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화
언제 봐도 화려한 접견실로 들어섰다. 햇빛에 반사된 크리스털이 벽면과 바닥에 무지개를 그려냈다. 그것들을 디디며 푹신한 소파에 몸을 던졌다. 한숨을 돌리나 싶었던 그때, 접견실의 문이 곧바로 열렸다.
“어서 와요. 두 사람!”
스피나는 어느 때보다 밝은 얼굴이었다. 그녀가 제복을 입고 있던 게 마지막 기억이었기에 보석이 잔뜩 달린 드레스를 입은 모습이 오히려 어색할 지경이었다. 리헤로스는 허리를 굽히곤 하얀 손등 위에 코끝을 대며 예를 표했다. 그의 뒤를 이어 똑같은 동작을 취하고 나서야 인사가 마무리되었다. 우리는 소파에 채 앉기도 전부터 수다스러웠다.
“정말 고생 많았어요. 마침내 진정한 평화가 왔네요.”
“다 백작님 덕분입니다.”
“후후, 저는 그저 손가락으로 살짝 건드리는 정도로만 도와드렸을 뿐인걸요.”
“겸손하십니다.”
서로의 공을 높이며 화목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찻잔을 기울일 새도 없이 여러 가지 이야기가 오갔다. 대화의 중심 주제는 칼리고가 완전히 소멸한 이후에 정상화된 왕국에 관한 이야기였다.
“아 참, 아크리스가 들으면 좋아할 만한 소식이 있어요.”
“네? 그런 게 있나요?”
“왕실 기사단… 글라디우스 기사단이 해체되었어요.”
“…칼리고, 아킬라와 밀접한 연관이 있어서일까요.”
“칼리고가 국왕 폐하의 눈과 귀를 속여 폭정을 앞세웠었거든요. 폐하는 놈의 비열한 입에 조종당하고, 칼리고가 월권을 하자 충언을 하던 공주님은 감옥에 갇혔었어요. 본인의 말은 곧 폐하의 목소리이고, 신의 말씀이라 하면서요. 리헤로스는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죠.”
리헤로스는 작게 끄덕였다. 역시 이 세계의 주인공이어서일까? 리헤로스는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이 사실이 나한테까지 닿지 않은 게 다소 아쉽긴 했다.
“그런 짓까지 했다고요…? 폐하가 공식 석상에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게 그 때문이었을까요?”
“아무래도 그렇겠죠. 언제부터 음모를 꾸민지 모르겠지만, 폐하가 사람들 앞에 나서는 걸 두려워한 게 칼리고가 단장으로 임명될 때부터였어요.”
“…….”
칼리고에게 카르말록스의 마수가 뻗치기 전부터 뱀의 혀로 주변인을 세뇌하고 있었다. 그렇다는 것은 놈이 타락한 것은 우리를 만나서부터 이상해진 게 아니라 이전부터 꾸준히 반란을 도모하고 있었다는 것이 된다. 아마 리헤로스나 내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왕좌를 노릴 놈이었다. 고전 판타지 장르에서 보이는 비열한 섭정의 역할에 가까웠다.
“그걸 숨기고 칼리고의 지시를 따른 기사단 전체가 가담한 것이니 국가 반란죄로 모두 처넣기 직전이었죠.”
“무산되었다는 얘기군요?”
“그래요. 너무나도 다정하신 공주님께서 선처를 바라셨거든요.”
“어째서….”
“후후, 리헤로스 때문 아닐까요?”
나도 모르게 놀란 눈으로 리헤로스 쪽으로 고갤 홱 돌렸다. 본인도 잘 모르겠다는 어리둥절한 얼굴이었다.
“다른 게 아니라, 공주님은 리헤로스를 만난 이후로 인간의 선한 면을 믿으시더라고요.”
“…….”
“폐하도 속인 칼리고가 상명하복 구조인 기사단에서 단원들은 명령을 거스를 수 없으니 원치 않은 반란을 일으켰을 수도 있다, 그래서 한번 기회를 주자. 뭐 이런 거죠.”
“자애로우시군요.”
“그렇죠. 그 점이 공주님의 장점이긴 해요.”
스피나는 싱긋 웃었다. 나였으면 선처고 뭐고 바로 형 집행을 내렸을 텐데 말이다. 그런데 공주도 무작정 선처해 준 것이 아닐 것이다. 기사단이 해체되고, 칼리고와 같은 악인은 존재하지 않으니 아마 더한 소동이나 반란은 없으리라 예상하고 결정했을 것이다.
