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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왕님 망겜에도 엔딩이 있나요-127화 (완결) (127/127)

127화 (完)

결과는 좋지 못했다.

‘아크리스’가 흔한 이름이 아니라고 생각했건만 온갖 식재 마트, 상표, 옷 브랜드 작명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내 이름이 검색에 적절치 못하다면 반대로 ‘리헤로스’는 어떨까 싶었다. 나완 다르게 한 페이지 안에만 쏙 들어오는 검색 결과였다. 게다가 정확도가 낮아 두 가지 단어의 합성어가 섞인 게시글만 보였다. 이거면 찾기 쉬우리라 생각해서 들뜬 마음으로 글쓰기 버튼을 누르고 자판을 두드려 내려갔다.

[리헤로스. 나를 찾고 있어? 기다리고 있었어.]

나름 위트 있게 써본다고 한 것인데 홀로이 벅차오른 느낌이 들지 않나. 이다음에 보면 항마력이 버티지 못할 것 같아 뒤의 문장은 지웠다.

[리헤로스.]

어찌 됐든 자세한 이야기는 만나서 하면 될 일이고, 그가 찾으러 올 수 있을 만큼의 간결한 단서만을 적는 게 좋아 보였다. 이미지를 첨부하기 위해 사진첩을 살펴보았는데 쓸만한 게 없었다. 그가 게시글을 보자마자 ‘나’라고 확신할 만한 단서가 필요했다.

앱을 백그라운드에 내려둔 채 검색 포털 사이트를 열었다. 나를 위해 심었다던 장미가 가장 먼저 떠올라서 크림색 장미를 검색했더니 눈에 띄는 것이 있었다.

“썸머 스노우….”

끝내 리헤로스의 입으로부터 나오지 못했던 장미의 진짜 이름이었다. 여름에 내린 눈이라니 로맨틱하기 그지없었다. 뭉클한 감성을 잠시 내려두고 이미지를 저장한 다음, SNS에 사진을 첨부했다. 업로드 버튼을 누르는 건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 어느 때보다 찾고자 하는 마음이 절실했으니 말이다.

올린 지 얼마 안 된 게시물을 하염없이 들여다보다가 DM을 열었다 닫았다 하며 초조한 마음을 여실 없이 드러냈다. 한 시간가량을 그러고 있었을까, 엄지손가락 관절이 뻐근해지고 나서야 책상 위에 던져두었다.

“보고 있으면 뭐해…. 리헤로스가 SNS를 하는지 안 하는지도 모르는데.”

역대 내가 했던 말 중에 가장 이성적이고 지극히 현실적인 말이었다. 달궈졌던 기대감이 사라지며 김이 팍 샜다. 미처 정리하지 못한 이부자리 위로 털썩 누워버렸다.

‘그러고 보니 꽃에 관심이 많았잖아. 그럼 전국의 꽃집을 뒤져보면 되나?’

말미에서야 현실 세계의 사람인 걸 알았으니, 평상시의 생활 양식을 통해 실제론 어떤 사람일지 추측하는 것밖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부우우웅

그때, 스마트폰 액정이 빛을 발하며 알림이 울렸다.

현실로 돌아와 눈을 떴을 때처럼 튕겨 일어났다. 거의 네발로 기어가다시피 허우적대며 책상 위의 스마트폰을 허겁지겁 집어 들었다. 손이 어찌나 떨리는지 지문 인식도 세 번이나 틀리는 바람에 PIN 번호를 입력하라는 경고 메시지가 떴다. 몇 번이고 잘못 누르는 번호를 삭제, 입력, 삭제, 입력해가면서 겨우겨우 스마트폰의 잠금을 해제할 수 있었다.

“어…?”

원하는 모양새의 알림 메시지가 없었다. 다만, 낯선 메일 아이콘이 떠 있었을 뿐이었다. 상단 바를 내려서 내용을 미리 보니 더욱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피니티게임즈] 유자현 님, ‘시스템 기획’ 부문 면접 제의 드립니다.

유자현 님, 안녕하세요.

피니티게임즈의 인사 담당자입니다.

게임 IN에 올리신 이력서와 포트폴리오를 보고 면접 제의 드리고 싶어 메일 보냅니다.

아래의 내용을 확인하신 후, 면접 의사가 있으시면 회신 부탁드립니다.

피니티게임즈라면 N모 대기업의 자회사로 타이틀을 내는 족족 성공을 거두어 명작 제조기 타이틀이 명실상부했다. 내 스펙으로는 턱도 없다고 판단해서 공고는 들여다보지도 않았으니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망설임 없이 답장 버튼을 눌러 또박또박 적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후, 후우….”

메일에 흠은 없을지, 맞춤법은 잘 지켰는지 수십 번을 들여다보았다. 송신되었다는 알림 메시지를 보고 나서야 숨을 돌렸다. 어차피 내가 해야 할 일은 모두 마쳤고, 리헤로스가 날 찾기까지만 기다리면 된다. 그때까지 망가져 버린 생계를 복구해야 하니 잠시 면접 준비에 온 신경을 쏟아도 되지 않을까 싶었다.

