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그의 표정이 오만하다. 이서가 황당함에 입술 사이에 힘을 준다. 아까처럼 입이 벌어졌다가는 차계원이 또 손가락을 넣을까 봐서였다.
“아무튼, 앞으로 잘 부탁하죠.”
계원이 악수를 청하듯 손을 내밀자 백이서가 저도 모르게 두 손으로 그 손을 잡는다. 그 꼴이 우스워 계원의 입매가 올라간다.
“사무실은 곧 옮길 거니까 준비해 놔요. 어차피 짐도 없어 보이네.”
“회사 사무실을 말인가요?”
“바로 옮기고 싶어도 참아요. 아직 인테리어 공사 중이라.”
“사무실을 옮길 필요는 없는 거 같은데…….”
이서가 웅얼거렸다. 들을수록 이게 뭔가 싶다. 어딘가 이상한데 그게 한두 개가 아니라 딱 꼬집어 말할 수도 없었다. 와중에 차계원은 묘하게 강압적이었고 솔직하게 말하면 살짝 무서웠다.
“내가 이 후진 데랑 어울려요?”
“그건 또 아니기는 하지만…….”
“그럼 됐어요.”
차계원이 마디가 굵은 손가락을 뻗어 백이서의 뺨을 톡톡 친다. 순간 고개를 뒤로 물리려 하자 차계원의 사나운 시선이 박힌다.
덜컥.
“사장님!”
“어어. 태미야. 무슨 일이야.”
“꺄아아.”
사무실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온 태미가 차계원을 보자마자 환호성을 지른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환호성 덕분에 차계원이 사무실에 발을 들였을 때부터 얼떨떨하던 감정이 조금이나마 정리되는 것 같았다.
“세상에, 선배님 무슨 일이세요? 저 지금 꿈꿔요?”
사무실에는 발도 안 디딜 것처럼 굴더니 소파에 자리를 차지하고 앉는다. 파일을 들고 온 거로 보아 계약 해지를 위한 방문으로 보였다.
“파일 줘.”
사실 태미가 오기 전에 계약 해지 각서를 준비해 놓기는 했다. 태미는 야망 있는 사람이었다. 더 이상의 설득은 통하지 않을 것이다. 실은 가망성 없는 회사보다 그편이 더 그녀에게 좋다는 걸 이서도 알고 있다.
“여기요.”
한태미가 이서 쪽으로는 시선도 두지 않고 파일만 건넨다. 계원의 인상이 단박에 찌푸려진다. 한참 어린애한테 무시당하면서도 평온한 백이서의 표정이 머저리 같았다.
‘호구였네.’
백이서는 마른 체형 때문인지 선이 유난히 도드라져 보였다. 안 그래도 하얀 게 표정 변화도 별로 없어 냉소적으로 보였는데 그냥 등신이었다.
“선배님 진짜 무슨 일 때문에 오신 거예요? 어제 회식도 빠지시고.”
태미가 큰 눈을 더 크게 뜨며 묻는다. 와중에도 차계원이 어렵기는 한지 살살 눈치를 살핀다.
“대표님이랑 나눌 이야기가 있어서요.”
자연스레 선을 긋는 태도에도 태미는 굴하지 않고 말을 잇는다. 하긴, 저런 집념 덕에 이런 능력 없는 소속사를 끼고도 살아남을 수 있었을 거다.
“저희 대표님이랑요? 점심은 드셨어요? 저 아직 안 먹었는데 같이 드실래요?”
“…….”
“맞다! 이 앞에 맛집 있어요! 방송에도 나왔는데!”
“태미 씨 혼자 드세요. 난 말 많은 사람이랑 식사하면 체해서.”
차계원의 쌀쌀맞은 태도에 지켜보는 이서가 다 무안했다. 태미에게 차계원은 동경의 대상일 터였다.
“휘준이 통해서 보낼 테니까 들어가 봐. 몸 관리 잘하고. 중요한 때잖아.”
“……네.”
