 걸어 나오고서 뒤를 돌아보았는데 테네브는 아직 그 자리에 서서 내 쪽을 보고 있었다. 절친한 친구가 생겼다는 생각으로 불순한 생각을 모두 지워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