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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왕님 망겜에도 엔딩이 있나요-88화 (88/127)

88화

라이오펠까지 오는 동안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쉬지 않고 했다. 보통 금방 잊혀질 가벼운 잡담이긴 했다. 두 사람도 이야기를 많이 주고받았다. 보통 리헤로스 쪽이 말을 건네는 쪽이긴 했지만 말이다.

“도착.”

어제 그런 일이 있고 난 후여서일까 화려하고 아름다운 수도 라이오펠에 음산한 기운이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우리는 어제 수상한 신도를 목격했던 곳으로 향했다. 예상했다시피 그 골목에서 같은 이벤트가 발생하진 않았다. 다만

“종말이 눈앞으로 다가왔다.”

“종말의 희생양이 되고 싶지 않으면 카르말록스를 숭배하라.”

회장 중앙에 있는 마법진이 푸른빛이 점점 퍼져나가고 있었다. 분명 저 마법진이 모두 켜지고 나면 마물이 쏟아져 나왔었다.

“마법진이 완전히 켜지기 전에 막아야 해!”

“알겠어!”

우리 셋은 일제히 회장 안으로 뛰어들었다. 신도들의 동작이 멈추니 마법진의 빛은 사그라들고 있었다.

“흐음! 웬 놈이냐!”

“멈춰라. 글라디우스 ”

“영창 하라 형제들이여.”

“인모스테-폰 아일람 마몬.”

“카르말록스 님이야말로 우리를 진리로 인도해 줄 진정한 신이다.”

“아디티오 윰-브라이드 미네테.”

─띠링

오랜만에 들어도 전혀 반갑지 않은 시스템 알림음이 울렸다.

[던전] 모순의 전당 : 광신도들

[시스템] 인원 제한 없음

“우세드-스테르 노 레-티리스.”

“제기랄!”

“우세드-스테르 노 레-티리스.”

“조심해 크리스!”

영창을 마친 광신도들의 팔과 상체는 징그러울 정도로 부풀어 올랐다. 보랏빛 핏줄이 터져 나올 것처럼 꿈틀댔고, 그들은 주술도를 품에서 꺼내 들며 불규칙한 움직임으로 달려들었다.

‘어제의 그 불꽃이… 다시 나와주기만 하면 다 태워버릴 수 있지 않나.’

내가 원래 가지고 있는 스킬은 보통의 마물에게 먹히지 않아 무용지물이었지만, 어제의 검은 불꽃은 유일하게 유효했다.

일말의 희망을 품으며 왼손을 뻗어보았다.

“….”

민망할 정도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어째서 그놈의 검은 불꽃은 정작 필요할 때 나오지 않는 것인가.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없는 능력이라니 성가시기 짝이 없었다.

“크리스!”

멀찍이서 싸우고 있는 리헤로스의 부름에 몸을 틀었고, 그 덕에 절묘하게 신도의 칼을 피할 수 있었다.

“좋은 지원이었어. 리헤로스!”

─카가각!

곧바로 광신도의 주술도와 맞붙었다. 양쪽 모두 짧은 길이의 단도였기에 무게 중심에는 큰 지장이 없었지만, 주술을 외운 이후 비약적으로 강해진 힘을 버티기는 힘들었다.

‘스탯이 낮아지기 전이었으면… 이 정도는 밀어내 버릴 텐데!’

테네브나 리헤로스는 여럿을 한꺼번에 대치하고 있었는데 나는 겨우 한 녀석을 상대하는 것도 벅찼다.

놈의 행색을 보니 그나마 위안이 되는 것은 주술 시전자처럼 보였다. 한마디로 ‘정예 몬스터’여서 어려운 거라고 자기최면을 걸 수 있었다.

힘에서 아주 약간 밀린다는 걸 놈도 눈치를 챘는지 맞붙고 있던 주술도를 떼어내고 여러 방향으로 내리치고, 올려치며 나를 자연스럽게 뒷걸음질 치도록 만들었다.