자리에서 일어난 태미가 나가지는 않고 뭉그적거리며 차계원을 살핀다. 분명 시선이 느껴질 텐데도 그는 모른 척 계약서만 넘겼다.
“선배님은 안 들어가세요?”
“어딜 가요. 여기가 내 회산데.”
“네?”
태미가 대답을 요구하듯 이서를 본다. 사인을 하기는 했는데 이걸 뭐라 설명해야 할지 난감하다. 차계원이라도 뭐라 말을 해 줬으면 좋겠는데 외려 합세해 이서를 본다. 한참을 망설이던 이서가 부담스러운 시선들을 이기지 못하고 어렵사리 입을 뗀다.
“차계원 씨 우리 회사로 들어오기로 했어.”
“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여길 왜요?!”
태미의 솔직한 반응에 이서가 씁쓸하게 웃는다. 태미의 반응은 당연하다. 현재 차계원이 소속된 회사는 국내 굵직한 배우들만 모아 놓은 곳이었다. 서포트도 좋았고 배우 관리도 뛰어났다.
‘왜냐니.’
그건 제가 더 궁금했다.
“잠깐만요!”
태미가 이서에게 들린 파일을 홱 뺏는다.
“저 조금만 더 생각해 볼게요. 너무 성급했던 것 같아요.”
“뭐……. 그래.”
이런 거로 쉽게 뒤집힐 마음이었다는 게 떨떠름하기는 했으나, 그녀가 나가 주지 않는다면 회사 측에서는 이득이었다.
“안 나갑니까? 볼일 다 끝난 거로 보이는데.”
차계원이 냉랭하게 내뱉는다. 선을 긋는 태도에 말도 더 못 붙여 보고 태미의 어깨가 움츠러든다.
“……저 먼저 들어가 볼게요. 연락할게요, 사장님. 알았죠?”
“그래그래. 조심히 들어가.”
태미가 마지막까지 당부를 남기며 사무실 문을 나선다. 그녀는 크게 될 거다. 배우로서 그녀는 만점이니까.
“흐음. 받아 줄 거예요?”
차계원이 주어 없이 불쑥 질문해 온다.
“……뭘요?”
“쟤 받을 거냐고. 다른 데랑 재계약한다고 꼽줬었잖아.”
“……나쁜 애는 아니에요. 태미 말이 틀린 것도 아니고.”
촬영장에서의 대화를 들었나 보다. 꽤 소리가 컸으니 못 듣는 것도 이상했다. 부끄러움에 이서가 시선을 피한다. 얼마나 힘없고 초라해 보였을까. 차계원이 먼저 계약서를 내미는 것도 이해가 간다. 저라도 이런 회사는 못 믿겠다 싶다.
“대표님은 밸도 없어요? 받지 말아요.”
“회사 차원에서는 고마운 입장이라…….”
“…….”
“같이한 시간도 있고요.”
“별.”
계원이 코웃음 친다. 상대는 철저하게 자기 입장만 생각해 움직이는데 고맙기는 개뿔. 저 답답한 꼴을 보고 있자니 조금 전까지 좋았던 기분이 삽시간에 잡친다.
“일어나요.”
“예?”
“앞에 맛집 있다면서.”
* * *
“먹여 달라는 뜻이에요?”
“……?”
샐러드를 입에 넣다 말고 이서가 뚝 멈춘다. 유자 향의 드레싱이 접시에 뚝뚝 떨어진다.
“깨작거리길래 내가 눈치 없는 건가 해서.”
“아뇨. 괜찮습니다.”
차계원의 말은 농담인지 진담인지 구별하기가 어려웠다. 사실 저게 농담이어도 진담이어도 무섭다.
“더 먹어요.”
제 앞에 잘 썰어진 고기를 놓아준다. 유명 셰프가 운영하는 레스토랑은 물 한 모금까지 청량한 느낌이 들었다. 회사 코앞에 위치해 있는데도 방문해 본 건 오늘이 처음이었다.
“……감사합니다.”
“저는 안 줘요? 가는 게 있으면 오는 게 있어야지.”
