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도덕적 안락함
#1
prologue
“다른 게 아니라…….”
백이서가 망설이기만 하며 쉽사리 입을 열지 못한다. 하얗게 마른 손가락은 애꿎은 사무실 소파만 쥐어뜯고 있었다.
이 소파 또한 차계원이 사 놓은 것이다. 이제는 회사 전체에 차계원의 입김이 안 닿은 데가 없다.
“소속사를……. 옮기는 건 어떨까 해서.”
“왜. 내가 나가 줬으면 좋겠어요?”
피식 웃은 차계원이 앉아 있는 백이서에게 다가와 허리를 숙여 시선을 맞춘다. 덜덜 떨면서 눈을 피하는 꼴이 가소롭다.
“그게 아니라……. 우. 우리 회사는 너무 작으니까……. 잘 챙겨 주지도 못하고, 아무래도 너한테 맞는 곳이…….”
입꼬리를 비튼 그가 백이서의 턱을 잡아챈다.
“아니긴 뭐가 아니야.”
“진짜 아니야.”
차계원이 눈을 가늘게 뜬다. 시선을 피하는 백이서의 입이 달싹거린다.
“…….”
“우리 회사가 해 주는 것도 너무 없, 없고……. 또.”
“좆 빨고 싶어서 이래요?”
붉어진 백이서의 얼굴이 당황으로 일그러진다. 차계원이 그 일그러진 입매를 아프게 짓누른다.
“나는 너 생각해서……. 더 체계적인 데로 알아보면…….”
그가 가당치도 않다는 듯 잡은 턱을 잡아당긴다.
“머리 굴리지 말고 입 벌려요.”
be involved in
촬영장은 분주했다. 이번 영화는 유독 야외 촬영이 많은 탓에 매니저 김건은 살얼음을 걷는 기분이었다.
“계원아. 담요 좀 더 가져다줄까?”
“됐습니다.”
야외용 의자에 앉아 옆으로 꼰 다리가 유난히 길고 곧다. 이마 옆 관자놀이를 문지르는 모양새가 무언가 마음에 안 드는 게 분명했다.
“아니면 차에 가 있을래? 슛 들어가려면 더 기다려야 할 거 같은데.”
“나 인성 개판이라고 광고 내요?”
“어유. 아니지. 아니지! 내가 커피라도 가져올게. 잠깐만.”
손사래를 친 김건이 뛰어간다. 탐탁지 않아 하는 시선이 그 뒤를 쫓는다.
“쯧.”
차계원은 성격이 더러웠다. 솔직히 말해 그냥 개판이었다. 10년 가까이 일한 매니저도 벌벌 기어야 할 정도로. 그리고 그는 제 성격을 딱히 숨기지도 않았다.
“헉헉. 계원아, 여기 커피.”
김건이 숨을 몰아쉬며 커피를 받쳐 내민다. 살집이 약간 있는 그의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다.
“……매니저님 많이 드세요.”
차계원이 귀찮다는 듯 손을 까딱인다. 그러면서도 얼굴에는 미소와 여유가 가득하다. 촬영장의 이목이 자신에게 집중되어 있다는 걸 그는 잘 알았다.
“어, 그래. 고맙다.”
김건이 멋쩍게 커피를 한 모금 입에 문다.
차계원은 말 그대로 연예인 중의 연예인이었다. 아역 시절부터 소위 대박을 친 그는 무명을 겪어 본 적이 없었고 명실상부 대한민국 제일가는 톱스타였다. 와중에 그의 외모는 점점 더 빛을 발해 인기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날로 치솟았다.
“이번 영화 끝나면 당분간 스케줄 잡지 마요.”
“어. 어. 알았어. 휴식이 중요하지 그럼. 하하.”
CF 하나만 들어가는 건 어떻겠냐는 말이 목구멍으로 삼켜진다. 오늘은 꼭 차계원에게 전해 달라고 하던, 사장의 아우성이 머릿속에서 메아리처럼 울리는 것 같다.
