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
혹시라도 내가 저를 좋아하는 걸 눈치챘다면 이런 질문이 나오지 않으리라 생각했으니, 그래서 더욱 서운했다. 어떤 대답이 나와도 상관없는, 확인을 위해 묻는 것 같았으니까.
‘이렇게까지 속상해하니까 나랑 그가 뭐라도 된 것 같잖아.’
내 속도 모르는 짝사랑 상대의 질문이 서운할지언정 절대 티 내면 안 된다. 자연스럽게 대답해야 했다.
그와 나의 감정은 완전히 다르니까.
“하하… 뭐야. 그 녀석이 조금 울었다고 과민반응하기는.”
“…….”
“설령 테네브가 날 좋아한다고 해도, 고백한 것도 아닌데 그걸 왜 물어?”
“아주 만약에 그가 고백하면 수락할 거야?”
“대체 그게 뭐가 중요해? 일어나지도 않은 일인데. 오늘 너 진짜 이상하다.”
“이상하다니. 크리스, 너도 그랬잖아.”
“내가?”
“내가 공주님과 결혼하는 줄 알았을 때, 내가 그분을 좋아하고 있다는 걸 상정하고 얘기하지 않았어?”
“아.”
기시감이 느껴진다 싶더라니. 나도 그에게 비슷한 질문을 했었다.
“그건… 전혀 다르지.”
“똑같이 물어보는 건데 어디가 다르고, 어디가 이상한데? 오히려 혼약이라는 관계가 더 긴밀한 관계임을 추측하고 있던 거잖아.”
물론 물어본 의미는 같을지 몰라도 속내는 당연히 다르다. 나는 그를 흠모하고 있고, 리헤로스는 절친의 감정이지 않은가. 그를 향한 감정을 애써 숨기느라 돌려 말했던 것이 이렇게 돌아올 줄 꿈에도 몰랐다. 어디의 어떤 게 같고 다르다고 확실히 지적할 수 없는 상황이 답답했다. 이유를 입 밖으로 내는 순간, 관계는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내가 테네브를 좋아하면, 어쩌고 싶어서 묻는 거야?’
진짜 묻고 싶은 것은 머릿속에서 윙윙 맴돌기만 했다. 갖은 생각은 벌레들의 날갯짓처럼 불쾌한 소음이 되어 정신을 산만하게 만들었다. 가까스로 정리한 말을 천천히 이어붙였다.
“나는 소문을 들은 게 있어서 그렇게 말했던 거였고, 너는 그냥 테네브 행동으로만 추측하고 있는 거잖아. 친구가 다치는 바람에 속상해서 눈물만 흘린 건지 어떤지 모르는 건데 그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아냐는 둥, 내 마음은 어떠냐는 둥 하는 건 지나치게 앞서간 거 맞지 않아?”
“아니면 아니라고 말하면 되는 건데 왜 자꾸 말을 돌려?”
“내가 언제 말을…! 너 진짜!”
“…그래. 내가 눈치가 없었네. 드렉티오 경을 좋아하는구나.”
리헤로스의 입꼬리는 아주 희미하게 올라가 있었지만, 늘 반달처럼 구부러져 있던 눈가의 변화는 전혀 없었다.
그와 함께한 이래로 본 적 없는 건조한 미소는 아까 욕실에서 느꼈던 감각을 떠올리게 했다. 턱 밑까지 차오른 물로 인해 갈비뼈가 눌리는 것처럼 답답해져 왔다. 떠오른 여러 가지 대답을 고르고 골라도 좋은 말이 쉽게 선택되지 않았다.
차라리 물에 들어가 머리끝까지 잠기고 싶었다. 숨을 쉬지 못하는 게 지금보다 훨씬 고통스럽지 않을 것이다.
그의 물음은 만난 지 얼마 안 된 이에게 절친한 친구를 뺏겼지만, 그 형태가 ‘친구’가 아닌 ‘연인’이라면 괜찮다는 말처럼 들리기도 했으니까. ‘테네브와 사귀게 된다면 이해해 줄 수 있다’라는 말이 나오지 않는 게 이상할 정도로 명확한 대화의 흐름이었다.
‘애초에 기대하지도 않았으면서 실망하기야?’
리헤로스는 헷갈리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선을 넘을 듯 말 듯 하면서도 아슬아슬하게 넘지 않는 어중간함.
혹시 그가 나를 좋아해서 이러는 게 아닐까 싶다가도 상대가 헷갈리게 구는 건 진심으로 좋아하는 게 아니라는 말이 있지 않던가. 정말 상대를 좋아한다면 헷갈리게 만들지 않는 것이 연애사에 있어 불문율이었다.
이를 끝으로 길길이 날뛰던 생각들에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얼어붙었다.
‘그래. 리헤로스는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것만은 확실하다고 자신했다.
“좋아한다고 하면? 마음이 좀 개운해?”
