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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왕님 망겜에도 엔딩이 있나요-90화 (90/127)

90화

테네브는 고개를 푹 떨구더니 바닥만을 한참 노려보았다. 이런 곳에서 마주한 상징물은 혼란스러움은 가중되는 것 같았다. 역시 소속을 부정하거나 배신하는 느낌이 들어서 힘들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대답이 쉬이 나오지 않는 듯했다. 나와 리헤로스는 별다른 신호를 하지도 않았는데 서로 눈을 바라보았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의 시선은 ‘역시 안 되겠구나’로 읽혔다. 어정쩡해진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무리한 부탁이면 우리가 알아서 할게. 몰래 잠입하면 되니….”

“……알겠습니다.”

“응?”

“기사단 내부를 조사할 수 있게… 도울게.”

“괜찮겠어?”

“…응. 괜찮아.”

결의에 찬 말과 달리 표정은 여전히 심란해 보였다. 리헤로스와 나는 또다시 마주 봤다. 이번에는 ‘잘 됐다’는 눈빛이었다.

“드렉티오 경. 감사합니다.”

“테네브 고마워….”

“저도 진실을 보고 싶은 것이니 피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저…… 조금 혼란스럽네요.”

“네 마음은 당연히 이해해.”

왕국을 수호하는 기사단이 종말을 바라는 종교와 관련이 있다고 하면 그 누가 혼란스럽지 않을 수가 있나. 거절해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거늘 그보다도 그가 추구하는 ‘진실’의 무게가 상당한 모양이었다.

우리의 대화가 완전히 끝나고 나서야 쌓여있던 시체들은 재가 되어 사라졌다.

‘던전이 종료됐나. 더 얻을 것도 없다는 이야기겠군.’

“여기서 얻을 수 있는 단서는… 이제 끝이겠지?”

“응. 그런 것 같아.”

“그럼 돌아가자.”

화두를 뗐지만 좀처럼 두 사람은 먼저 나갈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그래서 가장 먼저 건물 밖을 빠져나왔다. 자동 따라가기 설정이라도 있는 NPC처럼 졸졸 따라오는 걸 보고 만족스럽게 웃었다.

“좋아. 오늘 수확은 나쁘지 않았네. 개고생했던 예전에 비해.”

“…….”

던전을 무사히 종료했다는 것과 미지의 최종 보스에게 가까워지고 있다는 사실이 조금 들뜨게 했다. 그런데 테네브의 반응을 보고서는 웃음기를 싹 지울 수밖에 없었다. 내가 너무 좋아했나. 민망해질 정도로 그는 기운이 없었다.

“드렉티오 경. 협력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제가 해야 할 일을 하고 있을 뿐인걸요.”

그는 기운 없는 목소리로 답을 하고선 몸을 돌렸다. 리헤로스도 테네브의 반응을 보고 대화는 종료되었다고 생각하였는지 뒤돌아 가려 했다. 두 남자가 반대 방향으로 향하는 모습이 너무나도 상반되었다.

테네브의 어깨가 너무나도 축 처져 있었다. 꼭 비 맞은 강아지 꼴이었다. 이대로 보내기엔 그의 뒷모습이 잠들기 직전까지 눈앞에 아른거릴 듯해 불러 세웠다.

“테네브.”

“응.”

“조심히 들어가.”

가까이 다가가선 조심스레 팔을 뻗어 그를 안아주었다.

“네가 걱정하는 일은 없을 거야.”

그가 무슨 걱정을 하는지는 몰라도 이렇게 위로해 주는 게 최선이라 생각했다. 그의 등을 가볍게 쓰다듬고 놓아주려 했는데, 테네브가 꼭 마주 안았다.

“아키. 정말 세르뷔에에 남을 거야?”

“이 상황에서 그걸 또 물어?”

“만약, 아주 만약에… 마음이 조금이라도 변했으면 이야기해 줘.”

“…네가 듣고 싶은 대답은 아니겠지만, 바뀌진 않을 거야.”

그가 안쓰러운 건 안쓰러운 거고 나는 내 자리를 지켜야 한다. 테네브는 내 어깨에 얼굴을 뭉개듯 파고들더니 작게 옹알대는 소리를 만들어냈다.

“나도 네가 필요한데….”

“응?”

“……아니야.”

틈새 애교인 걸까. 오늘 유독 약한 모습을 오래 보이는 것 같았다.

‘오늘 일만 생각하면 그럴 만하기도 하지만….’

그래서 가볍게 안고 있던 팔에 힘을 주어 그를 짧고 강하게 꽉 안았다가 놓아주었다. 얼떨떨한 표정의 테네브도 얼떨결에 튕겨 뒷걸음질 치고 있었다.

