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원래 세르뷔에에서 라이오펠로 향할 때 길은 정해져 있다. 세르뷔에는 수도에 비해 규모가 작은 마을이긴 했지만, 수도와 인접해 있으므로 다른 마을에서 라이오펠로 향하는 객이라면 한 번씩은 거쳐 가는 일종의 교통 요충지였다. 그래서 길이 뻥 뚫려 있어 샛길로 빠지거나 지도를 볼 필요도 없이 오직 길을 따라가는 것만으로 갈 수 있는 편리한 도로가 자랑이라면 자랑이었다. 그런데, 우리는 기사단의 감시망을 피해 서쪽 문으로 들어가야 했기 때문에 큰길을 내버려 두고 숲을 가로질러 갔다.
‘근래엔 숲에 갈 일이 많이 없어서 그런가… 비포장도로를 걷는 게 꽤 어색하네.’
뿐만 아니라, 가뜩이나 무겁고 몸을 둔하게 만드는 갑옷을 입고 움직이자니 걸음걸이가 영 시원찮았다. 원래도 균형감각이 부실한데 갑옷이라는 페널티 덕에 휘청대며 걸으니 리헤로스가 내 옆으로 바짝 다가와 손을 잡아 주었다. 그의 손끝은 거칠었지만 크고 따뜻했다.
“…고마워.”
“고맙기는, 네 남자친구로서 이 정도도 못 할까.”
리헤로스의 거침없는 답변에 화들짝 놀라 테네브 쪽을 보았는데, 다행히도 거리가 꽤 벌려져 있었고, 목소리도 그렇게 크지 않아 듣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 그건 그런데.”
“힘들면 이야기해. 내가….”
“어허, 업어준다고 말하려고 했지?”
“응.”
“오늘은 평소와 달리 갑옷까지 주렁주렁 매달고 왔는데, 업을 수 있겠어?”
“당연히 할 수 있어.”
우리 둘은 서로 손가락 씨름하듯 맞잡은 손을 꼬물꼬물 움직이며 장난치고 있었다.
그때, 앞서가던 테네브가 갑작스레 멈춰 서서는 뒤를 홱 돌아본다.
“아키, 바닥 조심해. 나무뿌리가 많아.”
“아! 으응! 알겠어!”
갑작스럽게 말을 걸어오자 죄지은 사람처럼 제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그와 동시에 잡고 있던 손을 세차게 뿌리쳐버렸다.
‘미쳤나 봐. 아주 티를 내려고 작정했네!’
차라리 자연스럽게 잡은 상태로 힘들어서 부축해 주는 건데 어떠냐는 식의 태도를 보이면 되는 걸 과민반응을 해버리는 바람에 숨기고 싶다는 사실을 온몸으로 표현하고 앉았다. 누가 봐도 수상한 행동이 따로 없었다.
생각해 보면 리헤로스의 태도는 이전과 다를 게 크게 없었지만, 그걸 받아들이는 내 태도가 바뀌니 사사건건 과민한 반응을 보이고 있는 게 아닌가 싶었다. 예전엔 의미 부여하지 말자고 자신을 꼬집었었는데 이젠 그럴 필요가 없으니까 더욱 크게 와닿지 않는가.
“….”
걱정했던 것과 달리 테네브는 나를 위아래로 훑기만 하고 다시 앞을 보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테네브에게 꼭 숨길 필요는 없지만, 진지하게 ‘우리 오늘부터 조금 깊은 사이가 되었어.’라고 굳이 말하는 것도 제법 웃기고 오그라든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말을 꺼내기 어려웠다. 게다가 커플 사이에 낀 세 번째 바퀴처럼 느껴진다며 동행을 거절하게 되면 어쩌나 걱정부터 앞섰다.
‘아니다. 말하는 게 좋은가?’
나나 테네브의 상황을 신경 쓸 게 아니었다. 누구의 의견보다 리헤로스를 우선으로 생각했어야 했다. 애인의 존재가 떳떳하지 않다는 듯이 숨기면 불쾌해하지 않을까.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바로 옆에 있는 그를 슬그머니 올려다보았다. 멋쩍은 듯 희미한 미소를 띤 얼굴이었다.