약점을 찾아야만 했다. 나에게 허용된 것은 한방의 일격이었다. 일격으로 놈을 쓰러트릴 수 있어야 했다. 온몸이 근육 덩이로 이루어져 있어 단검이 파고들 만한 여리고 얕은 곳을 찾고 있었다.

‘머리. 그중에 턱 아래쪽이 유리해 보여.’

타깃 설정이 완료되자마자 망설일 것 없이 아래에서 위로 단검을 찍어 올렸다.

─후욱

근육 덩이라 무식하고 느릴 거라는 것은 오산이었다. 내 움직임을 언제 파악했는지, 목을 기울여 가볍게 피해버린다.

‘위험해.’

이미 휘둘러진 팔은 회수하기엔 수 초가 필요했고, 놈의 주술도는 내게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쩍! 푸퓩

놈의 칼이 내 왼 손바닥을 찔렀다. 보통이면 손가락뼈에 부딪히기도 하고 근육을 뚫기 쉽지 않을 텐데 날을 세로로 세워 완전히 관통했다. 반대쪽에 날이 솟아 나온 상태라 더 밀리게 되면 내 눈을 찌를 것만 같았다. 관통상은 이상하게도 아프지 않았다. 그저 힘에 부쳐 손바닥이 완전히 반으로 갈라질 것 같다는 생각뿐이었다.

“크윽…! 큿!”

─쯔즉! 쩍!

턱 아래를 찌르니 검날이 깊게 파고 들어갔다. 그대로 옆으로 그어내듯 빼내자 벌어진 살갗에선 검 보랏빛 액체가 솟구쳤다. 온몸에 뒤집어쓸 정도로 많은 양이었다.

“크엑!! 쿠욱 켁!!”

놈은 목을 부여잡으며 고꾸라졌다.

주변을 둘러보니 내가 겨우 한 놈을 쓰러트리는 동안 이미 다른 광신도들은 낙엽처럼 힘없이 쓰려져 있었다.

“민망하다… 후우….”

내가 쓰러트린 놈은 발작하며 온몸을 떨었다. 완전히 숨통을 끊기 위해 가까이 다가갔다.

“큭, 킁… 쿠헥! 컥… 진리…가 눈앞에 있었는…데.”

“하아… 네놈들이 추구하는 진리가 대체 뭔데.”

“인간은 본디… 야생에서 태어난 짐승이다. 쿠욱! 헉… 헉… 짐승이 야생에서 생존하기 위해… 갖출 게 뭐가 있다고 생각하는가…?”

놈은 입을 쩍 벌리며 웃어댔는데 입안이 피범벅이 돼 새하얀 이빨과 대조되었다. 그 모습이 기괴하기 그지없었다.

“바로 힘이다.…! 쿠훅…큭… 흐흐… 카르말록스는 우리에게 강한 힘을 내려주신다…. 그분이야말로 인간이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군림하길 바라는… 진정한…… 신이시다.”

“……웃기고 있네.”

“후윽, 헉… 우월한… 개체만… 살아남고… 모두… 종……말…할… 것……이.”

말을 채 마치 지도 못하고 숨이 끊어진 것 같았다. 괜히 들었다. 말마따나 ‘광신도’적인 사상이었다.

“네놈들이 바라는 건 이루지 못할 거야. 영원히.”

생명의 불씨가 꺼져가면서도 들었으면 했다. 너희들의 원대한 망상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몸을 일으키고 두 사람을 찾았다.

“테네브? 리헤로스는?”

“옆방까지 확인하시는 것 같았는데. 같이 가보지. 그쪽에 더 있으면 처리해야 하니까.”

“그래. 그러자.”

“잠깐, 너 왼손이….”

“으아아아아악!”

옆방에서 들려오는 비명은 발걸음을 재촉케 했다. 도착한 곳엔 기둥 뒤쪽을 향해 검을 겨누고 있는 리헤로스가 있었다. 그런데 검은 움직임 없이 가만히 멈춰 있었다.

“리헤로스! 괜찮아? 비명이….”

가까이 다가가 기둥 뒤를 보니 그 무릎 꿇은 채 가늘게 떠는 남성이 있었다.