감정에 휘둘리지 않는 메마른 사람이 되고자 했건만. 최대한 건조하고 객관적인 사실만 말하고 싶었건만, 그러지 못했다. 내 속을 몰라주는 그가 야속하기만 했다. 울컥울컥 치솟아 오르는 용암이 목구멍에서 끓는 것만 같았다. 넘쳐흐르는 답답한 마음을 분출할 곳은 없고 검고 끈적거리는 퇴적물이 켜켜이 쌓여가기만 했다. 지금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신경 쓸 틈도 없이 서운한 감정을 틀어막는 것이 벅찼다.
“네 대답이… 그래… 그렇구나.”
그의 답변은 더욱 좌절케 했다. 수긍이 빠른 걸 보면 역시나 내 마음은 보답받지 못할 일방통행이었다. 차라리 진작 테네브를 따라갔다면 이런 이야기를 듣지 않아도 됐을 텐데, 퍽 후회되었다.
차라리 심장 깊은 곳에 숨겨둔 감정을 억지로 끄집어내서는 너를 좋아한다는 최후의 단말마의 비명을 지르고 죽고 싶을 지경이었다. 고백이 통하지 않을 거란 걸 알면서도 짝사랑의 고통을 끝내기 위해 그러고 싶었다.
“내가….”
“…….”
“언제까지고 내가 네 옆에 있을 수는 없잖아.”
“크리스….”
“좋아하는 사람을 찾아서 사랑을 해. 저번에 내가 했던 말은 잊어. 친구라는 형태는 영원하지 않으니까… 네 삶을 찾아.”
이번에도 내 생각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꺼내놓고 있었다. 이로써 리헤로스는 내가 테네브를 좋아하는 것을 확정 짓겠지.
어차피 되돌아오지 못할 마음이었다. 차라리 이렇게 된 게 제일 나은 선택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해야만 했다. 그러지 않고서는 제정신으로 버틸 수 없을 것 같다.
“친구한테 연애 감정까지 시시콜콜 이야기해야 하는 게… 이토록 수치스러운 줄 몰랐네. 너한테도 꼬치꼬치 캐물어서 미안했어.”
눈 아래 뺨이 시큰시큰했다. 이딴 대화 주제를 가지고 그와 계속 마주하고 있기가 너무나도 괴로워서 몸을 돌려버렸다.
팔목이 잡히는 바람에 고작 반의반 바퀴만 돌 수 있었지만 말이다.
“크리스, 나….”
“제발!”
“…….”
“…그만해.”
“…부탁할게. 이야기 좀 하자.”
“끝난 거 아니었어? 네가 듣고 싶은 건 다 이야기해 줬잖아.”
“그게 아니라….”
바닥으로 시선을 떨구고 있었는데, 침묵이 길어지니 자연스레 올려다볼 수밖에 없었다. 대체 무슨 이야길 더 하겠다는 건지 이해할 수 없어 미간을 구겼다. 리헤로스는 한숨을 뿜지 않고 속으로 삼키는듯했다. 그리곤 천천히 소리를 내 말을 이었다.
“크리스… 왜 내가 확신할 수 있게끔 말해주지 않는 거야.”
“뭐?”
“내가 멋대로 생각하게 두고, 넘겨짚어도 반박하지 않는 이유가 궁금해.”
“멋대로… 넘겨짚어? 수긍한 거 아니었어?”
“아니야, 넌 분명하게 대답한 게 아니잖아. 그렇다고 하면… 이라고 했으니까.”
“내 반응을 보려고 떠보기라도 했다는 말이야?”
“…….”
“나를 떠봐서 네가 얻는 게 뭐야.”
리헤로스의 표정은 꽤 복잡해 보였다. 억울한 건지, 슬픈 건지, 화난 건지 종잡을 수 없는 감정이 뒤섞여 있었다. 그 표정을 지을 것은 나인데도 왜 네가 짓고 있냐고 쏘아붙이고 싶었다.
“왜 이렇게까지… 집요하게 물어보는지 궁금하지 않아?”
“네가 무슨 의미로 묻는 것이든 별로 알고 싶지 않아.”
“…….”
“친구로서 하는 질투는 그만둬. 우리 사이가 어그러지지 않으려면 그러는 게 좋을 것 같다. 그래, 그렇게 하자.”
“아니야.”
리헤로스의 떨리는 목소리는 분노나 억울해서 나오는 높낮이가 아니었다. 호소에 가까웠다.
“네가….”
“…….”
“네가 그를 좋아한다면 깨끗이 마음을 비울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아닌 것 같아.”
“그게 무슨 소리야?”
“…좋아해.”
“뭐…?”
귓가에 닿는 낮은 목소리는 비현실적이었다.
꿈인가. 혹시 그와 대화하는 사이에 잠들어버렸나. 아니면 내가 또 아무 의미 없는 단어에 의미 부여를 하는 걸까. 시각적, 청각적인 자극에 온 정신이 팔려서 머리는 새하얘졌다.
내 팔을 잡고 있던 그의 손은 천천히 내려가 손을 끌어당겼다. 손 전체에 전해져 오는 온기는 현실이라는 확실한 증명이었다.
“자, 잠깐, 너, 무슨 말을… 대체….”
“몇 번이고 내 마음을 표현했다고 생각했는데, 그때마다 명확한 답이 돌아오지 않아서 계속 망설였어.”
“그럼….”
