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몸이 말이 아니어서 오늘은 걷는 것 대신 포탈을 사용해 집으로 돌아왔다. 해가 지는 건 순식간이라 이미 저택의 주위는 어둠이 내려와 있었다. 그런데도 저택은 불이 켜져 있지 않았다.
‘벌써 모두 자고 있나?’
설마 라이오펠에서 기다리고 있는 건 아니겠지. 제발 아니길 바랐다. 이미 민폐는 끼칠 대로 끼쳤으니까 동거인을 두고 온 몰상식한 친구가 되지 않았으면 했다. 조심스레 문을 열고 내부로 들어섰다.
“다녀왔어.”
“어? 아크리스님!”
“페로… 안 자고 있….”
페로의 목소리를 따라 거실로 이동해 보니 리헤로스가 구부정하니 소파에 앉아있었다. 금발 머리 위엔 잿빛 털 뭉치가 납작하게 엎어져선 손으로 퐁퐁 머리를 두들기고 있었다.
‘뭐 하고 있는 거지?’
어느 사이에 페로와 리헤로스가 친해진 걸까. 과감한 스킨십? 공격? 터치? 무어라 불러야 할지 모를 행위를 본 게 놀랍기만 했다.
“크리스… 왔구나.”
“으응, 뭐 하고 있어?”
“리헤로스님이 기운이 없으셔서요. 이렇게 토닥토닥해드리고 있었어요!”
“아… 아아….”
“아크리스님이 이렇게 토닥토닥해줄 때 저는 기분이 좋아졌었거든요. 그래서 해드리는 거예요!”
“으응… 그래. 토닥토닥.”
토닥토닥이라는 행위가 엄청 귀엽긴 했지만, 위로가 되는지는 잘 모르겠다. 리헤로스 옆에 앉으니 페로는 눈치껏 날개를 펼쳐 거실을 빠져나갔다. 페로의 날갯짓하는 소리가 까마득하게 들릴 즈음에야 조심스레 입을 열 수 있었다.
“있잖아 오늘….”
“응.”
“고마웠어. 내가 무슨 짓을 한 건지 상황 파악하기도 전에 너무 무서워서… 도망친 거야.”
“…응.”
그의 짧은 대답은 초조하게 만들었다.
“변명은 아닌데, 왜 불꽃이 터져 나왔는지는 아직도 모르겠어. 그냥 네가 다친 걸 보고 너무 화가 났는데… 그때 머릿속에 어떤 목소리가 들리더니 그런 거야.”
“…….”
“내가 의도한 게 아니야 정말 결백… 아니다. 변명할 게 아니지. 나도 같이 해결해야 했었는데 많이 곤란했지…. 미안해.”
아무 표정도 없이 날 물끄러미 쳐다보기만 한다. 이젠 대답조차 나오지 않을 정도로 기분이 나쁜 걸까. 어서 그가 좋아할 만한 소식을 꺼내라고 온 내장이 뒤집히듯 재촉해댔다.
“그, 그리고 테네브가 네게 나쁘게 얘기한 건 내가 잘 타일렀어. 내가 부당한 대우를 받는 줄 알았나 봐. 전혀 아니라고 설명했어.”
“…응.”
“그리고… 그 종교는 셋이 같이 조사하기로….”
갑자기 리헤로스는 몸을 기울이더니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대었다. 깜짝 놀랐지만 그대로 목석이 된 것처럼 굳어버렸다.
“알겠어. 그렇게 하자.”
“아아… 응.”
이 대화로 끝난 걸까? 기묘해진 내 상태나 이상 상황에 대한 일언반구 언급이 없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하지만 물어볼 수가 없었다. 어쨌든 내가 잘못한 입장이니 말싸움으로 번지지 않고 무사히 넘어가면 감사할 일이었다. 거의 들리지도 않을 정도로 새근새근한 숨소리는 적어도 그가 화난 상태는 아니리라 추측되었다.
그의 무릎 위에 놓인 손엔 나와 같은 붉은 알의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꼭 커플링 같아.’
리헤로스의 눈치를 살살 볼 때는 언제고 그가 화내지 않으니 안심했다 이건가. 이젠 여유로운 감상이나 하고 자빠졌다. 반지는 각자 검지에 끼운 데다 스피나 백작과도 함께 나눠 가진 것이기 때문에 특별한 의미 부여는 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얼마 전에 리헤로스가 직접 끼워주었던 장면이 떠오르면서 망상 회로가 불타고 있는 거 아니겠는가.
“…자?”