“기운 내. 조만간 또 볼 거잖아.”

“으응.”

“그럼 부탁할게.”

“알겠어. 준비되면… 올게.”

격려를 담은 포옹이 통한 걸까? 테네브의 표정은 한층 밝아진 것 같았다. 덕분에 나도 마음이 한결 나아져 얼굴에 자연스럽게 미소가 떠올랐다.

테네브도 자리를 떴으니 먼저 출발한 리헤로스를 따라잡아야지 싶어 뒤돌아 뜀박질하려 했는데, 출발했기는커녕 꽤 가까이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깜짝 놀라 제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아! 미안. 먼저 가고 있을 줄 알았는데.”

“드렉티오 경. 괜찮은 거지?”

“응. 그냥 조금 충격적이었나 봐. 여러모로.”

“걱정되네.”

걱정된다는 말치고는 상당히 건조했다. 이렇게 AI 같은 말투 구사가 가능하구나.

“괜찮을 거야. 안 괜찮으면 내가 말릴게. 너는 걱정하지 마.”

리헤로스는 내 말에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건조하다고 생각했던 건 착각인가 보다. 워낙에 테네브가 절절했으니 더욱 그렇게 느껴졌는지도 모른다.

***

글라디우스 기사단의 눈에 띄지 않게 수도를 조용히 빠져나와 저택으로 돌아왔다.

“페로는 먼저 자고 있나?”

“그런가 봐. 조용하네.”

“그보다 리헤로스. 오늘 고생 많았어. 추리력이 점점 늘어. 아주 좋아.”

“응. 고마워.”

“피곤할 텐데 일찍 자. 응?”

“그럴게.”

오늘은 정말 피곤했다. 몸을 많이 다쳐서 그런가 회복하는 만큼 피로가 누적되니 그럴 수밖에 없겠지. 먼저 방으로 돌아가려는데 리헤로스의 부름에 멈춰 섰다.

“크리스.”

“응?”

“……아니야. 잘 자.”

“싱겁긴.”

입술을 삐죽 내밀면서 장난스럽게 불만을 표출했다. 그리곤 방 안으로 들어와 갖은 옷가지를 벗어 세탁 바구니에 담은 뒤 욕실 안으로 들어갔다.

분명 서양 판타지, 가상의 중세의 느낌이지만 수도시설은 현대에 가까웠다. 레버를 당기는 방향에 따라 찬물과 따뜻한 물이 나오는 말도 안 되게 신식 수도시설이다.

‘그래. 판타지 세계에서도 수도 시설 정도는 최신식이어도 괜찮아.’

설정 기획자들이 세세한 부분까지 얼마나 골머리를 썩이었을지 생각하니 웃음이 피식 나왔다. 따뜻한 물을 욕조 가득히 담고선 천천히 턱 끝까지 들어갔다.

“아아아아…. 기분 좋아.”

남탕의 아저씨 같은 탄성이 절로 나왔다. 이대로 잠들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얼굴을 쓸어 넘기자 뺨을 타고 흐르는 물방울이 꼭 눈물같이 흘렀다.

‘테네브… 그렇게 서러웠을까.’

온종일 곱씹고 싶을 정도로 자극적인 광경이었다. 상상 속에서나 거구의 남성을 울려보았지, 실재한다는 게 믿기 어려웠으니까. 심지어 나 때문에 운 거 아닌가.

떠올리면 떠올릴수록 기저의 더러운 심연이 고개를 들 것만 같아 겨우겨우 억누르며 잠수했다.

그러나 잊으려고 하면 할수록─

─나를 끌어안던 감각.

─내가 필요하다고 옹알대는 목소리가 상기되었다.

‘안 되겠다. 빨리 씻고 나가야겠다.’

몸을 일으켜 그저 씻는 것에만 전념했다. 씻는 행위를 마치고 나와 잠옷을 걸치고 침대에 누웠다.

‘목욕을 오래 해서 그런가? 조금 목마른데…. 물만 마시고 자자.’

리헤로스가 깨지 않도록 살금살금 발끝으로 걸어 내려왔다. 부엌의 창문 밖은 흰 보름달이 휘영청 떠 있어 램프가 따로 필요 없었다.

그 아래론 정원이 보였고, 벤치에 앉아있는 리헤로스가 눈에 띄었다. 달빛에 반사된 금발 머리가 너무 아름답고 눈부셔서 시선이 저절로 그쪽으로 당겨졌다고 해야 옳았다.

‘뭐 하고 있는 거지?’