“어쩌면 내 마음을 강요하고 있는 것일까, 네게 부담을 주는 게 아닐까 싶었어. 그렇지만… 제대로 표현하지도 못하고 네 곁을 서성이기만 하다가 ‘주변인’으로만 남고 싶진 않았어.”
“어…….”
“오늘만큼은 네 대답이 듣고 싶어.”
“…….”
“크리스, 너를… 정말 많이 좋아하고 있어.”
도저히 믿을 수가 없어 몇 번이고 눈을 깜빡였다. 앞에 놓인 이 상황은 꿈이며 환시가 아니다.
여태껏 느꼈던 미묘한 말들이 그의 진심이었단 말인가. 얼굴에는 열기가 스멀스멀 피어올랐고 허공에 붕 떠오른 정신 때문인지 속은 주체할 수없이 울렁거려 멀미를 유발했다.
“그만, 그만해.”
“……내가 그렇게 싫어?”
헉하는 숨소리를 삼켰다. 마치 금언의 저주라도 걸린 것처럼 말문이 막혀버린 바람에 우선 고개를 세차게 가로젓는 것으로 의사 표현을 했다.
“시, 싫을 리가 없잖아.”
“그 말은….”
“…….”
“좋은 것도 아니구나.”
“아니…!”
이대로 실망만 안겨주기 전에 수습해야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방금까지 톡톡 쏘아붙이던 입이 쉬이 떨어지지 않는다. 이놈의 주둥아리는 남을 공격할 때만 자유분방해지는가. 억울하기 짝이 없었다.
한참을 내 표정을 살피던 그는 쓴 미소를 띠고 있었다.
“내가 상처받을까 봐 말 못 하는 거지? 곤란하게 할 생각은 아니었는데….”
“아.”
“이 고백으로 내 옆에 있는 게 불편해졌을까 봐 걱정돼. 음… 너와 함께 모험하던 시간 전부를 불순한 마음으로 보냈던 건 아니야. 널 동료로, 친구로도 정말 좋아했으니까… 이후로 어색해지지 않았으면 좋겠어.”
“아으….”
“혹시 내 바람이 너무 큰 걸까.”
멋쩍게 웃으며 뒤로 한걸음 물러서는 그를 황급히 붙잡았다. 이번에야말로 대답할 기회를 놓친다면 관계가 어중간해지리라 생각했다.
“나─”
‘용사를 사랑하지 마.’
무거운 입술이 가까스로 떨어지려 하자 본체인 ‘아크리스’의 말이 최후의 경고를 알리는 사이렌처럼 귓가에 울렸다.
어떻게 해야 할까. ‘아크리스’의 말을 듣자니, 모처럼 마음을 확인하게 된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으니까. 내가 이리도 욕심이 많고 유혹에 약한 사람인지 깨닫는 순간이었다.
“…나….”
“…….”
“나도 좋아해.”
끝끝내 그가 원할 대답을 내어놓았거늘 무거운 정적은 가시지 않았다. 나는 당장이라도 쥐구멍을 찾아 머리를 집어넣고 싶은데 말이다.
“그러니까… 친구로서 좋아하는 게 아닌 거지?”
“으…….”
“무리하지 마. 분위기에 휩쓸려서 억지로 듣고 싶은 말은 아니야. 난 네 진심이 듣고 싶었던 것뿐이니까.”
“억지로 하는 거 아니야…… 아마.”
“응.”
“으윽… 네, 네가… 나를 좋아한 것보다…… 훨씬 일찍… 너를 좋아하고 있었을… 걸.”
무차별적으로 흔들리는 시선을 둘 곳이 없어 바닥으로 힘없이 떨궜다. 겨우겨우 내놓은 대답이 그다지 로맨틱하진 않았지만, 내 최선이나 다름없었다.
‘미쳤어. 미쳤어.’
멀미는 점점 더 심해졌고 온몸을 사방에서 팽팽하게 당겨지는 것처럼 혈압은 높아지고 있었다. 물러나 있던 그의 발끝은 조심스럽게 움직이더니 내 발끝에 맞닿았다. 그리고는 어깨를 감싸는 부드러운 손길이 느껴졌다.
“크리스.”
“읏… 부, 부르지 마.”
“크리스.”
도망치고 싶었다. 고백의 순간이 이리도 민망하고 온몸에 화상 입은 것처럼 간지러웠던가. 다정하고 진심 어린 고백은 들어본 지 까마득히 오래라 낯 뜨겁기 그지없었다. 이번엔 내가 뒤로 물러서려 했으나, 그가 팔을 내 등 뒤로 감더니 꼭 끌어안는 모양새가 되었다.
“아주 많이 좋아해.”
“긋, 그… 그건 아까도 말했잖아.”
“그리고… 나를 좋아해 줘서 고마워.”
“으… 으응….”
우리의 서투르고 어설픈 마음 확인은 드라마 속 주인공처럼 유려한 문장을 구사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단어 하나하나에서 그의 진심이 느껴지지 않은 건 아니었으니까. 난 이것으로도 충분했다.
그저 나와 리헤로스의 마음이 같았다는 걸 확인한 것만으로도, 이 세상에 남부러운 것 없는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되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