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다섯 번째 데이터에선 울분이 느껴졌다. 늘 한결같이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를 유지하는 그가 분개에 가까운 격양된 목소리를 내는 경우는 몇 없었다. 칼리고와 대치할 때, 그리고…….
「크리스가 저와 싸워야만 하는 존재인 것을 믿을 수가 없습니다. 아니, 믿고 싶지 않습니다.」
그래, 나와 대치할 때였다.
「그동안 저를 속인 것일까요. 왜… 대체 왜….」
꽉 쥔 그의 주먹은 거칠게 떨렸다.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의 소용돌이에 휩싸인 것처럼. 그 심경이 어땠을지 충분히 이해됐다. 발각된 이후로 해명할 겨를도 없이 떠났었으니 황당했을 것이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의 행동은… 제가 알고 있는 ‘악’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오히려….」
「……알겠습니다. 그와 직접 만나 물어보겠습니다. 그도 저와 만나게 되는 것은 피할 수 없을 테니까요.」
「분명 크리스도… 제가 아는 크리스라면 그걸 바라고 있겠죠.」
이 영상을 보고 나선 한참을 멀거니 서 있었다.
나의 서툰 표현과 알량한 자존심이 그에게 큰 상처가 됐을 것이다. 어떤 식으로든 그렇게 회피하지 않았어야 했다. 죽을 존재였으니까 대책 없는 관계의 마무리를 황급히 지었던 것 같다. 그렇기에 더욱 라이오펠로 돌아오기를 거부했었다.
[시스템]
여섯 번째 기록입니다.
「크리스는 우리의 품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는 분명 저를 해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숭고한 희생을 하려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제가 예상한 대로 말이죠.」
「그는 스스로 죄를 지었다고 생각합니다. 죄악에 대한 인지가 있습니다. 분명 그가… 마왕의 자리에 있을 때 저지른 일들은 쉬이 용서받지 못할 행동이지요.」
「어찌하면 좋을지 제게 해답을 주십시오….」
그의 눈동자는 흔들리는가 싶더니 이내 평정을 찾았다.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리헤로스는 어떠한 답을 들은 모양인지 고개를 주억대다가 일어났다. 저 멀리 문 앞에 서 있는 나를 향해 걸어가는 것으로 영상이 끝났다.
‘이때는 명확히 기억이 나.’
나와 싸우고 나서 무작정 라이오펠로 왔었고, 우리가 앞으로 어떤 길을 걸어가면 좋을지 묻기 위해 기도했었다. 대체 무슨 답을 들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의 표정에서 비장함이 묻어 나왔다. 어떤 의미로든 결심을 한 듯했다. 그의 행동은 한 치 의심이 없는 확신만이 느껴졌었으니까.
[시스템]
일곱 번째 기록입니다.
「오랜만에 왔군요.」
「그동안은 큰 탈 없이 잘 지내고 있었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걱정거리가 하나 생겼습니다.」
지금까지 칼리고에 대한 언급이 없었다. 분명 이번에야말로 칼리고에 대한 걱정과 대처법을 물으러 온 것이리라.
「이번엔…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이번엔’이라고 하면 앞서 했던 고민과 연관이 있는 걸까. 혹여 나와 함께 살게 된 이후로 신념의 흔들림이 있던 걸까. 급격히 걱정스러운 마음이 커졌었다.
「크리스를 흠모하는 사람이 생긴 것 같습니다.」
「이럴 줄은 알았습니다만… 실체를 보고 나니 조급해집니다.」
“…맙소사.”
또, 또다시 예상 범주 밖의 이야기가 나와 뒤로 넘어갈 뻔했다. 실제로는 테네브 단 한 사람만이 나에게 호의를 표현한 것뿐인데 마치 세계 제일의 옴므파탈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게 만든다.
‘진짜 도대체 왜?’
웃음을 도저히 참을 수 없는 나와 상반되게 리헤로스는 사뭇 진지했다.
「그를 위해 살아가고 최선을 다하고 있었습니다. 크리스에게 그 마음을 온전히 되돌려 받고자 생각한 것은 아니지만….」
「왠지 모르게 분합니다.」
「다른 시련은 고민할 거리도 아닙니다. 해결할 수 있는 것들이니까요. 하지만… 좋아하는 마음이란 건 왜 이렇게 어려운 걸까요.」
‘리헤로스는 초창기에 갈피 잡기 어려웠던 것 외에는 시나리오 진행에 큰 어려움을 느끼지 않았었구나.’
하긴 길을 찾는 거라던가 게임 시스템에 대해 무지했던 것을 제외한 공략 요소는 금세 간파해냈었으니 말이다. 세계의 종말이라도 닥친 것인 양 심각한 모습의 그를 묵묵히 지켜보았다.
「더는… 친구라는 이름 뒤에 숨어 지내기 싫습니다.」
「크리스를 그 이상으로 좋아하게 되어버렸으니까요.」
「때를 놓치면 분명 죽을 때까지 후회할 테니, 후회할 일을 만들지 않을 것입니다.」
확신에 찬 문장이었다. 혹시 이 이후로 나에게 고백한 걸까. 분명 몇 번 분위기를 잡는 경우를 본 적이 있었다. 그때마다 겁쟁이인 나는 도망치려고 애썼었지. 이다음은 그의 고백이 성공한 일대기가 기록되어 있을까 기대되었다.
