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화
“리헤…로스.”
언제부터 이러고 있던 걸까. 무게가 실린 손은 점점 혈액순환이 되지 않았다. 그런데도 매몰차게 빼낼 수 없어 조심스레 상체를 일으켰다. 우선 자유로운 반대쪽 팔을 살펴보니 이전에 있던 불쾌한 작열감도 없었고, 까맣게 변했던 팔도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온 상태였다. 가장 멀쩡했을 때보다도 훨씬 몸이 가벼웠다. 기묘할 정도로 붕 뜬 기분이라 하는 것이 맞았다.
‘임시로 몸을 이어 붙인 거랬지. 어쨌든 조심하자.’
죽을 둥 말 둥 한 사람이 엔도르핀이 폭발적으로 분비되어 고통도 감각도 못 느낀다지 않던가. 그런 예중 하나일 수도 있단 생각에 뒷덜미가 일순간 서늘했었다. 공포를 잊기 위해 내 최고의 안정제를 내려다보았다. 새근새근 잠들어있는 그의 얼굴은 교회당에서 본 영상과 달리 삶의 무게가 많이 덜어진 듯한 가벼움이 있었다.
‘고생 많았어….’
그가 깨어 있었다면 가장 먼저 해주고 싶은 말이었다. 아무것도 모른 채 덩그러니 떨어진 오지에서 오로지 믿을 것이라곤 나뿐이었었다. 고약했던 나의 성격을 받아주고, 믿어 주고, 제 마음 한구석까지도 내어주었다는 게 고마웠다.
고마운 것은 그뿐만 아니었다. 그를 통해 깨달은 게 많았다. 선의를 베풀면 등 뒤에서 칼을 찌르는 게 인간이라 믿어왔던 비관적인 나에게 인류애가 무엇인지, 착한 게 나쁜 것만은 아니란 걸 알려주지 않았던가. 그 때문에 처절하고 추악했던 삶이 아름다워졌고, 인류에 대한 희망을 얻었다.
‘분명 현실도 이와 다르지 않겠지. 내가 보지 못한… 아니, 보지 않으려고 했던 면인 거야.’
그래서 더더욱 현실로 돌아가서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새로운 삶을 살고자 하는 애틋한 마음이 피어오르지 않았나 싶었다.
"난 가야 해."
그러니 너는 행복해야 해.
그 말은 섣불리 나오지 않았다. 그를 정말 좋아하기에 행복을 빌어줄 수 있으리라 생각했건만, 머리와 가슴은 어쩜 이리도 다른 결론을 도출하는지 모르겠다. 그가 나에게만 웃어주었으면 하고, 나로 인해 행복한 모습을 보고 싶었고, 내가 있어야만 한다고 생각하길 바랐다. 드라마에서나 나올법한 아름다운 이별은 전부 거짓이다. 이렇게 탐욕스럽게 이기를 주장하게 될 줄 꿈에도 몰랐다.
그를 두고 떠나기 싫었다. 그러지 못하는 게 애석할 따름이었다.
“크리스… 가지 마….”
내가 뱉은 말을 꿈으로 착각하고 있는 걸까, 그가 입술을 자그맣게 우물대며 잠꼬대를 했다. 귀엽다든지 안타깝다든지 무어라 감상을 남길 새도 없이 시스템 알림이 눈앞에 떠올랐다.
[시스템] 접속 가능 시간: 2일 23시간 45분
'나도 알아. 알고 있다고.'
마치 나에게 ‘안 돼. 흔들리지 마.’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돌아가고 싶다고 발악을 할 땐 들은 척도 안 하더니 인제 와서 선심 쓰듯 보내주겠다고 하니 얄미웠다. 역시 관리자를 만났을 때 한바탕 싸웠어야 했나 싶었다. 그래 봐야 이 세계를 쥐락펴락하는 녀석이니 내 솜방망이 주먹 하나 정돈 가볍게 막아냈겠지. 착잡한 마음을 여러 번 짓씹으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바람이 불자 정원의 나무들이 스스스 소리를 내며 가지를 움직였다. 그 때문에 창밖에서 들어온 따가운 볕이 깜빡, 깜빡 그의 눈꺼풀 위를 지나갔다. 금방이라도 깰 것처럼 속눈썹이 떨렸다. 그래서 깨지 않도록 손바닥으로 그늘을 만들어주었다. 더는 미동 없이 잠꼬대하지 않게 된 그를 묵묵히 내려다보았다.
‘분명 지겹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이렇게 소중해질 수 있나.’
그늘이 되어주던 손을 내려 부드러운 금빛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이리도 진짜 같은데 한낱 데이터일 뿐이라는 게 믿을 수가 없었다. 손끝에 귓바퀴가 걸려 자연스럽게 타고 내려왔다. 귓불을 만지작거리다가 뺨을 감쌌다.