“살려주세요…!”

남자는 아기 포대기를 안고 있었다.

“뭐지? 웬 아기랑 아버지?”

“크리스…. 어떻게 할까.”

“…복잡하네.”

설마 아기를 데리고 사이비 의식을 치르러 왔을 거란 생각은 미처 들지 않았다. 오히려 ‘제물’ 쪽이라면 모를까.

“검 거두어도 괜찮을 것 같아.”

“후우우… 알겠어. 괜찮으십니까?”

“흐, 네에… 괜찮아요.”

“드렉티오 경, 죄송하지만 다른 방엔 남은 사람이 없는지 확인 부탁드립니다.”

“그러죠.”

“아가, 그래그래 울지 마. 뚝.”

남자의 품에 있는 아기는 어떤 울음소리도 내지 않는데 안은 팔을 좌우로 움직이며 달래고 있었다.

‘충격으로 머리가 어떻게 됐나?’

리헤로스는 남자를 일으켜 세워주었다. 초라한 행색의 남자는 여태껏 봐온 도움받은 NPC와 달리 용사는 안중에도 없어 보였다. 멍한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기만 했다.

“병원부터 가셔야겠는데. 충격이 심했나 봐.”

“응.”

건물 내부를 훑고 온 테네브가 문 쪽에서 말했다.

“다른 생존자는 없어 보입니다.”

“확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생존자와 함께 나가야 할 것 같습니다.”

“음, 이분에게 인터뷰하면 추가 단서를 얻을 수도 있겠네.”

“그럴 수도 있겠어.”

늘 던전에서 봐왔던 보상 상자는 눈에 띄지 않았다. 보상이 없는 곳인가? 아니면 던전의 연장선이 별도로 있는 걸까. 워낙에 상식 밖의 시스템이 점점 늘어나고 있어서 보상 상자가 없는 것도 기획 의도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머지않아 기획적 상식도 먹히지 않을 것 같아.’

기획자로서의 지식이 나의 강점이라 생각했는데, 이마저도 사용하지 못한다면 나는 민폐 엑스트라 1이 되고 말겠지. 그보다 슬픈 건 없다.

“그런데 아저씨. 아기는 괜찮은 거예요?”

“우리 아기를 걱정해 주시는 겁니까? 당연하게도 괜찮습니다. 우리 애는 강하거든요.”

“아기가 강하다니. 우량아인가요?”

“흐흐… 재밌는 농담인걸요. 자, 보시겠어요?”

남자가 포대기를 걷어내니 작은 체구의 마물이 입을 쩍 벌리고 있었다.

“윽?!”

“용사님도 카르말록스를 믿으세요. 그러면 이렇게 될 수 있답니다.”

“젠장, 저게 뭐야?”

“제 아이는 축복받았습니다. 그 어떤 인간에게도 지지 않는 강한 인류가 되었다고요!”

“미쳤군…! 애초에 인간이 아니잖아!”

“흐… 흐흐흐… 다시 태어난 겁니다. 우리 아이가 다시 태어난 거라고요!”

“크리스! 물러나!”

“그 반응… 뭐야? 뭐냐고! 카르말록스를 신봉하지 않는 놈들은 모두 죽어버려!”

남자는 포대기에 감싸인 마물을 우리 쪽으로 던졌다.

마물은 날카롭고 촘촘히 박힌 이빨을 드러내며 날아들었다.

리헤로스를 밀치고 앞으로 나섰다. 그리곤 본능적으로 왼팔을 들어 막았다.

─콰악!

“윽…!”

그 마물은 왼팔을 깊게 물더니 사냥감의 숨통을 끊고 싶어 하는 짐승처럼 머리를 이리저리 비틀어댔다.

목에 단검을 여러 차례 박아 넣었지만 물고 있는 턱에 힘이 빠지지 않았다.

“제기랄…!”

“크리스!”

“아키!”

리헤로스와 테네브가 내 쪽으로 우르르 몰리자 남자는 건물 밖으로 도망치려 했다.