어깨에 기댄 채 몇 분이나 미동이 없는 그에게 질문을 던지니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의 왼손등을 검지로 톡톡 두드렸다. 그런데도 반응이 없자 손가락뼈를 따라 천천히 쓰다듬듯 움직였다.
‘이거 완전 변태 짓 아니야?’
무심코 한 행동을 자각하고 나서 민망해졌다. 혹시 그가 깼을까 고개만 살짝 돌려 그를 내려다보았는데 이마에 붙은 거즈 뭉치가 눈에 띄었다.
‘감히 잘생긴 얼굴에… 아니지. 얼굴뿐만 아니라 어디라도 다치면 안 돼.’
흐트러진 금색의 머리카락을 넘겨주려는데 내 왼팔에 있는 검은 반점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원래 이 크기였던가?’
주위가 어두워서인지 아니면 정말 커진 건지 모호했다. 점이야 자연스럽게 커지기도 하니까. 별것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저 지금은 나와 리헤로스의 관계가 깨어지지 않은 것에 감사한 마음뿐이었다.
‘모든 게 잘 풀리고 있어. 정말이야. 내가 실수하지만 않으면 돼.’
테네브와 리헤로스가 화해하고 셋이 잘 지냈으면 했다.
***
“어젠 실례가 많았습니다.”
테네브는 고개를 깊이 숙여 리헤로스에게 사과를 표했다. 묘한 긴장감이 흘렀지만, 그 이상의 말다툼은 없었다.
“드렉티오 경, 저는 이제 괜찮습니다. 고개 드세요.”
“무례를 눈 감고 넘어가 주시는 넓은 아량에 감사드립니다.”
“잘 됐다. 리헤로스, 그렇지? 테네브. 이제 잘 지내보자. 우린 이제 동료니까.”
“잘 부탁드립니다.”
“저도 잘 부탁드리죠.”
늘 사근사근한 리헤로스도 테네브와의 관계에서는 딱딱한 말투와 표정을 구사하고 있었다. 사과를 주고받긴 했지만, 아직 냉기는 가시지 않았다. 모처럼 같은 목표를 위해 모였으니 좋게 풀면 좋으련만 역시 서로 이야기를 많이 해보지 않아 어려운 걸까.
‘가시방석이 따로 없네.’
그냥 가시도 아니다 송곳방석이다. 분위기를 풀기 위해 나서야겠다.
“그럼 기합 넣고 화이팅 할까?”
내가 먼저 손등이 보이도록 내밀자 두 사람은 겹치지 않고 내 손등 반반씩 나눠 가지듯 올렸다. 웃긴 꼴이었다. 마치 변신 합체 로봇 만화에서 오른팔, 왼팔이 합체한 느낌이었다.
“너네 화이팅 안 해봤어?”
“그거 하는 거였구나.”
“그게 뭐지?”
“어휴 됐다. 화이팅!”
손등에 올라온 두 사람의 손을 밀어쳐 내듯 힘껏 들어 올리자 어정쩡한 손 모아 화이팅이 완성되었다.
“오늘은 라이오펠의 뒷골목을 다시 도전해 볼 거야.”
“…….”
“두 사람 다 반응이 왜 그래? 영 시원찮네.”
“…괜찮겠지?”
“안 괜찮아도 지금은 별다른 방도가 없어…. 놈들의 본거지는 거의 알아낸 셈이잖아. 모두 몸조심해서 움직이자.”
두 사람은 그곳에서 있던 경험이 별로 좋지 않아서인지 똑같이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이렇게 하자. 이번의 목표는 ‘정보를 수집’하는 건 둘째치고 아무도 다쳐서 오지 않는 걸로 약속하는 거야.”
“그게 가능하면 좋으련만.”
“나도 걱정스러워. 크리스.”
“위험하다 싶으면 바로 돌아오자. 어때? 이러면 불안한 것도 좀 덜하지? 나도 고집 안 부릴게. 조심할게. 이상하다 싶으면 너희에게 바로 이야기할게.”
기획자적 관점으로는 한 스팟에서 똑같은 사건이 재현되지는 않으리라 생각했다. 도깨비도, 퀘스트도 모두 일회용이니까 반복되면 몰입감이 떨어지니 말이다. 그래서 다른 일이 발생하면 했지, 그때의 일은 반복되지 않을 것이다. 이건 거의 확신에 가까웠다.
“그럼 가자. 다들 무기 챙겼지?”
“응.”
“물론.”