***

현실 세계로 돌아온 지 정확히 일주일이 되는 날이었다.

운 좋게 잡힌 면접을 보는 날이라 기뻐해야 하지만 오롯이 그러지 못했다. 그 이유라고 함은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적었던 SNS의 게시글에는 어떠한 반응도 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어쩌면 그도 나처럼 기억 일부분만 가지고 돌아오는 바람에 전혀 기억하지 못해서 애쓰고 있을까. 그런 거라면 내가 정말 도움이 되지 못하니 안타깝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고민 끝에 준비한 것은 전국 꽃집 지도였다. 화훼업에 종사할 것이라는 추측이었다. 이런 것까지 만들게 될 줄 몰랐지만, 한 줄기 희망으로 삼아 찾고 싶었다. 어쨌든 금일 예정된 면접을 마치고 나서 인근의 꽃집부터 돌아볼 예정이었다.

우연히 지나칠 때 못 알아볼까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내가 그를 못 알아보는 건 둘째치고 나도 ‘아크리스’의 생김새와는 전혀 딴판이었으니까. 어두운 갈색 머리에 피부는 하얀 편이라지만, 창백한 수준은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실망하면 어쩌지.’

그의 다정한 성품이라면 외양으로 사람을 따지지는 않겠지. 그런데 끌리지 않는 외향이라는 게 있지 않은가. 나 역시도 그의 얼굴보단 다정한 성품에 끌려서 좋아하게 된 것이지만, 사람인지라 취향 밖의 스타일이란 것은 있으니 말이다. 이대로 찾지 않는 것이 오히려 좋지 않은가까지 결론이 치닫기 직전이었다. 홀로 남은 면접 대기 장소에서 기껏 준비한 예상 질문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유자현 님 맞으시죠?”

“아아, 네.”

“이쪽으로 오세요.”

갖은 준비와 다짐을 끝냈다고 생각했건만 다시금 걱정과 불안 증세가 재발했다. 난 리헤로스가 없으면 아무것도 못 하는 걸까. 걱정스러운 마음을 어찌할 줄 모르고 있던 찰나에 회의실의 문이 열렸다. 노트북, 태블릿을 두드리고 있던 두 사람이 나를 보자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십니까.”

“자리에 편히 앉으세요.”

맞은편에 착석하고 구겨진 상의의 아랫단을 잡아당겨 폈다.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준비가 끝났다는 신호를 보냈다.

“먼저 저희부터 소개를 드리자면, 저는 피니티게임즈 기획 실장인 한영호이고 이쪽은 시스템 팀장인 정성준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팀장이라는 사람은 제 이름이 불릴 때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할 뿐이었다. 그런데 그의 이름을 듣고 묘한 기시감이 들었다.

‘리헤로스도 이름에 지읒이 들어간 것 같았는데.’

명확하게 대답할 순 없었지만 희미한 기억을 떠올리자면 그랬다. 생각을 굴리며 멍하니 팀장 쪽을 쳐다보고 있으니 의아한 듯 고갤 갸웃 기울였다.

“너무 긴장하지 마시고요, 자기소개부터 부탁드릴게요.”

“아… 네, 안녕하십니까. 지원자 유자현입니다.”

면접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함정 질문이라든지 압박에 가까운 질의 때문은 아니었다. 오히려 분위기는 편안했으며, 기술 질문이 끝나자마자 어떤 게임의 어떤 시스템이 재밌었으며 인상 깊었다 따위로 대화의 꽃을 피웠다.

“이런…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요. 자현 씨에 대해선 많이 알게 된 것 같아요. 이젠 자현 씨께 질문할 시간을 드려야겠죠? 피니티게임즈에 궁금하신 게 있으실까요?”

“다른 건 아니고, 혹시… 두 분은 알리엔토 사가를 해보셨나요?”

실장은 웃음을 터트렸다.

“해봤죠. 비록 일주일 만에 섭종하는 바람에 많이 해보진 못했지만요.”

실장의 대답은 중요하지 않았다. 대답이 가장 듣고 싶었던 사람에게 시선을 옮기자 그는 고개를 저었다.

“저는 못했네요. 그 주 주말에 해보려고 했는데 섭종해서 기회가 없었어요.”

“아아….”

“그 게임을 재밌게 하셨나 봐요?”

“네… 아주 짧지만 긴… 시간을 보냈어요.”

“저런, 아쉬우시겠어요.”

“…….”

마지막 대답으로 팀장이 리헤로스가 아님을 분명히 알았다.

“그럼 질문은 끝나신 것 같으니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결과는 합불합 여부와 상관없이 메일로 보내드릴게요.”

애써 미소 지으며 마지막 인사를 남기고 회의실을 나왔다.