‘상처받았나 봐…! 미치겠다.’
발밑의 바닥이 뚝 떨어진 것처럼 심장이 철렁했다. 애인으로서 형편없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는데, 실망했으면 어쩌지. 걱정스러운 마음에 이번엔 내가 적극적인 면을 보여줘야겠다 싶어 그의 손을 잡았다.
“손… 빼서 미안해. 조금 전엔 너무 놀라서….”
“괜찮아.”
“정말?”
“네가 원래 부끄러움이 많은 걸 알고 있으니까.”
“야잇…!”
소리를 지를 것만 같아 아랫입술을 깨물며 가까스로 참았다. 당장은 나를 놀리느라 신나있지만, 내 특성을 잘 알고 있어 자칫 서운할 수도 있는 행동도 이해해 주는 거겠지. 고마우면서도 안심되었다.
‘다정하기도 하지….’
연인이란, 사소한 것에서도 마음이 상하고 싸우지 않던가. 예를 들면 누구를 오래 쳐다보고 있다든지, 기념일을 까먹었다든지, 스킨십 속도를 맞춰주지 않다든지 따위의 사소한 이유에서 말이다. 이번에 보인 행동이 리헤로스가 서운할 만한 수준의 행동이 아니어서 다행이었다. 앞으로는 더욱 섬세하게 행동해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나도 리헤로스가 해주는 만큼만 하면 선방… 아니지, 애초에 그게 가능한가?’
타고나기를 다정한 사람과 이제 막 성격을 고쳐보려고 하는 사람이 같은 수준의 섬세함을 보여주긴 당연지사 힘들겠지. 내 나름대로 어떻게 그를 기쁘게 만들어줄지 머리를 굴리는 내내 주변의 풍경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고, 어느새 수도 문턱 앞이었다.
나와 리헤로스는 어두운색의 로브의 후드를 뒤집어써서 눈에 띄는 모발 색과 생김새를 숨겼고, 서쪽 문의 문지기 병사들은 테네브에게 인사를 건네느라 우리 쪽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테네브의 말대로 서쪽 문은 드나드는 사람이 적어서일까? 외지인에 대한 경계심이 매우 낮은 듯했다.
지체하지 않고 곧바로 기사단 건물로 향했다. 늘 훈련장 공터에서 훈련을 하는 기사단원이라던가, 그 앞에서 구경하던 영애들은 오늘은 보이지 않았다.
“기사들이 코빼기도 안 보이는 것 같다?”
“단장님께서 많이 데려가셨어. 그러면서 오늘은 훈련도 쉬기로 되어있지.”
“그래도 돼? 당장 수도의 병력이 많이 빠진 상태에서 마물이 나오면 어쩌려고.”
“그래서 내가 남아있잖아.”
“오오오.”
“……오해하지 마. 잘난 체하려고 말한 거 아니니까. 나한테 맡겼으니 단장님이나 다른 기사단원들이 방심하고 있다는 뜻이었어.”
“아닌데, 되게 자부심 느껴지는 말이었는데. 나 테네브 델 드렉티오의 능력이 기사단 한 부대 정도다─ 같은?”
“제발… 부끄럽게 만들지 마.”
내 말에 쉽게 붉어지고 쭈뼛대는 테네브의 모습에 도저히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그는 팔로 얼굴을 가리는가 싶더니 건물 내부로 뛰쳐 들어갔고 우리도 함께 따라 들어섰다.
멀찍이서 기사단원들 한두 명이 보이면 기둥을 돌아 뒤쪽 계단으로 이동하고, 최대한 그들의 눈에 띄지 않게 행동했다. 4층이라지만 한 층의 높이가 상당해서 계단의 높이는 1층 반 정도 되는 것 같았다.
“칼리고의 집무실은 6층이었던가?”
“맞아. 그건 왜?”
“가서 뒤엎어버릴까 싶어서.”
“…네 마음은 이해하지만 그건 참아주었으면 좋겠어.”
