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이번 영화에서 주연을 맡은 차계원이었다. 그를 실제로 본 건 처음이었으나 그는 화면처럼, 아니 화면보다 훨씬 더 수려했다. 저 또한 그리 작은 체형은 아닌데, 190이 다 돼 가는 그가 옆에 서니 고개를 추어올리게 됐다. 머리를 위로 올린 이마가 매끄럽다.
“아까 커피 잘 마셔서요. 인사드리려고요.”
차계원이 빙긋 웃으며 손을 내민다. 얼떨결에 맞잡게 된 손은 참 다부졌다.
“아, 아니에요. 잘은 무슨.”
안 그래도 조각 같은 놈이 웃으면서 인사해 오니 주변이 다 화사해진다. 제가 게이여서 그런 것도 있지만 이건 돌이라도 설렐 외모다.
“저 명함도 안 주세요?”
차계원의 말에 이서가 부산스럽게 주머니를 뒤진다. 명함을 줄 일도, 요구하는 일도 점점 줄어들어 지갑에 명함 한 장이 없었다.
“명함. 아, 명함이……. 어떡하죠? 지금 없는데.”
“다음에 줘요. 그럼.”
부드럽게 웃은 차계원이 이서의 목도리를 가다듬어 주고 등을 돌린다.
* * *
“……이게 뭐야?”
“죄송해요. 대표님…….”
말은 죄송하다고 하면서 그녀는 망설임 없이 계약서를 내밀었다. 그녀의 손가락 끝은 계약 기간을 가리키고 있다. 자신의 계약이 끝나 간다는 뜻이다.
“너까지 이러면 어떻게 해. 우리 이제 배우 너밖에 없는 거 알잖아. 응? 성아야.”
“그러니까요! 무슨 회사가 소속 배우가 꼴랑 단둘이에요?!”
“제발 조금만. 응? 우리 이제 올라가고 있잖아. 너 곧 드라마도 들어갈 거고.”
“그 말도 지겨워 죽겠어요. 올라가긴 뭐가 올라가요? 의상 비용도 겨우 충당하는데. 저 이제 서른이에요. 언제까지 단역만 하냐고요!”
“안 그래도 네 배역 문제로 드라마 제작사랑 이야기하고 있으니까…….”
“이야기만 주야장천 하면 뭐 해요? 또 불발일 거 제가 모를 줄 알아요?”
성아가 화를 내며 사무실 문을 열고 뛰쳐나간다. 태미의 소속사 이전이 그녀에게도 자극이 된 듯싶었다.
“하. 진짜.”
이서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올린다. 하필 둘 다 계약 종료 시점이 비슷했다. 그렇다고 붙잡을 수도 없었다. 제대로 밀어 주지도 못한 주제에 누굴 붙잡을 수 있을까.
현재 나이 서른둘. 전 애인이자 대학 선배인 김승주의 꼬임에 넘어가 동업을 시작한 게, 4년 전 스물여덟이었다. 그는 잘생긴 대신 말을 잘하고 영악한 사람이었다.
“시발. 얼빠 새끼.”
그 얼굴에 빠져 그의 말이라면 다 믿었다. 백이서를 대표 이름으로 한 것과 백이서의 이름으로만 회사 자금을 구하는 게 이상하다고 느꼈을 때는 그가 이미 도망간 후였다. 잘생긴 사람은 얼굴값을 하고 못생긴 사람은 꼴값한다더니 그는 얼굴값 꼴값 다 했다.
징. 징.
책상 위에서 핸드폰 진동이 울린다. 대부업체 번호다. 이놈들은 말일만 되면 귀신같이 연락을 해 온다. 김승주는 골라도 어떻게 이런 곳을 골랐는지, 그들은 대부업체 중에서도 질이 나빴다. 이서가 핸드폰을 뒤집어 놓고 책상 위에 얼굴을 묻는다.
똑. 똑.
움찔.
고개를 숙이고 있는 이서의 가는 어깨가 움찔거린다.
‘전화 안 받는다고 찾아왔나?’
그래도 저번 달 이자까지는 꼬박꼬박 냈는데 이런 법이 어디 있나. 앞뒤 없는 놈들인 건 알았지만 서러움이 물밀듯이 몰려온다.
“대표님?”
그러나 들려오는 목소리는 빚쟁이의 목소리라기에는 너무 낮고 허스키했다.
“어?”
차계원.
고개를 들자 문 앞에 배우 차계원이 삐딱한 자세로 기댄 채 서 있었다. 백이서가 놀라 자리에서 일어난다.
“차계…….”
“안 반가우신가 봐요? 나 본 사람들은 다 반가워하던데.”
그가 이서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로 걸어 들어온다. 여유롭게 소파에 앉는 폼이 나른했다.
“아뇨! 안 반갑다니요. 그게 아니라. 여기를 왜…….”
저가 어제 뭘 잘못했나? 아니면 태미가? 아니 뭘 잘못했다고 해도 배우가 직접 올 일이 있나? 이서가 갈피를 못 잡고 허둥댄다. 차계원이 제 회사에 찾아오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아아. 저 여기 좀 들어올까 해서요.”
“어……. 이미 들어와 계신데.”
피식.
“아니. 대표님 회사요. 제가 들어오려고요.”
어색한 침묵이 사무실 내부를 채운다. 아니, 어색한 건 이서 혼자일지도 모른다. 차계원은 지금도 만면에 여유가 가득하다.
“예……?”
“여기는 배우 영입 안 해요? 아니면 제가 배우로서 별론가?”
고민하는 척 턱을 괴고 말하는 모습이 현실감 없었다.
“아니요!”
