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왕님 망겜에도 엔딩이 있나요-96화 (96/127)

96화

늘 칼리고의 눈빛이 서늘하다고 여겼지만, 이번만큼은 얼어붙다 못해 뜨겁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열감이 오르는 피부를 긁으면 한 꺼풀 한 꺼풀 뜯겨나갈 듯한 추운 시선이었다.

“테네브. 어째서 내게 보고하지 않았지? 놈의 일거수일투족을 보고하겠다고 하지 않았던가? 내가 언제 네놈에게 같은 쥐새끼가 되라고 했었지?”

“…저, 저는….”

“그래. 입이 있으면 말을 해봐라.”

“정말 오해이십니다…. 저는….”

“잔머리를 굴리느라 입이 점점 느려지는군. 누가 차라도 내오겠나? 입이 열리려면 두 잔 정도 비워도 모자라겠는데.”

칼리고의 비아냥거림에 뒤에 늘어서 있는 기사들은 저마다 테네브 쪽을 향해 코웃음이 섞은 비웃음을 보였다. 어쩔 줄 몰라 진땀을 빼는 테네브의 입술은 하고 싶은 말은 있지만, 섣불리 뱉을 수 없는 듯 달싹이기만 했다.

당연했다. 테네브의 대답에 나와 리헤로스의 처분이 이 자리에서 즉결로 이루어질 테니까.

‘심지어 칼리고야. 건수 잡았다고 신나있는 거 보니 이대로 두면 큰일 나겠는데.’

다른 이유도 아니고 주거침입죄 명목으로 집어처넣어도 될 것을 굳이 테네브의 입에서 나오게 하려는 비열함. 어딜 보나 사냥감을 발아래에 두고 굴리는 고양이 같은 꼴이었다.

더는 두고 볼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에 테네브의 앞을 가로막았다.

“내가 여기에 숨어있었어.”

“흠?”

“기사단 내부가 혼란한 틈을 타 숨어 지내던 나를 테네브가 발견하고 체포한 거라고.”

테네브에게 향하던 시선들은 일제히 내 쪽으로 쏟아졌다.

이딴 변명이 통할 리 없었다. 과연 믿어줄지 모르겠지만, 우선은 뱉고 봐야지 않은가. 테네브가 우리로 인해 곤란해지는 것은 절대 있어선 안 됐다.

‘리헤로스도 의심에서 빼내야 하는데.’

이미 한차례 알렸다시피 두 사람은 ‘호의적인 역할’이어야만 했으니까. 이 셋이 이 공간에 모인 것은 나의 잘못으로 돌려야만 한다. 어떤 처벌을 받든 내 선에서 끝난다면 감사할 일이었다.

“오호라, 그럼 이곳에 네놈과 테네브만이 있어야 할 텐데 용사는 왜 네 몸의 일부처럼 붙어있는 거지?”

“리헤로스는 잘못 없어. 나를 친구로서 찾으러 온 것뿐이야.”

“그걸 믿으라고 지껄이는 소린가?”

“크리스…!”

“진짜야. 아킬라가 기사단에서 쫓겨난 걸 알고 있으니까. 아킬라의 집무실은 비어있으리라 생각했어. 새벽에 사람들이 없는 틈을 타 건물 전체를 둘러보았고, 아킬라의 명패를 보고 이곳에 숨어들었지.”

혹여 리헤로스가 하얀 거짓말을 버티지 못하고 실토할까 봐 그의 쪽으로 손을 들어 저지했다.

“테네브는 나를 체포하러 온 거고, 리헤로스는 숨어있지 말고 잘 풀어보자고 설득하러 왔지. 언제까지 은둔하며 살 순 없는 노릇이라고 하면서.”

“흐음, 어디 더 지껄여보지, 그래.”

“더고 자시고 없어. 두 사람의 설득에 못 이겨서 밖으로 나오려던 찰나에 네놈을 마주친 거지. 그러니 두 사람은 관련 없어. 단순히 죄인인 나를 회개시키려고 했을 뿐이니까.”

“하!”

