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기사들이 사라지고 나서야 움직였다. 튀지 않도록 행동을 최소한으로 하며 걸었다.
광장에 모여 소란을 부리던 사람들도 흩어졌는지 보이지 않았다.
‘마을 주민 모두 집으로 돌려보내 버렸나.’
그렇다면 더욱 서둘러야 했다. 텅 빈 마을에 정처 없이 돌아다니고 있을 자라곤 거처 없는 나뿐일 테니까.
“그쪽에 있어?”
모퉁이 바로 옆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미친…. 식겁했네!’
조심스레 발을 원위치에 내려놓았고 벽에 바짝 붙어 건물 그늘 아래에 숨었다. 밝은 머리카락이 눈에 띌까 봐 목 부분을 잡아당겨 후드를 푹 눌러썼다.
“아아, 부스럭대는 소리가 들리길래 가보니 웬 떠돌이 개새끼뿐이야.”
“젠장… 대체 어디로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간 거야? 경보가 울린 지 얼마 지나지 않은 것 같은데.”
“걱정하지 마. 아직 마을을 벗어나진 못했을 테니까 찾을 수 있어.”
“그래야 할 텐데… 그 집에 들어간 건 분명 그 마족 놈일 게 뻔하니까.”
나와 모퉁이 사이를 두고 대화하던 기사들은 그 대화를 마지막으로 자리를 떴다. 침입자가 나라고 확신하는 모양새를 보아하니 나를 저격해서 결계를 설치한듯했다.
‘젠장… 초조하게 만드네. 쿨타임은 돌아왔을까?’
상태 창을 열어 포탈의 쿨타임 상태를 확인했다.
[시스템]
공간 이동 | 쿨타임: 66초 남음
분명 쫓기고 있는 동안 2분은 충분히 지났으리라 생각했건만, 아직 1분이나 남았다. 이놈의 시간은 더 필요할 땐 순식간에 사라져버리고 빨리 흘렀으면 할 땐 일분일초가 영겁 같았다. 그런고로 원래의 계획대로 교회당 내부에 잠깐이라도 몸을 숨기기로 했다.
고지는 멀지 않았다. 분주하게 움직이는 기사들이 멀어진 틈을 타 교회당의 살짝 열린 문 안으로 비집고 들어갔다. 은촛대를 훔치러 들어온 도둑처럼 발뒤꿈치를 들고 온몸의 신경을 날카롭게 곤두세웠지만, 이곳 또한 바깥 상황과 다를 것 없이 매우 조용했다. 어떠한 행사를 하고 있지도 않으며, 기도하는 사람이라거나 고해를 하러 온 사람도 전혀 없었다.
‘통행금지령이 내렸으면 당연한 건가.’
아마 기도하고 있던 사람들은 모두 돌려보내졌을 것이고 사제들은 사람이 없는 곳에 머무를 필요가 없을 테니 각자 할 일을 하러 갔을 것이다. 이곳으로 피신 온 것은 탁월한 선택이었다. 쿨타임이 끝날 때까지만 눈에 띄지 않고 쥐 죽은 듯이 버티기만 하면 됐다. 오래 걸리지 않을 테니 마침내 여유가 생겼다.
‘그러고 보니 세르뷔에에서 살게 된 지 꽤 되었는데도 교회당엔 와본 적이 없네.’
당연히 마족이 교회당에 간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니 갈 생각조차 해보지도 않았지만, 애초에 궁금증이 생길 만큼 눈에 띄는 장소가 아니었다.
알리엔토 대륙은 다신교로 여러 가지 종류의 신이 있다. 그중에서도 크레아누스가 주신인 대표 격으로 여겨진다. 그러므로 크레아누스의 석상을 만들어 건물 앞에 세워두는 게 일반적이었는데, 어느 곳에서는 본인들이 추구하는 성향에 따라 다른 신의 석상을 올리기도 하는 것 같았다.
‘현실에선 다신교를 접할 일이 없으니 낯설어.’