‘나와의 관계에 대해 이렇게까지 고민하고 기록했다는 게 감동인데….’
주인에게 허락받지 않고 일기장을 몰래 들여다본 기분이라 죄책감이 들긴 했지만, 나를 향한 감정이 가볍지만 않았단 게 벅차오르게 했다.
애정이라는 섬세한 감정에 휘둘리지 않겠노라, 다짐했던 순간들이 한심스러웠다. 연애의 실패, 좌절로 인해 이젠 다른 사람의 마음 따윈 필요 없다고 생각했었다.
그는 자신이 가진 모든 걸 나에게 주려고 했다. 객관적으로 어떠한 사람인지 계산하지 않고 나의 가치를 높여주는 사람이었으며, 오로지 나만을 위해 가시밭길조차 한달음에 달려오는 사람이었다. 언제 이렇게 조건 없는 애정을 받아볼 수 있을까.
그런데 나는 그에게 해준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왜 이렇게… 인생은 늘 후회의 연속일까.’
리헤로스의 앞에 서면 더욱 후회가 거대해진다. 그의 그릇에 비해 나는 너무 작고 옹졸한 사람이라, 그래서 더욱이 밀어내지 않았던가. 한 겹의 부정함도 없는 무결한 남자가 나로 인해 더럽혀질까 겁났다. 그런데 그는 망설임이라곤 없었다. 그저 자기감정에 충실하기만 했다. 그런 모습이 너무나도 닮고 싶었고 어쩌면 열등감을 느꼈는지도 모르겠다.
점점 숨겨왔던 기저의 감정까지도 꺼내어 들여다보고 있었다. 리헤로스로 인해 깨닫는 것이 무척 많았다. 그를 사랑하는 마음뿐만 아니라 나의 미숙한 감정의 성장까지 느끼게 하는 사람이었다.
‘…만나면 고맙다고… 전하고 싶어.’
당장은 그럴 수 없었으니 무거워진 손을 가까스로 옮겼다.
심장이 따뜻한 물에 푹 젖은 수건으로 감싸인 듯한 기분을 지닌 채, 다음 데이터를 이어보았다.
[시스템]
여덟 번째 기록입니다.
- 알 수 없는 에러입니다.
이건 어째서 열람할 수 없는 것인가. 특정할 만한 에러의 사유가 드러나지 않아 추측할 만한 단서도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지체하지 않고 다음 데이터를 열어보았다.
[시스템]
아홉 번째 기록입니다.
여느 때와 다를 것 없이 리헤로스의 모습이 나왔다.
그런데─
‘수척한 모습….’
이전에도 꽤 지쳐 보이는 모습이 몇 번 있었지만, 그에게서 느껴지는 이만한 절망감은 처음이었다. 리헤로스는 아주 오랫동안 무릎을 꿇은 채 말을 하지 않았다.
「신이시여.」
「저는 오늘 세르뷔에를 떠납니다.」
그가 딛고 있는 바닥의 모습을 보아하니 바로 이곳 세르뷔에의 교회당이었다.
「…당신이 바라는 결말을 모르겠습니다.」
「마침내 행복해질 수 있을까 기대했는데… 이것이 당신이 주는 마지막 시련입니까?」
주먹 쥔 그의 손은 눈에 띌 정도로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나는 이제 얼굴에서 웃음기가 완전히 사라진 채 묵묵히 스크린을 주시하고만 있었다.
세르뷔에를 떠난다고 한다면, 이제 나를 완전히 포기하기로 한 것일까.
‘…그를 원망할 수도 없어. 지쳤을 테니까.’
받은 것 없이 주기만 했던 것뿐만 아니라, 리헤로스가 아닌 나를 둘러싼 사건 사고들 뿐이었기에 리헤로스는 발을 빼기만 하면 엉킨 실타래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었다.
“리헤로스… 이제 나를 떠나. 나를 잊어.”
그러길 바랐다. 붙잡지 않는 것이 할 수 있는 것 중에 최선이라고 생각했으니까.
더 이상의 후회는 하고 싶지 않았다.
「…신이시여.」
「이 시련이 마지막이라 약속하신다면 끝까지 도전하겠습니다.」
“뭐… 라고…?”
그의 답에 깜짝 놀랐다. 숨을 쉬는 것조차 완전히 잊었다.
「만일 마지막이 아니더라도… 저는 운명에 굴복하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당신이 크리스를 제게 보내주시고, 저를 이곳으로 부른 것이겠지요.」
“아아….”
멈추고 있던 호흡을 터트리듯 내뱉었고, 그와 동시에 뺨에 뜨거운 줄기가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눈앞이 삽시간에 흐려져 손등으로 닦아내었는데 축축한 액체가 묻어나왔다.
그렇게 소리 내 울고 싶을 땐 나오지 않던 눈물이었다.
눈물은 멈출 새도 없이 하염없이 흘렀고, 눈시울이고 코끝이고 뜨거워지지 않은 곳이 없었다.