“너는 나 없이 행복할 수 있어? …아니었으면 좋겠어.”
그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고 싶어 허리를 기울였다. 긴 속눈썹, 가지런한 이목구비는 전투로 인해 상처투성이여도 매혹적이었다. 맨정신일 땐 하지 못한 애정 표현을 잠들어있을 때, 도둑질하듯이 남기고 싶었다. 리헤로스를 위해서가 아닌, 오로지 나의 만족감을 위해서.
─쿵!
“아크리스니임!!”
내 경범죄를 허락하지 않는 우렁찬 부름이었다. 요란스레 날갯짓하며 방 안으로 들어오는 녀석은 너무나도 반가웠으나, 직전의 행위를 급히 숨겨야 했기에 목소리는 아주 수상쩍을 정도로 떨렸다.
“페, 페로?”
페로는 눈물 콧물 때문에 풍성하던 털이 축축이 젖어 숨이 잔뜩 죽어있었다. 내 목덜미에 힘껏 부딪혀 와락 엉기니 리헤로스 쪽으로 쓰러질 뻔했다. 가까스로 중심을 잡고 나서 남는 손으로 녀석의 동그란 뒤통수를 쓰다듬어주었다.
“흐아아! 잘못되신 줄 알았어요!”
“난 안 죽어. 걱정하지 마. 그보다도… 너는 여태 어디 있었던 거야?”
“리헤로스 님이 크흡, 잘 숨어있으라고 해서…. 흐앵! 그렇지만 너무 무서웠어요. 막 분홍색 인간들이 많이! 이렇게! 저를 둘러싸고…! 계속 먹이고! 쓰다듬고!”
“누구보다도 아주 잘 지냈구먼….”
“히이잉!”
페로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는지 꿍얼꿍얼 옹알이하는데 무슨 말인지 도통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기뻤다. 리헤로스가 나를 지키고 나의 ‘세계’까지 지키고 싶다며 손을 내밀었던 것은 허황한 말뿐이 아니었단 걸 비로소 깨달았다. 리헤로스는 내가 못다 한 책임까지도 짊어주고 있었구나. 이런 그를 좋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해야만 하는 일과 나와 관련된 모든 것들을 제 일처럼 여겨주었다.
"그래, 그래. 무서웠지."
"으애앵! 위로하지 마세요! 더 눈물 난단 말이에요!"
"그래… 미안…."
리헤로스에게 고마운 것도 잠시, 지금은 그저 잔뜩 토라진 어린 박쥐를 위로하는 것밖엔 할 수 없었다. 한참을 그러고 있자 누군가 노크하며 들어왔다. 요 자그만 녀석이 건물을 뒤흔드는 목청을 가지고 있었으니 어그로 끌리는 건 당연했다.
"일어나셨군요. 아크리스 님."
"어… 네. 그런데 누구십니까?"
"백작님께서 호위를 부탁하셔서요. 잠시 두 분의 저택을 지키고 있는 겁니다.
“스피나…. 이드랑제 백작은 무사합니까?”
“물론입니다. 전투가 시작되기 전에 무사히 피신하셔서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다행이군요….”
스피나에게도 고마운 것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절대 선인 리헤로스만을 보호할 수 있는 것이었음에도 본인의 명예에 먹칠할 수도 있는 ‘불미스러운 존재’인 나까지도 포용해 주었다. 나는 비겁하게 숨어 다니기만 했는데 그녀는 누구보다도 진취적이고 용감했다. 많은 사람에게 본보기가 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녀가 산업을 선도할 정도로 성공할 수 있지 않았나 싶었다.
“백작에게… 감사하다고… 아니, 뵙고 싶다 전해주십시오. 조만간 찾아가겠다고….”
“알겠습니다. 그리 전하겠습니다. 자, 페로 착하지. 이리 와. 아크리스 님은 더 회복하셔야 해. 나가서 맛있는 거 먹자."
분홍색 휘장을 매단 남자는 뒤에서 붉은색 사과를 꺼내더니 살래살래 흔들었다. 눈물 콧물을 내 옷에 닦아낸 페로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포르르 날아올라 기사의 어깨에 앉았다.
“사과 좋아! 아크리스 님! 쉬고 계세요. 또 올게요!”
"그럼 편히 쉬십시오."
작은 양발에 사과를 쥐여준 기사는 정중히 인사를 마치고 나갔다. 페로가 인간을 무서워하고 낯을 가리던 게 엊그제 같은데 언제 이렇게 경계를 풀게 된 걸까. 이젠 정말 내가 없어도 될 것 같았다. 모든 게 이 삶을 조용히 마무리할 수 있게끔 도와주는 게 아닐까 싶을 지경이었다.
“이제 아무도… 내가 필요하지 않겠네.”
쓸쓸한 속마음은 차마 담고 있기 벅차서 입 밖으로 터져 나왔다.
