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비도덕적 안락함-6화 (6/100)

#6

절로 새된 소리가 나온다. 제가 잘못 읽은 게 아닐까 다시 읽어 봤지만, 숫자는 변하지 않았다.

‘너무 싸죠? 내 계약금이 겨우 5억이라니.’

‘말도 안 돼……. 난 이런 거 동의한 적 없어……. 저랑 상의해서 정한 거 아니잖아요.’

‘그럼. 이 사인은 뭐야. 여기 지장도 찍었는데?’

톡. 톡.

차계원의 긴 손가락이 맨 앞장에 찍힌 지장을 가리킨다. 낮에 이서의 손을 가져가 찍은 것이었다. 빙글빙글 웃는 차계원이 원망스럽다.

이서가 팔을 뻗어 계약서를 뺏으려 하자 계원의 팔이 여유롭게 위로 들린다. 닿을 리 없다.

‘어이쿠, 안 되지.’

‘그, 그래도 계약을 이대로 진행하는 건…….’

차계원이 이서의 작은 머리통에 손을 넣어 머리카락을 잡아당긴다. 말이 이어지지 못하고 끊긴다.

‘대표님 빚이 조금 많으시던데……. 감당 가능해요?’

‘윽.’

머리카락을 파고드는 손은 단단했다. 두피가 당겨져 절로 앓는 소리가 나왔다.

‘난 그런 잔챙이들이랑 달라. 당신 머리 가죽까지 벗겨내서 받아낼 거거든. 자신 있어?’

‘아, 아니요…….’

‘그러니까.’

차계원이 손에 힘을 빼고 이서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손가락 사이로 스치는 얇은 머리카락들이 부슬거린다.

‘아…….’

그제야 알았다. 자신이 왜 차계원을 불편해했는지. 왜 차계원을 보며 어깨가 움츠러들었는지. 본능이었다. 포식자의 같은 눈빛을 가진 자에 대한 본능.

be under one’s thumb

“백이서?”

경쾌한 목소리가 상념을 깨운다. 유니폼을 팔뚝까지 걷어붙인 심찬이 특유의 개구진 얼굴을 들이민다.

“형…….”

“뭐야. 빽이 맞네. 왔으면 불러야 할 거 아냐!”

이서가 부러 어깨를 축 내린다. 심찬은 이서가 어리광부릴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이었다. 찬은 항상 이서를 빽이라고 불렀다.

“바빠서 안 나오는 줄 알았지. 잘 지냈어?”

“빨리도 묻는다. 코빼기도 안 보이던 새끼가.”

탁.

말은 퉁명스러우면서 소담스럽게 썰어 놓은 과일을 내어준다.

“안주도 먹고. 넌 어떻게 애가 더 말랐냐.”

“으응…….”

청포도 한 알을 입에 넣고 굴리니 새콤하면서 단 과즙이 입 안 가득 찬다. 불안으로 요동치던 마음이 조금은 가라앉는 것 같다.

“일이 바빴어……. 미안해, 형.”

“됐다. 됐어. 일은 잘돼?”

서운한 기색은 딱히 없었다. 대학 졸업 직전 승주는 이른바 잠수 이별을 탔었다. 그 시기에 커뮤니티 사이트에서 고민 상담을 하다 우연히 알게 된 그는 이서의 사정을 잘 알고 있었다.

처음 친해지게 된 계기도 상담해 줄 테니 가게로 오라고 했던 날이었다.

“똑같지 뭐……. 태화 형은?”

“잘 있지 인마.”

둘은 고등학교 때부터 만나서 거의 10년 가까이 연애 중이었다. 우스갯소리로 이쯤 되면 부부 아니냐는 놀림을 받으면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김승주 연락 왔냐?”

“형!”

이서가 과일을 팍 내려놓는다. 입맛이 딱 떨어진다. 이서의 사정을 알고 있는 찬은 김승주를 유난히 싫어했고 꼭 잊을 만하면 한 번씩 물어 왔다.

“성질은……. 하도 죽상을 하고 있으니까 그러는 거 아냐! 너 그 새끼 관련된 일이면 청승 떠느라 일 못 보잖아.”