별로라니. 차계원이 배우로서 별로라면 대한민국에 배우 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는 흥행 보증 수표를 넘어 섭외 1순위였다. 아예 원하는 대로 시나리오를 써 줄 테니 출연만 해 달라며 비는 제작사도 상당했다. 태미가 마음 놓고 새 소속사를 찾아 나선 이유 중 하나도 이것일 거다. 차계원이 주연인 영화는 어차피 대박이 날 테니까.
“어……. 제가 이해가 잘 안 가서…….”
이서가 차계원의 맞은편 소파에 털썩 주저앉는다. 싸구려 소파는 쿠션감이라곤 하나도 없다. 소파 사이의 간격도 넓지 못했다.
“앗.”
얼이 빠져 벌어진 입에 차계원이 긴 손가락 하나를 쑥 넣었다 뺀다.
“왜 그렇게 벌리고 계세요. 뭐 넣어 달라는 것마냥.”
혀에 닿았다가 없어지는 감각에 이서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어진다.
‘이게 뭐지?’
“터지겠네.”
차계원이 방금 입에 넣었던 손가락으로 이서의 볼을 툭 친다. 눈앞의 모든 게 당황스러운데, 막상 차계원은 즐겁다는 듯이 웃고 있어서 당황스러운 티도 낼 수 없었다. 분명 무례한 행위가 맞으나 차계원이 하니 꼭 자연스러운 행동 같았다.
“아…….”
“나랑 계약 안 해요?”
차계원이 태연자약하게 묻는다. 제가 알기로 차계원은 저보다 다섯 살이나 어린 스물일곱이었다. 그런데도 꼭 자신보다 한참 어른 같다. 움직이는 동작이나 표정, 모든 태도 같은 게 그랬다.
“진짜 안 해?”
“아니요! 해요! 합니다!”
자신이 좀 맹하다는 소리는 들었어도 굴러 들어온 로또를 발로 찰 정도는 아니다. 사무실이 떠나가라 다짐하는 백이서를 보며 차계원이 발끝을 까딱인다.
“그래요. 사인해요. 그럼.”
“네?”
“사인.”
차계원이 친절하게 이서의 손에 펜 하나를 쥐여 준다. 소파 사이의 작은 테이블엔 어느새 계약서 하나가 놓여 있었다.
“어……. 계약서를……. 왜…….”
보통 계약서는 회사 측에서 준비하는 게 당연한 일이었다. 배우가 계약서를 내민다는 건 듣도 보도 못한 일이다. 상황 파악이 제대로 되지 않는 이서 앞에서 차계원이 당당하게 턱을 까딱인다. 어서 서명하지 않고 뭐 하냐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제가 좀 까다로워서.”
알기는 안다. 아무리 망해 가는 소속사 대표라도 같은 바닥에 있는지라 소문 몇 가지 주워들은 건 있었다.
예컨대 차계원의 집안이 보통이 아니라거나 차계원한테 걸리면 뼈도 못 추린다거나 겉보기와 달리 소름 끼치는 부분이 있다거나 같은 소문들.
하지만 소문은 소문이었다. 이 바닥에서 고작 저 정도 소문이면 아주 깨끗한 측에 속했다. 그마저도 저 잘생긴 외모 앞에서 다 사그라들었다.
“아. 그럼 한 번 읽어 볼게요.”
배우가 직접 앞에 계약서를 들이민다는 건 말도 안 되지만 그런 걸 따질 처지가 아니었다. 차계원이다. 다른 배우도 아니고 무려 차계원. 계약서가 아니라 양잿물을 통째 먹여도 감사해야 할 판국이었다. 하지만 차계원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백이서가 읽기 위해 집어 든 계약서를 다시 테이블 위에 올려놓는다.
“내용은 내가 말해 줄 테니까 사인부터 해요.”
“하지만…….”
“싫어요? 아까는 좋다며.”
물어봐 놓고 대답을 듣기도 전에 이서의 손을 가지고 가 서명란을 채워 넣는다. 백이서. 이름 석 자가 바른 글씨로 계약서 하단에 새겨진다.
“계약 기간은 제가 나가고 싶을 때까지로 할게요.”
“예?”
이서의 입에서 고음이 나온다. 소꿉놀이도 아니고, 뭐 이런 불합리한 경우가 다 있나. 그럼 언제든 제 기분 내킬 때 나가면 그만인데.
“왜요.”
“아니 그게. 그건 계약이 아닌 것 같아서요……. 계약은 기간을 정하고…….”
“제가 안 나가고 싶게 만들면 되잖아요.”
“그, 그걸 제가 어떻게…….”
“말만 잘 들으시면 돼요. 헛짓거리 안 하고.”
“아니…….”
그것도 못 하냐는 듯 차계원이 다리를 반대로 꼰다. 이서의 입이 무언가를 말할 것처럼 우물거린다. 아무리 봐도 이건 정상적인 회사와 배우 간의 계약 같지가 않은데 쉽게 말이 나오지 않았다.
“매니저랑 코디, 기타 나한테 필요한 인력들은 내가 데려와요.”
“전부요?”
“어차피 여기 직원도 없는 걸로 아는데요.”
“네…….”
입이 있어도 할 말이 없다. 지금 회사는 직속 코디도 없어 일용직으로 고용하는 실정이었다. 이야기를 이어 갈수록 이서의 어깨가 위축된다.
“수입 정산은 회계사가 알아서 해 줄 거예요. 걱정 마요, 떼먹는 거 없으니까.”
“예?”
“…….”
들을수록 기가 찬다. 이건 꼭 차계원이 제 회사에 들어오는 게 아니라 제가 차계원의 회사로 들어가는 것 같았다.
“일부러 그래요?”
“예? 뭐를…….”
“되묻는 거.”
“제가 뭐 하러…….”
“귀여워 보이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