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화
“뭐라고?”
“…미련했어. 큰 이상 징후가 없어서 괜찮은 줄로만 알고 있었는데 아녔나 봐. 그래서… 선고를 받았을 때, 나도 못지않게 충격이었어.”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던 얼굴에는 슬픔이 서렸다. 일그러지는 미간, 붉어지는 눈시울은 그가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자연스레 묻어나오고 있었다. 부서질 듯이 꽉 끌어안으며 감히 말로 표현 못 할 내 마음이 닿길 바랐다.
“이건 말이… 안 돼. 크리스… 어째서….”
“미안해. 나도… 너와 함께하는 먼 미래를 그리고 싶었어. 그러고 싶었는데….”
최대한 담담하게 이야기하려고 했는데, 하늘을 담은 것 같던 푸른 눈동자가 바다가 되어버린 걸 보니 초연함을 유지할 수 없었다.
“언제… 까지야?”
“……내일.”
“너무 짧잖아….”
“미안해.”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마지막 인사는 하고 싶었어. 인사도 없이 가면… 더 힘들어할 것 같아서.
“네가 없으면… 난….”
가슴이 뻥 뚫린 것만 같았다. 어떤 말도 위로가 되어줄 수 없단 걸 확신했다.
“리헤로스. 너를 정말 사랑해. 네 곁에 남을 수만 있다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지만, 그것이 카르말록스에게 영혼을 파는 것이라면 원하지 않겠지.”
“…….”
“나도 이렇게… 끝내고 싶지 않아.”
“크리스….”
“그러니 서약하자.”
내 품에 얼굴을 파묻고 있던 리헤로스는 고갤 들어 올렸다. 그의 눈물을 본 것은 처음인데 이런 상황에서 보고 싶진 않았던지라 통증이 상당했다.
“죽어서도 잊지 않겠다는 서약.”
“…그래. 그러자.”
“고마워….”
물기 어린 그의 뺨을 문지르다가 입을 맞췄다. 고작 형식적인 서약으로 마음의 무게가 덜어지진 않겠지만, 조금이라도 구색을 갖추는 것이 우리 둘 모두에게 좋을 것 같았다.
◊
운명의 날이 밝았다.
막으려야 막을 수 없이 해는 뜨고, 사람들은 모두 집 밖으로 나와 활동을 시작했다. 그 어느 때보다도 마을 사람들은 들떠 있었고 활기를 띠고 있었다. 그에 반해 나와 리헤로스는 영락없이 피곤한 얼굴로 아침을 맞이했다. 기나긴 밤을 보내느라 못 잤느냐 하면 것도 아니었다. 마지막 날이라고 해서 억눌린 욕구를 해소하지도 않았으며, 못다 한 말을 주절이지도 않았다. 마치 이 모든 순간을 자세히 눈에 새기기 위한 것처럼 그저 지그시 바라보았었다. 무겁게 감기는 눈꺼풀을 못 이기고 늦은 새벽까지도 뒤척이는 것 같더니 그도 피곤한 얼굴로 기상하였다.
가장 아름답고 기쁠 날이 우울하기 짝이 없었다.
“잘… 잤어?”
“…응.”
내가 먼저 리헤로스에게 다가가 기대었다. 몸통에서 쿵쿵 울리는 심장 소리는 평소보다 빨랐다. 어떤 말을 해야 현실로 돌아가더라도 후회 없었노라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고민했지만, 그에게 감동을 줄 만큼 미려한 말재간이 없으니 아주 오랫동안 두 눈으로 이야기하듯 마주했다.
─똑똑똑
“왕성에서 왔습니다.”
어제 테네브를 보내고 난 이후에 늦은 저녁에서야 온 재단사들이었다. 급하게 잰 치수를 적용해서 예복을 벌써 만들었다는 건 게임이니 가능할 일이었다.
원래 손님이 찾아오면 먼저 나가보겠다며 자리를 뜨는 리헤로스가 오늘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본 채 한 발자국도 떨어지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내 쪽에서 그를 밀어내고 현관문을 여는 수밖에 없었다.
“답이 없으셔서 아직 주무시는 줄 알았어요.”
“죄송합니다. 들어오세요.”
환한 미소로 줄지어 들어오는 재단사와 사용인들은 담당할 사람을 정하고 온 것인지 바로 우릴 각자의 방으로 끌고 들어갔다. 세 개의 전신거울을 펼쳐 세워두고 포장된 옷을 꺼내어 내게 내밀었다.
“속에 받쳐 입는 옷은 혼자 입으실 수 있을 거예요.”
“겉옷은 아닌가 보네요?”