“아. 안녕하세요. 배우님!”
서늘한 기운을 뚫고 누군가 대뜸 차계원에게 인사를 건넨다. 말간 인사 속, 추위로 빨갛게 물든 코끝이 하얀 피부와 대비돼 선명하다. 방금 김건이 커피를 받아 왔던 케이뉴 소속사 대표 백이서였다.
“오늘 커피 차를 가져왔거든요. 배우님도 한 잔 드세요!”
두 손으로 김이 모락모락 나는 라떼를 내민다. 차계원이 슬쩍 커피 차가 있는 방향을 바라본다. ‘케이뉴 엔터테인먼트.’, ‘대배우 한태미 님을 응원합니다.’ 같은 팻말이 세워져 있었다.
“감사합니다. 잘 마실게요.”
부드럽게 눈을 휘며 커피를 받아 든다. 김건이 속으로 혀를 내두른다. 차계원의 가식은 볼 때마다 놀라웠다.
“네! 우리 태미 잘 부탁드립니다!”
꾸벅 인사한 백이서가 다시 커피 차로 돌아간다. 토실토실한 아이보리색 짧은 숏 패딩이 그가 걸을 때마다 뒤뚱거렸다.
“내가 버려 줄까? 너 라떼 안 마시잖아.”
김건이 이리 달라는 듯 팔을 내민다. 그 팔을 무시한 차계원이 라떼를 마시지는 않고 다른 손으로 옮겨 잡는다.
“팬인가?”
“뭐가?”
“저 사람. 한태미 팬이냐고.”
“아아. 아니. 저 사람이 대표야. 한태미 소속사 사장.”
“대표가 커피를 돌려요?”
차계원이 이상하다는 듯 되묻는다. 소속사 사장이 직접 커피 차를 이끌고 온다는 건 처음 듣는 이야기다. 백이서는 쟁반까지 받쳐 들고 손수 커피를 나르고 있었다. 연출 팀 몇 명이 커피를 받아들며 감사 인사를 한다.
“한태미가 이번에 좀 떴냐. 소속사 옮긴다나 봐. 한태미한테 잘 보이려고 그러는 거지, 뭐. 배우 하나라도 잡아 보려고.”
“아아.”
확실히 케이뉴라는 소속사 이름은 생소했다. 차계원이 백이서를 빤히 본다. 이번에는 카메라 팀에 커피를 돌리고 있는 남자의 귓불이 코처럼 빨갰다. 연한 갈색 머리가 굽슬굽슬 목도리를 스친다.
“왜. 아는 사람이야?”
“글쎄.”
차계원이 들고 있던 라떼를 한 모금 마신다. 매서운 날씨에 쉽게 식어 버린 커피는 그새 미지근해져 있었다. 라떼. 그것도 미지근한 음료는 딱 질색이었다.
“매니저님.”
“응?”
“우리 이번 소속사 계약 얼마 남았죠?”
* * *
이서가 카메라 뒤에서 발을 동동 구른다. 스태프들과 한 걸음 떨어진 자리다. 찬 겨울바람이 뺨을 할퀴고 지나간다. 이번 씬만 찍으면 태미의 오늘 촬영은 끝이었다.
“컷!!”
감독이 우렁차게 컷을 외친다.
“오늘은 이만하자고. 날도 저무는데.”
스태프들이 웅성웅성 장비들을 정리하며 저녁 식사 메뉴를 논의했다. 이서가 매니저에게 담요를 받아 들고 한태미에게 뛰어간다.
“태미야! 오늘 추웠지. 고생했다. 날씨가 어제보다 더 춥네.”
어깨를 도닥이며 담요를 둘러 주자 태미가 새초롬한 표정으로 못 이기는 척 받아 든다. 그녀는 이제 갓 스물셋이 된 데뷔 3년 차 배우였다.
“대표님이 여기까지 웬일이세요?”