칼리고는 머리를 뒤로 쓸어 넘기며 웃음소리를 내었다. 당연하지만 재밌어서 웃는 것은 아니었다.

“역시… 그럴 줄 알았지. 테네브가 ‘내 말을 거역할 리 없지. ‘감히’.”

칼리고는 강조하고 싶은 단어 하나하나마다 억양을 높여 뱉으며 붉은 눈동자는 테네브에게 완전히 고정되었다. 어떻게든 말을 해보려 노력했던 테네브의 입술은 완전히 닫혀버렸다. 아무래도 말의 뼈를 느끼고 더 변명하지 않는 것이 본인의 신상에 좋다고 생각해서 일 것이라. 그러니 분산된 칼리고의 공격성을 내 쪽으로 완전히 끌어와야만 했다.

“칼리고.”

“뭐냐? 쥐새끼.”

“조사가 필요하면 받을게. 불필요한 싸움은 걸지 않았으면 좋겠어.”

“‘필요’하면 받겠다? 의심받고 있는 죄인 주제에 태도가 상당히 뻣뻣하군.”

“결백하니까 뻣뻣한 거지. 설마, ‘죄인’이 자백하는데 무고한 왕국 시민까지 끌고 갈 생각은 아니지?”

“뭐?”

“두 사람을 참고인으로 데려가는 건 좋지만, 나를 의심한다고 해서 두 사람에게 불온한 처우를 한다면 가만있지 않을 거야.”

“가만히 안 있는다?”

칼리고는 평정을 잃었는지 팔을 뻗어 내 멱살을 잡아끌었다. 몸이 크게 흔들렸지만, 무게중심을 뒤로 빼서 놈에게 완전히 끌려가지 않도록 버텼다. 칼리고는 송곳니를 드러내며 얼굴의 근육을 일그러트리며 속삭댔다.

“어리석기도 하지. 건방진 게 여전히 제 주제를 몰라.”

“그럼, 무릎이라도 꿇을까?”

“쉴 새 없이 까불어대는 그 입을 찢어줄까? 아니면 혀를 도려내 줘?”

대화는 나와 칼리고가 하고 있지만, 각각 뒤에 서 있는 리헤로스, 테네브 그리고 기사단원들이 경직되어 있었다. 단순히 놀라서 그렇다기보단 검의 손잡이 위에 손을 올리며 공격 태세를 준비하고 있었다. 누군가 도화선에 불을 붙이면 당장이라도 붉은 선혈이 눈앞에 튀어 오를 것만 같은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으르릉대는 칼리고의 목을 긁는 호흡은 점차 안정적으로 변했다. 그리고 쥐고 있던 멱살을 툭 놓아버린다.

“크, 크큭…. 하하하하!”

모두가 날 선 신경을 거두고 그에게 시선을 던진다. 웃음소리를 겨우 멈춘 칼리고는 눈을 내 쪽으로 치켜떴다.

“겁나나?”

“뭔 헛소리야.”

“잔뜩 움츠러든 꼴이 하찮아서 말이지.”

“자기소개하고 앉았네.”

“하아, 여전히 건방진 모습이 보기 좋군.”

그는 가죽 장갑을 고쳐 끼며 내려다본다. 주먹이라도 날릴 것을 대비해 어금니를 꽉 물고 온몸에 충격을 완화할 수 있도록 힘을 주고 있었다.

‘주먹 한 대로 끝났으면 좋겠다. 아니면 이번에도 강제로 체포할 생각인가.’

리헤로스가 구금당해 시간 낭비하게 되는 것은 사양하고 싶으니 이것만은 막아봐야겠다. 나만 갇히게 되면 나 없이도 잘 헤쳐 나갈 수 있다. 왜냐면 협력해 주기로 한 테네브도 있으니까.

칼리고의 구김이 있던 가죽 장갑은 손 모양에 딱 맞게 자리를 잡혔고, 주먹을 날리는 대신 가볍게 내려놓는다. 어리둥절해 맥이 풀렸다. 빈틈을 노리는 것도 아니었고 그저 배실배실 웃고만 있었다.