그는 익살맞은 표정을 지으며 답을 대신했다. 나무로 짜인 가림막이 세워졌고 얌전히 셔츠와 바지를 몸통에 끼워 넣었다. 가림막에서 나오자 재단사와 사용인들이 몸 위에 잔 옷가지를 걸고, 품이 넓은 부분은 즉석에서 바느질하기도 했다. 멀뚱히 거울을 통해 분주한 사람들을 지켜보는 것밖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내 무료한 표정을 흘끔 본 사용인 하나가 말을 걸 때까지만 말이다.
“국왕 폐하께서 드디어 공식 석상에 나오시네요.”
“…그렇죠.”
“뒤늦게 알았잖아요. 몸을 숨기시던 게 칼리고 기사단장 때문인지 누가 알았겠어요. 두 분이 아니었으면 라이오펠은 암흑기에 빠졌을 거예요. 새삼스럽지만 감사해서요.”
“저보다는 리헤로스…… 용사가 제일 고생 많았죠.”
“겸손하시긴. 하여튼 오늘은 용사님도 표창 받으시고 이제는 행복할 일만 남았네요.”
“아아… 네.”
“안 기쁘세요?”
“기쁩니다….”
“에이, 말이랑 얼굴이랑 전혀 다른데요? 웃으세요. 좋은 날이잖아요.”
눈꼬리를 구부려 웃는 시늉을 하자 안심이 된 모양인지 옷시중을 들어주던 사용인도 활짝 웃으며 손을 다시 움직였다. 많은 단추를 일일이 끼워주고 비단 천으로 만들어진 끈을 몸에 묶어주었다. 마지막으로 금속 핀으로 매무새를 고정하고 나서야 방에서 나올 수 있었다.
“자, 여기 보세요. 착용감은 어떠세요?”
“뭘 입어도 잘 어울리시네.”
“내 말이 그 말이야. 천사가 따로 없어요.”
그들은 내 모습을 보자마자 감상을 내뱉기 바빴다. 금실로 수 놓인 흰 예복은 여태껏 입은 옷 중에 가장 비싸 보이는 데다 몸에 감기는 느낌이 퍽 좋았지만, 감탄할 여유 따윈 없단 게 아쉬울 따름이었다.
“용사님도 환복 마치셨습니다.”
그 자리에 있는 모두가 동시에 리헤로스가 들어갔던 문을 바라보았다. 그 안에서 모습을 드러낸 리헤로스는 예복이 아닌 정복 차림새였다. 왼쪽 가슴엔 왕국의 상징 문양이 수 놓여 있었고 훈장이 걸릴 위치가 비어있었다.
“세상에!”
“정말 멋지세요.”
“용사님의 고결한 품격이 느껴집니다.”
나에게 했던 것과 다를 것 없는 칭찬을 늘어놨지만, 그는 평소처럼 쑥스러워한다든지 예의상의 감사 인사를 보내지도 않았다. 무시가 아닌, 그저 아무것도 들리지 않은 상태 같았다. 우수에 찬 눈빛으로 나를 곧게 바라보고만 있는 모습은 처음 만났던 때를 떠올리게 했다.
‘그때도 지금처럼 마음이 복잡했던 걸까? 새삼스럽지만… 무슨 생각을 했던 건지 궁금해지네.’
한참 우리의 눈치를 번갈아 보던 왕실 사용인은 정적을 깨고 다음 일정을 재촉했다.
“저어… 준비 끝나셨으면 마차로 모시겠습니다.”
“…그럼 갈까?”
입을 열지 않을 것 같던 리헤로스가 먼저 소리 권했고, 그와 동시에 손을 내밀었다. 장갑을 낀 흰 손바닥은 더 커 보였다. 미세하게 끄덕이고 살포시 손을 맞잡았다. 계단이라 보폭에 큰 차이는 없지만, 그는 내 속도에 맞추어 최대한 천천히 걸었다.
‘아프다고 말했던 걸 의식하고 있나.’
작은 동물을 애지중지하듯 조심스러운 몸짓을 귀여워할 시간도 없이 저택을 나오자 마차가 눈에 띄었다. 한 번 타본 적이 있었으니 화려한 외양에 휘둥그레진 것은 아니었다.
“오늘은… 두 대가 왔네요?”
“네, 용사님은 훈장 수여를 받으셔야 해서요. 그… 아크리스 님은 귀빈석으로 따로 모실 예정입니다.”
“그렇지만, 크리스도 저와 함께 수여를….”
“아니야 리헤로스.”
“…….”
“그렇게 할게요. 제가 뒤쪽 마차에 타면 되죠?”
잡고 있던 손에서 빠져나와 그가 말릴 틈도 주지 않고 곧장 올라탔다. 창밖에서 보내는 리헤로스의 시선을 버틸 수가 없어서 커튼을 쳐버렸다.
