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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왕님 망겜에도 엔딩이 있나요-97화 (97/127)

97화

“이왕 셋이 끝까지 가기로 했으니 잘해보자.”

“응.”

“그래.”

“둘 다 대답이… 그게 끝이야? 어휴, 됐다. 그 주술사는 지하 감옥에 있겠지?”

“아마 국가를 위협할 정도의 중죄가 아닌 이상 지하 감옥에 있을 거야.”

“그럼 엄청난 중죄를 저지른 범죄자는?”

“징벌의 뇌옥…으로 가겠지.”

“그러고 보니 아까 바구미인지 뭔지가 거기로 가고 싶지 않으면 잘하라고 했었지?”

“그랬지.”

“대체 어떤 곳이길래? 그래봤자 감옥이 거기서 거기에 비슷하지 않아? 독방인가?”

“직접 가본 적은 없지만…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어떤 잡음조차 들리지 않아서 금방 미쳐버린다고 하더라고. 아무것도 하지 않으니까 오히려 미쳐버린다고 할까.”

“흐음.”

원래의 세계에 있을 때 봤던 인터넷 게시물이 생각났다. 인터넷도 창문도 없는 공간에서 얼마나 버틸 수 있는가를 주제로 시끌시끌했었다. 나는 먹을 것만 무한 제공되고, 콘솔게임을 넣어준다면 가능하다는 쪽이긴 했지만, 시야가 완전히 보이지 않는다는 페널티가 있다면 꽤 답답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네가 갈 일은 없으니까. 신경 쓰지 마.”

“아아….”

아닐 거라 확신하면 이상하게 그 일에 휘말린다. 가상의 세계에서 반드시 일어나게 되는 일종의 플래그라고 할까.

‘기우이길 바라야지.’

꼭 플래그를 세운다고 일어나리란 법은 없으니까.

“드렉티오 경, 지하 감옥으로 안내 부탁드립니다. 칼리고… 경이 오기 전에 확인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래야겠군요.”

“그래그래. 잡담이 길어졌네. 서두르자.”

“내가 앞장서지.”

“응, 부탁할게. 나도 한 번 갇혀보긴 했는데 아직 길이 어두워서 말이야.”

“그야… 당연히 익숙해질 정도로 자주 오면 안 되지.”

“아무래도 그렇지?”

“그렇다마다.”

마주 보고 쿡쿡 웃는 소리를 내다가 테네브의 발이 가장 먼저 떨어졌다. 그가 뒤를 돌자마자 나는 자연스럽게 리헤로스의 팔을 잡아끌었고 그는 잡힌 팔을 빼는 듯하더니 손을 맞잡았다. 그 행동에 입꼬리가 안 올라갈 수 없었다.

‘안 그래 보이는데, 은근히 집착하는 부분이 있다니까.’

사소하지만 굳이 손을 고쳐잡는 모습은 심장 언저리를 간지럽게 만들었다. 사랑이라는 단어를 처음 배운 사람처럼 뭉클해지기까지 했다. 바로 앞에 테네브가 있으니 크게 반응해주진 못하지만, 엄지손가락만 움직여 그의 손등을 느리게 쓰다듬었다. 피부를 스치고 지나갈 때, 정전기라도 오른 것처럼 찌리릿한 느낌이 왔다.

“아…….”

기묘한 전류를 나만 느낀 게 아닌 모양인지 흠칫 놀라 발걸음이 느려진 리헤로스는 제 아랫입술을 우물댄다.

‘저 표정 뭐야? 미치겠다. 조사만 끝나고 집에 돌아가면… 가만 안 둬.’

절친의 급습으로 인해 깨졌던 로맨스 흐름을 다시 도전해 볼 생각이다. 어차피 둘 다 닳고 닳은 성인이니 진도는 빨리 나가도 상관없지 않은가.

‘그러고 보니 리헤로스는 밤에 어떤 모습일까.’

가벼운 키스까지는 상상할 수 있었지만, 그 이상은 상상력의 한계에 부딪혔다. 그는 자상하고 착하지만, 리드하는 박력이라던가 강압적인 모습은 전혀 없었으니까. 어느 정도 몰아붙여야 하는 행위에서는 어떤 표정을 지으며 어떤 방법으로 하게 될지 미지수였다.

‘그렇다는 건… 분위기 잡히면 내가 리드해야겠지? 어쩔 수 없네.’

나로 인해 쾌락에 젖는 그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 등줄기가 빳빳해졌다. 무의식적으로 고갤 돌려 다시금 그를 올려다보았다.

“…왜 그래. 크리스?”

“……아니야.”

수줍게 얼굴을 붉히는 리헤로스를 보니 줄기차게 불순한 망상을 이었던 게 미안해졌다. 그리고 남자친구인데 뭐 어때, 하는 마음도 불쑥 치솟아 올랐다. 어쨌든 내 잘못은 아니다. 귀여운 리헤로스의 탓이다.

‘됐으니까 빨리 끝내고 집에 가고 싶다.’

이러고 있다간 기사단 건물에 들어온 근본적인 이유까지 잊어버릴 것 같았다. 그의 귓가로 살며시 다가가 조용히 물었다.