“언제 적 이야기야 그게!”

“아니면 말지 왜 화를 내냐? 찔리는 거 있는 사람처럼.”

“아, 됐어! 형이랑 이야기 안 해!”

빽 소리친 이서가 재킷을 들고 나가려는 시늉을 취한다. 바 테이블에서 일어나 한 발을 뻗으니 심찬이 달래듯 다시 끌어다 앉힌다.

“에구. 삐졌어요? 우리 빽이 팩! 삐져 버렸어요?”

그가 입을 네모꼴 비슷하게 만들고 과장된 목소리를 낸다. 만나면 한 번을 안 빼놓고 자신을 놀리려 드는 게 아주 얄미워 죽겠다.

“아 진짜!”

열이 올라 아득바득대는 이서 앞에서 배까지 부여잡고 웃던 찬이 드디어 진지하게 이서를 바라본다.

“알았다, 알았어. 뭔데 그럼. 왜 죽상인데. 너 꼭 뭔 일 있을 때 찾아오잖아.”

“…….”

“앉아 봐. 오늘 손님도 없으니까.”

“하…….”

“뭐냐니까. 너 이래 놓고 별일 아니면 죽인다, 진짜.”

이서가 입을 뗐다 붙이는 걸 몇 번이고 반복한다. 아무리 이런저런 이야기를 다 한 사이라도 차계원과 잔 것 같다는 말은 쉽사리 나오지 않았다.

결국, 상대가 차계원인 걸 빼고 말하자고 결심한 이서가 입을 연다.

“형 혹시 나 3년 전에 가게 온 날 기억나?”

“기억나겠냐? 너 그때 뻔질나게 드나들었는데? 차였다고 징징 울면서 아주. 으. 나니까 봐준 거야. 나니까.”

또 놀리려고 드는 찬을 이서가 황급히 저지한다.

“아니! 나 엄청 취한 날.”

솔직히 말하자면 차계원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아예 짐작 가는 날이 없는 건 아니었다.

본디 이서는 술을 즐기는 편이기도 했었고 주량도 센 편에 속했다. 원래도 소주 두 병은 너끈했는데 이쪽 일을 하다 보니 이제는 세 병 넘게 마셔도 말짱했다. 그런데 딱 하루. 인사불성이 되도록 취한 적이 있었다.

“그 왜. 형이 막 보드카 준 적 있잖아.”

“그게 한두 번이냐? 너 맨날 가게 술 다 갖다 먹잖냐.”

“형이 준 거지 내가 가져다 먹었어?!”

매번 그만 마시겠다는 자신에게 따라 주는 건 본인이면서. 이서가 억울함을 감추지 못하고 씩씩거린다. 찬이 또 한바탕 웃어댄다.

“형 친구가 체코 여행 갔다 왔다고 선물 준 거! 88도인가 89도인가 온더락으로 계속 따라 줬었잖아. 기억 안 나?”

이름도 기억 안 나는 압생트 중 하나였다. 처음 보는 신기한 도수에 객기를 부린 게 화근이었다. 그제야 찬이 기억난다는 듯 손가락 두 개를 맞부딪혔다.

“야, 당연히 기억나지! 곰도 쓰러진다는데 너 안 쓰러졌잖냐. 진짜 미친 새끼야, 너는.”

안 쓰러지기는 개뿔. 곰도 쓰러진다는데 자신이 살아남았을 리가.

두 잔을 마시고 가까스로 괜찮은 척 가게를 빠져나간 게 그날 기억의 끝이었다. 가게를 나가자마자 토를 했던 것도 같다.

“……나 그날 누구랑 잤나 봐.”

그리고 그 누구가 차계원이 맞을 수도 있다. 이서의 한숨이 깊어진다. 하루지만 직접 본 차계원은 소문과 달랐다. 소문보다 무척 대담하고 위험했다. 아직도 그에게 당겨진 두피가 아릿하다. 목이 잡힐 때는 정말 그 커다란 손이 제 목을 조르는 것 같았다.

‘안 돼.’