“하여튼! 두 사람이 무사한데다 알리엔토 대륙에 평화가 찾아왔으니 축하연을 열려고 해요.”
“그렇게까지 안 해주셔도 괜찮습니다. 저희는 이미 받은 게 많아서….”
“후후, 거절은 안 받을게요.”
그녀는 쏜살같이 거절을 거절했다.
“그렇지만….”
“왜냐면 제가 여는 것도 아닌 데다 벌써 준비 중이거든요. 왕실 주최의 연회니까 꼭 참석해야겠죠? 국가 행사란 말이에요.”
“그, 그렇게 대규모로요? 준비하려면 꽤 시간이 걸릴 텐데요.”
“아크리스가 푸욱 자는 동안 리헤로스가 폐하도 안 만나주고, 저도 안 만나주니 우리 가문이 힘을 보태서 야금야금 준비하고 있었죠.”
“네? …나 얼마나 오래 잤어?”
다시금 고갤 돌려 옆에 앉아있는 리헤로스에게 물었다.
“그리 오래된 건 아니야. 삼일 정도.”
“…….”
삼일이라면 앞으로 내게 남은 시간과 같았다. 조금 더 일찍 일어났다면 내게 시간이 더 주어졌을까? 관리자를 잡아 흔들며 묻고 싶었다. 스피나는 양손을 맞부딪히며 오묘하게 가라앉은 공기를 환기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떠들었네요. 모처럼이니까 오늘도 저희 저택에 머물다 가실 거죠?”
“죄송하지만….”
이번엔 내가 먼저 재빨리 답했다. 스피나에게 감사를 표하겠다는 목표는 완수했으니 더 머무를 이유도 없었다.
“오늘은 리헤로스와 단둘이 보내고 싶어서 돌아가려고 합니다.”
“어머.”
“크리스….”
“늘 편히 지낼 수 있도록 마음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리헤로스와 저를 끝까지 믿어주셔서 다시 한번 감사했습니다.”
“어머머…! 오늘이 마지막인 사람처럼 굴기예요? 그러지 말아요. 앞으로 시간은 많으니까요. 아쉽지만 다음에 또 놀러 오는 것으로 약속해요.”
“…네. 그러겠습니다.”
당연하지만 지키지 못할 약속이었다. 식어버린 찻잔을 두고 나섰다. 어느덧 땅거미가 지며 온 세상에 콩알만 한 보석이 반짝거리는 감색 커튼이 드리우고 있었다.
‘하루가 이렇게 빠르게 지나가는구나.’
남은 삼 일을 알차게 보내겠다는 포부와 달리 시간은 붙잡을 새도 없이 무력하게 흘러간다. 남은 이틀은 리헤로스와 단둘이서만 보내고 싶었다. 가장 미안하고 고맙고, 좋아하는 사람이니 사실 이틀도 부족할 지경이었다. 배웅하는 이드랑제 가의 사용인들 한 명 한 명에게 인사를 했다.
“댁까지 모셔다드리겠습니다.”
“괜찮습니다. 좀 걷고 싶어서요.”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그럼요. 감사했습니다.”
물끄러미 바라보고만 있던 리헤로스의 손을 잡아끌며 걷기 시작했다. 깔끔하게 다듬어진 가로수를 지나 수도의 중심을 가로질렀다. 장사를 접는 상인들, 하품하는 고양이들뿐이었다. 모든 건물 안은 노르스름한 기름 램프로 불을 밝히고 있었고 굴뚝엔 하얀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이젠 너무 익숙해진 풍경이었다. 그것들을 눈으로 담고 있으니 리헤로스가 먼저 말을 걸었다.
“…크리스. 오늘 좀 이상해.”
“응? 뭐가?”
“아까는 마차 타고 갔는데, 지금은 왜….”
“그거야 해가 지면 스피나를 못 보니까 서두른 거야. 이젠 특별한 약속 없으니까 너랑 조용히 시간 보내고 싶어서 걷겠다고 했지.”
“정말?”
“그럼.”
그는 맞잡은 손을 꼭 잡았다. 놓치기 싫은 것을 소중히 쥐는 어린아이처럼. 미묘한 불안감이 해소되고 있는 거라면 다행이다. 이젠 떨어져 지내면서 궁금했던 이야기를 할 차례였다.
“참, 네가 교회당에 기록한 거 봤어.”
“어…? 진짜?”
“응.”
“언제?”
“글라디우스 놈들한테 쫓기다가 교회당에 잠깐 숨었을 때 우연히 찾아냈어.”
“어떻게… 열었어?”