늘어서 있는 의자들을 따라 스테인드글라스가 반짝이는 홀을 걸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교회당에 들어온 것은 처음이 아니었다. 리헤로스의 손에 살아남아 라이오펠로 돌아왔을 때, 그가 기도하는 모습을 보았던 게 떠올랐다. 그곳에 비해 세르뷔에의 교회당은 소박한 느낌을 주었다.
따뜻한 온기가 머무르고 있는 장내는 진공 상태가 된 것처럼 고요하기만 했다. 믿고 있는 종교가 없을지언정 종교적 의미가 담긴 장소는 말로 형용 못 할 편안함이 있다. 현실에서는 차별받지 않는 공간이지 않은가. 그런 자비와 포용이 마군을 부리던 나에게도 내려질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여기에도 석상이 있네.’
단상 뒤에는 건물 앞에서 본 것보다도 큰 크레아누스의 석상이 매달려있었다. 거대한 흰 표면에는 스테인드글라스의 오색이 반사되고 있었고, 뒤에는 금색의 광휘를 표현한 듯 꾸며져 있었다. 비록 형체가 존재하지 않는 신임에도 그를 향한 신앙심이나 애정이 돋보이는 조각상이라 할 수 있었다. 그 장엄한 모습에 홀린 듯이 앞으로 걸어갔다.
“…정말 리헤로스에게 답을 주고 있습니까?”
그가 기도하러 갔을 때, 꼭 그런 것 같았다. 혼자만의 상상이라기보다 늘 신에게서 답을 들어온 사람 같았으니까. 나를 죽이지 않고 라이오펠로 돌아왔던 당시엔 어떤 이야기를 들었을까 궁금했다. 정말 내가 이 세계에서 살아갈 수 있는 자라고 대답해 준 것일까. 수많은 악행을 뒤늦게 회개할 수 있는 것일까.
“나는… 용서받을 수 있는 자입니까?”
눈을 감고 있는 신의 형상에게 물었다. 석상이 답을 줄 수 있는 것도 아닌데 나의 물음은 끝나지 않았다.
“그게 아니라면…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나에게도 답을 주면 안 되겠습니까?”
그저 하소연이었다. 모든 일이 마음처럼 풀리지 않아 누구라도 탓을 하고 싶었으니까. 리헤로스에게도 답을 주는 존재라면 나에게도 줄 수 있는 게 아닌가. 그래서 애꿎은 석상에 대고 중얼거린 것뿐이었다.
드르륵─
그때, 갑자기 석상의 발아래쪽이 열리더니 눈앞에 금빛의 상태 창이 떠올랐다.
─띠링
“깜… 짝아…!”
─띠링
[시스템]
hint 1?
장미의 이름
뜬금없이장미의이름을묻고있는것인가. 게임 속 미니게임인가, 퀴즈인가? 추측이 난무했지만, 결국 식물이라면 세계에서 제일가는 문외한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나에게 물어봤자 답을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래서 시큰둥한 상태로 상태 창만 노려보고 있던 와중에 날카로운 깨달음이 파파팍 치고 들어왔다.
‘설마… 리헤로스가 정원에심었던그장미말인가?'
내가 아는 장미라곤 그뿐이었으니 리헤로스와의 대화를 되짚어보았다. 그리 오래되지 않아 금세 떠올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젠장, 결국은 못 들었던 것 같은데.’
그가 장미에 관해 이야기해 주려는 찰나에 내가 들은 체 만 체 했던 기억뿐이었다. 이것만은 분명했다. 평소에 리헤로스의 말을 무시하지 말고 귀담아들었어야 했는데, 수많은 후회 위에 새로운 후회를 겹쳐 올렸다.
“크림… 로즈?”
─삐익
[시스템]
패스워드가틀렸습니다.
다시입력해 주세요.
당연했다. 듣지를 못했으니 기억을 되짚고 자시고 할 게 없었다. 모처럼 발견한 비밀 시스템인데 내 안일한 행동으로 인해 날려버리게 된 것이 한스러울 따름이었다.
‘잠깐, 힌트 뒤에 1이라고 적혀있는 거 맞지?’
1이라고 적혀있다면, 2도 3도 있을 가능성이 있지 않은가?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으로 상태 창 위에 손가락을 대고 옆으로 넘기는 제스처를 취했다.