“난 됐으니까! 저 새끼 잡아!”

내 외침에 가장 먼저 튀어 나간 건 리헤로스였다.

그의 속도는 누구보다도 날렵했기에 놈이 몇 발자국 먼저 앞섰다고 해도 금세 따라잡을 수 있었다.

─촤악!

금빛 검기가 송곳처럼 길게 뻗어 남자의 어깨를 뚫었다.

범죄자에게 내린 처벌치고는 가벼운 축이라 생각했지만, 남자는 엄살에 가까울 정도로 데굴데굴 구르며 신음했다.

“그르르르… 크르르륵.”

다시 내 쪽의 상황이 눈에 들어왔다. 마물의 눈은 벌게진 채로 코와 입에서 피를 흘리면서도 꽉 물고 있는 팔을 놓지 않았다. 아직 내 옆에 있던 테네브가 마물의 이빨 사이에 손을 끼워 넣더니 양옆으로 벌리기를 시도했다.

“크으윽! 제발…! 열려라!”

─부드드득, 두드득

굳게 닫힌 아가리가 점점 열어젖혀지더니 완전히 반대 방향으로 꺾여 힘없이 축 늘어졌다. 팔에 난 구멍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팔뚝이고 손바닥이고 구멍이 너덜너덜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만신창이가 됐다.

‘그런데 이상하게 아프지 않네.’

힘주어 쥐락펴락해보니 무사히 가동됐다. 피가 철철 흐르는데 움직이고 있는 형태가 꽤 기괴해 보이긴 했다.

기겁해서 소리조차 못 내던 테네브는 제 옷을 쭉 찢더니 나의 왼팔을 전체적으로 둘둘 감아주었다.

“괜찮아. 하나도 안 아파.”

“너…! 지금 네 얼굴을 보고 하는 소리야?”

“내 얼굴이 어떤데?”

“시체처럼 창백해. 당장 쓰러지지 않는 게 용해 보일 정도로.”

“아무래도… 약간 빈혈이 있을 수도 있겠네. 지혈하는 게 맞겠다. 고마워.”

뒤늦게 리헤로스가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도망가던 놈은?”

“…자결했어. 이번에도 도망치는 걸 막지 못했네. 미안해.”

“흐음… 꼭 길이란 게 한 방향만 있는 건 아니잖아. 어떻게든 찾을 수 있겠지.”

“크리스, 네 팔…!”

“이건 괜찮아. 아프지 않으니까 피만 멎으면 돼.”

풀뢰고르인지 풀떼기인지 모를 것에 당한 이후로 몸통의 왼쪽은 무통에 가까워졌나 보다. 신경이 다쳐서일까 이유가 어떻든 리헤로스가 위험해질 상황에 몸을 던지게 될 텐데 안 아프게 가기만 한다면 감사할 일이다.

‘뭐가 됐든 리헤로스가 다치는 것보단 내가 다치는 게 낫지.’

그보다 마왕 자리를 박탈당한 이유일까, 아니면 내가 게헤나를 집권할 때와 다른 마물이어서일까 나를 알아보지도 못하고 무자비하게 공격해댄다. 마군을 돌보지 않은 업보가 돌아온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아키!”

“깜짝이야. 왜 소리를 질러?”

“왜 너는… 너 자신은 돌보지 않는 거야.”

“무슨 뚱딴지같은 소릴…. 테네브?”

테네브의 뺨 위로 투명한 액체가 투둑 떨어졌다. 물방울의 진원지를 찾으니 그 끝엔 테네브의 젖은 눈이 있었다.

그는 황급히 팔로 눈가를 북북 문질러댔다.

“어?”

“큿….”

“테, 테네브? 왜 그래?!”

“너 때문에…! 미치겠어.”

“…진짜 우는 거야?”

“보지 마…!”

“아학… 하하… 왜 우는지 설명을 해줘야 사과를 하지. 응?”

“웃지 마!”

“그렇지만.”

“……네가 너무 안타까워. 모든 상황이 널 도와주지 않는 것 같아서. 그래서 네가 항상 아픈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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