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앉아서 하나하나 설명해 주니까 조율하자는 뜻 같아?”
“아, 아니었나요……?”
아픈 무릎을 문지르지도 못하고 두 손을 테이블 위에 가져다 댔다. 무게 중심이 쏠려 받치지 않으면 고개가 처박힐 것 같았다. 손에 닿는 차가운 유리가 깨져버릴까 봐 조마조마했다.
“통보야. 알량한 예의로 말이나 해 주는 거라고.”
“윽! 그, 그래도.”
아무리 힘없는 회사라고 해도 어디까지나 대표는 저였다. 그러나 차계원의 말은 앞으로도 동의 없이 모든 걸 진행하겠다는 뜻과 같았다.
이대로 질질 끌려갈 수는 없는 노릇인데 꽉 잡힌 멱살과 테이블 모서리에 눌린 가슴께가 너무도 아렸다.
“멍청해서 상황 파악도 느린가 봐요. 응?”
쨍그랑.
테이블 위의 물건들이 떨어지는 파열음이 들린다. 깨진 찻잔에서 흐른 커피가 신발 밑바닥을 적셨다.
“내가 니 좆만 한 회사 하나 못 망하게 할 거 같아?”
하고도 남을 것이다. 어느 바보가 그걸 모를까. 이서가 어금니를 세게 물었다. 차계원의 의도는 명확했다. 질질 끌려올 것인지 이대로 회사를 망하게 할 것인지 선택하라는 거다.
“왜 대답을 안 해.”
계원이 짓이기듯 말한다. 잡힌 멱살 때문에 숨통이 조였다.
“으……. 하실 윽……. 하실 수 있을 것 같아요.”
아니, 선택이 아니었다. 애초에 그는 제게 선택권을 준 적이 없다. 차계원이 힘을 주어 멱살을 당길 때마다 덩달아 무게가 실린 손가락 뼈마디가 하얗게 도드라진다.
서러움이 물씬 쏟아지려는 걸 꾹 눌러 담는다. 이곳은 이서가 어떻게든 살려 보고자 4년 넘게 발버둥 친 회사였다. 그걸 차계원은 조금도 상의 없이 강탈하려 하고 있었다.
얌전히 대답하는 이서의 모습에 조금 누그러진 차계원이 삐뚜름하게 입을 연다.
“근데 뭐 믿고 이렇게 나불거려요? 멱살 좀 잡았다고 낑낑대는 주제에.”
“그…….”
“이미 망한 회사가 얼마나 바닥을 칠 수 있을까, 그거 궁금해서 이러는 거죠.”
“아니요. 안 궁금……. 그거 안 궁금해요…….”
노련한 빚쟁이의 독촉보다 차계원의 말 한마디가 더 쓰렸다.
“앞으로 어떻게 할래요.”
차계원이 이서 쪽으로 상체를 기울인다. 툭. 툭. 무례한 손길이 이서의 머리를 튕겨내듯 민다. 자존심은 둘째 치고 수치스러운 기분에 이서가 눈을 질끈 감는다.
“봐줄 때 잘할래. 계속 기어오를래.”
“잘할게요……. 안 기어, 안 기어오를게요.”
“그럼 오늘은 뭐 알고 있어야 해.”
“뭐, 뭐를.”
“내가 아까 말해 줬잖아. 당신 오늘 뭐 알아 둬야 하냐고.”
차계원이 이서의 왼쪽 귀를 만지작거린다. 멱살은 아직 놓지 않은 채다.
“회, 회사에 부서가 나누어지고요. 회계 팀도 생겨요.”
백이서가 멍청하기는 해도 영 붕어 대가리는 아니었는지 조금 전 계원이 했던 말들을 줄줄 읊는다.
“그리고.”
“앞으로 지출 내역은 회계팀이 관리하기로 했고…….”
“그 전에.”
“전에……. 전에요?”
이서가 열심히 머리를 굴린다. 차계원이 오늘 전달한 내용은 다 말한 것 같은데 그의 표정은 아니라고 말하고 있었다.
“하나 빼먹었잖아.”
“윽.”
계원이 어젯밤 물어뜯었던 귓불 위를 손톱으로 꾹 누른다.
