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비도덕적 안락함-9화 (9/100)

#9

“저기요. 차계원 씨.”

“네.”

“침대가 되게 넓네요…….”

“네.”

“…….”

그 다디단 졸음을 달아나게 만들고 있는 게 바로 차계원이었다. 제 침대를 두 개 합쳐 놓은 것보다 넓은데 굳이 굳이 옆에 딱 붙어 있었다. 착각인가 싶어 옆으로 움직이니 차계원의 팔이 제 몸을 다시 끌어왔다.

“조금 떨어져서 자면……. 안 될까요.”

“안 돼요.”

단호한 말과 함께 차계원의 팔이 쑥 목 뒤로 들어온다. 긴 다리 한쪽은 제 배 위에 올려놓는다. 기껏 정자세로 누웠는데 이래서야 옴짝달싹 못 하는 꼴밖에 안 됐다.

“아까도 물어본 거 같은데 원래 체온이 높은 편이에요?”

차계원의 말대로 이서는 남들보다 체온이 조금 높은 편이었다. 그래서 겨울에도 그 흔한 내복 한 번 입은 적이 없었다.

“네. 그래서 더위도 잘 타요.”

그러니까 좀 떨어져 달라는 뜻이었는데 차계원은 오히려 몸을 맞붙여 온다.

“……괜찮네요.”

뭐가 괜찮다는 건지 작게 속삭인 차계원이 이서를 더 제 쪽으로 밭게 끌어당긴다. 침실이 조용해 속삭임도 크게 느껴졌다.

그러고 보면 차계원은 체온이 상대적으로 낮은 편 같았다. 사람 자체가 좀 싸늘해서 그런가 했는데 닿아 오는 피부나 숨결도 비교적 서늘하다.

“…….”

차계원이 제 가슴께에 올려놨던 손을 올려 제 목을 지분거린다. 손이 스칠 때마다 서늘한 촉감이 간지러웠다.

“목은 왜 계속 만지시는지…….”

“멍들까 봐요.”

“어…… 그러면 멍이 안 드나요?”

“시끄러워요.”

“……네.”

정말 궁금해서 물어본 거였는데 돌아오는 대답이 냉정했다. 등을 돌리고 싶어도 이미 몸에 감긴 팔과 다리 때문에 할 수가 없었다. 아무래도 잠들기는 그른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이서는 눈을 감았다.

* * *

“으음…….”

눈꺼풀 위로 따가운 햇빛이 느껴진다. 눈을 감은 채 고개를 살짝 틀자 뺨에 닿는 포근한 이불의 감촉이 기분 좋다. 아침의 몽롱함은 더 잠에 빠져 있고 싶게 만들었다. 자다 깨서 그런가 목이 마르다는 생각이 들 즈음 혀에서 이상한 이물감이 들었다.

“아……?”

이상하다는 생각에 힘겹게 눈을 뜨자 차계원의 얼굴이 보인다. 자고 일어난 것 같지 않게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은 모습이다.

‘여기 차계원 씨네 집이었지…….’

몽롱한 정신을 겨우 붙잡으며 시선을 내리자 이번에는 차계원의 손목이 보인다. 제 입에 들어와 있는 손가락 하나도.

“일어났어요?”

“으아아! 뭐 하는 짓이에요!”

“입 벌리고 자길래.”

톡.

제 입에 넣어져 있던 손으로 콧잔등을 톡 친다.

‘변태도 아니고.’

아침부터의 봉변이 달가울 리 없었다. 아무리 무딘 이서라도 이건 꼭 짚고 넘어가야 할 것만 같다. 자는 사람을 건드리는 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예의가 아니었다. 막말로 이게 성추행이 아니면 뭐란 말인가.

“차계원 씨. 죄송하지만 방금 건 조금…….”

“배 안 고파요?”

이서의 말을 끊고 차계원이 평온한 투로 물어온다. 그 탓에 따지려던 말이 쏙 들어간다.

“조금 고픈 것 같기도 하고……?”

