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
이서가 합죽이처럼 입을 다문다. 그래. 조금 불쾌하면 어떤가 싶다. 적어도 딱딱한 대리석과 조우하는 것보다는 낫겠지. 차계원이라면 빈말이 아니라 필시 자신을 던질 것이다. 불필요한 고통을 감수하고 싶지는 않았다.
“불편해요?”
생각해 주는 양 차계원이 묻는다. 제 멍의 원인도, 불편의 원인도 본인이라는 걸 진짜 모르지는 않을 텐데 굳이 물어보는 저의가 궁금하다.
“아주 조금…….”
“참아요. 그럼.”
“네.”
안하무인이 따로 없다. 그렇게 한참을 차계원의 손에 들려 있다가 겨우 내려진 곳은 욕실 앞이었다. 작은 조각상들까지 장식된 욕실은 욕조 또한 장정 세 명이 씻어도 남을 정도로 넓었다.
“씻고 나와요. 옷 가져다줄 테니까.”
“아니요. 아니요. 저.”
탁.
이서를 안으로 떠민 차계원이 코앞에서 문을 닫아 버린다. 빨리 집에 가고 싶은데 꼼짝없이 여기서 자고 가게 생겼다. 넓은 욕실에 덩그러니 혼자 남은 이서가 멍하니 닫힌 문만 본다.
“아…….”
호랑이한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던데. 차계원 앞에서는 정신을 차려 봐야 소용이 없는 기분이다. 가게에서만 해도 그렇다. 가족과 연 끊은 게 벌써 7년 전인데 제가 장남인 건 또 어떻게 알았을까.
“뭐 하는 인간이야.”
벌써 하루 만에 머리에 멱살까지 안 잡힌 데가 없다. 3년 전 일 때문이라도 과하다. 같이 만든 해프닝인데 왜 저렇게 못 잡아먹어 안달이냔 말이다.
“죄지은 것도 없는데.”
심지어 잔 건 기억도 안 난다. 생각할수록 너무하다 싶지만 별 방법이 없었다. 5억의 열 배면 50억이다. 당장 50만 원도 없는데 계약 해지를 위해 낼 50억이 어디서 나오겠는가.
“이달 이자도 못 내고…….”
회사 때문에 낸 빚만 해도 3억이다. 여기서 빚이 더 늘어난다면 겨우 지킨 전셋집에서도 못 살게 될 거다.
“하아.”
이서가 힘없는 손으로 샤워기의 물을 튼다. 따듯한 물에 온몸이 노곤해진다.
* * *
예상은 했지만, 차계원이 준 옷은 너무 컸다. 흰 반팔 티에 남색 반바지였는데 허리 부분이 헐렁해 걸을 때마다 흘러내릴 것 같았다.
‘옷도 많아 보이시던데…….’
허리춤을 꼭 잡고 웅크리고 있는 백이서에게 계원이 다가간다. 아래층 욕실에서 씻고 나온 참이었다.
“다 씻었어요?”
“네? 네!”
“근데 왜 그러고 있어요.”
“그……. 그냥.”
막 씻고 나온 백이서에게서는 청량한 물 향이 배어 나왔다. 제대로 닦지 않은 물기가 방울져 흘러내렸다.
“내가 잡아먹을까 봐 그래요?”
“…….”
정곡을 찔린 이서가 아무 대답 못 한다. 아까 제 목덜미에 한참 코를 박고 있던 게 찝찝했다.
“하. 진짜 웃기네.”
“우리 잔 적 있다면서요.”
뭐든 한 번이 어렵지 두 번은 쉽다고 했다.
“하나 확실히 해 두겠는데.”
계원이 벽에 기댄 채 팔짱을 낀다. 뭐. 아예 생각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병아리 새끼처럼 경계하는 꼴은 또 언짢았다.
“그날 먼저 불 지핀 건 대표님이에요.”
“예??”
놀란 백이서가 수건을 떨어트린다. 그걸 또 받아낸 계원이 나긋하게 쐐기를 박는다.
“달려들길래 응해 준 거예요.”
“장난치지 마세요! 취했는데 그럴 정신이 어디 있다고.”