“당연히 농담이야.”
우리가 싸우러 온 것도 아니고 조사 차원의 잠입이라지만, 모두 살얼음판을 걷고 있는 양 긴장하고 있어 경직된 분위기를 풀기 위해 농담을 던졌다. 내가 지나치게 가볍게 생각하는 건가 싶기도 했지만, 누그러진 분위기가 익숙해져 버렸다고 해야 할까. 조금은 느슨한 분위기가 되어야 실수를 안 할 것만 같았다.
4층에 올라 복도 끝에 있는 방문 앞에 멈춰 섰고, 테네브는 주저하지 않고 방문을 열어 당겼다.
─끼이이익
방으로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창문으로부터 햇살이 강하게 내리쬐고 있었다. 처음에는 다소 눈을 뜨기 어려웠지만, 빛에 익숙해진 시야는 실내를 온전히 담을 수 있었다.
“…아무것도 없군.”
“역시나… 전부 치워버렸나?”
“구석에 책장은 아직 남아있어, 크리스.”
“음, 그러네.”
한눈에 확 띄는 지물이 아니었고, 벽에 바짝 붙어있는 작은 크기의 책장이었다. 그쪽으로 다가간 리헤로스의 옆에 나란히 붙어 살펴보았다.
─띠링
[단서]
아킬라 집무실의 책장
- 책장에 비치된 책은 꽤 오래 손을 타지 않은 모양인지 먼지가 쌓여있다.
눈에 띄는 비품들은 모두 옮겼음에도 책장은 손도 안 댄 게 의아했다.
“치우려면 다 치우지, 책장만 남아있네.”
“혹시 옮기지 못하는 물건이라 치우지 못한 걸까?”
그러고 보니 마왕성 창고에 있던 책장이 떠올랐다. 거기도 책장 뒤에 숨겨진 공간이 나왔지. 내가 책장을 잡아당기려고 하자 리헤로스도 함께 거들어주었다. 물러서 있던 테네브도 다가와 힘을 보탰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럴지도 모르겠어. 어딘가 움직일 수 있는 장치가 있는지 살펴보자.”
“응, 우선 책부터 전부 꺼내 볼까.”
책을 꺼낼 때마다 뿌연 먼지가 나풀대며 코끝을 간질였다. 기관지가 먼지로 틀어막혀 질식할 것만 같았는데, 불행 중 다행인 건 책이 많지 않아 금방 내릴 수 있었다. 책장의 구석구석을 누르고 두드리며 살펴봤지만, 이렇다고 할만한 장치는 없었다.
“그냥 고정해둔 책장은 아닐까.”
“그런가…?”
“경,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벽면을 두드렸을 때, 안쪽이 울려서 뒤에 공간이 있는 건 분명합니다. 아마 장치가 책장에 달린 게 아니겠죠.”
그 말로 우리를 설득한 리헤로스는 차분히 책장 근처의 바닥과 벽면을 살피고 있었다. 그리고 벽면의 제일 하단에 튀어나온 벽돌 하나를 유심히 바라보더니 부츠 앞 코로 꾹 눌렀다.
─덜컹
누르고 있던 돌이 벽 내부로 깊게 들어가는 것과 동시에 책장은 여닫이문처럼 열렸다.
“이야, 관찰력 좋은데? 잘했어 리헤로스.”
“칭찬 고마워. 그럼 들어가 보자.”
“혹시 누가 안에 있을지도 모르니 제가 앞장서는 게 맞는 것 같습니다.”
“테네브 말이 일리가 있어. 그렇게 하자.”
기사단 실 비밀의 공간에 누군가 있다면 기사단 내부의 인물일 것이고, 테네브가 살피는 것이 가장 자연스러울 테니 말이다. 테네브는 어둡고, 좁은 공간에 벽을 짚으며 천천히 발을 떼었다.
“멀찍이 떨어져서 따라와. 내가 신호하면 뒤로 돌아 나가고.”
“그래그래. 알겠어.”
통로가 어두워 밖에서 보았을 땐 깊이가 어느 정도인지 체감이 되지 않았는데, 꽤 긴 복도 같았다.
