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차 안의 공기가 냉랭하다. 차계원의 흥얼거림만 고요한 차 안에 퍼진다. 제 눈치만 보는 사람은 상관도 없다는 듯한 음색에 김건이 입을 연다.
“다시 생각해 볼 여지는 없어?”
“같은 말 하게 하지 마요. 짜증 나니까.”
방금까지의 흥얼거림이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싸늘하다.
“너한테도 손해니까 하는 말이야…….”
현재 차계원이 몸담고 있는 소속사 투와이는 대한민국 연예 기획사 중 제일 힘이 셌다.
“손해? 매니저님은 개미한테도 손해 입어요?”
물론 기획사 자체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기획사가 그만큼 큰 것도 차계원 덕분이었으니까. 문제는 차계원의 계약이 2년이나 남았다는 것이다.
“위약금만 20억이야. 우리 들어가기로 했던 작품도 다 중지되고……. 혹시나 소송이라도 들어오면 그거 나름대로 골치 아프잖냐.”
“거기도 위약금 물어 줘요. 그럼.”
“차라리 영화라도 마무리하고 옮기는 건 어때? 이제 막바지잖아.”
“…….”
거의 애원하듯 말하는 김건에게 차계원은 시선도 주지 않는다.
“……회사 사람들 다 너한테 잘했잖아. 대표님도 너라면 얼마나 쩔쩔매. 다 맞춰 주는데 뭐가 마음에 안 들어서…….”
쩔쩔매다 뿐일까. 차계원의 성격을 잘 아는 소속사는 행여 그의 심기라도 건드릴까 봐 언제나 노심초사였다.
“아.”
“내가 틀린 말 해? 너 생각해서 그러는 거 아냐!”
“시발, 진짜.”
짜증 섞인 음성에 김건이 긴 한숨을 내쉬고 입을 다문다. 어제만 대표한테 온 전화가 50통은 넘는다. 건은 회사 소속이 아니라 10여 년 전 차계원이 개인적으로 고용한 사람이었다. 계약서상으로도 회사에 소속되어 있지 않았다. 차계원과 회사 둘 사이에 서면 당연히 차계원을 선택해야 했다.
“내가 진짜 너랑 오래 일했지만. 네 속을 모르겠다.”
지랄맞기도 이렇게 지랄맞을 수가 없다. 그래도 저한테는 친절한 편이라는 게 코미디다. 어릴 때부터 보아 온 정이 있어 관둘 수도 없고. 또 차계원은 제 사람에게 봉급은 톡톡히 주는 편이었다.
“기사는 그냥 이해관계가 맞지 않았다고 낼게. 합의하에 계약 끝내는 거라고.”
“그러든지.”
차계원이 심드렁하게 대꾸한다. 내일이면 연예계가 떠들썩해질 거다. 온갖 기사가 쏟아질 거고 거기에 따른 추측성 말들도 따라붙을 것이다. 물론 차계원은 신경도 쓰지 않겠지만.
* * *
“바로 집으로 들어가지. 기자들 냄새 맡았을 텐데.”
“무슨 상관이에요.”
실랑이는 예상보다 길어졌다. 실랑이라기보다 한쪽이 끈질기게 매달리는 거였다. 차계원이 있는 4년간 주가를 톡톡히 올린 대표 김진수는 종래에 바짓가랑이까지 붙들고 늘어졌었다.
“거머리 새끼들.”
차계원이 읊조린다. 하다 하다 안 되니 대표는 협박까지 시도했었다. 주가를 네가 책임질 거냐는 둥. 네 인성 개판인 거 기사 내겠다는 둥. 앞으로 작품 못 들어가게 할 거라는 둥.
물론 씨알도 안 먹혔다. 차계원의 어머니는 방송 채널까지 딸린 신문사를 운영했다. 여태 그에 대한 안 좋은 기사가 한 줄도 뜨지 않은 데에는 그 영향력이 한몫했다.
그렇게 협박의 주체는 순식간에 바뀌었다. 더군다나 그의 조부는 국내 굴지 무역 회사의 창시자였다.
“왜 말로 하면 못 알아들을까.”
일생을 갖다 바친 회사까지 무너트리고 싶지 않았던 김진수는 울며불며 계원을 놓아줬다. 제풀에 꺾여 위약금도 필요 없다며 빌었다.
“여기서 내려요.”
계원이 도착한 곳은 케이뉴의 지하 주차장이었다. 건물이 작으니 주차장도 협소했다.
“오기는 했는데 여기는 뭐 하러? 여기 그 한태미네 소속사 아냐?”
“잔말 말고 세워요.”
김건의 잔소리를 무시하며 내린 계원의 시선에 둥근 뒤통수 하나와 그 앞의 커다란 인영 하나가 보인다. 계원의 미간이 단박에 찌푸려진다.
“하. 저건 또 뭐야.”
* * *
“잘 전해 줘.”
“……저는 계속 여기 있을 겁니다.”
고개 숙인 휘준의 까무잡잡한 목덜미가 눈에 들어온다. 괜히 휘준의 발목을 잡아 두고 있는 것 같아, 전공을 살려 이직할 것을 몇 번 권한 적도 있었다. 그때도 그는 늘 지금처럼 고개를 숙이고 이곳에 있겠다며 다짐하듯 말했다.
‘의리 있는 놈.’
이 쥐똥만 한 회사 뭐 붙어먹을 게 있다고 5년 가까이 고생인지. 회사 초반부터 같이 일한 사람 중 아직도 남아 있는 건 휘준이 유일하다. 그의 묵묵함에 코끝이 찡했다.
“당연하지, 인마! 너도 이직하려 그랬냐! 이제는 늦었어.”
“형!”