“먼저 끌어안고 안 놔주던데요? 못 믿겠으면 한 번 더 해 보든가. 그러면 기억날지도 모르죠.”
차계원이 수건으로 이서 머리의 물기를 닦아 주며 말한다.
“아, 아무리 그래도 관계까지 간 건…….”
“아. 그건 내가 집어 먹은 거 맞고.”
“취한 사람 상대로 그러는 건 범죄 아닌가요…….”
“그럼 입맛만 돋우고 말아요?”
차계원의 뻔뻔함에 말문이 막힌다.
“그래도.”
“잘만 느껴 놓고?”
“자, 잘게요.”
온몸이 다 홧홧해진다. 재빠르게 도망가려는 뒷모습을 차계원이 놓치지 않고 잡아챘다.
“어디 가요 잔다면서. 내 방 옆인데.”
“소, 소파에서 잘게요.”
“들어가요.”
“소파도 푹신해 보여서……. 넓고……. 또 같이 자면 불편하실 거고. 아니면 손님방도 있어 보이던데…….”
“지금 내외하는 거예요?”
주절주절 떠드는 백이서는 계원의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있었다.
“할 거 다 한 마당에 이제 와서?”
귀엽다 귀엽다 하니까 진짜 귀엽게 논다.
“그게 아니고요…….”
“난 누가 내 말 안 듣는 거 싫어해요.”
차계원이 제 방문을 열고 턱을 까딱인다.
“아.”
‘말 안 듣는 게 싫다니. 아무리 봐도 그건.’
“그건 싸이코잖아요…….”
“……할 말은 다 하죠. 아주.”
이쯤 되면 어이가 없을 지경이다. 그럴 거면 달달 떨지를 말든가.
“죄, 죄송…….”
“얌전히 내 방 가서 잘래요. 아니면 기억 되찾기 놀이 할래요.”
차계원이 말하는 놀이가 뭔지 한 번에 알아들은 이서가 열어 놓은 방문 틈으로 쏙 들어간다.
* * *
들어온 방은 한눈에 봐도 단조로웠다. 좋게 말해 심플하고 안 좋게 말하면 삭막했다. 그 넓은 방에 커다란 침대 하나와 길쭉한 스탠드 조명 하나가 다였다. 침대의 끄트머리에 걸터앉은 이서는 차계원에게 머리를 내주고 있었다.
“원래 잘 안 말리고 자요?”
“네.”
“왜요.”
“귀찮아서요.”
“앞으로는 말리고 자요.”
“…….”
“대답 안 해요?”
“아, 아뇨.”
머리를 말려주는 손이 빨랐다. 이러다가도 또 차에서처럼 머리카락을 쥐고 흔들까 봐 두렵다. 맷집이 좋은 편이기는 했지만 갑작스러운 타격은 무서울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왜 갔는데요.”
“예?”
“게이 바.”
차계원이 등 뒤에서 낮게 묻는다.
“확인해 보려고…….”
“뭘.”
“그. 3년 전에……. 우리가 그.”
“잔 거요?”
“네, 네 그거요.”
좀 에둘러 말해 줬으면 좋겠는데 차계원은 그런 게 없었다. 선택하는 단어마다 가감 없고 직설적이다.
“내 말이 안 믿겨서 거기에 갔어요?”
“안 믿은 게 아니라요…….”
“저에 대한 신뢰가 이렇게 없어서야……. 대체 나는 누구를 믿고 일하죠? 응?”
“다른 의도는 없었어요. 그냥……. 확실하게 해 두면 좋으니까요.”
폭신한 침대가 가시방석처럼 느껴진다. 차계원은 이미 검지에 이서의 머리카락 한 움큼을 말아 비비 꼬고 있었다.
“대표님한테는 내가 양아치 새끼로 보이나 봐요. 지장까지 찍은 판국에.”
손가락에 말려 있는 머리카락을 죽죽 당기다 못해 머리 말리던 것을 뚝 멈추고 코드까지 뽑는다.
“믿어요! 믿어요. 진짜 믿어요!”