‘기사단 건물 규모가 큰데, 방은 몇 개 없다 싶더라니… 이런 비밀 공간이 많나?’
기사단이 귀족이나 재벌도 아니고, 벙커 같은 공간을 만들어야 할 이유가 무엇이 있는가. 이해되지 않았다. 긴 복도를 지나 마침내 방이라고 불릴만한 정사각형의 공간이 나왔다. 약 10평 정도였는데, 기대했던 것과 달리 아무것도 없었다.
“아쉽게 됐네. 아무런 단서를 못 얻어서.”
“그런데… 좀 이상하지 않아?”
“뭐가?”
“책장은 먼지가 그렇게 쌓여있었는데, 여긴 그 정도로 수북하게 쌓여있진 않잖아.”
“흐음….”
“어쩌면 아킬라가 여기에 몸을 숨기고 있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단순한 망상일지도 모르지만, 그런 직감이 들었다.
“음, 그럴 수도 있겠지.”
“그럼 아킬라는 본가로 돌아갔어?”
“사실… 그가 기사단에서 쫓겨난 이후로 괜찮은지, 위안 목적으로 그를 만나려고 했었어. 그런데 다른 기사단원들에게 소식을 물어보았더니 행방이 묘연해.”
“내 추측에 힘을 실어주는 단서네.”
이로써 다음 목표는 대략 정해져 있었다.
“우선, 원래 계획대로 아킬라의 책상이 비품 창고로 옮겨졌는지 확인이 필요할 것 같아.”
“응, 그러고 나서 아킬라의 행방을 찾는 게 맞겠네.”
“테네브, 혹시 아킬라의 집 주소라든지 알고 있어? 여기에 없으면 집으로 갔겠지, 싶은데.”
“그 정도는 알 수 있어. 좀 이따가 관리부서에 가서 기사단원들의 신상 정보부를 찾아보면 될 것 같아.”
“음… 거기도 역시 테네브 혼자 갈 수밖에 없겠지?”
“아무래도 그렇지.”
우리 셋은 비밀의 방에서 나와 책장을 원래 상태로 돌려놓았고, 아킬라의 집무실을 빠져나가려고 했다.
─찰카닥, 팅
금속 장치를 여닫는 소리가 들렸다. 꼭 회중시계와 같은 작고 섬세한 금속 장식물 같은 소리였다. 대체 이런 소리가 어디에서 날 수 있을까 의아함을 품고 있을 때, 테네브와 리헤로스는 문 쪽을 바라본 상태로 제자리에 굳어 있었다.
“이게 누구야. 어디서 더러운 시궁창 냄새가 난다 했더니만 쥐새끼들 아닌가?”
“칼리고…!”
여기 있어선 안 될 검은 머리카락과 맹수 같은 붉은 눈동자를 보고 굳지 않을 수 없었다. 온몸의 근육이 움직이기를 거부한 것처럼 완전히 멈춰 섰다. 식은땀은 등줄기를 따라 흥건하게 흐르는 것만 같았다.
칼리고의 집무실과는 거리가 있는데 굳이 이 층을, 그것도 아킬라의 집무실에 찾아온 이유가 무엇일까.
그보다도 오늘은 수도를 떠난다고 들었는데, 설마 테네브에게 칼리고의 일정을 속인 걸까. 모든 게 완벽하게 돌아간다고 생각했거늘, 너무나도 안일했던 모양이다.
“마물들에 물어 뜯겨 오체분시 당해 죽은 줄 알았는데 살아있었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되지 않아 미안하게 됐네.”
“그러게 아쉽게 됐군.”
칼리고는 노골적으로 비아냥댔다. 섬뜩함을 느끼는 것을 지나 부글부글 끓는 분노는 주먹을 떨리게 했다. 나에게 더 시비를 걸어온다면 사양하지 않고 싸울 기세로 그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놈은 서늘한 붉은 눈동자만 굴려 테네브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테네브 델 드렉티오. 왜 이들과 기사단 건물을 들쑤시고 다니는지 나를 설득해야 할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