─띠링
[시스템]
hint 2?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것
너무 추상적이었다. 변하지 않는 것이라면 많지 않은가. 모든 무생물에 통용되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혹시… 첫 번째 힌트가 장미였으니까 식물과 연관된 것 아닐까.’
화초에 관심이 많은 리헤로스였으니 모든 시스템 힌트가 그쪽과 연결 지었을 것이라 확신했다. 그 덕분일까 두 번째 힌트에 대한 답은 곧바로 떠올랐다.
“침엽수.”
리헤로스가 다른 것을 심고 싶냐고 물었을 때, 나는 침엽수라 답했었다. 그 이유가 ‘변하지 않는다는 점이 좋아서.’라고 분명히 말했었고, 그걸 의미 있게 생각했다면 답으로 빌렸겠지.
─삐익
아까와 같은 비프음이 들렸다.
“젠장…….”
제발 나의 자의식 과잉이 아니길 바랐다. 그래서 애써 그가 데리고 왔던 침엽수의 이름을 떠올렸다. 이것마저 아니라면 다음 힌트를 확인하는 건 둘째치고 창피해서 이 홀 전체를 왕복하며 구르고 싶어질 테니까.
‘그런데… 이름이 뭐였더라?’
제 머리를 퍽퍽 내려치고, 머리카락을 죽죽 잡아당기면서 둔해진 뇌세포를 깨웠다. 그 침엽수의 이름은 장미와 달리 분명 들은 기억이 있었다. 매우 짧고 직관적인 이름이라고 생각했었다.
‘분명히… 그렇게 생각한 이유가 있는데, 그게 뭐였지.’
왜 그렇게 생각을 했을지 차근차근 연상해야 했다. 그것은 일반적인 침엽수와 너무나도 달랐다. 푸르고 날카로운 잎사귀는 눈이 내려앉은 것처럼 하얬다는 것이 특징이었다.
“스노우… 화이트?”
─삐익
[시스템]
패스워드가틀렸습니다.
다시입력해 주세요.
분명 비슷했는데, 기억이 날 듯 말 듯 했다. 침엽수 특유의 파랗고 하얀 것을 동시에 연상시켜 뼈가 시릴 정도로 차가운 겨울이 연상되는 이름이었던 것으로 기억했다.
“그렇지. 스노우가 아니라 얼음, 아이스였어. 아이스. 그러니까… 그린 아이스?”
─삐익
“그린이 아니었나? 그렇다면… 블루… 아이스.”
─띠딩
[시스템]
연결에 성공하였습니다.
“맞췄다!”
나도 모르게 환희에 찬 탄성을 내질렀다. 이 난리를 피우고 있는데도 기사단이 오지 않아 안도했고, 무엇보다 맞추어서 다행이었다. 아마 이 수상한 장치를 열람해 보지 못하고 나갔으면 신경이 쓰여 잠 못 이루고 들락날락하다가 글라디우스 놈들에게 발각될 게 뻔했으니 말이다.
‘게임 시스템을 발견한 건 너무 오랜만이라 그런가? 설레네.’
이곳은 게임 세계라는 것을 망각하게 할 만큼 현실적인 공간이었다. 시스템으로 잠겨져 있는 건 꽤 중요한 정보일 테니 서둘러 리스트를 살펴보았다.
아홉 개의 데이터가 있었고, 가장 과거에 기록되었을 리스트의 가장 아래의 데이터를 손가락으로 터치했다.
[시스템]
첫 번째 기록입니다.
「크리스.」
나를 부르는 아주 익숙하고 반가운 목소리에 본능적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기대감에 찬 나의 발소리만이 홀을 가득 채우기만 할 뿐, 아무도 없었다.
몸을 되돌리고 나서 알았다. 반가운 목소리의 주인은 그 어디도 아닌 바로 앞, 띄워진 반투명 스크린을 통해 드러났다.
“이럴 수가… 리헤로스?”
한쪽 무릎을 굽힌 채 살짝 올려다보고 있는 그의 모습. 반투명 스크린임에도 뚜렷하게 느껴지는 푸른 눈동자는 언제 마주해도 따뜻하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