‘잘한 거야. 마지막까지 굳이 눈에 띄고 나서긴 싫어. 어차피 연회장에서는 볼 수 있을 테니까.’
뒤이어 리헤로스도 올라탄 모양인지 좌우로 덜컹거리며 움직였다. 울렁거리는 마음을 잠재우기 위해 커튼을 걷어 빠르게 지나쳐가는 바깥 풍경을 내다보았다. 점점 속도를 올리며 달리던 두 마차는 라이오펠의 두 갈래 길에서 각각 다른 길을 타게 되었다. 리헤로스는 식이 시작되기 전에 왕성 내부의 주요 인물들과 접견할 것이라 예상했다. 마차에 따로 탑승하게 된 이유도 분명 나까지 신경 쓸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것이겠지. 그들에게 잘 보일 필요는 없으니 뭐가 됐든 서운하지도 않았으며 상관없었다.
차 내부의 진동이 완전히 멎고 나서야 감옥 같던 작은 상자의 문이 열렸다.
“아크리스 님, 이 길을 따라 쭉 올라가서 회장으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저마다 파트너와 이야기를 나누며 즐거워 보이는 귀족 사이에서 묵묵히 계단을 올랐다. 혼자는 익숙했기에 예전이라면 전혀 신경 쓰지 않았을 텐데 오늘만큼은 리헤로스의 빈자리가 크게 느껴졌다. 피로감 때문일까, 어딘가에 몸을 기대고 싶어지자 서둘러 회장 내부로 들어갔다.
긴 직사각형 형태의 회장은 제일 끄트머리에 단상이 있었고 고급스러운 카펫이 그 앞까지 길게 뻗어 있었다. 그 위로 걸어 나가며 양옆으로 빼곡히 비치된 의자를 살펴보니 각 시트에 이름이 수 놓여 있었다. 귀빈석에 대해선 그다지 좋은 기억이 없는데 이번만큼은 ‘귀빈석’이라고 불릴 위치이긴 했다. 단상과 가장 가까운 곳에 놓인 의자였으니 말이다.
‘사람이 엄청 많네.’
꼭 어린애 같은 감상이어서 헛웃음이 픽 나왔다. 대륙과 왕족의 명예를 구한 영웅의 공을 치하하고 예우 받는 자리이니 그럴 만도 하지 않은가. 오히려 프라이빗한 회장에서 일부 인원만 초대하지 않고 광장에서 진행했다면 더 많은 사람이 모였겠지.
‘내 처형을 보러 온 때랑 맞먹지 않으려나.’
자조적인 답을 끝내고 식의 시작을 알리는 병사의 나팔 소리에 집중했다.
천장에서부터 말려있던 휘장이 풀려 내려오고 우리가 걸어왔던 카펫에 행렬이 이어졌다. 정복을 갖춰 입은 병사들이 갈라지며 벽으로 붙어 서자 그 사이로 리헤로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칙칙하고 엄숙한 장내를 밝히는 한 줄기의 빛과도 같았다. 단상 앞에서 무릎을 꿇은 리헤로스는 지루하고 긴 대주교의 축사가 끝날 때까지 그 상태 그대로였다. 무릎은 아프지 않은지, 다리는 저리지 않은지 따위의 걱정이 앞섰다.
그리고 그때, 마침내 베일에 가려져 있던 국왕이 나타났다. 그의 첫인상은 푸근한 산타 할아버지에 가까웠다. 인자한 미소, 은은하게 감도는 선함이 느껴졌다. 강직한 것과는 거리가 먼 지도자이니 칼리고가 쥐락펴락할 수 있었던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
“알리엔토를 위해 싸워주어 고맙네. 용사여.”
“저에겐 영광일 따름입니다.”
리헤로스의 왼 가슴에 붉은 리본이 달린 태양 모양 엠블럼이 달리자 일제히 박수가 쏟아졌다. 사방에서 꽃가루가 터지고 그는 군중을 향해 허리를 굽혀 예를 갖추었다. 마침내 내 쪽으로 돌아보는가 싶었는데, 절묘한 타이밍에 병사가 앞을 가로막으며 지나가는 바람에 짧은 눈인사조차 나누지 못했다. 눈 깜짝할 순간에 리헤로스는 축하를 받으며 병사들과 함께 식장을 빠져나갔고 식은 종료되었다.
‘괜찮아. 연회에선 만날 수 있을 거야… 아마도.’
리헤로스는 앞으로 이곳에서 살아갈 날이 많다. 삶을 편안히 영위할 명예는 중요하기 때문에 독점은 잠시 포기할 수 있었다.
그런데 우습게도 ‘잠시’는 내 희망 사항이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