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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왕님 망겜에도 엔딩이 있나요-101화 (101/127)

101화

─지익, 지이이익

직접 땅을 딛고 걸을 수 있을 만한 상태가 아니었다. 기사 둘에게 매달려 가다시피 끌려가고 있다. 지나온 길은 아킬라의 피인 지, 내 피인 지 모를 것으로 바닥을 물들였다.

무슨 상황이 닥쳐와도 어떤 것이든 쳐부수고 리헤로스를 지켜낼 줄 알았건만, 나의 존재가 그에게 도움이 되지 않다는 선고를 받은 건 상상했던 것보다 더욱 충격이 가시지 않았다. 그것에 더해 칼리고가 나를 짐승처럼 찔러대며 실험하는 행위를 그대로 리헤로스에게 행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을 할 수밖에 없었다.

‘끊임없이 진실을 파헤친 결과가 이거야?’

어쩌면 진상을 들쑤시지 않고 쥐 죽은 듯이 살았어야 했나 싶었다. 제아무리 칼리고가 정형적인 ‘선’과 거리가 멀더라도 실질적인 ‘악‘은 마족인 나라는 사실을 망각한 결과일까. 내 선택이 모든 것을 망친 것 같아 숨이 막혀왔다. 목울대가 뜨거워질 정도로 울컥했지만, 역시나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무엇 하나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이 없었다.

‘미칠 것 같아…. 아니, 미치고 싶어.’

차라리 시원하게 미쳐버리고 싶음에도 정신은 맑다 못해 또렷했다. 원래 악인의 최후가 이리도 끈질기고 지겹던가.

모르겠다. 지금은 그저 어딘가에 등을 기대어 쉬고 싶었다.

“풀어줘!”

끝이 안 보일 정도로 긴 지하 감옥에는 억울함을 토해내는 죄수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들은 창살 밖으로 손을 뻗어 무엇이라도 잡으려 애썼고, 기사들은 동요하지 않고 무심히 지나쳤다. 지하 감옥은 겉으로 보았던 것과 달리 아래로 끊임없이 내려가도 끝이 없었다. 흡사 같은 자리를 반복하며 걷는 버그에 걸린 느낌이었다.

점점 눈앞의 전경이 변하는 아래로, 더 깊은 지하로 내려가자 설움에 찬 호소는 머리 위쪽에서 들렸다. 심해 속으로 잠수하는 것과도 같이 귀가 먹먹해질 만치 아득한 고요함이 찾아왔다. 벽에 붙어있는 횃대도 짙은 어둠을 밝히기엔 역부족인 듯 횃불이 없는 찰나의 구간은 한 치 앞조차 칠흑 같았다.

차라리 이쪽이 편안했다. 많은 피를 흘린 탓인지 눈앞이 어지러웠는데, 어둠 속에서는 얼마나 흔들리고 있는지 몰랐으니까 어지러움이 조금은 가셨다.

“…여기까지 내려온 건 처음이야. 소문대로 기분 나쁜 곳이네.”

조용했던 기사들은 두려움을 떨치기 위해 떠들어대는 것 같았다.

“쫄았냐?”

“아, 아니거든?”

“쫄았네 이거.”

“…그럼 너 혼자 갔다 올래?”

“미, 미쳤냐! 단장님 명령을 거스를 셈이냐!“

“명령은 핑계잖아 인마. 무서우면서.”

“X발…! 장소가 무서운 게 아니야. 이놈이 깨면 어떡하냐고! 그럼 너도나도… 아니, 다 죽는 거야…!”

괜한 걱정이었다. 당장 회복이 되더라도 누굴 복수하거나 저항할 정도로 전의가 남아있지 않았으니까.

가까이에서 들리는 말소리도 귀에 물이 가득 찬 것처럼 들렸다. 상태가 더 안 좋아지고 있는 건지, 기압 차 때문인지 모르겠다. 청각을 제외한 살아있는 감각을 총동원해서 정신을 붙잡았다. 비강을 파고드는 곰팡내는 이리도 지독했나 싶을 정도로 퀴퀴했다. 굳이 비교하자면 마왕성과 비슷한 환경이라 할 수 있었다.

리헤로스를 통해 쾌적한 삶을 영위하고 있었지만, 잊었던 생활로 돌아온 것만 같았다. 공간뿐만 아니라 내 처지까지도 말이다.

“다 왔다.”

“콜록, 어서 묶어놓고 나가자. 여기에 더 있다가는 폐가 곰팡이로 가득 찰지도 몰라.”

“겁쟁이 새끼. 핑계는.”

“그러는 너는…!”

놈들은 나를 짐 다루듯 내던져 놓았다. 힘없이 바닥에 누워 두 사람을 반쯤 떠진 눈으로만 쫓았다. 벽을 더듬던 기사들은 사슬과 긴 관을 천장에서 끌어 내렸다. 내 왼쪽 어깨와 팔을 잡아 들어 올리자 피가 다시금 불컥 불컥 터져 나왔다. 벌어진 상처가 매우 컸고, 환부를 붙여놓지 않아 지혈되지 않았을 테니 당연했다.