“계단 위험하니까, 손은 놓고 갈까?”

“아아, 응.”

리헤로스의 손을 천천히 놓아주며 해이해진 정신을 바로잡았다.

올라가는 것에 비해 내려가는 길은 퍽 짧게 느껴졌다. 지상층을 모두 내려오고 나서, 지하 감옥으로 향하는 어둡고 좁은 복도에 접어들었다. 여전히 돌 블록 사이사이에 스며 빠지지 않은 피 찌꺼기나, 부서진 기둥, 발톱 자국 따위의 흔적이 남아있었다.

“그때 정신이 없어서 몰랐는데… 건물이 만신창이가 된 걸 보니 알겠네. 엄청나게 큰 사건이었구나.”

“크리스, 설마 이 모든 게… 마물이 나왔던 일 때문에 부서진 거야?”

“응. 원래는 안 이랬어.”

“크리스…….”

그는 눈썹을 구부려 걱정돼 미치겠다는 눈빛을 보냈다. 더 말을 하게 두었다간 나를 절대 조사에 끼워줄 것 같지 않아서 테네브의 등에 말을 걸었다.

“칼리고 말이야. 지금쯤이면 확실히 갔겠지?”

“응, 진짜 간 것 같아. 바그너가 행군한다고 했었잖아.”

“그럼 다행이네.”

같은 장소에서 같은 이벤트가 두 번 발생하지 않는다는 게임적 문법을 믿기로 했다. 칼리고와의 분쟁은 피할 수 없겠지만, 당장은 비슷한 이슈는 없겠지.

“너 평상시에 칼리고와 같이 다닐 거 아니야. 요 근래 무슨 일 없었어?”

“무슨 일이랄 건 없었어.”

“그래? 흐으음, 당최 이해가 안 되는 놈이야….”

“정확히는 잘 모른다고 하는 게 맞겠네.”

“왜?”

“최근 들어 단장님… 아니, 칼리고의 친우인 입장으로 만남을 청해도 만나 주지 않아.”

“…정말?”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르지. 널 돕고 있다는 사실을 칼리고처럼 눈치 빠른 사람이 모를 리가 없으니까.”

“그래서 네가 아까 확신했던 거군?”

“…그래.”

“이렇게 되어버린 거 어쩔 수 없지. 기사단을 나오는 건 어때?”

“…….”

“절대 네 고민을 가볍게 말하는 거 아니야. 이런 말을 하는 건… 왠지 모르게 불길해서야. 너에게 해코지하려고 이를 갈고 있는 것 같아서. 아니, 그저 너만 해코지하려는 게 아니라 우리 모두를 몰락시키려고 준비하는 것처럼 느껴진다면 믿기 어려울까?”

“…….“

좀처럼 행복 회로가 굴러가지 않았다. 오히려 최악의 최악까지 상정하게 되니 누군가 지켜보고 있는 것만 같은 기분 나쁜 시선이 느껴질 정도였다.

“걱정은 이해한다만, 일단은 기사단에 남아 지켜봐야겠어.”

“진심이야?”

“네가 그랬잖아. 이 일이 완전히 끝나기 전까지는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고.”

“그건 그렇지만… 최근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모를 때의 이야기고….”

“당장 나가버리면 칼리고가 우리에게 어떤 해코지를 할지 몰라. 대신 이번 조사가 끝나면 당분간은 조용히 지내야지.”

“…….”

“용사와 아키, 두 사람을 도울 수 있는 건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이야기야.”

“…그래. 알았어.”

“……미안해.”

“네가 왜 미안해해? 내가 더… 미안하지.”

안정적인 파티가 이제야 손발이 잘 맞게 굴러가나 싶었는데, 결국엔 파투가 되고 마는구나. 입이 썼다.

테네브의 의견을 존중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내가 억지로 그의 삶을 조종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그의 착한 마음을 이용해서 평탄하기만 했던 인생을 망친 것만 같아 진심으로 미안했다.

‘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우리의 일에 테네브를 끌어들이지 않을 거야.’

이 세계가 회귀가 가능한 판타지 세계관이라면 그럴 것이다. 지금은 후회해 봐야 아무 도움도 되지 않으니 비생산적인 망상일 뿐이었다.

테네브는 아무렇지 않은 듯 지하 감옥을 지키고 있는 병사에게 다가가 금화를 쥐여주었다. 병사는 그에게 무어라 당부하고는 조용히 지상으로 올라가는 듯했다.

“지상 계단 끝에 있겠다고 하네, 잠깐은 눈 감고 넘어가 준다고 했어.”

“그래. 잠깐이면 될 거야.”

놈을 어떻게 할 건 아니고, 대화를 청할 생각뿐이었다. 궁지에 몰린 놈이 술술 불 줄 그 누가 알겠는가.

한껏 기합을 넣은 어깨를 위풍당당 편 채 문제의 ‘주술사’가 갇혀있는 감방의 앞에 멈춰 섰다.

“…….”

“주술사… 라는 게 너였어?”