멋대로 줘놓고 이서를 파렴치한 보듯 보는 차계원의 표정이 뻔뻔하다.
“맛있게 드세요…….”
서툴게 고기를 뭉텅이로 잘라내 차계원의 앞에 놔준다. 포크로 고깃덩이를 푹 찍어 올린 차계원이 성의 없는 손짓으로 고기를 빙빙 돌린다.
“뭐, 맛만 있으면 됐죠.”
“……저 여쭤보고 싶은 게 있는데.”
“말해요.”
“왜 우리 회사로 들어오고 싶으신지…….”
이서는 잘 속는 편이었다. 어리숙해서 그런 것도 있지만 뭐든 그러려니 하는 성격 때문이었다. 허튼 말도 그렇구나, 하고 넘어가다 보니 큰일 날 뻔한 적이 허다했다.
제 회사 사정은 제가 제일 잘 안다. 이건 신종 사기 수법이라고밖에 설명이 안 된다. 하지만 상대는 차계원이다. 차계원이 뭐 때문에 저한테 사기를 치겠는가.
“도장까지 다 찍은 마당에 궁금해요?”
“네. 궁금한데…….”
‘궁금한 게 정상 아닌가.’
“마음에 들어서죠. 다른 이유가 있나.”
대체 뭐가 마음에 든다는 말일까. 바닥을 치는 평판이? 작품 하나 못 따내는 영업력이? 이해는 안 갔으나 되물어 봐야 제대로 말해 줄 것 같지도 않다.
사실 제일 신경 쓰이는 건 따로 있었다. 조금 전 읽어 보지도 못하고 사인한 계약서다.
“계약 내용은…….”
차계원이 말을 뚝 끊는다.
“차차 알아 가요. 별거 없으니까.”
차계원이 내밀었던 계약서는 척 봐도 열 몇 장이 넘어갔다. 그걸 사인만 받고 냉큼 챙겨 갔다. 적어도 사본이라도 주는 게 응당 맞는 일인데 그럴 기미도 없어 보인다.
“아까는 말해 주시겠다고…….”
“거짓말이죠.”
“네?”
“꼬시려면 뭔 말을 못 해요. 보기보다 멍청하시네요. 아, 보기에도 멍청하다.”
혼잣말 같은 비난을 무심하게 내뱉고 알맞게 자른 고기를 이서의 입에 넣는다.
“그래도 계약서느……. 으읍.”
“꼭꼭 씹어요. 옳지.”
이서가 천천히 고기를 씹는다. 고기의 맛이 제대로 느껴지지 않는다. 차계원의 행동은 묘하게 아슬아슬했다. 그러니까 이건 꼭.
‘플러팅 같은데.’
자신을 대하는 그의 태도는 플러팅과 비슷했다. 조금 위험하고 제멋대로인 플러팅.
‘아니야. 말도 안 되지.’
차계원이 저한테 그럴 리가 없다. 괜히 제가 지레 착각하는 거다. 이서가 제대로 몇 번 씹지 않은 고기를 꼴딱 삼킨다.
“쯧. 꼭꼭 씹으라니까.”
차계원이 혀를 찬다.
징. 징.
그때 핸드폰 진동이 소란스럽게 울렸다. 차계원의 것이었다.
“나 전화 좀 받고 올 테니까 기다려요.”
“아. 네.”
“이건 먹고 도망가면 안 돼요.”
알 수 없는 소리를 한 차계원이 가게 룸을 나간다. 셰프는 차계원과 친한 지인이라고 했다. 레스토랑에서 제일 좋은 룸으로 안내받은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인상 좋은 그는 차계원에게 빚진 게 있다며 비용은 안 받을 테니 마음껏 먹으라 당부했다. 그런데 도망이라니. 계산할 필요도 없는데 도망칠 일이 뭐가 있단 말인가.
“소화 안 돼…….”
원래도 입이 짧은데 모든 상황이 이해가 안 가니 음식도 안 들어갔다. 결국, 이서는 차계원이 돌아올 때까지 샐러드만 조금 깨작거릴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