“나는 단검만 들고 갈게. 아주 만약에 전투가 벌어져도 골목길에서는 활이 유효하지 않을 것 같거든.”
“크리스는 단검도 잘 쓰니까 괜찮을 거야.”
“설마 싸우겠냐마는, 그렇게 해.”
제아무리 미친 종교라고 해도 수도에서 소란을 일으키면 칼리고의 탐색 망에 걸릴 테고 분명 무자비한 칼리고는 너나 할 거 없이 처벌할 테니 조심하지 않을까? 싶긴 했다.
‘내가 그 소동을 벌여놓고 안 걸린 건 운이 좋은 거겠지.’
리헤로스가 모두 수습해서일 것이다. 누군가 하나 죽었으면 나는 꼼짝없이 잡혀갔을 게 뻔했다.
“페로. 집 잘 지키고 있어.”
“오늘도요? 요즘 자주 나가시네요.”
“응. 금방 돌아올 거야. 착하지. 사과 많이 사놨으니 먹어.”
“헤헤, 알겠어요! 다녀오세요!”
테네브가 우리와 합류하기 위해 세르뷔에까지 왔던지라 셋이 함께 수도 라이오펠을 향해 나란히 걸었다. 포탈을 사용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설명을 읽어보았을 땐 시전자만 이동이 가능한 포탈이었다. 어색해하는 둘을 두고 나 혼자 가서 기다릴 순 없는 노릇이니 중간에 껴서 함께 가기로 했다.
“테네브, 그냥 오지 말고 라이오펠에 있지 그랬어. 왔다 갔다 하기 귀찮았을 텐데.”
“하나도 안 귀찮아. 이제 습관이 돼서.”
“흐응, 습관?”
“아….”
“드렉티오 경, 매일 아침 약을 두고 가시는 거 알고 있었습니다. 그땐 미처 말씀을 못 드렸네요. 감사했습니다.”
“…제 나름대로 조용히 다녀갔다고 생각했는데.”
“누가 옆 마을까지 와서 약을 우체통에 넣어? 너 말곤 없지.”
“크흠….”
“미련 곰탱이. 그래도 고마웠어. 네 덕분에 금방 나을 수 있었어.”
“별… 말씀을.”
“아하하. 쑥스러워한다.”
진심으로 숨기고 있던 걸까 단순한 건지 순수한 건지 모르겠다. 약 이야기를 시작으로 사소한 잡담이 터져 나왔고, 그 덕에 굳어있던 분위기가 많이 풀린 것 같았다.
“이젠 안 와도 돼서 기분은 후련하지?”
“딱히 안 후련해.”
“왜?”
“세르뷔에… 살기 좋아 보여. 조용하고, 고즈넉해서.”
“너도 이사 올래?”
“…그럴까.”
“근처에 부지도 많던데 와. 옆집이면 재밌겠다. 그렇지?”
“그렇지만, 드렉티오 경은 기사단 훈련장과 가까워야 편하지 않으실까?”
“그것도 그렇네?”
“아침 일찍 일어나서 가면 돼. 괜찮아.”
정말 이사 올 기세였다. 물론 그가 가까이에 살면 불미스러운 사고에 대비해 도와줄 이웃이 생기는 셈이니 손해 보는 것은 없었다. 진지하게 고민해 봐도 좋을 이야기였다.
“그러고 보니 아키, 너희 마당에 나무와 꽃이 많이 심겨 있던데….”
“아아, 봤어?”
“응. 장미 꽃봉오리가 피어있더라. 흰색.”
“맞아. 흐음… 역시 빠르네.”
게임의 시간이란 현실과 완전히 달랐다. 꽃이 고작 몇 주, 아니 며칠 만에 꽃봉오리를 피울 정도라니.
“보셨군요. 그건 제가 크리스를 위해 심어둔 크림색 장미입니다.”
“아… 그렇습니까.”
“분명 만개하면 예쁠 거야. 너도 옆집에 이사 오면 맞춰서 심어. 한꺼번에 피우면 예쁘겠다.”
“아니야. 나는 뭘 키우는 데에 소질이 없어서 안 될 거야.”
뭐든 잘 키워내는 리헤로스와 키우는 것에 소질이 없는 테네브. 두 사람은 겉보기엔 비슷해 보이면서도 알맹이의 성향은 완전히 정반대였다. 오히려 상반되는 사람끼리 잘 지낸다는 이야기가 있지 않던가, 내가 리헤로스랑 친해질 수 있던 것처럼 테네브도 리헤로스와 조금이나마 친해졌길 바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