그 안에 갇혀있는 인물을 본 테네브는 못 볼 것이라도 본 사람인 양 경악을 금치 못했다. 내 눈엔 그저 평범한 인간처럼 보였는데 말이다.

“이해가 안 돼. 네가 어떻게…!”

“왜 그러십니까? 드렉티오 경.”

“저 녀석… 죽은 놈입니다.”

“네? 그게 무슨….”

“이미 죽었다고요. 지난번 전투에서.”

테네브의 말은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어 더 물을 수도 없었다. 여태 종교를 추적하면서 언데드 마물이 등장하긴 했다 만, 모두 야수형이었지, 인간형 언데드가 나온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갈 데까지 간 건가?’

인간을 되살리는 주술을 성공한 거라면, 정말 죽은 마왕이라도 되살리기 위해 주술 식을 만들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무어라 말해도 안중에도 없던 놈은 갑작스레 고함을 치기 시작했다.

“아아…! 언제 오시는 거야! 기다리고 있으라고, 오신다고 했는데! 오신다고 했는데! 으으!”

“뭐라는 거야?”

“너무 늦었어… 늦었어… 너무 답답해 나가야 해! 나갈래!”

놈은 창살에 바짝 붙더니 그 사이로 얼굴을 구겨 넣듯이 뭉개고 있었다. 악신의 힘을 추앙하는 종교에 들어간 놈이니 제정신이 아닐 거라 생각은 했지만, 이 정도로 정신이 나간 상태일 줄은 몰랐다.

“하아아… 허탕인 것 같은….”

─꾸지지직

단단한 게 찌그러지고 뒤틀리는 소리였다. 아니,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고 그렇게 생각을 했을 뿐이지 살아생전 들어본 적 없는 괴상한 소리였다.

분명 얼굴을 창살에 찧은 채 일그러트리던 놈은 몸을 세로로 납작하게 압축하더니 창살 밖을 빠져나왔다. 경악을 금치 못한 나는 숨소리를 내는 것도 버거울 정도의 충격을 경험하였다.

─철퍽

놈의 납작해진 몸뚱이는 창살 밖을 완전히 빠져나오고 나서 바닥으로 엎어지더니 금세 몸이 부풀어 원래의 상태로 돌아왔다.

바닥에서 꿈틀대던 놈은 두 팔과 다리를 빠르게 교차하며 지하 감옥 출구 쪽으로 움직였다. 인간의 몸으로 사족보행 자체가 말이 안 되지만 그 속도는 결코 인간의 움직임이라고 할 수 없었다.

잇단 충격적 장면에 턱이 덜덜 떨렸다. 준비도 안 된 상태에서 쉴 새 없이 놀라게 하는 공포영화를 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놈이 점점 멀어지고 나서야 꽉 막혔던 말문이 터졌다.

“이… 미친! 내가 뭘, 뭘 본 거야?”

속으로는 더한 욕지거리를 하고 있었다.

마치 게임 속 폴리곤이 납작하게 접힌 버그를 본 것 같았다. 그래픽이라는 자각이 있는 3D 모델링과 다르게 극사실적인 인간의 모습으로 봤다는 점이 미칠 것 같지만 말이다.

나는 얼떨떨한 감상이 채 가지도 않았는데 리헤로스는 재빨리 놈이 사라진 쪽으로 달려 나갔다.

“내가 쫓아갈게!”

“리, 리헤로스! 같이 가! 테네브는 여기 있어!”

“아니, 나도 간다.”

황급히 오르는 계단은 왜 이리 높고 끝나지 않는 것 같은지 답답하기만 했다. 그래도 끝이 보이기 시작하니 누군가의 비명이 들려왔다.

“지하 감옥을 지키던 병사겠지? 하, 씨…! 제기랄!”

“후우, 일이 마음처럼 안 돼.”

무얼 좀 하겠다 싶으면 벌어지는 변수 때문에 돌아가실 지경이었다. 계단의 끝에선 세 칸을 훌쩍 뛰어넘어 올라왔고, 벌벌 떨고 있는 병사가 가장 먼저 보였다.

“이봐, 놈은 어디로 도망쳤어!”

“저, 저저… 저기!”

병사의 떨리는 손가락 끝엔 멀거니 서 있는 ‘이름 모를 부활자’의 뒷모습이 보였다. 누가 먼저 할 것 없이 우리는 일제히 무기를 뽑아 들었고, 녀석은 천천히 우리 쪽으로 돌아보았다.

“으…….”

“멈춰라! 지금이라도 투항하면 목숨만은 살려주마.”

“나, 안…….”

“뭐?”

“나가야 해….”

“무슨 소리야?”

“나, 그으윽… 으…. 나가… 으으윽… 으극… 으….”

놈의 머리통 정수리 부근이 쩍 갈라지기 시작하더니, 점차 양옆으로 벌어져 피부가 껍데기처럼 벗겨져 내렸다.

그 속엔 거대한 핏덩이가 우뚝 서 있어 처음에는 피부 속의 근육이 모두 드러난 줄 알았다.

“말도 안 돼.”

붉은 피가 흘러내리면서 그 아래의 얼굴이 드러나자 테네브는 비통함, 분노, 당혹감이 서린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아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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