하얗고 통통한 귓불의 잇자국 위로 붉게 자국이 덧그려진다.
“계약! 계약 조건이 추가됐어요. 클럽 안 가고 게이 바 안 가고요.”
“흐음.”
차계원이 멱살을 잡고 있던 손을 힘주어 민다. 가슴께에 둔탁한 타격감과 함께 소파 위로 몸이 나뒹굴어졌다.
“좋아요. 다음부터는 안 봐줘요.”
보기 좋게 나뒹굴어져 숨을 몰아쉬는 백이서 앞에서 계원이 산뜻하게 웃는다. 그 호선을 그리는 입술이 명심하라는 듯 속삭인다.
“또 기어오르면 멱살 정도로 안 끝나요.”
“……네.”
겁에 질린 눈망울이 잘게 흔들리며 대답을 내놓는다. 그 큰 눈망울이 떨리는 게 몹시도 흡족했다.
“그럼 우리 이제 다른 대화 해 볼까요?”
구겨진 셔츠 자락이며, 땀이 송골송골 맺힌 이마며, 귓불까지 괜찮은 곳이 없는데 차계원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다리까지 꼬고 앉는다. 그 외양이 너무도 멀쩡해 숫제 억울한 기분까지 들었다.
“좋, 좋습니다. 다른 대화.”
하지만 억울함을 알아줄 사람은 없다. 겨우 몸을 일으켜 앉은 이서가 앵무새처럼 대답한다.
“오늘 회사 와서 뭐 하려고 했어요? 일정이 있었을 거 아냐.”
“별거 없는데…….”
“별거인지 아닌지는 제가 판단해요.”
“계약 종료된 거 정리하고……. 휘준이한테 설명하고…….”
“그 사람은 계속 일해요? 한태미 나갔잖아.”
계원이 소파 등받이에 팔을 걸친 채 자신의 턱을 매만진다.
“아. 휘준이는 회사 처음부터 같이 일했었어요……. 매니저 일도 잠깐 맡은 거라…….”
“친해요?”
“예……. 굳이 따지자면…….”
“얼마나?”
“대학 선후배 사이예요.”
“아아. 내일 일정은요.”
“어……. 이제 차계원 씨 들어오셨으니까 스케줄 정리해야겠죠? 다음 작품도 보고…….”
“나 내일 스케줄 있는 건 알아요?”
“아! 네, 네!”
내일 유명 잡지사에서 화보 촬영이 있다는 건 차에서 건이 언질해 뒀던 부분이었다.
“그거 따라와요.”
“제가…… 가서 뭘 하나요……?”
차계원이 스케줄을 가면 휘준과 앞으로의 일을 논의하려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게 생겼다. 계원과의 계약도 설명해 주려 했는데.
“매니저도 없이 혼자 가기 그래서.”
“건 씨는요?”
“쉬는 날이에요.”
촬영 날을 피해 휴무를 잡는 게 아니라 외려 촬영 날에 쉰다니. 김건은 꽤 오래 매니저 생활을 한 사람 같았는데 의아했다.
“아. 그럼 차라리 휘준이를 붙여 드릴까요?”
“여기서 걔가 왜 나와.”
차계원이 눈을 번득인다. 이서가 말실수를 했나 싶어 황급히 덧붙인다.
“제가 매니저 업무를 본 적이 없어서요. 계원 씨한테 피해 줄까 봐…….”
“그냥 옆에 따라다니기만 하면 돼요.”
“그래도 경험 있는 사람이 낫지 않을까요?”
“난 불편한 사람 싫어요.”
“저는……. 편한가요?”
현재 이서에게 제일 불편한 사람은 차계원이었다.
“네, 엄청.”
환하게 웃은 차계원이 이서의 옷매무새를 추슬러 준다. 그 웃음이 이서에게는 그렇게 작위적으로 보일 수가 없었다.
“일해요. 기사 잘 관리해 주시고요.”
제 재킷을 두 번 털고 일어난 계원이 깨진 찻잔을 지르밟고 사무실을 나선다.