“흐응, 네가 걸어 놓은 암호가 다 정원에 있는 것과 관련이 있던데?”
“…….”
그는 미간을 문질러댔다. 혹시 꼭꼭 숨겨둔 비밀 일기장을 훔쳐봐서 화가 난 걸까 하는 걱정도 잠시, 그의 귓바퀴는 주홍빛 노을보다도 더 붉게 물들었다. 그 모습에 자연스럽게 소리 내 웃었다.
“열 개 맞지?”
“응… 그걸 다 봤어?”
“다는 아니지만, 대부분.”
“아아… 그랬구나. 얼마 전에 기록했던 건 기억나는데…. 예전엔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나지 않으니까 불안해.”
“푸하핫, 별 얘기 아니던데 뭘. 그냥 네가 어딜 가서 뭘 느꼈고, 이 정도였지.”
절절한 고백들을 상세히 나열하는 건 그를 부끄럽게 할 뿐만 아니라 나까지도 부끄러움이 치사량에 달할 것이니 굳이 짚지 않았다.
“이 말을 꺼낸 건 널 놀리려고 한 게 아니야. 이전 기록은 나와 함께 다닐 때였으니 시점이 대충 추측이 가능했는데, 마지막 영상 이후의 네 행적은 알 수 없어서 그 이후로 어떻게 지냈는지 궁금해서 말이야. 내가 구금되고 나서 네가 재판에 섰고, 스피나가 변호해 주었단 것까진 알아.”
“그때… 음…. 나는 이드랑제 기사들에 의해 저택에 끌려왔어. 사실 스피나도 처음에는 경계했었거든, 자신이 모르는 이야기가 있다면 다 털어놓으라고 화를 냈었지.”
“그거야 당연하다고 생각해.”
나라 간의 전쟁이 없는 이 세계에서 무기 산업이 발달하는 이유는 오로지 마족 때문일 테니 말이다. 그녀는 누군가를 해치는 무기를 만드는 것에 부정적인 태도였으니 내가 마족이라는 사실에 경계하고 분개하는 것은 충분히 이해되었다.
“간단하게 말해서 너와 대척하던 때, 날 해치지 않고 희생하며 보호하려고 했다는 것까지 모두 설명했어.”
“완전 초창기 때부터의 이야기네….”
“응. 그러지 않으면 스피나가 너를 포기해버릴 것 같았어.”
“…….”
“네가 가는 곳마다 악의 징조가 있던 게 아니라, 우리가 나서서 그것을 찾았다는 것까지 설명했고 네가 사용하는 마법과 그 주술은 완전히 다르다는 걸 자세히 이야기했었어.”
“이야기뿐이면… 증거랄 것을 보여주지 않았는데도 믿어준 거 아니야?”
“…그게 나뿐만 아니라 드렉티오 경도 말을 보태주었어.”
“…….”
“혼자였으면 오래 걸렸을 거야. 그런데 어떻게 알고 찾아왔는지… 네 신변은 자신도 보증한다면서 풀려날 수 있게 도와달라고 부탁했었지. 그녀는 전속 마법 기사들을 보내서 수상쩍은 글라디우스 기사단 내부의 증거를 수집했고 널 감옥에서 빼낼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어. 그러다가 네가 탈옥했단 소식을 들었지.”
“……탈옥 시켜준 건 테네브였어.”
“……역시 그랬구나.”
테네브. 그도 나의 생존을 바랐던 사람이었으니, 구출하기 위해 다방면으로 노력한 모양이었다. 결과적으로 그가 구출해 준 보람도 없이 끝나버렸지만 말이다.
“난 이드랑제 저택에서 발이 묶였어. 증거를 모을 때까지 가만히 있으라고 부탁해서 움직이지 못했는데, 글라디우스 기사들이 찾아왔었어. 너를 데려갔느냐면서.”
“…곤란했겠구나.”
그는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저택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는 알리바이가 확실해서 추궁 받지 않았어. 오히려… 네가 집으로 돌아갔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걱정됐어. 실제로도 그랬던 거지?”
“…….”
“…그래서 스피나에겐 미안하지만 어떻게든 저택을 빠져나가 널 찾으러 가려 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처형일이 결정되었단 소식이 들려온 거야.”
“그랬었지….”
“이게 다야.”
“말해줘서 고마워.”
“나도 궁금해. 크리스.”
“응?”
“탈옥한 이후에 어디에 무얼 하면서 지냈어?”
고작 하루 이틀의 이야기겠지만, 테네브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묻는 것이리라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