쏘아보는 시선이 냉랭하다. 데뷔만 시켜 주면 뭐든 하겠다며 빛내던 초롱초롱한 눈은 이제 없다.
“왜라니. 너 촬영하는데 고생하니까 왔지.”
“하긴. 우리 회사에 일하는 사람 저밖에 더 있어요?”
“하하. 그, 그렇지?”
아주 틀린 말이 아니기에 반박할 수 없었다. 현재 케이뉴 소속사에 배우는 단둘뿐이었다. 그마저도 한 명은 단역 활동이 전부다. 한태미를 데뷔시키기 위해 백이서는 밤낮없이 뛰어다녔었다. 아무것도 없는 기획사를 믿어 준 그녀가 고마웠고, 그런 그녀를 꼭 뜨게 하겠다는 어떤 필사의 다짐이 있었다.
그 다짐이 이런 결과를 만들 거라고 그때는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다.
“태미야, 잠깐 이야기 좀 할까?”
얼마 전 그녀는 CF를 통해 이름을 알렸다. CF는 중독성 있는 노래와 상큼한 영상미가 돋보였고, 덕분에 그녀 인생 처음으로 영화에, 그것도 조주연 중 하나로 캐스팅될 수 있었다. 그 CF 하나를 따내기 위해 백이서는 해당 광고 기획사의 문지방이 닳도록 드나들었었다. 간식이며 술이며 몇 번이나 대접하느라 빚도 더 늘었다.
그리고 태미는 이번 영화를 끝으로 소속사를 옮기겠노라 통보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녀를 욕할 수는 없다. 더 이름 있는 회사로 가고 싶은 건 배우의 욕망이며, 마침 계약도 끝나가고 있었다.
“아, 싫어요. 귀찮아. 귀찮아. 이제 막 촬영 끝난 사람한테 배려도 없어요?”
일부러 크게 말하는 태미의 목소리에 스텝 몇 명의 시선이 꽂힌다. 이서의 얼굴이 확 벌게졌다. 저 사람 대표 아니냐며 수군거리는 목소리들이 귓가를 따끔하게 만들었다.
“대표님.”
태미의 매니저이자 이서의 후배 휘준이 이서의 팔을 끌었다. 이목이 많으니 나중에 이야기하자는 뜻이었다.
“그래도 잠깐이면 돼. 무작정 우리 회사에 남아 달라는 말하려는 거 아니야.”
“몰라. 몰라! 난 좀 쉴래요. 다음에 이야기하면 되잖아요!”
태미가 등을 팍 돌린다.
“그럼 차에서라도…….”
“왜요? 그러면 제가 재계약이라도 할 거 같아요?”
“…….”
“회식 갈 사람들 여기 모이세요!”
“꺄아! 저요! 저 가요! 매니저님! 빨리 와요.”
신난 태미가 사람들이 몰려 있는 곳으로 뛰어간다. 휘준이 백이서의 눈치를 살핀다. 그의 표정에는 걱정스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너도 가 봐. 태미 살펴야지.”
“대표님은…….”
“난 먼저 가 볼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가 보겠습니다.”
“그래. 술 많이 못 마시게 해라. 너도 조금만 마시고.”
“네.”
휘준이 꾸벅 인사하고 사람들 틈으로 합류한다. 몇 번이고 뒤돌아보는 걸 보니 제가 마음에 걸리는가 보다. 서휘준은 묵묵하고 의리가 있는 사람이었다. 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
“하아.”
이서가 차로 걸음을 옮겼다. 10년 된 구형 승용차였다. 김승주가 대표직을 떠넘기며 같이 준 것이었다. 물론 떠넘겼다기보다 두고 도망갔다는 표현이 맞았다.
“어휴. 인생 참.”
그가 깊게 한숨을 내쉴 때였다. 뒤에서 낮고 부드러운 음성이 흘러나왔다.
“이제 가세요?”
“어? 아. 차계원 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