‘갑자기 귀신 들리기라도 했나. 감정이 이리도 널뛸 수가 있어?’

조금 전까지 내 입을 찢어버릴 것이라느니 증오를 표출해놓고 이젠 웃는다니. 급기야 미쳐버린 걸까. 칼리고는 몇 번이고 충돌한 인물 중 하나였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종잡기 어려운 캐릭터였다.

“자존심 센 널 묶어두고, 잘못했다고 애원할 정도로 고통스럽게 심문하고 싶다만 애석하게도 그리하지 못하겠군.”

“뭐?”

“그러니 평소에 행실을 똑바로 하고 다녀라. 쥐새끼.”

“잠깐 그게 무슨 말….”

칼리고는 자세한 설명 없이 불친절한 말만 일방적으로 던지고서 몸을 돌려 나갔다. 멍해진 상태로 점점 멀어지는 뒷모습을 바라보기만 했다. 우리 셋 중 그 누구도 안도의 한숨을 쉬거나 가벼이 농담을 던지는 이는 없었다.

아무런 간섭 없이 단순히 시비를 걸고 싶어서 온 거라기엔 굳이 테네브에게 일정을 속이면서까지 깜짝 등장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목적을 달성했다는 양 유유히 떠나는 모습은 상당히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그러던 중, 테네브는 가장 끝에 따라가고 있던 기사단원 하나를 끌고 왔다.

“아, 왜…!”

“바그너. 단장님 말씀을 이해할 수가 없는데… 설명해 줄 수 있나?”

“나 가야 해! 오늘 행군 빡세단 말이야.”

“간단히, 아주 짧게라도 알려줄 수 있을까? 정말 미안해.”

“하아… 그게…. 기사단 건물에서 마물을 소환했던 주술사를 잡았거든.”

“뭐?”

“신원은 비밀리에 부쳐서 잘 모르는데… 하여튼 잡았어. 그래서 너나 용사 일당에게 죄를 묻지 않는 거야. 기사단에서 서성대는 게 엄청 의심스럽긴 해도.”

“…….”

“드렉티오…. 너도 이제 정신 차리고 이상한 짓 하러 돌아다니는 건 그만둬. 아마 단장님 덕분에 종교 주축은 금방 잡힐 테니까. 얌전히 자리나 지키라고. 징벌의 뇌옥으로 끌려가고 싶지 않으면.”

“…알겠어.”

“당신들도!”

바그너라는 기사는 우리를 향해 손가락질하고는 허둥지둥 기사단 대열에 합류하였다. 이 답변으로 인해 안 그래도 복잡하게 엉켜있는 생각들이 더욱 머릿속에 빼곡해졌다.

‘나를 의심해서 잡아놓고, 이제는 범인이 있으니 놓아준다고? 저 자식 성격상 절대 그럴 리 없을 텐데.’

오히려 진범을 숨기고 내게 죄를 뒤집어씌운다면 모를까. 칼리고치고 너무나도 정상적인 범주의 객관적 판단이었다.

“크리스. 괜찮아?”

“아키!”

리헤로스의 다정한 음색이 들림과 동시에 테네브는 내 앞으로 불쑥 다가오더니 얼굴 안색의 구석구석을 살피었다. 나는 괜찮다고 답이라도 하듯이 고개를 저었다.

“나야 괜찮지. 그보다도 저 자식 행동 찝찝한 거… 나만 그래?”

“과정이야 뭐 어때. 의심받지 않아서 다행이야.”

“음….”

테네브로 인해 가려졌던 리헤로스도 내 옆으로 바짝 다가오더니 조용히 입을 열었다.

“크리스, 나도 너와 같아. 분명 오해가 풀린 것 같긴 한데… 마음 한구석이 편치 않아.”

“그렇지? 그러니까… 뭐랄까… 뭐라고 설명을 해야 할까? 좀 더 재수 없어졌다고 할까?”

“……단장님이 최근 들어 부쩍 여유로워진 것 같긴 해.”

“정말? 테네브도 느낄 정도면… 왜지?”