‘그래… 이렇게까지 극적인 만남이 펼쳐질 리가 없지. 이곳은 게임이 아니라 현실이잖아.’

판타지적 만남에 기대는 것도 게임의 세계관에 익숙해져서 일지도 모른다. 무뎌진 현실을 되찾아야만 했다. 면접도 끝났겠다 긴장감은 완전히 사라져버려서 맥없는 발걸음으로 엘리베이터를 잡았다. 피니티게임즈는 대형 게임사 N사의 자회사였기 때문에 건물을 함께 사용하는지라 엘리베이터의 개수도 여덟 개나 되었다. 이 회사에 다니게 되면 이 번뇌와 고통의 모든 것을 잊을 만큼 행복해질 것 같았다.

여덟 개의 엘리베이터 중 하나가 열렸다. 그 안에는 남녀 한 쌍이 타고 있었고 목엔 본사 N사의 사원증이 걸려있었다. 내부 층계 버튼 쪽에 바짝 붙어 서자 두 사람의 이야기가 들렸다.

“사람 찾는 건 잘 되어가고 있어요?”

“…….”

남자 쪽은 멋쩍은 웃음을 흘렸다.

“흥신소라도 가봐야 하는 거 아니에요?”

“그게… 어렵네요.”

“왜요?”

“얼굴도 이름도 몰라서요.”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자의 행방을 뒤쫓는 나와 같은 처지의 남자였다. 돈은 없지만 가능하다면 나도 흥신소를 찾아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참, 그 얼굴은 진짜 얼굴이 아니었죠? 애매하네… 역시 페북이랑 인스타 해보시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그걸로 찾을 수 있을까요?”

“당연하죠. 그렇게 특이한 꿈을 꾼 사람이면 더더욱이요. 요즘은 각종 커뮤니티로 퍼 날라주는 사람도 많잖아요? 길고 생생한 꿈이라면 더 흥미로워할걸요.”

“…….”

“제가 몽타주도 그렸는데 안 할 거예요?”

“…그럼 해볼게요.”

“잘 됐다. 찾으면 저한테 커피 사시는 거예요.”

“그래야죠. 그려주셨던 거 다시 보내줄 수 있나요?”

“네네, 그럼요. 그럴 줄 알고 제가 메신저로 보내느, 앗!”

여자가 가방에서 스마트폰을 꺼내려다가 떨어트린 모양인지 내 발치까지 쭉 미끄러져 왔다. 주워드리기 위해 허리를 굽혔는데, 액정 속 몽타주가 너무나도 눈에 익었다.

흰머리에 창백한 피부, 금색 눈동자를 가진 남자의 그림이었다.

꼭 알리엔토에서 기거할 적 거울을 비춰본 듯한 느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아아, 감사합니다!"

손을 내미는 여성분에게 핸드폰을 순순히 건네주었다. 너무 놀라서 어찌할지 모르겠다. 뒤에 선 남자가 내가 절박하게 찾고 있던 그 사람이라는 소리니까. 강한 확신이 들수록 오히려 그쪽을 쳐다볼 수가 없었다.

1층의 문이 열리자 두 사람은 유유히 빠져나갔고 나는 느릿느릿 그 뒤를 따라갔다.

“방금 메신저로 보냈어요. 화이팅! 하다가 막히는 거 있으면 제가 도와줄게요.”

“고마워요. 유라 씨.”

“정우 씨한테 신세 진 게 많아서 빚 갚는 것뿐이니까요. 그럼 먼저 들어갈게요. 내일 뵈어요!”

여자는 손을 흔들며 먼저 로비를 나섰고, 그는 조용히 스마트폰을 내려다보는 듯했다.

가상 세계에서의 그와 다를 것 없는 체구였지만, 흑발에 가까운 자연 모발은 낯설었다. 아직 얼굴은 제대로 보지 못했지만, 그의 뒷모습에서 풍겨 나오는 분위기는 놀라우리만치 똑같았다. 어느 차원을 거치든 너는 너구나, 얼굴을 보지 않더라도 어디에서든 너를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는 로비 밖으로 나가려는 듯 발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지금 놓치면 안 될 것 같아서 애틋한 감정을 제치고 뜀박질했다. 초면이라면 미친 사람이라고 생각할 만큼 그의 팔을 덥석 잡아당겼다.

“나를…….”

놀란 얼굴로 내려다보는 눈동자의 흔들림은 무척이나 익숙했다.

“나를 찾겠다며.”

“크리…스?”

“왜 이렇게 느려? 나만… 애탄 것 같아서 짜증 나.”

우릴 비껴가는 사람들은 더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알리엔토 사가에서 살아가는 동안 현실의 시간이 멈췄던 것처럼 우리가 서 있는 공간만 멈춘 듯했다.

운명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누가 그랬던가.

게임 속 시나리오보다 더한 우연은 운명이라 불리는 끈을 이어주는 것 같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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