가만있다가 머리카락이 다 뽑히게 생긴 이서가 고개를 위아래로 붕붕 흔든다. 갓 마른 포슬포슬한 머리카락이 계원의 쇄골을 건드렸다.
“믿음이 없는 사람은 못된 사람이에요. 어릴 때 배웠죠?”
안 지 얼마나 됐다고 믿음 타령인지. 자신은 윤리 시간에도 성선설보다 성악설을 더 믿었다. 그리고 차계원은 성악설에 아주 잘 부합하는 사람 같다.
이서가 눈치만 보며 대답이 없자 차계원이 손에 힘을 준다.
“악!”
“난 못된 사람도 싫어해요.”
“저……. 저는 착해요.”
“착해요?”
“네, 네.”
“얼마큼 착한데?”
“아주, 아주아주 많이요.”
아직도 놔주지 않는 제 머리칼을 흘겨보며 이서가 부랴부랴 원하는 답을 내어준다.
“그거 알아요? 착한 사람은 10시 넘으면 밖에 안 돌아다녀요.”
질문 같은 말은 누가 들어도 은근한 강요였다. 세상 어느 착한 사람이 시간 따져가며 돌아다닌단 말인가. 고등학생도 새벽까지 돌아다니는 판국에 나이 서른 넘어 통금이 정해지게 생겼다.
“어……. 신데렐라도 12시까지는 다니던데…….”
“……걔처럼 괄시당하고 싶어요?”
“아뇨.”
“그런데 왜 자꾸 토 달아요.”
“……아, 안 달게요.”
“대표님은 착한 사람이니까 이제부터 그 시간에 안 돌아다니는 거예요.”
“…….”
“알았어요?”
“그…….”
“알았냐고.”
“네, 네네. 안 돌아다녀요. 저 원래 밤에 돌아다니는 거 안 좋아해요.”
“좋아요. 저도 착한 사람이니까 믿어 줄게요.”
착한 사람 다 죽었다. 차계원이 싱긋 웃으며 이서의 머리칼을 놔준다. 헝클어진 머리를 꾹꾹 눌러 정리하는 걸 빤히 보던 계원이 다 정리된 머리를 다시 헝클어트린다.
“아…….”
“늦었네요. 주무세요. 빨리.”
폭삭.
차계원이 이서를 툭 밀어 넘어뜨린다. 벌써 새벽 2시가 넘어가고 있다. 맥없이 이불에 넘어진 이서 위로 꽤 묵직한 이불이 덮어진다.
“내일 깨워 줄게요.”
“네……. 안녕히 주무세요.”
“대표님도요.”
눕혀 주니까 잠이 오는지 웅얼대는 모습에 계원의 입술 사이로 웃음이 새어 나온다.
볼수록 재미있는 인간이다. 겁은 잔뜩 집어먹으면서 은근히 당당하고, 눈치를 살살 보는데 눈치가 없다. 경계하는 듯싶더니 지 몸 조금 편하다고 금세 무방비해진다.
“많이 졸려요?”
“조금…….”
지금도 그렇다. 남의 집 침대에서 잘도 눈을 끔뻑거린다.
“아. 병신 같아.”
“저, 저요?”
몰려오는 잠을 참지 못하고 눈을 감았던 백이서가 깜짝 놀라 눈을 올려 뜬다. 계원이 옆에 누워 그걸 보고 있었다.
“네.”
“아……. 그렇구나.”
그렇긴 뭐가 그래. 이 병신은 아마 욕을 들어먹어도 고개를 끄덕거릴 거다.
“대표님.”
“……예?”
“다른 데서도 이렇게 멍청하게 굴어요?”
“저 멍청한 건 아닌 거 같은데…….”
“하……. 잠이나 자요 그냥.”
무례한 말에도 이서는 반박할 힘이 안 들었다. 온종일 예상치 못한 일들만 잔뜩 겪은 탓에 온몸이 다 노곤했다. 거기다 차계원의 집은 참 따듯했다.
한겨울에도 보일러 온도를 높여 놓지 않는 이서의 집과 달리 공기부터 뜨끈하다. 이불까지 포근하니 절로 눈이 감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