생각해 보니 어제 차계원과 먹은 점심이 마지막 식사였다. 이서는 원래 식사를 잘 챙겨 먹지 않았다. 귀찮기도 했고 평소에는 딱히 식욕이 돌지도 않았는데 이상하게 배가 고팠다.

피식.

“내려와요. 밥 줄게요.”

아직 이불 속에 파묻혀 있는 이서를 두고 능글맞게 웃은 차계원이 먼저 내려간다. 나간 문 틈새로 맛있는 냄새가 솔솔 풍겨 왔다.

“따져야 했는데…….”

꼬르륵.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일단 먹고 따지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만 같다.

* * *

“잘 먹겠습니다.”

식탁에 앉은 이서의 음색이 밝았다. 식탁 위의 메뉴는 한눈에 봐도 맛깔스러워 보였다.

“어제 세상모르고 자던데요.”

“아하하.”

잠이 들지 못할 거라 생각했던 건 기우였다. 어젯밤의 걱정이 부끄럽게 이서는 몸이 개운할 정도로 푹 잤다. 내려와서 안 사실인데 이미 아침이 아니라 오후였다.

“계원 씨도 잘 주무셨어요……?”

“전혀요. 잠버릇이 심하시던데요.”

그렇게 말하며 차계원이 제 목과 어깨를 두드린다. 몹시 결리는지 목을 이리저리 돌리기까지 한다.

“진짜요? 죄송해요. 어떡하지.”

“장난이에요.”

차계원이 얄밉게 웃는다. 이서가 대답 없이 반찬을 집는다. 이서의 숟가락이 제일 처음 향한 곳은 그가 제일 좋아하는 감자조림이었다. 크게 뜬 반찬이 입에 막 들어오려는 순간 큰 손이 수저를 빼앗아 간다.

“숟가락…….”

“대답 잘하면 줄게요.”

“……?”

“어제 내가 한 말 기억나요?”

“대충…… 은요.”

“제가 뭐라 했는데요.”

“말 안 듣는 사람 싫다고.”

“또.”

“못된 사람도 싫다고?”

“또.”

“또?”

“몇 시에 들어가야 한다고 했죠?”

“열…… 시요?”

“똑똑하네요. 자. 수저.”

부드럽게 웃은 차계원이 빼앗았던 수저를 입에 넣어 준다. 짭조름한 감자조림이 따듯했다.

‘설마 진짜 10시 넘어서 돌아다니지 말라는 건가?’

에이. 말도 안 된다. 분명 장난일 거다. 제 입에 손을 넣었던 것처럼.

“오늘 출근할 거죠?”

“네.”

오늘은 그냥 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출근은 해야 했다. 태미나 성아와의 계약 종료도 마무리 지어야 했고, 휘준과의 대화도 필요했다. 앞으로 필요할 새 인력도 구해야 할 거다.

“같이 나가면 되겠네.”

“차계원 씨도요?”

“회의해야 할 거 아니에요. 앞으로 대표님이 날 어떻게 서포트해 줄지.”

* * *

차계원을 픽업하기 위해 집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매니저 건은 생소한 광경에 눈을 비볐다. 계원의 옆에 있는 남자는 분명 어제 끌려 나간 사람이었다. 케이뉴의 대표 백이서.

어젯밤 차계원을 케이뉴의 주차장에 데려다줄 때만 해도 그가 케이뉴와 새 계약을 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오늘 아침에 통보와 다를 바 없는 전달을 받고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더불어 차계원은 김건 또한 케이뉴의 소속이 될 거라 알려 왔다.

“안녕하세요. 어제도 잠깐 뵀었죠. 계원이 매니저 김건입니다.”

케이뉴는 물론 백이서에 대한 정보는 별로 없었다. 워낙에 힘없는 회사를 운영했고 경력도 얼마 안 됐기 때문이다.

“반갑습니다. 케이뉴 대표 백이서입니다. 앞으로 자주 뵐 텐데 언제 식사 한번 해요.”