* * *
기사가 뜨는 건 삽시간이었다. 공식 기사는 차계원의 전 소속사에서 냈고. 차계원의 입장은 김건과 이서가 머리를 맞대어 냈다. 다행히 차계원은 워낙 이미지가 좋았고 오래 알고 지낸 기자들도 많아 우호적인 기사들이 대부분이었다.
기사 내용은 서로가 추구하는 바가 달라 이전한다고 떴지만, 사람들이 반응은 그렇지 못했다. 온갖 추측성 댓글과 불화에 대한 루머가 판을 쳤다.
“파급력이 정말 크네…….”
침대에 엎드린 이서가 노트북으로 기사들을 확인한다. 기사는 초 단위로 계속해서 나왔고 벌써 실시간 검색어 1위를 차지했다. 그 밑으로도 다 차계원과 관련된 검색어뿐이었다.
“이걸 어쩐다.”
더불어 이서의 소속사에 관해서도 관심이 높아졌다. 개중에는 욕을 하는 사람도 더러 있었다. 차계원이 왜 굳이 저런 회사로 들어가냐는 반응이었다. 드문드문 대표가 협박해서 데리고 간 게 아니냐는 댓글도 보였다.
“협박은 내가 받았는데 말이야.”
핸드폰은 꺼 놨다. 생전 연락도 안 하던 지인들이 온갖 경로를 통해 진위 여부를 물어 왔다. 애초에 지인도 몇 없지만, 그 얼마 안 되는 연락들도 부담스러웠다.
촬영은 11시쯤 시작이었다. 슬슬 계원을 픽업하러 갈 시간이었다.
* * *
오전이라 그런지 기온이 더 낮았다. 1월 말의 날씨는 추웠기에 이서는 핫팩을 몇 개 준비했다. 자신은 크게 추위를 타지 않으니 차계원을 위한 것이었다.
주차장으로 내려온 이서가 패딩 안 주머니에 넣어뒀던 차 키를 꺼낸다. 혹여 잃어버리기라도 할까 봐 제일 깊숙한 곳에 넣어 두었다. 그가 다시금 검은 차체를 바라본다. 언감생심 꿈도 못 꿔본 밴이 30년 된 저층 아파트 주차장에 서 있는 게 이질적이었다.
“으샤.”
차 문도 육중했다. 높은 차체의 운전석에 앉은 이서가 패딩을 벗어 옆에 두고 벨트를 맨다. 처음 앉아 보는 신형 밴은 앞쪽에 기능 모를 버튼들이 많았다. 요리조리 살피는 이서의 뒤에서 귀에 익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왜 이렇게 늦게 나와요?”
“으아아아악!”
귀신이라도 만난 것처럼 비명을 지르자 몸을 늘어트리고 있던 차계원이 미간을 찌푸린다.
“어, 어떻게 들어오셨어요?”
차계원이 준 차 열쇠는 분명 제가 갖고 있다. 어제 귀가하고 나서도 차 문이 잘 잠겼는지를 몇 번이고 확인했었다.
“스페어 키.”
계원이 짤막하게 대답한다. 백이서의 저 멍한 표정이 우습다. 저건 아침이나 밤이나 똑같이 머저리 같다.
“전화 안 받던데요.”
차계원의 집 앞에 도착해서 켜 두려고 했는데, 그사이에 전화했었나 보다.
“연락이 너무 많이 와서요. 잠깐 꺼 뒀어요.”
“쯧. 밥은 먹었어요?”
“아니요, 차계원 씨는요?”
“왜 안 먹었어요.”
“원래 아침 잘 안 먹어요.”
이서에게 아침이란 커피 한 잔이 다였다. 카페인이 도는 게 느껴져야 하루를 시작할 수 있었다.
“아침 먹고 가죠. 나도 아직 못 먹었으니까.”
“촬영 시간에 늦지 않을까요……?”
“촬영 밀렸어요. 두 시간 정도. 핸드폰을 꺼 두니까 연락을 못 받죠.”
“아…….”
“됐으니까. 빨리 밥이나 먹으러 가요.”
차계원이 더 토 달지 말라는 듯 손을 휘휘 젖는다. 긴장한 티가 역력한 이서가 운전대를 잡는다.