“…난 네가 필요해.”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이 잠꼬대가 아닌 또렷한 목소리인 것을 깨닫자 주체할 수 없이 부끄럽게 만들었다. 시선을 왼쪽으로 돌리자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처럼 맑고 파란 눈동자가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아….”
“크리스, 난 네가 필요해.”
강조하듯 다시 반복했다. 혹시라도 내가 둘러대거나 못 들은 척할까 그런 걸까. 홧홧한 열기는 낯뿐만 아니라 머리 꼭대기까지 타올랐다. 여기서 열이 더 오른다면 뇌가 바싹 익어버려 고장 날 것 같았다. 이 와중에도 리헤로스의 얼굴을 감상하는 걸 멈출 수 없었다. 막 일어난 얼굴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을까 경이로웠다. 아직 반쯤 풀린 눈은 우수에 찬 듯했고, 나른한 목소리도 그런 분위기를 풍기는 데 한몫했다
“그러니… 떠날 것처럼 말하지 마.”
리헤로스는 내 손에 제 뺨을 다시 비벼댔다. 호감을 표하는 짐승처럼, 꼭 체취를 묻히고 싶은 것처럼 아양 떨었다.
‘미치겠네….’
물끄러미 바보처럼 보고 있는 것밖엔 못 했다. 황홀경이라 할 수 있었다.
“…응?”
그는 대답 없는 내게 재차 물었다. 내 손을 꼭 잡고 올려다보는 모습은 애처롭기까지 했다. 그래서 막혀버린 말문을 쥐어 짜내듯이 속삭댔다.
“떠나지 않아. 나도… 네가 필요해.”
사랑이란 허상이라 믿어왔던 내게 진정 마음을 쏟아준 너를 어찌 밀어낼 수 있을까. 곧 떠날 거란 사실을 고하여 네게 상처 주기 싫었다. 하얀 거짓을 속삭여 기쁘게 해주고 싶었다. 미래에 닥쳐올 나의 업은 생각지도 않은 채 마음을 넘칠 만치 주려고만 했다.
“그렇게 말해줘서 기뻐.”
수줍음 많은 사춘기 소년처럼 얼굴을 붉힌 모습은 해로웠다. 말로 표현이 불가할 정도로 행복했으며, 심장이 미칠 듯이 뛰었다. 전기가 관통하는 듯한 찌릿한 고통이 느껴지는 제 가슴을 부여잡고 있으니 리헤로스는 몸을 일으켜 옆에 앉았다. 어깨를 감싸 안은 채, 왼 가슴 위를 얹은 손등 위로 그의 크고 기다란 손이 겹쳐 올라왔다.
“괜찮아? 아직도 아파?”
“아니… 그렇게 아픈 게 아니라….”
“…….”
“…….”
우리는 그 뜻을 알고 있었다. 너무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 감정을. 그것이 그에게 전달되었을 것이리라.
차라리 웃고 넘어가면 좋을 텐데, 정적 때문일까 더욱이 그의 얼굴을 마주할 수가 없었다, 이대로면 머리고 가슴이고 온몸이 터져나갈 것 같았으니까. 마치 운동하다 온 사람처럼 호흡이 거칠어지자 숨을 참았는데, 역효과가 났다. 불규칙한 호흡을 뱉고 있으니 나뿐만 아니라 리헤로스의 호흡도 덩달아 들뜨는 것 같았다. 그 어느 때보다도 둘 사이의 긴장감이 팽팽해졌다.
“…크리스.”
“…….”
부름에 그쪽으로 고갤 돌렸으나, 아까와 같은 이유로 마주하지는 못했다. 그저 숨고 싶었다. 좋아하는 사람과 몸이 닿는다는 게 이토록 간지럽고 민망한 일이었나 모르겠다. 한참을 그 상태로 있자 마침내 단단한 손가락은 내 턱에 닿았고, 아주 가볍게 내 고갤 들어 올렸다. 그가 싫어서 피하는 것이 아니었으니 무력하게 손길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와 눈을 곧게 마주한 건 사실 몇 초도 안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너무나도 길게 느껴졌다. 모든 것을 꿰뚫는 듯한 눈빛은 나의 더러운 감정까지도 샅샅이 읽히는 것 같았다. 너를 얼마나 욕망하고 있는지, 너와 어떻게 어떤 사랑을 나누고 싶은지까지도 말이다. 그랬기에 더욱 죄를 짓는 것 같았고 밀어내고 싶었으나, 이내 거친 숨결을 뱉는 내 입술 위로 그의 입술이 가볍게 닿았다. 아주 조심스럽게 짓눌러오는 감각은 더는 숨을 뱉을 수 없을 만큼 벅차올랐다. 얕게 닿아만 있던 입맞춤은 지분대는 움직임으로 변했고, 벌어진 입술 사이로 뜨겁고 축축한 살덩이가 파고들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