“어째서… 왜…. 대체 왜….”
목소리는 주체할 수 없이 흔들리고 있었지만, 이깟 것은 이제 신경 쓰이지도 않았다.
어째서 나를 포기하지 않는 것일까. 저의 행복을 찾으러 떠나지 않는 것일까. 너는 왜 나를 위해서만 살아가는 것처럼 구는 건지 그를 붙잡고 집요하게 묻고 싶었다.
「내일, 크리스를 구출하기 위해 기사단으로 갈 것입니다.」
「우선 이드랑제 백작을 설득하는 것이 숙제이겠지만… 그녀도 제 계획을 들으면 수긍해 줄 것이라 믿습니다.」
「칼리고와 최종 결판을 내는 날이 되겠군요. 하지만 두렵지 않습니다.」
「그가 가진 어둠을 제가 가진 진실로 간파할 수 있을 테니까요.」
「크리스는 그 누구보다도 알리엔토 대륙을 아끼는 사람입니다. 제가 봐온 그는 그랬었으니까… 저는 믿습니다.」
양손에 얼굴을 파묻고 서럽게 울어댔다.
「크리스.」
화면 안에서 부르는 목소리에 깜짝 놀라 고갤 들어 올렸다. 처음 이 데이터를 열었을 때와 같이 리헤로스가 나에게 말을 거는 것만 같은 착각을 일으켰다.
「고독이 익숙해지지 않도록 제가 곁에 있어 줄 겁니다.」
「그 누구보다 크리스를 사랑하니까.」
“이… 바보가…….”
얼마나 울었을까 가까스로 멈춘 눈물을 모두 닦아내고 나니 양 소매는 푹 젖어있었다.
생각해보면 이것은 최소 어제의 기록이었다. 그렇다는 건 이미 출발했을 거고 칼리고와 대치 중일지도 모른다.
“하아아아….”
분명 리헤로스는 이 투쟁을 내가 죽기 전까지 계속할 것이다.
아득바득 살아남는 것이 정말 리헤로스를 위한 일일까. 이미 이 세계에서 인정받지 못할 존재가 되었다. 풀어낼 수 없는 편견과 존재를 변호하는 일을 죽을 때까지 해야 한다는 건 못 할 짓이다.
“리헤로스….”
리헤로스는 누구보다 치열하게 살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난 잠깐이었지만 그의 마음을 의심했고, 비겁하게 숨어있기만 하지 않은가.
이젠 정말 결단을 내려야 할 때였다.
평생 쫓기며 사느냐, 리헤로스의 명예를 지키고 사라지느냐.
‘고민하는 게 무색할 정도야….’
사실 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이행하기 전에 하고 싶은 일이 있었다. 데이터 리스트 최상단에 눈에 띄는 버튼이 있었다. ‘신탁’과 ‘기록’. 신탁 버튼은 비활성화되어 있었고 기록 버튼은 나에게 주목해달라는 듯 깜빡이고 있었다. 망설임 없이 터치하였고 창 위에 새로운 알림창이 덧씌워졌다.
[시스템]
기록하시겠습니까?
[YES] [NO]
‘yes’ 버튼 위로 손가락을 올리자 기록 중이라는 텍스트가 떠올랐다. 혹시 내가 울었던 사실을 알게 될까 봐 목을 가다듬었고, 입술만 달싹이다가 첫 옹알이를 시작한 아이처럼 느리게 한 자 한 자 소리내기 시작했다.
“이걸… 네가 언젠가 볼 테니까… 남기는 건데.”
시큰거리는 눈두덩이를 문지르다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고마워. 네가 그 오랜 시간 나를 생각해 준 것처럼 나도 너를… 그동안 많이 생각했어.”
그의 다정한 말투, 나긋한 목소리, 품의 따뜻한 온기까지 지나온 시간을 떠올리자 바로 조금 전의 경험처럼 생생하기만 했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도 모르고 맹목적으로 믿어준 걸 바보 같다고 한 소리 했었는데, 내가 더 바보 같았지.”
“리헤로스… 좋아해. 네게 모두 표현하지 못했던 게 후회스러울 정도로.”
솔직한 마음을 토해내다 보니 목에 무언가 걸린 것처럼 울컥 차올랐다. 마지막 인사를 눈물로 보내기 싫었기에 마른침을 삼키며 참아냈다.
“네가 좋은 말을 해주었던 것처럼 말을 잘 꾸며보고 싶은데 이 말을 대체할 단어는 없는 것 같아. 좋아해, 사랑해. 너에게 있어 나도 그런 존재였길… 바라.”
[시스템]
기록이 종료되었습니다.
모든 시스템 창이 사그라지고 정적만이 감돌았다. 석상을 바라보며 모든 생각을 덜어냈다. 이제 더는 후회는 없을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할 것이다.
허공에 원을 그려 아무런 온도도 느껴지지 않는 검푸른 불꽃이 일렁이는 포탈을 펼쳤다.
내가 가야 하는 곳은 단 한 곳뿐이었다.
“글라디우스 기사단 훈련장 앞으로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