“읏, 큭….”

“까, 깜짝이야.”

“추워… 어지… 러워.”

“징그러울 정도로 끈질기네….”

“소, 소름 끼쳐. 어서 나가자!”

그 말을 끝으로 기사들은 단 한마디도 나누지 않으며 나를 사슬에 매다는 데에 열중했다. 두껍고 긴 관은 왼팔에 깊게 꽂았는데 온갖 줄을 주렁주렁 매단 꼴이 꼭 거미줄에 매달린 벌레 같았다. 나의 행색뿐만 아니라 질겁하며 쏜살같이 사라진 기사들이 꼭 벌레를 피하려고 도망치는 것 같아서이기도 했다.

감옥 내부는 어떤 자그마한 빛조차 들어오는 것을 허용치 않았다. 바닥과 천장이 어디쯤 있는지 구분조차 어려웠다. 공기는 눅눅하고 손끝은 차갑고 온몸이 아프고 힘들었다. 저린 팔을 조금씩 움직여보았지만, 그럴수록 자유를 갈망하게 될 뿐이었다. 바짝 마른 입술을 물자 껍질이 투툭 일어났다.

‘말려 죽일 생각인가….’

─똑

─똑

다리 많은 벌레가 부지런히 움직이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어디에서 들리는 것인지 모를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만이 오로지 적막 속의 동반자가 되어주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어지러움을 가시게 해주는 어둠이 반가웠지만, 지독한 정적은 과거를 떠올리는 기폭제이기도 했다. 무엇이라도 눈에 보이면 그것을 매개로 다른 생각으로 돌릴 수 있는데, 아무것도 보이지 않으니 바로 직전의 사건이 기다렸다는 듯 떠올랐다.

‘후회해도 늦었어.’

머리로는 이미 알고 있다. 알고 있는데도 울컥울컥 치밀어 오르는 후회를 멈출 수가 없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두 사람이 집에 남으라고 했음에도 고집부려 동행한 것? 마왕임을 밝히고 리헤로스와의 결전에서 살아남은 것? 주제넘게 용사를 돕기 시작한 것?

이곳 인생 절반, 아니 그 이상이 후회의 연속이었다. 현실에서 망해버린 삶을 이곳에서라도 성공시키고자 했던 오만이었을까. 더 나은 인생을 살지 못하는지에 대한 한심한 자책이 이어졌다.

“젠장… 젠장…!”

차라리 소리라도 지르면 속이 시원해질까 욕지거리를 뱉어봤지만, 강철같던 몸도 그럴 여력이 남지 않은 모양이었다. 노인같이 쉬어버린 쇳소리만 가까스로 나왔다.

눈을 질끈 감았다. 어차피 보이지 않는 시야를 차단할 목적이 아니었다. 지금 내 의지로 할 수 있는 유일한 행동이었을 뿐이니까.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아까와는 확연히 달리 덜어진 피로감에 눈을 떠보았다. 익숙한 하얀 공간이 펼쳐져 있었다. 눈을 감고 있으려고 했을 뿐인데 어느새 잠든 모양이었다.

‘이 와중에도 잠이 오냐.’

어이없는 건 둘째치고, 이 공간에 오면 항상 맞이해주는 녀석이 있다는 것을 떠올렸다. 녀석을 찾기 위해 주위를 살폈고, 완전히 몸을 돌리자 입꼬리를 올려 웃고 있는 ‘아크리스’가 있었다.

“자주 보네?”

“그래. 이젠 지겹다.”

“그러지 마. 어차피 한배에 탄 처지인데 잘 지내면 좋잖아.”

“…이곳은 네가 원하면 날 끌고 올 수 있는 거야?”

“뭐… 대충 그렇다고 해둘게.”

“대충이라니…!”

피로함은 적었지만 뻐근한 어깻죽지, 당장이라도 끊어져 버릴 듯한 왼팔의 고통은 온전히 느껴졌다. ‘아크리스’는 팔을 부여잡고 고통스러워하는 나를 유심히 바라보더니 훌쩍 다가왔다.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몰라 손을 휘저으려 했는데, 손가락 끝에 추를 수백 개라도 단것처럼 묵직해서 그럴 수 없었다.

“저리 가…!”

‘아크리스’는 공격할 거라는 예상과 달리 내 왼팔을 조심스레 어루만지고 있었다.

“이런… 많이 아프겠는데.”

“…….”

“홀로 감당하기 힘든 사건이었겠구나. 많이 힘들었지?”

“뭐야…? 갑자기….”

“말했잖아. 난 네 생각을 읽을 수 있어. 요 며칠간 지켜보고 있었는데 네 마음대로 되지 않아서 좌절하는 모습이 안타깝더라고.”

“…….”