어떤 심각한 고민을 하길래 잠도 못 자고 있는 걸까 걱정스러운 마음에 마당으로 나갔다.

“리헤로스.”

“아… 크리스. 안 잤어?”

“자기 전에 물 좀 마시려고 했는데, 네가 보여서.”

“그랬구나.”

“무슨 걱정 있어?”

그는 제 손을 주물럭대며 한참을 망설였다. 늘 깊은 밤, 달 아래에서 이런 심각한 대화를 나누는 것 같았다. 나와 페로의 첫 대화를 들킬 때도 그 뒤에도 항상 그랬다.

고개를 든 리헤로스의 눈빛을 마주했다. 어떤 상황에도 늘 따뜻하다고 생각했건만, 오늘은 유독 뼛속까지 시린 느낌의 푸른빛이었다.

“드렉티오 경에게 부탁은 했지만, 조금 불안해.”

“어째서?”

“…그야 그도 글라디우스 기사단 소속이잖아.”

테네브를 대하는 리헤로스 온도가 확연히 달라진 것 같았다. 어떤 경우에도 사람을 믿고 따르던 리헤로스와는 전혀 달랐다. 뭐 때문에 그가 이리도 경계하는 걸까.

“그럼… 안 도와줘도 괜찮다고 해?”

“…….”

“네가 원하는 게 그거야?”

“크리스. 화난 거 아니지?”

“아니, 아니. 내가 왜 화를 내겠어. 네 의도가 그렇다면 테네브한테 이야기해 줘야 할 거 아니야.”

“…….”

내 딴에는 우리에게 협조해 주겠다는 테네브의 마음을 거절해야 한다는 사실이 언짢긴 했던 것 같다. 그 감정이 목소리에서 묻어 나온 것 같았고 워낙에 섬세한 리헤로스는 당연하게도 감지한 모양이다.

“그럴 거면 차라리 이야길 하지 말지. 나는 테네브에게 말하지 않았으면 했는데 왜 굳이 애한테 충격을 주면서까지 이야길 했어.”

“크리스.”

“후우, 미안. 그냥… 이렇게 말 바꾸는 거 좋지 않은 것 같아서 목소리가 높아지네.”

“…….”

“내일 내가 수도로 가서 테네브한테 이야기할게. 신경 쓰지 마.”

“어떻게 신경을 안 써?”

“그럼 어쩌라는 건데?”

“미안해. 내가 괜한 이야길 했어.”

“하아….”

그의 사과는 빨랐고 진심이 느껴졌지만, 급발진은 여전히 이해되지 않았다. 분명히 신중하게 생각하고 테네브에게 부탁한 것일 텐데도 손바닥 뒤집듯이 지금은 못 믿겠다고 한다는 게 이해 안 되는 대목이었다.

“방금 너답지 않았어. 왜 그러는 건데? 무슨 결정적인 이유라도 있어?”

“질투 나서 그런가 봐.”

“어… 어?”

“너랑 드렉티오 경의 관계가… 오랜 친구인 나보다도 좋아 보여서.”

“그, 그게 무슨 소리야?”

비교할 것을 비교해야지 테네브와 나의 관계가 그렇게 비춰질 수 있을까. 제동이 걸린 내 목소리와 달리 리헤로스의 말에는 가속이 붙었다.

“친구를 뺏긴 느낌이라고 하면 유치해 보일까?”

“아니 뭐… 네가 그렇게 생각하면 어쩔 수 없긴 한데, 내 태도가 문제였어?”

“네 태도엔 문제가 없어. 드렉티오 경이 너를 생각하는 깊이가 남달라서 더욱 내가 이렇게 느끼는 거겠지.”

“그가 울어서… 그래? 우는 건 나도 처음 봐. 오늘따라 감성에 넘쳤는지, 왜 그랬는지 아직도 잘 모르겠어.”

“널 좋아해서 그러는 거 같아.”

“뭐?”

“너를 친구 이상의 마음으로 좋아해서 그런 거 아닐까 싶어.”

“아….”

리헤로스도 대충 눈치채고 있었던 것 같다. 테네브가 풍기는 묘한 뉘앙스를.

“…아닐걸.”

“정말 그렇게 생각해?”

“……”

“아니라고 하면 거짓말이야. 모르는 게 이상할 정도로 그는 너를 위하고 있으니까.”

“무슨…….”

“넌 어떤데?”

“이걸 묻는… 저의가 뭐야?”

“너도 드렉티오 경을 좋아해?”

따뜻한 물로 달궈진 온몸이 일순간 차갑게 식는 것 같았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다른 사람을 좋아하느냐는 물음을 듣는 게 이토록 가슴 시린 일인 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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