“글쎄… 그간 종종 업무를 내려놓고 휴식하신 적이 있었거든. 쉬다 와서 마음에 여유가 생긴 거 아닐까 싶다만.”

놈이 가진 열등감은 그저 휴식한다고 나아지는 수준이 아니다. 무언가 더러운 꿍꿍이가 있다면 모를까. 무투대회에서 리헤로스에게 무참히 패배한 이후로 느낀 게 있던 걸까? 잘 모르겠다.

“좋은 쪽으로 변하셨으니 좋은 거 아닌가? 좋게 생각하면 안 되는 건가?”

“좋은 쪽… 이라고 말해야 하나. 사람이 이렇게까지 급변하면 문제가 있는 거야. 하지 않던 짓 하면 죽는다는 말이 괜히 있어?”

“그건… 마계에서 쓰이는 속담인가? 살벌한데.”

“마계 속담이겠냐.”

테네브의 바보 같은 말에 웃음이 픽 나왔다.

그래. 지금 당장 그의 심경 변화를 고민해봤자 해결되는 것은 없었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일이 남아있지 않은가.

“크리스. 그 기사단에서 마물을 소환했다던 ‘주술사’를 찾으러 가보자.”

“오, 나도 그 얘기 하려고 했어.”

리헤로스는 눈치가 빠른 건지 나와 생각이 잘 통하는 건지 원하는 것을 바로 내놓았다.

“그건… 단장님께 맡겨도 되지 않겠습니까? 두 사람의 의심도 완전히 풀린 것 같습니다만.”

“아니요. 짧게나마 고민해본 결과, 완전히 풀린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오히려… 오늘의 사건으로 인해 칼리고뿐만 아니라, 중립적으로 생각하던 기사단원들에게도 요주의 인물로 낙인찍혔을 겁니다.”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시는지요?”

“주술사가 잡히긴 했지만, 우리를 의심 없이 풀어준 것처럼 그 사람도 심문하고 난 후, 혐의 없이 풀릴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럼 다시 자연스럽게 기사단 건물에서 발견된 크리스와 제가 표적이 되겠죠.”

“음, 듣고 보니 그것도 맞는 말이야.”

그저 좋게 좋게 해결해나갔던 초반의 병아리 용사님이 맞긴 하는가? 180도 달라진 모습에 그저 흐뭇했다. 나름 테네브도 설득할 만한 이야기라고 생각했건만, 그는 미간을 문질러대며 침음을 흘렸다.

“정말 진상을 파헤칠 때까지, 끝까지 추적하겠다는 말씀이십니까?”

“네, 경께서 곤란하시다면 크리스와 함께 안전한 곳으로 대피하세요. 저 혼자 해도 괜찮습니다.”

“그럼….”

리헤로스의 말에 나는 펄쩍 뛰었다.

“너 혼자 사지에 내몰 수는 없지. 됐어, 같이 가. 어차피 나에게 안전한 곳은 이제 없으니까.”

“크리스…….”

“감동이지?”

“응, 정말 고마워. 네 말은 정말 의지 돼.”

“아, 아키가 그렇게까지 말하면… 저도 최대한 돕겠습니다.”

“테네브, 괜찮겠어? 무리하지 마. 어차피 이건 나와 리헤로스의 일이니까.”

“…어쩌겠어. 용사의 말이 사실이라면, 단장님은 이미 나까지 밀접한 관련자로 생각하고 있을 거 아닌가.”

“글쎄, 내가 봤을 땐 오늘이 최후의 통첩 같아 보였어. 그러니 지금이라도 손 떼도 늦지 않았어.”

“……아니. 할 거야.”

“네 결정이 그렇다면, 그래. 끝까지 잘 부탁해.”

본인이 자신 있게 이야기했지만, 결국엔 제 소속과 등을 지는 일일 수도 있었다. 그래서일까 조금은 풀이 죽은 것처럼 보이는 테네브의 어깨를 세게 두드렸다.

그래,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하나뿐이다. 칼리고의 기분에 따라 눈치를 볼 바에 확실한 범인을 잡아 놈의 앞에 확실히 보여주는 것이 항변이고 결백함을 증명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