목덜미부터 소름이 올라온다. 번뜩이는 눈이 꼭 승냥이 저리 가라 할 정도로 사나웠다. 회사고 뭐고 당장 계약을 물리고 싶은 심정이다.

“잘했네. 부럽다 야. 역시 사람은 얼굴이 다야 다. 봐봐 그걸 마시고도 잘 물어가고.”

남의 속도 모르고 심찬이 편한 소리를 해댄다.

“어떡해?”

“참나. 너 원나잇 몇 번 해 봤잖아. 그게 무슨 큰일이라고.”

해보긴 해 봤다. 김승주에 대한 배신감은 제게 꽤 긴 방황을 가져왔다. 하지만 누군가를 만날수록 모든 게 부질없다는 생각만 확고해졌었다.

“진짜 어떡해…….”

이야기할수록 어렴풋한 기억이 점점 선명해진다. 기억이 끊긴 다음 날 자신은 한 호텔에서 일어났다. 미칠 듯한 숙취를 끌어안고 난생처음 보는 호화스러운 호텔 방에 기겁했던 것이 뿌옇게 안개처럼 떠오른다. 살면서 호텔에 그런 룸이 있는 줄도 몰랐다. 끊긴 필름에 대한 자책감과 호텔 방의 기세에 눌려 옆의 인영을 확인할 생각도 못 하고 황급히 도망쳐 나왔었다.

“맞나 봐…….”

부정하면 할수록 아귀가 들어맞는다. 책상에 소파까지 있던 룸은 제 집보다 넓었다. 하룻밤에 그런 룸을 빌리는 사람이 세상에 몇이나 될까.

“땅 파고 들어가겠네. 그만해라 그만해. 사내새끼가 쫌스럽게.”

“얼굴이나 확인하고 튈걸.”

이서가 우는 소리를 낸다. 제 안이함의 대가가 이렇게 눈덩이처럼 불어나 자신을 덮칠 줄 어떻게 알았겠는가. 따지고 보면 차계원이 자신에게 거짓말할 이유도 없었다.

“대체 뭐가 걱정이냐. 어? 그것도 다 지난 일 가져다가. 3일 전도 아니고 3년 전 일을.”

그러니까. 제 말이 그 말이다. 3일 전도 아니고 3년 전 일을 차계원은 왜 들춰내서 사람을 불안하게 만드냔 말이다.

“그때 잔 사람 우연히 마주쳤어.”

“……우연히?”

“어쩌다 보니까…….”

의심스럽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는 심찬에게 이서가 얼버무린다. 그 사람이 차계원인 걸 알면 형 또한 놀라 나자빠질 것이다. 정신을 붙들고 있는 제 자신이 용했다.

“그럴 수도 있지 뭐. 이참에 연애나 해 봐.”

“……나 연애 안 해.”

“…….”

심찬은 백이서를 퍽 아꼈다. 요즘 사람답지 않게 앞뒤가 같은 사람이었다. 다만, 제가 보기에 그는 답답한 면이 있었다. 백이서는 웬만한 일에는 담담하고 무던했는데 그래서인지 차여도 차인지도 모르고. 뒤통수를 맞아도 맞았는지 몰랐다.

김승주만 해도 그렇다. 몇 년 전, 잠수 탄 지 3년 만에 돌아온 놈을 이서는 군말 없이 받아 줬다. 소문이 나자마자 저 버리고 간 새끼가 뭐가 좋다고, 말려도 안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1년도 안 돼 빚이고 회사고 다 떠넘긴 후 그는 또 도망갔다. 그게 3년 전 일이다.

“아직도 그 지랄이냐. 염병. 열녀문이라도 세워 주랴?”

“아! 그 새끼 기다리는 거 아니라고! 연애에 신물 나서 그런 거라니까!”

“어이구. 누가 보면 연애 달인인 줄 알겠어요. 겨우 한 번이 다인 주제에.”

“형!”

“아! 야! 그러고 보니 그날. 진짜 대박이었다.”

심찬의 머리에 불현듯 무언가가 떠오른다. 오랜만에 귀국한 친구 때문도 있었으나, 그날이 기억에 남는 이유는 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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