“알잖아. 나도 같은 것을 경험했다는걸.”

나를 위로하기 위해 찾아온 걸까. 아크리스 답지 않은 생각지도 못한 행동에 놀라 미간에 들어간 힘이 완전히 풀렸다. 안타깝다는 듯이 구부린 눈썹은 나를 진정으로 걱정하는 것 같았다. 그의 반응은 생경하다 못해 나를 온전히 이해하는 고향 친구를 찾아온 듯한 마음이 들게 했다.

“그래서 묻고 싶은 게 있는데, 이번 사건을 통해 깨달은 게 있어?”

“뭐를?”

“분명 너는 나와 다르다고 호언장담했었지. 그런데 결국 결과는 똑같아. 이 몸은 고난을 수없이 겪을 수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났어. 어쩌면 이것은 영원히 끝나지 않을 저주인지도 모르지.”

“…….”

“그러니 말을 해봐.”

“무슨… 말을?”

“이제 어떻게 하고 싶은지. 네가 이 상황에 닥치면서 느낀 바를 이야기해달라고.”

아마 내게서 나올 대답이란 건 단 한 가지일 것이다. ‘아크리스’가 그토록 종용했던 ‘죽음’.

“내가 죽음을 선택한다면 어떻게 되는데? 이미 처형 일이 정해졌어. 그러니 죽는 것은… 매한가지 아니야?”

“조금 다르지. 그 악랄한 놈들이 시체를 가지고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나한테 말만 하면 당장이라도 숨을 거둘 수 있어.”

“뭐…? 그게 가능하단 말이야?”

“큭큭, 그래. 어떠한 고통도 없이 잠들듯이 죽는 거야.”

쉴 새 없이 고문당하고 짐승만도 못한 취급을 받으며 목숨을 연명할 바엔 ‘아크리스’가 말하는 죽음을 선택하는 게 안식으로 향하는 빠른 길일 것이다.

‘하지만… 그게 맞나? 그것뿐일까?’

죽음은 가장 편리한 최후 수단이다. 어떠한 책임을 지지 않고서도 회피할 수 있지 않은가. 그 뜻은, 내가 저지른 일을 홀로 남겨질 리헤로스에게 떠넘기고 사라지는 것이란 말이기도 했다.

‘내가 끝맺어야 해…. 안 그러면 이 세계에 살아갈 리헤로스가….’

찰나의 생각을 읽은 모양인지 ‘아크리스’는 걱정스러운 낯빛을 지우고 표정을 굳혔다.

“네 꼴을 봐.”

“…….”

“네가 지금 누굴 걱정할 때야?”

“걱정할 수밖에 없어…. 나 때문에 리헤로스가 피해를 보면 안 되잖아.”

“느긋한 소리 하고 앉았네. 네가 아킬라를 맨손으로 찢어 죽이는 걸 직접 봤다면, 그도 너를 경멸하게 될걸? 아니, 살려둔 걸 후회하겠지!”

“…….”

“마족의 실체를 보고 난 이후에도 우호적인 사람? 절대로 존재하지 않아.”

“아니야. 나는….”

“너는 안 그렇다고? 네가 그랬어도 리헤로스는 아닐 거라고? 또 그 헛소리야! 결국 너도 나랑 같다는 걸 직접 경험했는데! 원래 마왕은 원한다면 맨손으로도 찢어 죽일 수 있는 강한 힘을 가지고 있어. 너는 고작 사람 행세해 보겠다고 쓰지 않았었지만 말이야.”

“…….”

“그 모습을 처음부터 보여줬어 봐. 누가 너를 그저 곱상하고 곁에 두고 싶은 마족이라 생각하겠어? 당장이라도 산 채로 배를 갈라 심장을 꺼내 바치려 들겠지.”

“…….”

“인간은 원래 그래. 손바닥 뒤집듯이 쉽게 태세를 변환하거든. 너… 모르지 않잖아?”

그 말에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전 남자친구였다. 그런 성향을 지닌 사람은 분명 존재했다. 하지만 리헤로스는… 그러지 않을 거라 믿고 있었다.

그가 보여준 행동들─

“아….”

─로만 믿어도 괜찮은 걸까.

굳건했던 믿음에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전 남자친구도 처음부터 모진 사람은 아니었다. 그렇기에 갑작스레 이별을 고했을 때 충격을 받았었다.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믿었다. 하지만 ‘그런 사람’이라는 게 따로 정해져 있지 않다는 걸 깨달았었다.

“강한 힘을 가지고 있단 것을 모를 때야 이용하기 편리하지. 자신보다 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 그러면 기저에 두려움이 생겨. 인간도 동물이거든, 강자는 언제든 나를 휘두를 수 있는 권력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니까.”

“…….”

“그러니 리헤로스에게 죄책감을 가질 필요 없어. 인간은 눈 깜짝할 새 변해버리는 계절 같은 동물이니까.”

아크리스는 내게 손을 뻗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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