백이서는 보기 드물게 예의가 바른 사람이었다. 촬영장에서 잠깐 커피를 받을 때도 인상이 좋다고 생각했는데 웃는 낯이 부드러워 그런 것 같았다.

“저야 좋죠. 허허.”

듣기로 백이서의 나이는 서른둘이었는데 20대 중반이라 해도 믿을 것 같았다. 타고난 피부도 원체 좋아 보였고 이목구비가 오밀조밀한 덕에 어려 보이기도 했다.

“식사는 무슨 식사. 밥 못 먹어 죽은 귀신 붙었어요?”

차계원이 타박을 늘어놓는다. 웃긴 건 식사하자고 말한 건 백이서 대표인데 차계원은 저를 보며 타박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이거 제 명함이에요. 필요한 거 있으시면 연락해 주세요.”

백이서가 명함을 내민다. 건이 그 명함을 받아 들려 하자 중간에 들어온 손이 홱 그걸 낚아챈다.

“야! 차계원!”

“나도 명함 못 받아서요.”

“아……. 괜찮아요. 한 장 더 있어요. 어제 챙겨 와서…….”

다시 내민 명함은 그와 닮아 있었다. 빳빳한 흰 종이 가운데 담백하게 진한 회색으로 박힌 이름이 깔끔했다.

홱.

“야 이놈아!”

이번에도 차계원이었다. 뺏어 간 명함 두 장을 팔랑이며 흔들고 있었다.

“어휴.”

저 성질머리를 누가 말릴까.

“두 장 챙겨 온 건데…….”

중얼거리는 모양새가 순둥순둥해 보인다. 하기는 차계원과 있으면 세상 웬만한 인간들은 다 순둥하게 느껴지고는 했다.

“괜찮습니다. 대표님. 이따가 번호 알려 주세요.”

“형 지금 작업 걸어요? 번호는 무슨 번호.”

아예 도끼눈을 뜨고 비아냥댄다. 대체 아침으로 뭘 잘못 먹으면 저렇게 싹수도 없어지는지. 차계원이 연예인인 게 천만다행이었다. 아니면 필시 나쁜 길로 빠졌을 거다.

“연락이 돼야 일을 할 거 아니야!”

“나중에 내가 알려 줄 테니까 운전이나 해요.”

귀찮다는 듯 몇 번 손을 휘저은 차계원이 밴 안으로 들어간다. 백이서가 옆에서 저와 차계원을 번갈아 보며 눈치를 살핀다.

“죄, 죄송합니다.”

“아유. 대표님이 왜요. 제가 죄송하죠. 원래 저런 녀석이 아닌데. 하하.”

원래 저런 놈이 맞다. 제가 아는 십 몇 년 동안 차계원은 한결같이 저랬다.

“안 타요?”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건을 종용한다.

“탄다, 타! 대표님도 타시죠.”

“아, 네.”

건이 운전석에 자리 잡고 그 옆에 백이서가 막 올라타려 할 때였다. 뒷좌석에서 목 베개까지 두른 계원이 발로 앞자리를 찼다.

퍽.

“왜! 왜! 또 왜!”

옆자리도 있는데 꼭 제가 앉아 있는 자리를 찬다.

“뒤에 타요.”

“그럼 운전은 누가 하라고!”

“매니저님 말고. 대표님이요.”

“저요? 어……. 하지만…….”

“빨리.”

마지못해 백이서가 뒷자리로 발을 옮긴다. 미안하다는 얼굴로 자신을 보며 양해를 구하는 모습을 보던 건이 혀를 찬다.

‘무슨 일이래.’

차계원은 워낙에 까다로운 거로 유명했다. 그 까다로움이 어느 정도였냐면 코디나 다른 로드 매니저도 옆자리에 못 앉게 할 정도였다. 운전석 빼고는 아무도 못 앉게 하니 촬영이 있을 때면 밴 두 대는 필수였다.

“출발 안 해요? 운전대 앞에 두고 고사 지내나.”

이제 저런 말본새에도 아무런 타격감이 안 든다. 김건이 조용히 액셀을 밟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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