휘준은 꼬박꼬박 대표님이라 부르다가도 당황하면 형 내지는 선배라 불렀다. 말 놓으라는 소리를 대학 때부터 했는데 도통 듣지를 않는다. 말이 매니저지 미숙한 저를 대신해 정산 업무를 돕기도 하고, 없는 인력 때문에 잡일도 도맡아 했다. 그가 태미의 매니저를 맡게 된 것도 그래서였다.
“운전 항상 조심하고.”
“네. 대표님도 조심하십시오.”
“태미랑 정리되면 아예 실장 시켜 줄게. 하는 일이야 별반 다르겠느냐마는.”
“저는 뭐든 상관없습니다.”
그럴 것이다. 서휘준은 회사 청소만 하라 해도 할 놈이다. 저 무뚝뚝한 표정과 말투가 역설적으로 가끔 힘이 되고는 했다.
“들어가 봐.”
이서가 웃으며 손을 작게 흔든다.
“들어가 보겠습니다…….”
인사하며 발걸음을 옮기려 하던 휘준이 멈칫한다. 휘준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리니 차계원이 이쪽으로 성큼성큼 걸어오고 있었다. 넓은 보폭이 성급하다.
“차계원 씨? 어쩐 일로…….”
“누구예요?”
이서의 팔을 잡아챈 차계원에게서 대답 대신 사나운 질문이 나온다.
“아. 우리 회사 휘준 씨예요. 서휘준. 잘됐네. 안 그래도 서로 인사할 자리 만들려 했는데…….”
“안녕하십니까. 서휘준입니다.”
휘준이 먼저 악수를 청한다. 고개를 까딱 옆으로 꺾은 차계원이 그 손을 내려다본다. 마주 잡을 생각이 없어 보이는 태도에 이서가 황급히 말을 돌린다.
“차계원 씨는 아까 말했지? 앞으로 우리 회사로 들어오실 거야.”
“앞으로가 아니라 들어왔죠.”
“하하. 그쵸…….”
이서가 어색하게 제 뒷머리를 긁적인다. 살짝 올라간 둥근 눈에 의아함이 가득하다.
“되게 늦게까지 일하시네요. 열정이 넘치시나 봐.”
차계원의 목소리에 이유 없이 비꼬는 티가 역력하다. 어딘가 화난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안 그래도 이제 갈 거예요. 빨리 들어가. 늦었다.”
“……내일 뵙겠습니다.”
어서 들여보내려는 이서의 마음을 읽은 건지, 분위기가 좋지 못하다는 걸 느꼈는지 휘준이 별다른 말 없이 주차장을 나선다. 휘준의 차가 빠져나갈 때까지 팔짱만 끼고 보던 계원이 그제야 입을 연다.
“뭐 하는 사람이에요?”
“계원 씨는 무슨 일이세요?”
체할 것 같은 식사를 하고 헤어진 게 불과 몇 시간도 지나지 않았는데 무슨 일인가 싶다. 그것도 이렇게 매서운 분위기를 풍기면서.
“……자주 오면 좋죠. 회사도 적응하고.”
“어…….”
분명 사무실을 옮긴다고 한 것 같은데 적응이 필요한가 싶었지만, 이서는 입 밖에 내지 않았다. 괜한 말로 긁어 부스럼 만들고 싶지 않았다.
“저거 뭔 사이냐고.”
차계원의 말투가 사나웠다. 한껏 찌푸린 인상이 딱딱하다.
“지금은 태미 매니저예요. 영화 촬영할 때 못 보셨어요?”
지금 차계원은 꼭 자신을 취조하는 것 같았다. 선을 넘는 듯한 그의 태도를 이해할 수 없고 불편했으나, 이 날 선 분위기에서 빠져나가고 싶은 이서가 부러 더 능청스러운 척 대답했다.
“매니저 같은 소리 하네. 근데 저렇게 발정 난 눈으로 봐요?”
이서가 빠져나가려는 걸 용납하기 싫다는 듯 차계원이 공격적으로 물어 온다.
“예?!”
갑작스레 들어오는 상스러운 말에 이서의 얼굴이 목까지 붉어진다. 제가 들은 게 잘못 들은 질문이었으면 싶었다. 어버버 하는 아래턱의 잔 떨림을 본 차계원이 피식 웃는다.
“저렇게 생긴 사람 좋아해요?”
차계원이 턱짓으로 휘준이 떠난 자리를 가리킨다.
“지금 대체……. 대체 왜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이서의 목소리가 다른 때와 달리 높아진다. 이런 직접적인 희롱은 태어나 처음이었다. 이제는 핏줄까지 선 이서의 목을 계원이 한 손에 잡아 제 코앞까지 끌어온다. 이서의 이마가 계원의 쇄골에 부딪힌다.
“컥…… 켁, 켁.”
갑작스러운 힘에 침이 잘못 넘어갔다. 캑캑거리는 이서를 보면서도 계원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는다.
“대표님 게이잖아. 둘이 동료냐고 자는 사이냐고.”
차계원이 조소를 머금고 말한다. 갑작스러운 아웃팅에 침 삼키는 것도 잊은 이서의 심장이 곤두박질친다. 쿵. 쿵. 가슴이 미칠 듯한 불안감으로 크게 뛰었다.
“아, 아니…….”
당황스러운 마음이 부정하는 말 먼저 내뱉는다.
“하?”
“아니에요, 왜…….”
“아니라고?”
“그런 걸 왜 물으시는지 저는 전혀……. 이건 사생활이고 또…….”
“당신 나랑 잔 적 있잖아. 근데 게이는 아니야?”
차계원의 한쪽 입술이 삐뚜름하게 올라간다. 같잖다는 그 표정에 이서의 낯빛이 하얗다 못해 창백하게 질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